임진왜란 이후 400여년…韓 드디어 日 넘어서나

(서울=연합뉴스) 김윤구 김경윤 기자


임진왜란, 을사조약, 한일병합, 6.25전쟁 등을 거치면서 일본은 우리나라를 수탈하거나 한국의 역사적 불행을 이용해 이익을 취했다.

이 과정에서 일본은 한국인에게는 넘보기 어려운 거대 강국의 이미지를 굳혔다.


실제로, 일본은 미국인들이 두려워할 정도로 강한 경제력을 과시하기도 했다. 한때 일부 학자들은 일본이 미국을 제치고 세계 최고의 강국이 될 것으로 내다봤다.

하지만 일본이 1990년대부터 '잃어버린 20년'을 겪으면서 침체의 길을 걸었고 그동안 한국은 꾸준하게 성장해 일본 경제를 바짝 추격하고 있다.

2020년에는 한국의 1인당 국내총생산(GDP)이 일본에 육박할 것이라는 전망도 나오고 있다.

이에 따라 한국이 임진왜란(1592∼1598년)과 일제강점기의 굴욕을 씻어내고 일본을 넘어설 것이라는 기대가 나온다.


◇ 임진왜란 후 조선 경제 황폐화…농토 5분의 1로 줄어


1592년 임진왜란으로 조선은 씻기 어려운 상처를 입었다. 전란으로 사망자가 늘어 인구가 급감했고 농토는 황폐화돼 재건까지 오랜 시간을 쏟아야 했다.

임진왜란의 잔혹함을 가장 대표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현재 일본 교토(京都)에 남아있는 귀무덤(이총·耳塚)이다.

왜군은 전란 당시 조선군과 백성을 죽이고 머리 대신 코와 귀를 베어 그 수를 헤아렸다.

이들은 자신의 군공을 자랑하기 위해 이런 신체부위를 소금에 절인 뒤 일본에 가져오기까지 했는데, 이를 묻은 장소가 현재의 귀 무덤이다.

조선의 경제 역시 전란으로 난도질당했다.


임진왜란 직전 조선의 농토 규모는 약 150만결에 달했다. 1결은 미곡 300말(두·斗)을 생산할 수 있는 크기의 토지를 뜻한다.

하지만 전쟁이 끝난 후에는 조사된 토지의 수가 5분의 1 수준인 30만결로 급감했고 이마저도 전란으로 인구 수가 감소하면서 경작할 사람이 부족해 제대로 경작되지 않았다.


이를 회복하는 데는 장기간이 소요됐다.


광해군 당시 토지 규모는 54만결에 불과했고 숙종대에 이르러서야 140만결로 회복됐다.

곡식 생산량이 감소하면서 일반 백성들의 생활은 더 곤궁해졌고 아사자의 수가 폭발적으로 늘었다.

굶어 죽는 이가 너무 많아서 군인만으로는 시신을 매장하기에 역부족이어서 승려를 동원해야 할 지경에 이르기도 했다.

1593년 선조실록은 "겨울에 굶어 죽고 얼어 죽은 이가 언덕을 이뤄 일반 빈집과 외진 곳에도 시체를 쌓아 놓았다"고 기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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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일 정상회담 이후]위안부 피해자 납득할수 있어야… 국장급 채널로는 한계

동아일보]

[한일관계 어디로]<上>위안부 문제 타결 ‘산 넘어 산’



“정상이 만나 합의를 못했다고 판이 깨지면 안 된다. 쉽게 풀릴 문제였다면 지금까지 왔겠나. 국장급 협상의 격을 높여 그동안 못 낸 속도를 내야 한다.”



박근혜 대통령과 아베 신조(安倍晋三) 일본 총리가 2일 만나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논의한 것에 대해 주일 대사를 지낸 전 고위급 외교관은 이렇게 말했다. 유명환 전 외교통상부 장관도 “외교에서 한쪽이 100% 양보하기는 어렵다. 정상이 정치적인 결단을 내려 문제를 풀어야 한다”고 말했다. 한일 정상이 차분하게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논의했다는 것 자체가 큰 진전이라고 유 전 장관은 평가했다. 유흥수 주일 대사는 2일 본보 기자와 만나 “그동안 한일 간에 아무것도 안 된다고 말해왔던 것보다는 상황이 낫지 않으냐”며 정상회담 결과가 나쁘지 않다고 말했다. 양국 정상이 일본군 위안부 해법을 찾자고 원칙에 합의한 것만 해도 성과라는 평가다. 하지만 각론에서 여전히 넘어야 할 산이 많다. 



○ 바뀌지 않은 일본의 태도


아베 총리는 2일 귀국 직후 방송에 나와 “위안부 문제는 1965년 한일 청구권 협정에 따라 완전하고 최종적으로 해결됐다는 것이 기본 입장”이라고 말했다. 하기우다 고이치(萩生田光一) 일본 관방부장관은 “일본 입장은 바뀐 게 없다는 것이 입장”이라고도 했다. 일본의 말대로라면 법적 부분은 손대지 않은 채 외교적, 도의적인 선에서 매듭짓고 싶다는 뜻으로 해석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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日, 유네스코에 일본인 파견추진…기록유산 등재에 영향력 확대

2014년 12월 중국 장쑤(江蘇)성 난징(南京)시에 있는 난징대학살기념관에서 열린 추모식에서 의장대가 화환을 들고 이동하는 모습.(교도=연합뉴스 자료사진)
2014년 12월 중국 장쑤(江蘇)성 난징(南京)시에 있는 난징대학살기념관에서 열린 추모식에서 의장대가 화환을 들고 이동하는 모습.(교도=연합뉴스 자료사진)

난징학살 세계기록유산 등재에 충격…위안부자료 등재 저지 나설듯

(도쿄=연합뉴스) 이세원 특파원 = 난징(南京)대학살 자료가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돼 충격을 받은 일본이 유네스코에서의 영향력 확대에 나서고 있다.

일본 정부는 유네스코 아시아·태평양지역위원회에 일본인 위원을 파견하기로 방침을 굳혔다고 요미우리(讀賣)신문이 31일 보도했다.


이 보도에 따르면 일본 정부는 지역위원회에 자국민 위원을 둠으로써 세계기록유산 등록 심사 과정에서 발언권을 확대하겠다는 구상을 하는 것으로 보인다.


일본 정부는 자신들의 반대에도 중국이 신청한 난징대학살 관련 자료가 최근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된 것을 계기로 이런 계획을 추진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번에 일본군 위안부 관련 자료는 등재되지 않았으나 중국이 한국을 비롯한 다른 피해 국가와 공조해 재신청할 수 있음을 시사했다.

일본은 위안부 자료가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되는 것을 차단하는 데 주력할 것으로 예상된다.


일본 정부는 지역위원회에 파견한 자국 위원을 세계기록유산 심사에서 자국의 의사를 관철하는 창구로 활용할 것으로 보인다.



유네스코가 선정하는 기록유산은 세계, 지역, 국내 등 3가지 종류가 있으며 이들은 각각의 위원회에서 결정된다.


요미우리신문은 국제자문위원회와 지역위원회의 위원들은 활발하게 정보를 교환하며 서로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으로 여겨진다고 전했다.

일본 정부의 한 고위 관료는 난징대학살 자료가 세계기록유산에 등록된 것에 관해 "중국이 아시아·태평양지역위원회를 통해 국제자문위원회에 공세를 폈다"는 견해를 밝히기도 했다.


세계기록유산은 14명으로 구성된 국제자문위원회가 심사해 이리나 보코바 유네스코 사무총장에게 등록을 권고한다.

그러나 일본이 자국민을 위원으로 파견하겠다고 신청해도 수용될지 명확하지 않다고 요미우리는 전했다.

현재 10명이 활동하는 아시아·태평양지역위원회 위원은 숫자의 상한이 없다.


지역위원회는 2012년 5월 일본에 위원을 파견할 수 있는지 의사를 타진했으며 당시 일본은 자국에서는 지역기록유산에 대한 관심이 적다며 파견을 보류했다.

중국은 의장과 사무국장 등 지역위원회 임원회에서 4자리를 차지하고 있으며 한국에서 파견된 1명은 부의장을 맡고 있다.

일본 정부는 다음 달 5∼7일 프랑스 파리에서 열리는 유네스코 총회에 하세 히로시(馳浩) 문부과학상을 파견해 유네스코 세계 기록유산 제도의 변경을 요구할 계획이다.하세 문부상은 파리 방문 중에 보코바 유네스코 사무총장과도 회담도 추진한다.


sewonlee@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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慰安婦問題、日韓の歴史「認識」はなぜ対立する? 木村幹・神戸大教授に聞く

きむら・かん 1966年大阪府生まれ。神戸大学大学院国際協力研究科教授。専門は比較政治学、朝鮮半島地域研究。著書に『朝鮮半島をどう見るか』、『韓国における「権威主義的」体制の成立』(サントリー学芸賞)、『朝鮮/韓国ナショナリズムと「小国」意識』(アジア・太平洋賞)、『徹底検証 韓国論の通説・俗説』(共著)、『日韓歴史認識問題とは何か』(吉野作造賞)など。
きむら・かん 1966年大阪府生まれ。神戸大学大学院国際協力研究科教授。専門は比較政治学、朝鮮半島地域研究。著書に『朝鮮半島をどう見るか』、『韓国における「権威主義的」体制の成立』(サントリー学芸賞)、『朝鮮/韓国ナショナリズムと「小国」意識』(アジア・太平洋賞)、『徹底検証 韓国論の通説・俗説』(共著)、『日韓歴史認識問題とは何か』(吉野作造賞)など。

安倍晋三首相と韓国の朴槿恵大統領の間では初めてとなる日韓首脳会談が、11月2日にソウルで開かれることになった。

ここ数年、第2次世界大戦中の旧日本軍の従軍慰安婦問題など、主に1945年以前の歴史を巡る認識(歴史認識)での対立が目立つが、そもそも歴史「認識」問題とは何なのか。両国の認識の違いが表面化した背景には何があり、今後、隣国との関係はどうなっていくのか。前回に続き、木村幹・神戸大大学院教授を招き、大学生向けに講義してもらった。

初回の「日韓が対立する歴史「認識」問題って何?」では、50年間の両国がたどってきた経済力や国際関係からみた日韓関係を整理し、80年代の教科書問題を例にとって考えた。今回は、90年代以降、日韓間で特に大きな問題となってきた、旧日本軍の従軍慰安婦問題に焦点を当て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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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내 ‘한류(韓流)’는 ‘한류(寒流)’...NHK,한국 드라마 방송 완전 중단

2003년 <겨울연가>를 방송해 일본 내 ‘한류(韓流)’의 결정적인 계기를 마련한 NHK가 최근 한국 드라마에 대한 방송을 완전히 중단했다. 일본 내 지상파 민방들도 한국 드라마의 방송을 잇따라 중단하는 등 ‘한류’가 ‘한류(寒流)’로 전락하고 있다는 지적까지 나오고 있다.


NHK가 2003년 4월 <겨울연가>를 위성방송(BS) 전파를 통해 내보낸 것을 시작으로 지난 8월까지 위성방송과 지상파방송에서 한국 드라마를 계속 방송해 왔으나, 지난 8월 <기황후>를 끝으로 더 이상 한국 드라마를 내보내지 않고 있다.


이와 관련, NHK 측은 “현 시점에서는 (한국 드라마에 대한) 방송예정은 없다”고 밝혔다고 11일 도쿄신문이 보도했다.


NHK는 일본 안에서의 한류에 불을 당기는 역할을 했다. NHK는 2003년 4월부터 9월까지 위성방송을 통해 <겨울연가>를 방송한데 이어 이듬해 4월부터 8월까지 지상파에서도 같은 프로그램을 내보내면서 한류를 일으켰다.


이후 <아름다운 날들>, <올인>, <대장금>, <첫사랑>, <국희>, <태왕사신기>, <이산>, <마의> 등의 드라마를 잇따라 위성방송과 지상파 방송을 통해 소개해왔다. 


도쿄(東京)에 있는 5개 민방의 지상파들도 한국 드라마의 방송을 대부분 중단했다. 지금은 평일 오전 TV도쿄의 전파를 타고 있는 <야경꾼일지> 1개만 남아 있다.


NHK 등이 한국 드라마를 더 이상 방송하지 않기로 한 배경과 관련, 전문가들 사이에서는 한국 드라마 자체의 문제점을 지적하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대중문화 분야를 취재해온 언론인 후루야 마사유키(古家正亨)는 “2005년 이후 한류가 일본과 중국에서 붐을 이루기 시작하면서 해외를 의식한 스토리와 스타를 채용한 작품이 늘어났다”면서 “<겨울연가>에서 ‘첫사랑’ 등의 아련한 추억을 느껴온 일본인 한류팬 들에게는 (새로 등장한 드라마에서) 뭔가 부족함을 느끼게 된다”고 분석했다.


일각에서는 <겨울연가>의 배용준을 이을 수 있는 새로운 스타가 떠오르지 않는 점을 지적하기도 한다. 작가 도야노 가오루(都與野かおる)는 “한국에서는 젊은 배우가 인기를 얻지만, 팬의 연령층이 높은 일본인에게는 반향이 없다”고 지적했다.


한·일 관계의 악화 등에 따른 ‘혐한’ 분위기도 일본에서 한국 드라마가 자취를 감춰가는 요인이라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2011년 민방인 후지TV 앞에서 이 방송국의 프로그램 편성이 한류에 편중돼 있다는 것을 지적하는 항위 시위가 일어나기도 했다.


도쿄신문은 “2012년 8월 이명박 대통령이 독도를 방문한 이후 일본 안에서 혐한 분위기가 갑자기 확산됐다”면서 “후지TV가 같은 달 한국 드라마의 방송을 중단했고, TBS는 2014년 3월부터 한국 드라마에 대한 방송을 하지 않고 있다”고 전했다.


한편, 일본의 민영 위성방송인 BS와 CS에서는 매월 200편 이상의 한국 드라마가 방송되고 있다고 도쿄신문은 덧붙였다. 그러나 BS와 CS는 시청차의 폭이 지상파에 비해 좁다.


<도쿄|윤희일 특파원 yhi@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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中 위안부기록 등재 실패에 "한국이 다시 준비중" 기대(종합)

난징대학살 문건 등재엔 "일본 과거사 반성 촉구 계기" 


(상하이=연합뉴스) 정주호 특파원 = 중국이 제출한 난징(南京)대학살 문건이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된 데 대해 중국은 "침략전쟁의 잔혹성을 인식하고 역사를 되새기는 계기를 마련해줬다"며 환영의 뜻을 표명했다. 


하지만, 함께 등재를 신청한 일본군 위안부 자료가 등재 목록에 포함되지 않

자 아쉬움을 나타냈다. 


관영 신화통신은 10일 유네스코가 난징대학살 문건을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했다는 소식을 속보로 전한 뒤 신청 경위와 배경, 등재의 의미 등을 상세하게 풀어주는 장문의 기사를 게재했다. 


신화통신은 '기록유산 전승의 신기원을 이룩했다'는 제목의 기사를 통해 일본이 2차대전 시기 자살특공대 유서를 세계기록유산 후보에 올리는 등 역사를 왜곡하거나 은폐하려는 기도를 물리치고 등재를 성공시켰다는데 의미를 뒀다.


통신은 또 주청산(朱成山) 난징대학살 피해 기념관 관장과 인터뷰를 통해 "역사는 일종의 기록"이라며 "인류가 역사를 기록하는 목적은 현재와 미래에 다시는 역사의 잘못을 범하지 말고 평화로운 생존과 발전을 누리기 위함"이라고 강조했다는 내용을 전했다.


중국 공산당 기관매체인 인민망(人民網) 역시 난징대학살 문건이 등재에 성공했다며 이로써 중국은 이미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된 본초강목, 황제내경, 전통음악 녹음 기록 등과 함께 총 10건의 세계기록유산을 보유하게 됐다고 보도했다.


하지만, 이들 중국 언론은 일본군 위안부 관련 기록이 기록유산에는 오르지 못했다는 사실은 짤막하게 언급하며 아쉬움을 나타냈다. 

그러면서 한국이 일본군 위안부 및 강제징용 관련 문건과 자료를 세계기록유산에 등재할 것을 고려 중이라는 소식을 전하며 군 위안부 기록이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될 가능성이 여전하다고 기대감을 내비쳤다. 


중국이 신청한 난징대학살 자료는 도쿄재판소 및 난징군사법정 기록과 일본군인이 촬영한 대학살 관련 사진, 미국 선교사가 촬영한 영상 등이 포함돼 있다. 

앞서 화춘잉(華春瑩) 중국 외교부 대변인은 9일 정례 브리핑에서 "난징대학살 관련 자료의 세계기록유산 등재는 일본을 포함한 각국 국민이 침략전쟁의 잔혹성을 새롭게 인식하는 한편 역사를 되새기고 평화를 소중히 여기며 인류 존엄성을 공동 수호하는데 도움을 줄 것"이라고 말했다.


화 대변인은 "난징대학살과 위안부 강제동원은 일본 군국주의가 중국 침략전쟁 시기에 저질렀던 엄중한 범죄로 중국은 역사에 대한 책임감으로 이번에 세계기록유산 등재를 신청했다"고 밝혔다. 


화 대변인은 이어 "역사적 사실은 부인할 수 없고 역사는 왜곡과 수정을 허용치 않는다"며 "온갖 방법으로 세계기록유산 등재를 저지하려는 일본의 움직임은 또다시 역사를 직시하지 않는 잘못된 태도를 보여주고 있다"고 비판했다.


jooho@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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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美대표 친일파' 사사카와재단 이사장 "8月 아베담화는 책임회피로 일관했다"

[오늘의 세상]

데니스 블레어, 이례적 비판 "아베, 지지받을 기회 놓쳐"


일본의 대미(對美) 공공 외교를 책임지는 '사사카와(笹川) 평화재단 USA'의 데니스 블레어(68·사진) 이사장이 아베 신조(安倍晋三) 일본 총리의 지난 8월 전후(戰後) 70년 담화를 "책임 회피로 일관한 실망스러운 문서"라고 강력히 비판했다. 미 국가정보국장 출신으로 대표적인 '친일파'로 꼽히는 블레어 이사장은 아베 총리가 담화를 발표한 당일 작성한 논평을 최근 재단 홈페이지에 전격적으로 올렸다.


'사사카와 USA'는 A급 전범 용의자 출신인 사사카와 료이치(笹川良一)의 '사사카와 평화재단 재팬'이 후원해 1990년 워싱턴DC에 만든 핵심 싱크탱크로 일본 관련 세미나와 콘퍼런스를 주관하거나 후원한다. 지난 4월 말 아베 총리 방미(訪美) 때도 워싱턴 DC의 최고급 호텔에서 일본과 가까운 미국 내 여론 주도층 400명을 모아놓고 특별 강연회를 단독으로 열어 '친일 여론' 형성에 앞장섰다. 블레어 이사장은 2014년 미국인으로서는 처음으로 이사장으로 취임했었다.


블레어 이사장은 논평에서 "아베 총리가 '우리는 역사의 교훈으로부터 미래를 위한 지혜를 얻어야 한다' '무고한 사람에게 우리나라가 헤아릴 수 없는 상처와 고통을 끼쳤다'고 말했지만, 20년 전 무라야마 담화에 크게 못 미쳤다"며 "일본이 과거사를 정면으로 직시하고, 타국에 일본이 그렇게 했다는 점을 인정하는 데는 턱없이 부족했다"고 말했다.


블레어 이사장은 "아베 담화는 실망스러우며, 아베 총리에 대한 지지자를 교육하고, 다른 나라를 안심시킬 큰 기회를 놓쳤다"며 "우리는 일본의 지도자들이 일본인이 자국의 과거를 더 잘 이해하는 데 도움을 주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블레어 이사장은 올해 초 한 세미나에서 일본의 과거 악행을 언급하면서 동시에 "한국도 베트남전 때 무자비한 행동을 많이 했다"고 주장해 논란을 일으켰다. 이 때문에 일본의 이익을 대변하는 재단의 최고 책임자가 일본 총리를 직설적으로 비판한 글을 홈페이지에 올린 배경을 놓고 워싱턴 외교가에서는 다양한 분석이 나오고 있다. 일부는 재단 측이 이사장을 교체하려는 상황에서 블레어 이사장이 선수를 친 것으로 보고 있다.


[워싱턴=윤정호 특파원 jhyoon@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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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케이, 유흥수 대사 '명성황후 칼럼' 사과 요구 거부

【서울=뉴시스】박근혜 대통령을 '민비'에 비유한 산케이신문 노구치 히로유키(野口裕之) 정치부 전문위원이 작성한 칼럼.<사진출처: 산케이신문 홈페이지 캡쳐> 2015.09.15
【서울=뉴시스】박근혜 대통령을 '민비'에 비유한 산케이신문 노구치 히로유키(野口裕之) 정치부 전문위원이 작성한 칼럼.<사진출처: 산케이신문 홈페이지 캡쳐> 2015.09.15

【서울=뉴시스】이재준 기자 = 유흥수 주일 한국대사가 15일 산케이 신문 측에 박근혜 대통령을 일본 낭인에 의해 잔혹하게 시해당한 명성황후에 비유해 논란을 빚은 칼럼을 삭제하고 사과하라고 요구했다.


산케이 신문에 따르면 유흥수 대사는 이날 산케이 신문 본사를 직접 방문, 8월30일자 산케이 뉴스에 실린 노구치 히로유키(野口裕之) 정치부 전문위원의 '미중(美中) 양다리 한국이 끊지 못하는 민족의 나쁜 유산'이라는 제하 칼럼에 대해 "분노를 느끼게 하는 내용으로 박근혜 대통령과 한국 국민을 모독하고 있다"며 삭제와 사죄를 강력히 촉구했다.


또 유 대사는 노구치 전문위원이 칼럼에서 박 대통령의 중국 열병식 참석을 '사대주의'라고 폄하한 대목을 비판하면서 박 대통령이 방중을 통해 한중일 정상회의 개최에 소극적이던 중국에서 긍정적인 답변을 이끌어냈다고 강조한 것으로 신문은 전했다.


이에 대해 유 대사를 만난 구마사카 다카미쓰(熊坂隆光) 산케이신문 사장은 "기사는 기자의 자유로운 논평, 평론이기에 삭제와 사죄를 할 생각은 없다. 자유 저널리즘의 표현은 자유 사회를 구성하는 요소의 하나"라며 요청을 거부했다고 한다.


노구치는 칼럼에서 박 대통령의 전승절 열병식 참관이 내외정세 변화에 따라 사대주의 상대를 바꿔온 조선 말기를 연상시킨다며 한국이 그 때의 사대주의 DNA를 계승해 발휘하는 것이라고 비꼬았다.


아울러 조선이 사대주의 상대를 교체할 때마다 일본이 존망의 위기를 맞았다고 망발하면서 조선을 독립시키려는 일본을 오히려 청나라, 러시아와 전쟁을 벌이도록 유인했다고 왜곡했다.


또 노구치는 명성황후를 비하하는 '민비'와 비정상적인 행위를 의미하는 '도착(倒錯)'이라는 일본식 표현을 동원해 조선 말기에 박 대통령 같은 여성 권력자로서 '민비'가 있었다며 명성황후가 겪은 비운을 자세히 서술하면서 박 대통령의 불운을 암시하기도 했다.


하지만 산케이는 노구치의 칼럼이 한국 외교의 특징으로서 사대주의를 거론하고 박 대통령의 항일전쟁 70주년 기념 열병식 참관을 예로 들었을 뿐이라고 옹호했다. 노구치는 산케이 신문 내에서도 대표적인 강경 우익 보수로 꼽히는 기자로 알려졌으며 주로 한국과 중국 등 과거사 문제로 대립하는 국가에 대해 뒤틀린 논조의 칼럼을 자주 실어왔다.

yjjs@newsi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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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인사이드] 긴 잠에서 깬 日 젊은세대, '反아베' 외치다

중장년층이 대부분이던 일본의 집회 풍경이 실즈 소속의 젊은 대학생들의 참여로 바뀌고 있다.  도쿄=AP연합뉴스
중장년층이 대부분이던 일본의 집회 풍경이 실즈 소속의 젊은 대학생들의 참여로 바뀌고 있다. 도쿄=AP연합뉴스

록 공연·발랄한 구호로 무장… 反아베 외치는 日 젊은이들… 안보법 반대 선봉에 선 ‘실즈’


일본 정국에 긴장이 감돌고 있다. 아베 신조(安倍晋三) 일본 총리와 집권 자민당이 집단자위권 행사를 포함한 안보 관련 법안을 다음주 중 강행 처리할 것으로 예상되면서다. 민주당과 유신당 등 야당들은 물론 지식인, 학생, 시민사회단체들이 대대적인 저지 시위를 계획하고 있다. 양측 모두 절대 밀릴 수 없다는 각오여서 벌써부터 격렬한 충돌이 예상된다.

그동안 일본 국민들은 내각과 거대 집권당이 정책적 결정을 내리면 군말없이 이를 받아들이는 데 익숙했다. 서구의 민주주의 관점에서 보면 지나치게 복종적 국민이라는 비판도 들어왔다. 그러나 이번만큼은 상황이 다르다. 그 중심에는 일본 대학생들의 모임 ‘자유와 민주주의를 위한 학생긴급행동’(SEALDs·실즈)이 자리 잡고 있다. 


◆긴 잠에서 깬 日 젊은세대

1970년대 초반 좌파 학생운동인 ‘전공투’가 소멸한 뒤 일본 대학가에서는 학생운동이 아예 종적을 감췄다. 대학생들은 사회공동체의 문제나 정치 이슈 대신에 취업이나 취미, 연애 등 개인 관심사에 몰두했다. 1990년대 초 버블경제 붕괴 이후 이런 현상은 한층 가속화했다. 불황이 장기화되면서 청년 학생들은 움츠러들기만 했다. 해외로 유학가는 학생의 수가 격감했고, 창업에 도전하는 청년도 찾아보기 어려웠다. 대부분의 학생이 이르면 3학년 2학기부터 ‘슈카쓰’(취업활동)에 뛰어들었다. 이들의 독특한 행동 방식은 프리터(아르바이트로 생계를 이어가는 젊은이)와 오타쿠(한 분야에 열중하는 사람), 사토리(돈벌이와 출세에 관심 없는 젊은이), 초식남(연애나 결혼에 소극적인 젊은 남성) 등 수많은 신조어를 낳았다.

그런데 아베 정권이 안보 법안을 밀어붙이기 시작하면서 이런 분위기가 확 바뀌었다. 대학생들이 실즈를 조직해 ‘반안보법 반아베 투쟁’에 적극 동참하면서 일본 내 시위 양상이 눈에 띄게 달라졌다. 영국 BBC가 “일본의 젊은이는 눈을 떴다”고 평가할 정도다. 도쿄신문에 따르면 실즈의 핵심 멤버인 요코하마시립대 4학년 다키모토 미키(22)는 이런 변화에 대해 “최근 젊은이들이 시위를 하게 된 것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삶과 자기 자신까지 정부의 생각으로 바뀌어버릴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서다. 그래서 목소리를 높이고 싶다고 생각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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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韓피폭자소송지원 40년' 이치바 씨 "해야할일 했을 뿐"

'한국원폭피해자들을 돕는 시민모임'의 이치바 준코(59·市場淳子) 회장이 8일 일본 최고재판소 판결이 나온 뒤 도쿄에서 기자회견을 하는 모습이다.
'한국원폭피해자들을 돕는 시민모임'의 이치바 준코(59·市場淳子) 회장이 8일 일본 최고재판소 판결이 나온 뒤 도쿄에서 기자회견을 하는 모습이다.

전화인터뷰서 '재외피폭자에 동등한 의료비 지급' 日대법판결 소회 밝혀

"건강진단·간병수당 지급까지 실현되도록 日정부와 협상할 것"

(도쿄=연합뉴스) 조준형 특파원 = "외국인(한국인)이 피해를 봤지만, (식민지 지배의) 가해자는 일본인입니다. 가해자의 나라에 살고 있는 시민으로서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일본 시민단체인 '한국원폭피해자들을 돕는 시민모임'의 이치바 준코(59·市場淳子) 회장(오사카 거주)은 9일 연합뉴스와의 통화에서 이같이 말했다. 

약 40년간 한국인 피폭자들의 소송을 지원해온 이치바 회장은 재외 피폭자에게 일본 내 피폭자와 마찬가지로 의료비 전액을 지급하라는 일본 최고재판소 판결(8일)을 유도한 숨은 공신이다. 

그럼에도 그는 끝까지 포기하지 않은 한국인 피폭자들과 변호인단에 공을 돌리는 한편, 향후 일본 정부와의 협상을 통해 한국내 피폭자에 대한 건강진단, 간병수당 지급 등 남은 과제들까지 해결하겠다는 결의를 불태웠다. 

이치바 회장은 간사이(關西) 지역 소재 한 대학에 재학했던 1970년대, 히로시마(廣島)·나가사키(長崎) 원폭 피해자 중 한반도 출신자들이 많았다는 사실을 알게 돼 큰 충격을 받은 것을 계기로 줄곧 한국인 피폭자 지원에 매진해왔다. 

한국인 피폭자들이 피폭 전 일본에서 어떤 삶을 영위했으며, 피폭 이후 고국 또는 일본에서 어떻게 살아왔는가를 심층적으로 다룬 책 '한국의 히로시마'를 펴내기도 했다. 

다음은 이치바 회장과의 전화 인터뷰 일문일답이다. 

--8일 일본 최고재판소 판결의 의미는 무엇인가. 

▲피폭자 원호법(일본법)을 평등하게 적응하라는 소송을 한국 원폭 피해자를 중심으로 약 40년간 계속해 왔고, 드디어 의료비라는 지원이 (차별없이) 이뤄지게 됐다. 피해자에게 가장 우선적으로 필요한 지원이 가장 늦게 40년이나 지나서 인정됐다. 지금 살아계신 한국인 피폭자분들이 적다는 것은 아쉽지만 그래도 생존자분들에게 가장 필요한 지원이 실현된 만큼 큰 도움이 될 것이다. 

앞으로의 여생을 의료비 걱정없이 보낸다는 것은 중요한 일이다. 그런 의미에서도 판결의 의의가 크다.

'피폭자 건강수첩'을 교부받은 피폭자라면 어디에 살고 있든 원호 대상이 된다는 점을 명시한 판결이었다. 피폭자 원호법 중 아직 재외 피폭자에게 적용되지 않은 것이 7조의 건강진단과 31조의 개호(간병) 수당 지급이다. 의료비 지급뿐만 아니라 아직 시행되지 않은 건강 진단과 간병 수당 지급도 조속히 시행하라는 것을 어제의 판결을 바탕으로 (일본 정부에) 요구할 수 있을 것이다. 

--승소의 원동력은 무엇인가. 

▲의료비 소송을 담당한 변호인단이 오사카 지법, 오사카 고법에서 매우 훌륭한 변론을 해왔다는 것이 가장 큰 요인이라고 생각한다. 원고 측의 변론이 허술하면 이길 수 있는 재판도 이기지 못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한국인 피폭자들이 수십년간 굳건히 싸워온 결과라고 생각한다. 

--어떤 마음으로 외국인인 한국인의 피폭 문제에 천착하게 됐나. 

▲외국인이 피해를 보았지만, (식민지 지배의) 가해자는 일본인이다. 가해자의 나라에 살고 있는 시민으로서 당연히 우리가 해야할 일이라고 생각했다. 

--앞으로의 과제는 무엇인가. 

▲재판을 안 해도 되도록 일본 국회의원의 힘을 빌려가며 협상을 통해 후생노동성의 변화를 유도한다는 것이 우선 방침이다. 재외 피폭자 의료비는 얼마나 조기에 지급 절차를 완비하느냐가 남아 있지만 이미 8일 판결로 해결된 것이다. 나머지 건강진단과 개호 수당을 실현함으로써 완전하게 평등한 법 적용을 가능케 하는 것이 과제다. 이제까지는 재판으로 해왔지만 생존 피해자들도 고령인 만큼 남은 과제에 대해서는 협상을 통해 일본 정부가 (자발적으로) 조치를 취하도록 유도하고 싶다. 

--한국 정부와 정치권에 바라는 바는 없는가. 

▲한국 정치권에는 원폭피해자지원 특별법 법안을 통과시키길 기대한다. 한국 정부에는 하루 빨리 군위안부 문제, (일제에 의해 강제로 이주한) 사할린 동포 문제와 함께 피폭자 문제(피해자 구제조치 등)를 일본 정부와 협의해 잘 해결하길 바란다. 

--전후 70주년을 맞이한 일본이 최근 원폭 피해만 강조하고 전쟁 가해국이었다는 사실은 강조하지 않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 어떻게 생각하는가?

▲우리 모임은 한국의 원폭 피해자를 돕는 시민 모임인데, 일본 피폭자 운동이 그 피해만을 강조하고 일본의 가해 책임을 묻지 않는 것은 괴상한 일이라는 인식에서 출발했다. (8일 최고재판소 판결을 계기로) 한국 원폭 피해자에게 의료비 전액 지원을 하게 된 일은 곧 '일본의 원폭 피해자 운동이 일본은 피해자라는 사실만을 생각해서는 안 된다'는 메시지라고 생각하며 운동에 임하고 있다. 

--최근 한일 정상회담 전망이 나오는 등 양국 관계 개선의 기운이 고조됐다. 어떤 기대를 갖고 있는가. 

▲양국 정부에서 논의하지 않으면 문제는 해결되지 않는다. 양국 관계가 험악하게 된 원인은 아베 정권이 잘못된 역사 인식을 갖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우선 일본 정부가 아시아 침략, 조선 식민지 지배에 대한 역사 인식을 가지고 회담에 임하지 않는 한 절대로 중국, 한국과 좋은 관계를 만드는 정상회담을 할 수 없다고 본다. 

--모임 회원 규모는 어느 정도인가. 

▲회원 수는 약 600명이다. 회원은 회비를 내며 모임을 지탱해온 사람들이고 중심적인 역할을 하는 사람들이 오사카와 히로시마, 나가사키 지부에 몇명씩 있다. (취재보조: 이와이 리나 통신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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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보법안 반대 시위, 일본 열도 300여곳서 동시다발로 열려

국회 주변에 시위대 대거 몰려… 주최측 "12만명"·경찰 "3만명"

야당 대표도 시위 현장에…내달 14일부터 중의원서 '밀어붙이기' 가능

(도쿄=연합뉴스) 이세원 특파원 = 일본 아베 신조(安倍晋三) 정권의 안보 법안 강행 처리가 임박하면서 이에 반대하는 시위가 각지에서 동시 다발적으로 열렸다.

안보법안에 반대하는 시민모임인 '전쟁하게 하지 마라·9조를 부수지 마라! 총궐기 행동실행위원회'(이하 위원회)는 30일 도쿄(東京) 국회의사당 주변에서 대규모 시위를 열었다.

참가자들은 비가 내리는 가운데 국회 의사당을 에워싸고 "전쟁하게 하지 마라", "지금 바로 폐안(廢案)", "헌법을 지켜라" 등의 구호를 외치며 현재 심의 중인 안보 법안의 폐기를 요구했다.

'아베 그만둬라'는 구호가 적힌 현수막이 내걸리는 등 아베 정권에 대한 불신과 비판도 쏟아졌다.

시위대는 주변 인도는 물론 국회 의사당 정문으로 향하는 왕복 10차선 도로를 가득 채울 정도로 많이 몰려들었다.

경찰이 의사당과 시위대 사이에 버스로 벽을 만들어 차단할 만큼 이례적으로 대규모 시위였다.

일부 참가자가 경찰이 설치한 바리케이드를 걷어내려고 시도하면서 몸싸움이 벌어지기도 했으나 주최 측이 질서 유지를 촉구하는 등 큰 충돌로는 번지지 않았다.

교도통신에 따르면 경시청은 이날 시위 과정에서 경찰관을 폭행한 혐의(공무집행방해)로 참가자 2명을 체포했다.

위원회는 이날 참가자가 약 12만 명이라고 발표했다. 이는 아베 정권에서 하에서 열린 안보법안 반대 시위 가운데 가장 큰 규모인 것으로 보인다.

이와 달리 경시청은 시위대 규모를 3만여 명으로 추산했다고 NHK는 전했다.

안보 법안에 반대하는 대학생 중심의 청년 단체 '실즈(SEALDs)'를 비롯해 남녀노소가 참가했으며 도쿄 아키하바라(秋葉原)에서 성적소수자(LGBT) 등 약 100명이 모여 전쟁 반대를 외치는 등 각계가 도쿄에서 반대 목소리를 냈다.

또 민주당, 공산당, 사민당, 생활당 등 4개 야당 대표도 국회 앞 시위장에 모습을 드러내 국회에서 법안 통과 저지를 위해 모든 노력을 다하겠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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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日정부, 한국의 수산물 금수에 WTO 강제절차 추진 방침"

이르면 20일 소위원회 설치 요청

(도쿄=연합뉴스) 이세원 특파원 = 한국 정부가 후쿠시마(福島) 원전 사고를 이유로 일본 수산물 수입을 금지한 것에 대해 일본 정부가 세계무역기구(WTO) 소위원회를 통한 강제 해결을 추진하기로 방침을 굳혔다고 교도통신이 19일 보도했다.

보도에 따르면 일본 정부는 한국과의 협의에서 이견을 좁히지 못했으며 이에 따라 이르면 20일 WTO에 분쟁 처리를 위한 소위원회(패널) 설치를 요청할 계획이다.

일본 정부는 그동안 '수입금지가 과학적인 근거가 없으며 WTO 협정 위반'이라고 주장했고 한국 정부는 '국민의 안전을 고려한 정당한 조치'라고 반론해 양국 간에 문제가 해결되지 않았다.

교도통신은 실제로 소위원회 설치가 인정되는 것은 9월 무렵이 될 것으로 전망했다.

한국 정부는 후쿠시마 원전 사고 후 원전의 오염수가 바다로 유출되면서 방사성 물질 오염에 대한 국민의 불안이 고조하자 2013년 9월 후쿠시마·이바라키(茨城)·군마(群馬)·미야기(宮城)·이와테(岩手)·도치기·지바(千葉)·아오모리(靑森) 등 8개 현에서 나오는 모든 수산물의 수입을 금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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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만하라 할 때까지 사죄" 아베 압박해온 日 양심 7인

아베 신조 일본 총리가 전후 70년 담화를 발표한 가운데 과거 일본 총리의 양심적 담화문이 다시 주목을 받고 있다.

 

'식민지배, 침략, 사죄, 반성'이라는 4대 키워드를 처음으로 확실하게 담아 담화문을 발표한 무라야마 전(前) 총리와 일본군 위안부의 존재를 인정하고 공식 사과한 고노 전(前​) 총리의 담화는 양심적 담화로 평가받고 있다.

 

아베 담화가 발표되기 전 "일본은 상대국이 인정할 때까지 사죄해야 한다"며 아베 총리를 압박해온 일본 양심 7인을 소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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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토야마 "식민지 시대 가혹한 고문, 죄송하고 사죄드린다"

전 일본 총리가 서울 서대문형무소를 방문, 취재진 질문에 답하고 있다.
전 일본 총리가 서울 서대문형무소를 방문, 취재진 질문에 답하고 있다.

"아베 담화, 식민통치·침략, 반성·사죄 담겨야"

독립투사 영령에 11번 고개숙인 일본 전 총리…추모비 앞에선 무릎꿇고 큰 절

(서울=연합뉴스) 황철환 기자 = 하토야마 유키오(鳩山由紀夫) 전 일본 총리는 12일 일제강점기 독립투사들에게 행해진 고문 등 가혹행위에 대해 진심으로 사과했다.

광복 70주년을 맞아 서울시·경기도, 여야 정치권과 시민사회가 여는 '2015 동아시아평화국제회의' 참석을 위해 한국을 찾은 하토야마 전 총리는 이날 오후 서대문형무소역사관을 방문했다.

유관순 열사가 수감됐던 여옥사 8호 감방을 시작으로 과거 일제강점기 독립투사들이 투옥돼 고문을 당한 흔적을 돌아 본 하토야마 전 총리는 사전에 준비한 원고 없이 즉석에서 기자회견을 가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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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잊어버린 최초의 위안부 증언자…그 이름, 배봉기

할머니의 말년을 가족같이 돌봤던 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총련) 오키나와 지부의 일꾼이었던 김수섭(74), 김현옥(73)씨 부부와 함께 나들이를 갔다가 찍은 사진. 사진 김수섭씨 부부 제공
할머니의 말년을 가족같이 돌봤던 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총련) 오키나와 지부의 일꾼이었던 김수섭(74), 김현옥(73)씨 부부와 함께 나들이를 갔다가 찍은 사진. 사진 김수섭씨 부부 제공

한국 사회가 기억하지 못하는 배봉기(1914~1991) 할머니는 한반도 출신 여성들 가운데 자신이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였음을 처음 밝힌 인물이다.


배 할머니는 1914년 9월 충남 예산군 신례원리에서 태어나 1991년 10월18일 나하시 마에바시 2초메에서 숨졌다. 사진은 할머니의 말년을 가족같이 돌봤던 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총련) 오키나와 지부의 일꾼이었던 김수섭(74), 김현옥(73)씨 부부와 함께 나들이를 갔다가 찍은 사진이다. 김씨 부부는 사진을 찍은 정확한 시점은 기억하지 못했다.


배 할머니는 한국 사회에서 본격적인 위안부 운동이 시작된 계기가 된 김학순 할머니의 첫 증언이 나오기 무려 16년 전인 1975년 <교도통신> 등 일본 언론을 통해 자신이 일본군 위안부임을 밝혔다.


그러나 배 할머니의 증언은 사회의 폭넓은 반향을 부르지 못했고, 그래서 곧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잊혀지고 말았다. 우린 왜 할머니를 기억에서 지운 것일까. 그 실마리를 찾기 위해 배봉기 할머니기 위안부 생활을 강요당했던 오키나와의 작은 섬, 할머니가 살던 작은 헛간, 할머니가 마지막 숨을 거둔 동네를 찾아가 봤다. 그곳에서 발견할 수 있었던 것은 자신이 당했던 피해를 감춘 채 생을 마감해야 했던 수많은 위안부 피해 여성들의 쓸쓸한 뒷모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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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사람 잡는 허위신고·위증 늘었다… 韓 무고죄 유독 많아

[뉴스데스크]◀ 앵커 ▶

엉뚱한 사람을 공범으로 몰거나 죄 없는 사람을 신고하는 일이 늘고 있습니다.

생사람 잡는 무고와 위증 범죄, 그 천태만상을 현재근 기자가 파헤쳤습니다.



◀ 리포트 ▶

50살 이 모 씨는 최근, 필리핀에서 필로폰을 들여온 혐의로 체포됐습니다.

생판 처음 듣는 얘기였지만 자신의 이름과 주소가 적힌 소포를 들이미는 경찰 앞에서 어떤 부인도 통하지 않았습니다.

누명은 검찰 수사 과정에서 벗겨졌습니다.


앞서 수감돼 있던 마약사범 일당이 평소 사이가 좋지 않았던 이 씨 집에 일방적으로 마약을 보냈던 겁니다.

[장인호 검사/서울남부지검 형사4부]
"다른 마약 사범들을 제보함으로써 자기 사건에서 양형 또는 구형에서 선처를 받으려는.."

여성이 일단 피해자로 간주되는 점을 악용한 거짓 성폭행 신고도 늘고 있습니다.

20살 김모 양은 알고 지내던 한 대기업 직원과 합의하에 성관계를 가졌음에도 성폭행을 당했다며 경찰에 신고했습니다.

그러나 수사 과정에서 이 직원이 2억 원 가까운 퇴직금을 받았다는 걸 듣게 된 김 양이 합의금을 받아낼 생각으로 꾸민 일이었다는 게 밝혀졌습니다.

이처럼 생사람 잡는 무고죄는 유독 우리나라의 발생 비율이 높은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지난 2007년 기준으로 일본과 비교해 217배, 인구 차이를 감안하면 5백 배가 넘는단 통계가 나온 적도 있지만, 그 이후에도 발생 건수는 줄지 않고 있습니다.

[고민석/서울남부지검 형사2부장]
"진실 여부를 찾기 위해서 필요없이 수사력이 낭비되고 재판과정에서 법정비용이 높아지는.."


검찰은 무고범들을 '사법질서 교란사범'으로 규정하고 철저히 단속할 방침이라고 밝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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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인 41% "日공격당하면 비폭력으로 저항"…"싸울 것" 29%

교도통신 전후 70년 여론조사…"아베담화서 식민지·침략 사죄해야" 67%

(도쿄=연합뉴스) 조준형 특파원 = 타국에 대한 공격을 자국에 대한 공격으로 간주하고 무력을 행사하는 집단 자위권이 오는 9월께 일본에서 법제화할 것으로 예상된다. 그러나 정작 국민 40% 이상은 심지어 일본이 공격당한 경우에도 '비폭력으로 저항하겠다'는 생각인 것으로 나타났다.

교도통신은 종전 70주년을 맞아 5∼6월 우편 방식으로 진행한 여론조사 결과 '만약 외국이 일본을 공격하면 당신은 어떻게 하겠느냐'는 질문에 가장 많은 41%가 '비폭력으로 저항할 것'이라고 응답, '무기를 들고 싸운다(29%)'는 응답보다 많았다고 29일 보도했다. '도망친다'가 16%, '항복한다'가 7%로 뒤를 이었다.

이는 교전권을 부정한 헌법 9조 수정을 희망하는 아베 정권과 일반 여론의 괴리를 보여주는 조사결과로 풀이된다.

이번 조사에서 헌법을 이대로 존속시켜야 한다는 응답은 60%, 바꿔야 한다는 응답은 32%로 각각 집계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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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은 어리광쟁이, 김치 안 팔려도 일본 탓”… 한중일 삼국지

‘한국에서는 일본 경제마저 악당 취급받고 있다.’

‘한국에서는 아베노믹스에 따른 엔화 약세로 한국의 수출기업 경쟁력이 저하되고 있다는 내용으로 일본에 대한 피해자 의식이 한국 언론을 중심으로 확산되고 있다.’

일본 산케이가 20일자 지면에서 한국 언론 등이 자국의 경제 부진을 일본 탓으로 돌린다는 주장을 담은 칼럼을 내보냈습니다. 일본 넷우익들은 이에 화답이라도 하듯 ‘한국은 어리광쟁이’라며 손가락질하고 있습니다. 22일 한중일 삼국지입니다.

문제의 칼럼은 산케이 서울특파원 나무라 다카히로 편집위원이 ‘김치와 한국 자동차, 북한 경제 악화도 일본 때문인지’라는 제목으로 쓴 것입니다.

나무라 다카히로 편집위원은 지난해 10월 가토 다쓰야 산케이 전 서울지국장 사태 당시 우리 외교부 대변인을 향해 “한국에 언론의 자유가 있느냐”면서 “가토 다쓰야 기자가 3개월간 여기를 떠날 수 없다. 사실상 인권문제 아니냐”고 따져 물었던 장본인입니다.

나무라 다카히로 편집위원은 한국에서 경제 고전의 이유로 아베노믹스로 인한 엔화 약세를 들먹인다고 분석했습니다. 그는 이를 ‘일본에 대한 피해자 의식’이라고 표현하기도 했는데요. 일본을 가해자로 묘사한다는 것입니다.

그는 수출 분야에서도 일본과 경합하는 한국 기업들은 엔화 약세로 일본 기업에 당했다고 초조해하고 있는 등 한국 언론은 역사 인식에서 뿐만 아니라 경제에서도 일본탓을 한다고 분석하기도 했습니다.

“김치나 소주, 라면 등 몇 년 전까지 일본에서 인기가 있던 한국 제품이 안 팔린다거나 한국 자동차가 일본에서 팔리지 않는다 등의 불만은 일본에서도 통한다. 엔저 이외에 대일 수출 부진의 원인으로 일본에서의 혐한감정을 들 수 있다거나 국산 차의 자존심이 일본 시장을 닫고 있다는 해석도 있다.”

그는 이런 한국 내 주장에 대해 반박했습니다.

“한국이 싫으니까 한국 물건을 안 사는 게 아니다. 일본 소비자가 한국처럼 자국 차에 특별한 자부심을 갖고 있는 것도 아니다. 좋은 물건을 사고 싶을 뿐이다.”

나무라 다카히로 편집위원은 아베노믹스를 적극 옹호하면서 칼럼을 마무리 지었습니다.

“아베노믹스가 이웃 나라는 핍박하는 정책이라는 감정적인 주장을 한국 국민 상당수가 그걸 그대로 믿고 있다. 한국에서 일본 경제도 악당 취급되고 있다.”

일본 네티즌들은 이 칼럼을 놓고 한국산 제품에 대한 조롱을 퍼붓고 있습니다.

“인기는 원래 없었다. 처음엔 신기해서 산 사람도 드물게는 있었지만 두 번째 산 사람은 없지.”

“한국은 항상 피해자인 것처럼 말한다. 어리광을 부리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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日 "한국의 수산물 수입규제 WTO 강제해결절차 돌입 방침"

농림수산상, 기자회견서 "더 대화해도 같은 결과"

(도쿄=연합뉴스) 조준형 특파원 = 일본 정부는 한국 정부의 일본산 수산물 수입 규제에 대해 세계무역기구(WTO)에서의 강제해결 절차에 돌입할 방침을 밝혔다고 NHK가 21일 보도했다.

하야시 요시마사(林芳正) 일본 농림수산상은 이날 각의(국무회의) 후 기자회견에서 "대화의 가능성은 부정하지 않지만, 같은 식으로 대화를 하면 같은 결과(결렬)가 될 것으로 예상된다"며 강제 해결 절차에 들어갈 뜻을 분명히 밝혔다.

한국 정부는 2011년 3월 동일본대지진으로 후쿠시마(福島) 원전 사고가 발생한 직후 방사능 오염 위험이 큰 후쿠시마 주변에서 생산되는 50개 수산물에 대해서만 수입을 금지했다.

그러다 후쿠시마 원전의 오염수가 바다로 유출되면서 방사능 오염에 대한 국민 불안이 고조되자 2013년 9월 후쿠시마·이바라키(茨城)·군마(群馬)·미야기(宮城)·이와테(岩手)·도치기·지바(千葉) ·아오모리(靑森) 등 후쿠시마 주변 8개 현에서 나오는 모든 수산물의 수입을 금지하는 조치를 취했다.

일본의 거듭된 문제 제기 속에 양국 정부는 최근 스위스 제네바에서 WTO협정에 근거한 양자 협의를 했지만 협의 기간(협의 요청일로부터 60일) 안에 입장 차이를 좁히지 못했다. 이에 따라 일본은 협의 기간이 끝난 지난 20일부터 WTO에 제소할 수 있게 됐다.

일본이 제소하면 분쟁처리를 위한 소위원회가 설치되며 이후 WTO가 지정한 전문가가 양국 정부의 주장을 청취한 뒤 결정을 내리게 된다. NHK는 1년 안에 결정이 이뤄질 것으로 보인다고 전했다.

jhcho@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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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日외무성 '세계유산 표결시 부결우려' 지난달 아베에 보고"

(서울=연합뉴스) 일본 근대산업시설을 세계유산으로 등재한 결정문이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WHC) 홈페이지에 공식 게재된 것으로 19일 확인됐다. 해당 결정문은 제39차 세계유산위를 총정리한 문서의 177~181페이지에 'Decision:39 COM 8B.14'라는 제목으로 포함됐다. 사진은 결정문이 포함된 부분. 2015.7.19 << 세계유산위 제공 >> photo@yna.co.kr

교도통신 보도…"아베, 'forced to work' 수용 지시"


(도쿄=연합뉴스) 조준형 특파원 = 일본 외무성이 메이지(明治) 산업시설의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록을 둘러싼 한일간 외교전 와중에 표결까지 갈 경우 부결될 우려가 있다는 취지로 아베 신조(安倍晋三) 총리에게 보고했다고 교도통신이 19일 보도했다.

이 같은 보고를 받은 아베 총리는 한국의 요구를 일부 받아들여 표결 없이 만장일치로 결정되도록 하라는 취지의 지시를 했다고 교도는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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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대기업 ‘강제징용’에 처음 머리 숙인다

ㆍ미쓰비시, 2차대전 미군 포로 900여명 강제노역 사과하기로

ㆍ한국인 징용자에겐 ‘침묵’
일본 대기업 미쓰비시 머티리얼이 2차대전 당시 강제노동에 징용된 미군 포로들에게 공식 사과하기로 했다. 강제징용 피해자에 대한 일본 대기업의 공식 사과는 이번이 처음이다. 미쓰비시 측은 한국인 강제노동 징용자에게는 아직까지 공식 사과를 한 적이 없다.

미국의 유대인 인권단체 ‘시몬 비젠탈 센터’는 미쓰비시 머티리얼의 최고 중역을 비롯한 대표단이 이번 주말 미국에서 징용 피해자인 제임스 머피(94)를 만나 공식 사과할 예정이라고 밝혔다고 AP통신이 14일 보도했다. 시몬 비젠탈 센터의 부소장인 에이브러햄 쿠퍼는 “일본 대기업이 이런 표현을 한 것은 이번이 최초이며, 다른 기업들도 동참하는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주미 일본대사관의 오타카 마사토 대변인은 “사과는 미쓰비시 측의 자체 결단이며 일본 정부는 관여한 바 없다”고 설명했다. 일본 정부는 미국인 포로 징용 문제에 대해 앞서 2009년과 2010년 공식 사과한 바 있다.

미쓰비시 머티리얼의 전신인 미쓰비시 광업은 2차대전 당시 900여명의 미군 포로를 일본으로 이송해 공장 4곳에서 강제노역을 시켰다. 2차 대전 당시 강제노동에 징용된 미군 포로는 모두 1만2000여명으로 이 중 10% 가량이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 회사에서 노역한 미군 포로 가운데 소재가 확인된 생존자는 2명이지만, 건강 문제로 머피만 사과행사에 참석키로 했다. 머피는 “음식도, 의약품도, 옷도, 위생시설도 없는 노예생활이었다”라고 회상한 뒤 “일본인들은 이미 용서했지만, 지난 70년 동안 늘 사과하길 바랐다”고 말했다.

AP통신은 미쓰비시 측의 방침을 ‘역사적인 사과’로 평가하면서 다음달 2차 세계대전 종전 70주년을 앞두고 과거사에 대한 일본의 태도를 둘러싼 비난 여론이 높아지는 가운데 나온 것이라고 분석했다.

<정유진 기자 sogun77@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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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도인 도망을 막아라"…'강제노동 방증' 日문서 발견(종합)

日야마노탄광 문서…"'높이 7척·길이 140간' 울타리 설치"

"조선인, 사실상 감금상태에서 강제노동 사실 보여주는 것"

(서울=연합뉴스) 이귀원 기자 = 일본이 근대산업시설의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 결정문에 반영된 조선인 강제노역(forced to work)에 대해 '강제노동을 인정한 것이 아니다'고 말 바꾸기에 나선 가운데 당시 일본 탄광에서 조선인들의 탈출을 막기 위한 목적으로 구조물을 세웠다는 기록이 발견됐다.

한일관계 전문가인 김문길(부산외국어대 명예교수) 한일문화연구소장은 11일 일본 미쓰비시가 운영해온 것으로 알려진 후쿠오카(福岡) 소재 야마노(山野) 탄광의 물자명세서를 일본의 한 박물관에서 입수해 연합뉴스에 공개했다.

용도를 '반도인(半島人) 합숙소'라고 명기한 총 3장짜리 물자명세서 서류에는 공작물의 규모 또는 구조 항목에 '반도인 도망방지를 위해 합숙(소) 주위에 높이 7척(尺, 30㎝) 연장 140간(間, 1.818m)의 '판병'(板�)을 신축하라'고 명시돼 있다.

일본 전문가들은 '판병'을 나무판자형 울타리를 의미한다고 해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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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과 제3세계 국가들의 ‘식민지 청산의 머나먼 길’… 진정한 화해, 대부분이 아직도 ‘미완’

ㆍ‘역사비평’서 한·일협정 50주년 맞아 특집으로 다뤄

▲ 독일 - 폴란드

독일 브란트 ‘크니팔’로 모범적 사과


▲ 프랑스 - 알제리
프랑스 올랑드 “고통 인정”에 “미흡”


▲ 이탈리아 - 에티오피아·리비아
피식민지 자국 내 혼란으로 어영부영


35년에 걸친 일본의 식민지배는 해방 70년이 된 지금도 한·일관계의 발목을 잡고 있다. 한국과 일본처럼 식민·피식민 관계에서 벗어난 유럽과 제3세계 국가들은 어떤 과정을 통해 관계 정상화를 도모했을까. 최근 발간된 계간 ‘역사비평’(111호)은 한일협정 50주년을 맞아 식민지배국과 피지배국의 다양한 과거사 청산 노력을 특집으로 다뤘다. 종합하면, 관계 정상화는 그 어떤 곳에서도 쉽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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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노, 무라야마와 대담서 "군위안부 강제연행 있었다"(종합)

1993년 8월 4일 오후 일본 총리관저에서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관한 일본 정부의 조사 결과를 발표하는 고노 요헤이(河野洋平, 왼쪽) 당시 관방장관과 1995년 8월 15일 역시 총리관저에서 일본의 패전 50주년을 맞아 무라야마담화를 발표하는 무라야마 도미이치(村山富市, 오른쪽) 당시 일본 총리의 모습.
1993년 8월 4일 오후 일본 총리관저에서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관한 일본 정부의 조사 결과를 발표하는 고노 요헤이(河野洋平, 왼쪽) 당시 관방장관과 1995년 8월 15일 역시 총리관저에서 일본의 패전 50주년을 맞아 무라야마담화를 발표하는 무라야마 도미이치(村山富市, 오른쪽) 당시 일본 총리의 모습.

"명확하게 드러난 사실…모집과정에서 감언·거짓말 등도"

(도쿄=연합뉴스) 조준형 이세원 특파원 = 고노 요헤이(河野洋平) 전 관방장관은 일본군 위안부 모집 과정에 관해 명백하게 강제연행이 있었다고 9일 밝혔다.

그는 이날 일본 도쿄도 지요다(千代田)구 소재 일본기자클럽에서 열린 무라야마 도미이치(村山富市) 전 일본 총리와의 대담에서 일본군이 인도네시아에서 네덜란드 여성을 위안부로 삼은 사건을 거론하며 "군이 명백하게 강제적으로 데려가서 위안부로서 일을 시킨 사례"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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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기획]겉은 비슷한데 韓-日속이 다르네

[동아일보]
한일 공통 간식, 삼각김밥 탐구


삼각김밥은 작은 혁명이었다. 1000원도 안 되는 가격에 밥을 그것도 김밥을 먹을 수 있다니. 맨밥도 아니었다. 마요네즈를 버무린 참치, 고추장 양념을 한 쇠고기 등 짭조름한 속 재료가 심심함을 달래 줬다. 삼각김밥이 대중에게 알려지기 시작한 건 2000년이다. 그때 가격은 700원, 15년이 지난 지금 가격은 800원, 비싼 건 900원이다. 여전히 1000원도 안 된다. 15년 전이나 지금이나 1000원 미만으로 밖에서 밥과 반찬을 한 번에 맛볼 수 있는 건 삼각김밥이 유일하다. 삼각김밥은 주머니가 가벼운 중고교생들의 배를 채워 준다. 가볍게 한 끼를 때우려는 여성들에게도 안성맞춤이다.

이 혁명적 먹을거리가 뜬 것은 대한민국 축구사(史)에서 혁명과도 같았던 2002년 한일 월드컵 때다. 길거리 응원에 나선 사람들은 허기를 달래고자 편의점으로 몰렸다. 편의점마다 삼각김밥이 동이 났다. 2002년 월드컵을 기점으로 삼각김밥은 국민 간식이 됐다. 삼각김밥의 인기는 편의점을 대중화시키는 데도 기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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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상이 좋지 않다"…한·일 국민감정 '최악'

한일 국민감정에 대한 양국의 공동조사 결과가 나왔는데, 예상대로 최악이었습니다. 양국 응답자의 절반 이상이 서로에 대해 인상이 좋지 않다고 대답했습니다.

도쿄에서 최선호 특파원입니다.

<기자>

한국과 일본 사람이 상대국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3년째 같은 질문으로 추적 조사한 결과입니다.

인상이 좋다는 응답은 15.7과 23.8%에 불과했고, 한국인의 72.5, 일본사람의 52.4%가 인상이 좋지 않다고 답했습니다.

특히 2년 연속으로, 절반 이상의 일본 사람이 한국에 부정적인 반응을 보였습니다.

원인은 역시 역사문제, 한국인의 74%가 "제대로 반성하지 않는 일본"에 반감을 느꼈고, 일본인 74.6%는 "한국이 일본을 너무 비난한다"고 답했습니다.

한국 응답자 10명 중의 9명은 일본 하면 군국주의, 패권주의를 떠올렸고, 일본은 같은 비율로 한국 하면 반일 민족주의, 국가주의를 떠올렸습니다.

그러면서도 이런 상황은 바람직하지 않고 개선돼야 한다는 의견이, 양국 모두 3분의 2를 넘었습니다.

미약하지만, 반전의 가능성은 있다는 분석입니다.

[정한울/동아시아연구원 선임연구원 : 한국 국민이나 일본 국민 모두, 방문을 많이 해 본 경험이 있을수록, 그리고 상대국에 대한 정보가 늘어날수록 우호적인 태도를 갖고 있다, 라는 것이 확인이 되었습니다.]

정상회담의 필요성에는 두 나라 사람 모두 80% 이상 공감했습니다.

그러나 한국인은 위안부 문제를 정상회담 최우선 의제로, 일본은 '포괄적 관계 개선'을 강조해 온도 차도 뚜렷했습니다.

(영상취재 : 한철민, 영상편집 : 우기정)  

최선호 기자 choish@s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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싱가포르 총리 "일본, 2차대전 잘못 인정해야"

"한국도 더는 일본에 사죄 요구 말아야"

(싱가포르 교도=연합뉴스) 리셴룽(李顯龍) 싱가포르 총리는 29일(현지시간) 일본이 '보통 국가'가 되고 지역에서 적극적인 역할을 맡으려면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저지른 잘못을 인정해야 한다고 강력히 당부했다.

리 총리는 이날 국제전략연구소(IISS) 주최로 열린 제14차 아시아안보회의(일명 샹그릴라 대화) 개막식에 참석해 기조연설을 통해 "일본은 과거의 잘못을 인정하고 일본 여론도 우익 학자와 정치인의 역사 왜곡을 한층 솔직하게 거부하고 나서야 한다"고 밝혔다.

또 리 총리는 "일본이 이미 전쟁에 대해 막연하나마 깊은 반성과 사과를 표명했다고는 하나 위안부와 난징(南京) 대학살 같은 특정 사안에 대해선 덜 분명한 태도를 보이고 있다"고 지적했다.

리 총리는 올해 종전 70주년을 맞지만, 전쟁의 상흔이 "과거 당사국 간 특히 일본과 이웃인 중국, 한국 사이에 여전히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다"며 "70년이면 유럽에서처럼 과거사를 더는 적절히 문제 삼지 않을 때가 지났으며 이를 위해선 당사자 쌍방의 정치력과 포용력이 요구된다"고 강조했다.

다만 리 총리는 중국과 한국으로선 일본 침략으로 겪은 고통에 대해 일본이 충분히 보상하지 않았다고 생각하겠지만, 이젠 일본의 잘못 인정을 받아들이고 더는 일본의 사죄를 요구하지 말라고 권고했다.

리 총리는 "전쟁 역사가 일본을 수세로 몰리게 하거나 후손에까지 증오를 대물림하는 데 쓰여서는 안 된다"며 "화해야말로 일본이 스스로도 원하는 '보통 국가'가 되도록 도울 것"이라고 덧붙였다.

jianwai@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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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일 총성없는 역사전쟁..'유네스코 왜란'

조선인 징용 나가사키조선소
내달 세계유산 등재 유력시
독도·위안부 이은 또다른 도발
한국 “강제노동 적시” 日 부정적
정부, 유네스코 통과여부 주시


한국과 일본이 총성 없는 또 다른 역사전쟁을 벌이고 있다.

일본은 최근 조선인 강제노동 시설이 포함된 근대산업시설의 유네스코 등재를 추진하면서 일본제국주의 시절 한국의 아픔을 자극하는 ‘유네스코왜란’을 야기했다.

일본이 최근 신청한 23개 근대산업시설 가운데는 나가사키 현에 자리한 미쓰비시 나가사키 조선소에 포함된 제3드라이독<사진>과 자이언트 크레인, 목형장(木型場) 그리고 다카시마 탄광과 하시마 탄광, 후쿠오카현에 있는 미이케 탄광과 야하타 제철소 등 7곳이 강제징용된 조선인의 한이 서려있는 곳이다.

일본은 이들 산업시설들의 세계유산 등재를 추진하면서 대상기간은 경술국치조약에 의한 한일합방 이전인 1910년 이전으로 한정하면서 역사논쟁을 피하려는 ‘꼼수’를 부리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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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사 왜곡] 아베의 ‘위안부 왜곡’ 제동 걸릴까… 日 역사학자들도 조목조목 질타

일본인 역사학자들의 집단성명으로 아베 신조(사진) 일본 총리의 위안부 왜곡행보에 제동이 걸릴지 주목된다. 오는 8월로 예상되는 전후 70주년 담화에서 아베 총리가 분명한 위안부 사과를 하지 않을 것이라는 게 일반적인 예상이었으나 이번 사태로 아베 총리가 발언의 수위를 조절할지도 관심이다.

◇위안부 왜곡에 조목조목 질타=일본인 역사학자들의 집단성명은 위안부의 역사적 왜곡을 조목조목 비판했다.

첫째, 위안부의 역사적 사실을 분명히 했다. 성명은 “강제연행된 위안부의 존재가 많은 사료와 연구에 의해 실증돼 왔다”며 “‘고노 담화’의 근거가 무너진 것이 아니다”고 지적했다. 일본 정부는 1993년 8월 고노 요헤이 당시 관방장관이 군 위안부의 존재를 인정하고 사과하는 담화를 발표했었다.

둘째, 위안부를 성노예로 규정했다. 이는 아베 총리가 위안부를 ‘인신매매의 피해자’로 두루뭉실하게 표현한 것에 대해 일침을 가한 것이다. 성명은 “위안부 여성은 성노예로서 필설로 다하기 어려운 폭력을 받았다”며 “성매매의 계약이 있었다고 해도 정치적, 사회적 배경을 무시하는 것은 문제의 전체로부터 눈을 돌리는 것”이라고 반박했다.

셋째, 위안부 왜곡은 인권 침해이자 학문 탄압이라고 밝혔다. 성명은 “위안부 문제를 외면할 경우 일본이 인권을 존중하지 않는다는 것을 국제적으로 홍보하는 것과 같다”고 말했다. 성명은 또 위안부 문제를 제기하는 대학 교원에 대한 사직과 강의 취소 등은 ‘학문의 자유에 대한 침해’라고 비판했다.

성명에 참가한 단체는 일본역사학협회, 오사카역사학회, 규슈역사과학연구회, 센슈대학역사학회, 종합여성사학회, 조선사연구회간사회, 도쿄학예대학사학회, 도쿄역사과학연구회, 나고야역사과학연구회, 일본사연구회, 일본사고구회, 일본사상사연구회, 후쿠시마대학사학회, 역사학연구회, 역사교육자협의회 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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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착카메라] '평화의 소녀상' 앞에서 갈라진 사람들

[앵커]

일본대사관 앞 '평화의 소녀상' 주위엔 24시간 사람들이 모여 있습니다. 소녀상을 지키는 사람과 이제는 일본의 사과를 수용하자는 사람들로 나뉩니다.

밀착카메라 안지현 기자가 살펴봤습니다. 

[기자]

주한 일본대사관을 바라보고 있는 소녀상 주변에는 이처럼 시민들이 놓고 간 꽃다발이 있습니다. 아래쪽을 보시면 방한용품이 소녀상의 맨발을 감싸고 있는데요. 

그런데 지난해 말 한일 합의 이후, 이곳을 찾는 사람들이 끊이지 않고 있다고 합니다. 

추운 겨울을 보내고 있는 소녀상을 소녀상의 시선으로 살펴보겠습니다. 

소녀상의 모습을 담으려는 시민들의 발길이 이어집니다.

해외 언론의 카메라도 보입니다.

그 옆으로는 소녀상 곁을 매일 지키는 대학생들이 있습니다. 


[정주희/경희대 총학생회장 : 소녀상을 옮긴다는 것은 역사를 송두리째 없애겠다, 지우겠다는 의미와 다를 바가 없다고 생각해요.]

그런데 한 남성이 소녀상 주변을 맴돕니다. 

[바로 옆에 사는 대한민국 우리 핵폭탄이 있습니까? 종북 좌파! 종북 좌파!]

소녀상에 절을 한 이 남성은 한 차례 소동 후에야 사라졌습니다.

소녀상 주위는 이렇게 서로 다른 생각을 가진 이들이 모여듭니다.

대학생들에 대한 지원의 손길도 이어지고 있습니다.

소녀상 뒤로는 시민들이 주신 음식이라며 식품들이 있습니다. 

앞쪽에는 각종 음료수도 보이고 라면도 상자째 쌓여 있는데요. 추위를 피하기 위한 방한용품도 있습니다. 목도리와 담요도 보입니다. 

맞은 편에는 주변환경이 더러워지지 않도록 자체적으로 분리수거를 하고 있습니다.

이들은 소녀상 곁에서 문화행사를 하며 자리를 지킵니다. 

[강필준/대학생 : 더 열심히 해서 위안부 할머니들이 진정으로 고통에서 해방되는 날이 빨리 찾아왔으면 좋겠습니다.]

현재 시각은 새벽 한 시입니다. 이곳의 기온은 영하권을 기록하고 있는데요. 

소녀상 옆을 보실까요? 40명 넘은 학생들이 아직 이곳을 떠나지 않고 있습니다. 

내일 아침까지 소녀상 옆을 지키며 밤샘농성을 하는 건데요. 그런데 자세히 보시면 바닥에는 얇은 깔개를 깔고 침낭 속에서 어렵게 잠을 청하고 있습니다. 

충돌도 일어났습니다.

지난 6일, 24주년을 맞은 수요집회. 

보수성향의 어버이연합은 한일 합의 결과를 수용하라며 소녀상 앞에서 무릎을 꿇는 퍼포먼스를 열었습니다. 

[한일 일제 전범회의에 책임과 인정 사과를 적극 환영한다!]

앞서 또 다른 보수단체인 '엄마부대'는 할머니들이 희생할 것을 요구하기도 했습니다.

이 같은 보수단체 회원 사이에서 말없이 서 있는 여학생이 보입니다.

스스로를 '효녀연합'이라고 이름 붙인 청년들은 한일합의를 받아들이자는 보수단체의 주장에 반박하고 나섰습니다.

하지만 소리를 내고 맞서기보다는 조용히 반대의 뜻을 밝혔습니다.

[홍승희/대한민국 효녀연합 : 인간에 대한 예의가 저희가 원하는 거예요. 할머니들을 못 지켜 드렸잖아요, 역사에서.]

이 외에도 소녀상 지키자며 고등학생들로 이뤄진 효자연합. 

[소녀상, 저희가 지키겠습니다.]

또 엄마부대에 반대하는 생각을 밝힌 '진짜 엄마 부대'도 나타났습니다.

[배외숙 /이화여대민주동우회 대외협력위원장 : 내 딸이 위안부였어도 나는 용서할 것이라는 말을 듣고 저는 진짜 엄마라면 그런 말을 할 수 없다.]

소녀상은 전국 24곳에서 자신들을 잊지 말아 달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단발머리를 한 어린 소녀상 뒤로는 쪽 찐 머리를 한 할머니의 그림자가 보입니다.

얼마나 더 많은 시간이 지나야 할머니들이 하얀 나비처럼 고통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을까요?

안지현 

출저 JTBC

동영상링크:http://m.news.naver.com/hotissue/read.nhn?sid1=102&cid=1021431&iid=1156455&oid=437&aid=00001047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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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 이후 400여년…韓 드디어 日 넘어서나

(서울=연합뉴스) 김윤구 김경윤 기자


임진왜란, 을사조약, 한일병합, 6.25전쟁 등을 거치면서 일본은 우리나라를 수탈하거나 한국의 역사적 불행을 이용해 이익을 취했다.

이 과정에서 일본은 한국인에게는 넘보기 어려운 거대 강국의 이미지를 굳혔다.


실제로, 일본은 미국인들이 두려워할 정도로 강한 경제력을 과시하기도 했다. 한때 일부 학자들은 일본이 미국을 제치고 세계 최고의 강국이 될 것으로 내다봤다.

하지만 일본이 1990년대부터 '잃어버린 20년'을 겪으면서 침체의 길을 걸었고 그동안 한국은 꾸준하게 성장해 일본 경제를 바짝 추격하고 있다.

2020년에는 한국의 1인당 국내총생산(GDP)이 일본에 육박할 것이라는 전망도 나오고 있다.

이에 따라 한국이 임진왜란(1592∼1598년)과 일제강점기의 굴욕을 씻어내고 일본을 넘어설 것이라는 기대가 나온다.


◇ 임진왜란 후 조선 경제 황폐화…농토 5분의 1로 줄어


1592년 임진왜란으로 조선은 씻기 어려운 상처를 입었다. 전란으로 사망자가 늘어 인구가 급감했고 농토는 황폐화돼 재건까지 오랜 시간을 쏟아야 했다.

임진왜란의 잔혹함을 가장 대표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현재 일본 교토(京都)에 남아있는 귀무덤(이총·耳塚)이다.

왜군은 전란 당시 조선군과 백성을 죽이고 머리 대신 코와 귀를 베어 그 수를 헤아렸다.

이들은 자신의 군공을 자랑하기 위해 이런 신체부위를 소금에 절인 뒤 일본에 가져오기까지 했는데, 이를 묻은 장소가 현재의 귀 무덤이다.

조선의 경제 역시 전란으로 난도질당했다.


임진왜란 직전 조선의 농토 규모는 약 150만결에 달했다. 1결은 미곡 300말(두·斗)을 생산할 수 있는 크기의 토지를 뜻한다.

하지만 전쟁이 끝난 후에는 조사된 토지의 수가 5분의 1 수준인 30만결로 급감했고 이마저도 전란으로 인구 수가 감소하면서 경작할 사람이 부족해 제대로 경작되지 않았다.


이를 회복하는 데는 장기간이 소요됐다.


광해군 당시 토지 규모는 54만결에 불과했고 숙종대에 이르러서야 140만결로 회복됐다.

곡식 생산량이 감소하면서 일반 백성들의 생활은 더 곤궁해졌고 아사자의 수가 폭발적으로 늘었다.

굶어 죽는 이가 너무 많아서 군인만으로는 시신을 매장하기에 역부족이어서 승려를 동원해야 할 지경에 이르기도 했다.

1593년 선조실록은 "겨울에 굶어 죽고 얼어 죽은 이가 언덕을 이뤄 일반 빈집과 외진 곳에도 시체를 쌓아 놓았다"고 기록했다.

◇ 강점기에는 수탈 통해 산업 발전, 6·25 때는 경제 지렛대 삼아


19세기 말엽에 들어서면서 일본은 다시 조선에 결정적인 타격을 줬다.

당시 일본의 야마가타 아리토모(山縣有朋) 전 총리는 조선을 일본의 '이익선'이라고 지칭하며 자국 주권을 안전히 지키기 위해 확보해야 하는 범위로 보았다. 이후에도 일본이 조선을 바라보는 시각은 '이익'이라는 개념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1910년 일본이 한국을 강제병합하면서부터 강제 수탈이 시작됐다.

산미증식계획을 통해 3천900만t의 쌀을 일본으로 보냈으며 이를 바탕으로 제조업 등 자국의 산업발전을 꾀했다.

1940년대에는 태평양전쟁을 앞두고는 무기를 만든다며 민간의 놋그릇과 수조, 가마솥 등 쇠붙이는 모두 강제로 공출했다.

이 때문에 각 집마다 음식을 담을 그릇이 남아나지 않아 사기그릇을 나눠줘야 하는 상황이 벌어졌다. 일본 경제는 세계2차대전의 패전으로 크게 주저앉았지만 6·25 전쟁을 계기로 다시 회복의 발판을 다졌다.

일본으로서는 일제강점기에 이어 한국전쟁까지 연달아 이웃국가인 한국의 수혜를 입은 셈이다.

이후 일본은 세계 2위의 경제대국으로 성장했다.

◇ 한국의 일본 추격


한국은 오랜 기간 일본보다는 뒤지는 경제 상황을 견뎌왔지만 최근 들어 바짝 추격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일본이 1990년대 초 부동산 버블을 기점으로 저성장 국면에 들어섰으며, 한국이 반도체와 통신기기 부문을 중심으로 강세를 보이면서 역전의 기미가 보인다는 분석이 나온다.


국제통화기금(IMF) 세계경제전망 데이터베이스에 따르면 앞으로 5년 뒤면 한국의 1인당 국내총생산(GDP)이 3만7천 달러 가량으로 일본(3만8천달러)에 육박할 것으로 전망됐다.




구매력평가(PPP) 기준 1인당 GDP는 지난해 한국 3만5천379 달러, 일본 3만7천519 달러로 큰 차이가 없는 상태이며 한국은 2018년에 4만1천966 달러로 일본(4만1천428 달러)을 추월할 것으로 전망됐다. 2020년에는 한국이 4만6천612 달러로 일본(4만4천329 달러)를 추월할 것으로 예상됐다.

지난해 한국의 수출액은 5천727억달러로, 일본의 수출액(6천902억 달러)에 근접했다.


스위스 국제경영개발연구원(IMD)의 국가경쟁력 순위에서는 한국이 1계단 상승한 25위로 6계단 떨어진 일본(27위)을 추월했다.


한국은 통일을 통해 도약할 수도 있다는 의견도 나오고 있다.


통일후에 한국은 일시적으로 경제적 어려움을 겪을 수 있지만 인구가 8천만명으로 늘어나면서 내수시장이 확대되는데다 남한의 자본·기술력과 북한의 노동력이 결합하면서 기대 이상의 시너지가 발생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heeva@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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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일 정상회담 이후]위안부 피해자 납득할수 있어야… 국장급 채널로는 한계

동아일보]

[한일관계 어디로]<上>위안부 문제 타결 ‘산 넘어 산’



“정상이 만나 합의를 못했다고 판이 깨지면 안 된다. 쉽게 풀릴 문제였다면 지금까지 왔겠나. 국장급 협상의 격을 높여 그동안 못 낸 속도를 내야 한다.”



박근혜 대통령과 아베 신조(安倍晋三) 일본 총리가 2일 만나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논의한 것에 대해 주일 대사를 지낸 전 고위급 외교관은 이렇게 말했다. 유명환 전 외교통상부 장관도 “외교에서 한쪽이 100% 양보하기는 어렵다. 정상이 정치적인 결단을 내려 문제를 풀어야 한다”고 말했다. 한일 정상이 차분하게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논의했다는 것 자체가 큰 진전이라고 유 전 장관은 평가했다. 유흥수 주일 대사는 2일 본보 기자와 만나 “그동안 한일 간에 아무것도 안 된다고 말해왔던 것보다는 상황이 낫지 않으냐”며 정상회담 결과가 나쁘지 않다고 말했다. 양국 정상이 일본군 위안부 해법을 찾자고 원칙에 합의한 것만 해도 성과라는 평가다. 하지만 각론에서 여전히 넘어야 할 산이 많다. 



○ 바뀌지 않은 일본의 태도


아베 총리는 2일 귀국 직후 방송에 나와 “위안부 문제는 1965년 한일 청구권 협정에 따라 완전하고 최종적으로 해결됐다는 것이 기본 입장”이라고 말했다. 하기우다 고이치(萩生田光一) 일본 관방부장관은 “일본 입장은 바뀐 게 없다는 것이 입장”이라고도 했다. 일본의 말대로라면 법적 부분은 손대지 않은 채 외교적, 도의적인 선에서 매듭짓고 싶다는 뜻으로 해석된다. 

이런 일본의 원칙 고수는 위안부 피해자들을 납득시킬 수 있느냐의 문제와 직결돼 있다. 피해자들은 일본이 법적 책임을 인정하고 정부 예산이 들어간 배상금을 지불하라고 요구해왔다. 한국 정부도 “국민과 피해자들이 납득할 수준이 돼야 한다”고 밝혀왔다. 2012년 피해자에게 돈을 지급하되 배상이 아닌 사죄의 마음을 담은 인도적 지원으로 하자는 사사에 겐이치로(佐佐江賢一郞) 당시 일본 외무성 사무차관의 방안이 좌초한 것도 피해자들이 받아들일 수 없었기 때문이다.


“(군대 위안부 문제가) 장래 세대에 장해가 되지 않게 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인식을 했다”는 아베 총리의 이날 발언에도 한국과 다른 인식이 담겨 있다. 이 말은 ‘이번 협상이 최종적인 것이며, 타결된다면 더이상 위안부 문제를 거론하지 말라’는 요구를 담고 있다. 하지만 한국은 한 번도 이번이 최종 협상이라고 밝힌 적이 없다. 



○ 한국과 다른 일본 시간표와 의사결정 구조


내각제 특성상 일본 관료는 총리에 대한 접근이 수월하다. 한일 국장급 위안부 협의의 일본 대표인 이시카네 기미히로(石兼公博) 일본 외무성 아시아대양주국장은 아베 총리에게 직접 보고하고 지시를 받을 수 있다. 반면 한국 대표(외교부 동북아국장)의 보고는 차관보-차관-장관-청와대-대통령을 거치는 복잡한 구조다. 일본이 ‘한국 쪽은 실권이 없다’고 평가 절하하는 배경이다. 이번 정상회담 직전인 10월 중순 위안부 협의 일본 측 책임자가 이하라 준이치(伊原純一) 국장에서 이시카네 국장으로 교체되기도 했다. 이에 따라 협의 채널을 격상하거나 채널을 다양화하는 게 낫다는 제안도 나온다.


선남국 외교부 부대변인은 3일 정례브리핑에서 위안부 후속협의 채널에 대해 “국장급 협의가 중심이 될 예정”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국장급만 고집할 필요는 없다는 얘기도 많다. 2014년 3월부터 총 9차례 국장급 협의가 이어졌지만 일본이 구체적인 해법을 제시한 적이 없다고 외교 소식통은 전했다. 최근 거론된 아시아여성기금 잔여액에 일본 정부 예산을 합친 기금 조성과 정부의 책임 부분 인정 등의 방안도 별도 채널로 타진되고 있는 상황이다. 외교가에서는 한일이 그동안 국장급 이외의 별도 채널을 가동해왔으나 강제징용 관련 시설의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 과정에서 “한국에 당했다”고 생각한 일본이 이 채널을 와해시켰다는 관측도 나오고 있다.


박 대통령은 정상회담 직전 인터뷰에서 ‘연내 위안부 문제 타결을 바란다’는 희망을 밝혔지만 일본의 시계는 한국과 다르게 도는 것도 걸림돌이다. 단임제 5년 임기의 반환점을 넘긴 박 대통령과 달리 아베 총리는 2018년까지 집권이 보장돼 여유가 있다. 또 내년 1월 일본의 정기국회가 열리면 보수 정치인이 목소리를 내기 시작하고 3월 역사 교과서, 4월 야스쿠니신사 춘계대예제 참배 등 갈등 사이클도 다시 가동된다.



조숭호 shcho@donga.com·우경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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日, 유네스코에 일본인 파견추진…기록유산 등재에 영향력 확대

2014년 12월 중국 장쑤(江蘇)성 난징(南京)시에 있는 난징대학살기념관에서 열린 추모식에서 의장대가 화환을 들고 이동하는 모습.(교도=연합뉴스 자료사진)
2014년 12월 중국 장쑤(江蘇)성 난징(南京)시에 있는 난징대학살기념관에서 열린 추모식에서 의장대가 화환을 들고 이동하는 모습.(교도=연합뉴스 자료사진)

난징학살 세계기록유산 등재에 충격…위안부자료 등재 저지 나설듯

(도쿄=연합뉴스) 이세원 특파원 = 난징(南京)대학살 자료가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돼 충격을 받은 일본이 유네스코에서의 영향력 확대에 나서고 있다.

일본 정부는 유네스코 아시아·태평양지역위원회에 일본인 위원을 파견하기로 방침을 굳혔다고 요미우리(讀賣)신문이 31일 보도했다.


이 보도에 따르면 일본 정부는 지역위원회에 자국민 위원을 둠으로써 세계기록유산 등록 심사 과정에서 발언권을 확대하겠다는 구상을 하는 것으로 보인다.


일본 정부는 자신들의 반대에도 중국이 신청한 난징대학살 관련 자료가 최근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된 것을 계기로 이런 계획을 추진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번에 일본군 위안부 관련 자료는 등재되지 않았으나 중국이 한국을 비롯한 다른 피해 국가와 공조해 재신청할 수 있음을 시사했다.

일본은 위안부 자료가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되는 것을 차단하는 데 주력할 것으로 예상된다.


일본 정부는 지역위원회에 파견한 자국 위원을 세계기록유산 심사에서 자국의 의사를 관철하는 창구로 활용할 것으로 보인다.



유네스코가 선정하는 기록유산은 세계, 지역, 국내 등 3가지 종류가 있으며 이들은 각각의 위원회에서 결정된다.


요미우리신문은 국제자문위원회와 지역위원회의 위원들은 활발하게 정보를 교환하며 서로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으로 여겨진다고 전했다.

일본 정부의 한 고위 관료는 난징대학살 자료가 세계기록유산에 등록된 것에 관해 "중국이 아시아·태평양지역위원회를 통해 국제자문위원회에 공세를 폈다"는 견해를 밝히기도 했다.


세계기록유산은 14명으로 구성된 국제자문위원회가 심사해 이리나 보코바 유네스코 사무총장에게 등록을 권고한다.

그러나 일본이 자국민을 위원으로 파견하겠다고 신청해도 수용될지 명확하지 않다고 요미우리는 전했다.

현재 10명이 활동하는 아시아·태평양지역위원회 위원은 숫자의 상한이 없다.


지역위원회는 2012년 5월 일본에 위원을 파견할 수 있는지 의사를 타진했으며 당시 일본은 자국에서는 지역기록유산에 대한 관심이 적다며 파견을 보류했다.

중국은 의장과 사무국장 등 지역위원회 임원회에서 4자리를 차지하고 있으며 한국에서 파견된 1명은 부의장을 맡고 있다.

일본 정부는 다음 달 5∼7일 프랑스 파리에서 열리는 유네스코 총회에 하세 히로시(馳浩) 문부과학상을 파견해 유네스코 세계 기록유산 제도의 변경을 요구할 계획이다.하세 문부상은 파리 방문 중에 보코바 유네스코 사무총장과도 회담도 추진한다.


sewonlee@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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慰安婦問題、日韓の歴史「認識」はなぜ対立する? 木村幹・神戸大教授に聞く

きむら・かん 1966年大阪府生まれ。神戸大学大学院国際協力研究科教授。専門は比較政治学、朝鮮半島地域研究。著書に『朝鮮半島をどう見るか』、『韓国における「権威主義的」体制の成立』(サントリー学芸賞)、『朝鮮/韓国ナショナリズムと「小国」意識』(アジア・太平洋賞)、『徹底検証 韓国論の通説・俗説』(共著)、『日韓歴史認識問題とは何か』(吉野作造賞)など。
きむら・かん 1966年大阪府生まれ。神戸大学大学院国際協力研究科教授。専門は比較政治学、朝鮮半島地域研究。著書に『朝鮮半島をどう見るか』、『韓国における「権威主義的」体制の成立』(サントリー学芸賞)、『朝鮮/韓国ナショナリズムと「小国」意識』(アジア・太平洋賞)、『徹底検証 韓国論の通説・俗説』(共著)、『日韓歴史認識問題とは何か』(吉野作造賞)など。

安倍晋三首相と韓国の朴槿恵大統領の間では初めてとなる日韓首脳会談が、11月2日にソウルで開かれることになった。

ここ数年、第2次世界大戦中の旧日本軍の従軍慰安婦問題など、主に1945年以前の歴史を巡る認識(歴史認識)での対立が目立つが、そもそも歴史「認識」問題とは何なのか。両国の認識の違いが表面化した背景には何があり、今後、隣国との関係はどうなっていくのか。前回に続き、木村幹・神戸大大学院教授を招き、大学生向けに講義してもらった。

初回の「日韓が対立する歴史「認識」問題って何?」では、50年間の両国がたどってきた経済力や国際関係からみた日韓関係を整理し、80年代の教科書問題を例にとって考えた。今回は、90年代以降、日韓間で特に大きな問題となってきた、旧日本軍の従軍慰安婦問題に焦点を当てる。

■戦後補償問題、そして女性問題としての慰安婦問題

では次のケーススタディーとして慰安婦問題を考えます。これも最近ではよく知られていますが、2つの性格があります。

1つは戦後補償問題です。これに対し、日韓ですごく温度差があるんですけど、そうではなく女性の人権問題だという視点が特に韓国にはあります。これが2つ目です。韓国の慰安婦の支援運動の1つの中心となっているのは、女性問題団体、フェミニストの人なんです。これも、ちょうど冷戦が終わっていく時期に突き当たります。

僕が韓国へ行き来し始めた時はまだ、ソウルに行く飛行機に乗ると脂ぎった親父だらけだった時代でした。「キーセン観光」と当時呼ばれたんですけど、要するに買春観光だったんですよ。ホテルに男性が一人で泊まると必ず「寂しくないですか」という、とても怪しい電話がかかってくるような時代でした。女性からすると、そもそも売買春自体が問題ですし、日本人が金で韓国の女性の人権を踏みにじっていることになる。それって従軍慰安婦と同じじゃないのという話になります。

さて、戦後補償問題としての慰安婦問題は90年代になって本格的に登場します。とはいえ、80年代以前、慰安婦問題は韓国人の誰にも知られていなかったか、といえばそうではありません。例えばこれは1965年の『サルビン河に夕日が落ちる』という映画ですが、第2次世界大戦中の朝鮮人軍人と慰安婦の人たちが恋に落ちるお話になっています。当時の人たちは戦場を描く時、そこに慰安婦がいた、というのをある程度当然のこととして話していました。特に戦場で韓国語が通じる人は慰安婦しかいなかったから、むしろ彼らには強く記憶に残っている。

ではなぜ大問題にならなかったかというと、他の問題とは別の独立した問題だと考えられていなかったからです。戦時中に日本の戦争に動員された人はたくさん種類がありましたから、慰安婦も「その中の一つ」という程度の理解だった。でも80年代になると海外で元慰安婦の韓国人のカミングアウトが起こり、韓国内でも少しずつ、慰安婦問題が注目されていきます。そしてここでこの動きが民主化とつながります。韓国の民主化は1987年。運動の中でいろんな市民団体が出てくる中で、女性運動団体が慰安婦問題を他から独立した問題として取り上げます。こうして、1990年には挺身隊対策協議会、いわゆる挺対協ができます。

とはいえこの段階ではまだ今とは状況は全く違っていました。なぜなら、1965年の日韓基本条約で日韓間の全ての問題を解決した、という理解を日韓両国政府が共有していたからです。背景には民主化以前の韓国では、政府に自らの要求をつきつけること自体が難しかった、ということがありました。でも韓国が民主化されると、そもそも「自分たちはまともな補償を受けていない」と主張する人たちが増えていきます。ちなみに当初の運動で中心になったのは、元慰安婦の人たちではなく、日本軍の軍人・軍属として動員された人やその遺族の人たちでした。

それでも韓国政府はまだ動きませんでした。状況が変わるきっかけとなったのは、朝日新聞の報道でした。といっても、最近話題の「吉田証言」にかかわるものではありません。圧倒的にインパクトがあったのは、吉見義明・中央大学教授へのインタビューに基づいて行われた「慰安婦 軍関与示す資料」と題する報道です。1992年1月11日のことでした。

背景には当時の日本政府が、慰安婦問題に日本政府の関与が「全くなかった」と言い続けていたことでした。しかしそれが違ったということになり、日本政府は首相自らの謝罪に追い込まれます。韓国政府も「日韓基本条約で解決済み」という立場でしたので、日本側はどんなに謝っても韓国から賠償請求されることはないと思っていたことが、簡単に謝罪に踏み切れた理由です。石原信雄・官房副長官(当時)の言葉を借りれば「ざっくりと謝っておきましょう」ということになります。つまり、この報道の直後に日韓首脳会談があり、1月15日から17日の3日間、宮沢喜一首相(当時)は少なくとも13回も(これは毎日新聞に出ている謝罪の数を合計したものなのですが) 謝りました。「遺憾の意」「大変申し訳ない」「心が痛む」という言葉を連発します。

そもそも本来、この首脳会談では慰安婦問題はメインの議題ではありませんでした。当時まだ韓国は日本経済に依存する部分が大きく、ものすごい対日赤字を抱えていました。だからこの問題をとにかく「なんとかしてください」というのが韓国政府や世論の最大の関心事でした。日本はそこに飛び火しないように「ざっくり」謝って、問題を解決しようとしたわけです。

ですが、日本の総理大臣がひたすら謝り続けたこともあり、運動はこれまでにない注目をあびることになりました。こうして韓国も何もしないわけにいかなくなりました。1992年1月21日に突然「法的補償を求める」と方針転換することになります。しかもこの後の韓国政府は「問題は日本にあるので、日本側がまず解決案を作るべきだ」「その解決案にイエスかノーを決める権利は韓国側にある」という外交を展開します。

1993年8月4日、慰安婦問題について談話を発表する河野洋平・官房長官
1993年8月4日、慰安婦問題について談話を発表する河野洋平・官房長官

「真相を究明してください」と要求された日本側が出したのが、有名な1993年の河野談話でした。この時点で、韓国では盧泰愚(ノ・テウ)政権が金泳三(キム・ヨンサム)政権に変わっていました。金泳三政権は、最初「物理的補償は要求しない」という言葉を使うんです。要するにお金を一切要求しない、真相究明だけしてくださいと言うわけです。そしてその真相究明の最大のポイントは「『強制連行』を認めろ」ということでした。宮沢政権と金泳三政権は、ここでこの問題については、お互いの政権の間に解決しよう、と約束します。でも、今度は日本の宮沢政権が崩壊に向かいます。

さて、この宮沢政権下で慰安婦問題に取り組んだ河野さんや石原さんはなんとかこの政権で問題を解決しようとしたし、またできると思っていた。この背後には、この後韓国政府が期待するような慰安婦の強制連行を示す資料がたくさん出てくるはずだ、という予想がありました。でも、実際にはこれがいくら調べても出てこない。ここで日本政府は困ってしまいます。韓国側ではもう「強制連行された」という証言が出ていましたから、「そんなはずがない、日本政府は隠してるんでしょう」という話になるわけです。そこで突如、この部分を補うために宮沢政権が崩壊する直前に元慰安婦へのヒアリング調査を実施します。この結果、河野談話が出るわけです。因みに河野談話を発表する時の記者会見は、同時に河野さんの官房長官として最後の記者会見でした。いかに当時の政府が無理を押してこの談話を出したかがわかります。

ちなみに余談ですが、安倍首相や彼に近い人たちが、河野談話に非常に批判的な理由の1つがこの経緯なんですよね。自民党の一番リベラルな派閥「宏池会」が、党内の右側の人たちから全く合意を取らずに突っ走った、「宏池会」と対立する人たちはそう考えた。結局、こうして河野談話は自民党内でしこりを残すことにもなりました。でも、ここまで無理した理由もまた明確でした。「これさえやったら慰安婦問題は終わる」と韓国政府は約束していた。だから宮沢政権は無理をした。だけど、交渉相手だった金泳三政権は後に態度を変えてしまいます。

1995年6月23日、沖縄戦集結50年式典で挨拶する村山富市首相
1995年6月23日、沖縄戦集結50年式典で挨拶する村山富市首相

このあと細川、羽田の両首相を挟んで、社会党の委員長を擁立した村山富市政権ができます。自民党・社会党・さきがけの3党連立政権です、村山首相は安全保障など様々な面で自民党に譲ったんですけど、アジアに対する謝罪の問題で「ここだけは通したい」というのを自分の所信として持っていたんですね。慰安婦問題では補償に準じる措置として、有名な「アジア女性基金」を作ります。ポイントは、韓国側の依頼によって作ったわけではないということ。日本側は河野談話でいったん終わらせたはずでした。でも村山さんが非常に積極的だったので、自ら案を出します。当初は韓国の金泳三政府もこれを歓迎する雰囲気でした。自分が要求を放棄した物理的補償に近いものを、日本側が進んで出す、というのですから当然です。

ともあれこうして韓国内でも日本国内でも議論が始まります。連立政権で社会党は少数党ですが突っ走ります。すると、先ほどの河野談話と同じで、自民党内で反発が起こります。渡辺美智雄・元外相が「日韓併合条約は円満につくられた国際的条約で、法律的には『植民地支配』にあたらない」と言ったり(1995年6月)、のちに首相になる橋本龍太郎さんが「戦争の目的、性格を特定するのは容易ではなく断定的に言うのは困難だ」と答弁(1996年1月)したりして、韓国で「妄言」と問題視されます。日本の政治家の発言が韓国で問題視された「妄言事件」が圧倒的に多いのは、実は歴史認識問題に最も積極的だった村山政権です。

村山首相自身も1995年10月、「韓国併合は合法なのか」と国会で質問され「日韓併合条約は法的に有効に締結された」と発言をします。これに対して韓国で猛反発が起こります。すると金泳三大統領も「アジア女性基金のお金を受け取れません」と発言し、従来の立場を翻してこの問題で法的賠償を要求するようになります。日本からすると、裏切られた形になりました。こうなってしまう一つの理由は、慰安婦問題では常に日本側だけが解決案を作り、韓国政府がこれにイエス、ノーを言う権利がある、という状況で議論が進んでいくことにあります。たとえば両方が一緒に案を作っていけばいいのですが、河野談話でもアジア女性基金でもそうなりませんでした。

さて、ここでお気づきでしょうか。ここまで実は日本における右側からの動きはあまり出てきませんでした。なぜなら80年代以降90年代半ばまでの歴史認識の動きは、どちらかといえばリベラル勢力がこの問題に積極的に対応し、でもこれが上手く処理できないことが一因だったからです。彼らは彼らなりに善意で一生懸命やっているんだけど韓国側と上手くかみ合わず、かえって議論が混乱するという状態が続いていました。

2006年8月15日、靖国神社に参拝する小泉純一郎首相
2006年8月15日、靖国神社に参拝する小泉純一郎首相

しかし、ここから日本側からも「韓国に対して積極的に意見を言うべきだ」という動きが出てきます。最初は1996年、一部の研究者やこの問題に関心を持つ人々を中心に「新しい教科書をつくる会」ができます。学界でも言論界でも財界でもメインストリームでなく、当時の自民党を中心とするシステムに入っていない人たちから始まりました。だけどそれが力を持っていくと、政治家がこれを受け入れます。たとえば、小泉純一郎さんは本当は靖国神社にあまり関心がなかったと言われています。でも靖国神社に対する世論の関心が高まる中、靖国参拝するわけです。メインストリームの外側にいる右側の人たちの運動で何かしらがはじまり、それが大きく成功すると、「しめた」とばかりに自民党政権が取り入れる。これが小泉政権から今まで続いている一つの流れです。

そこには、右側の人たちの、韓国や中国に対する反発から始まり、その韓国や中国に協力しているように「(彼らには)見える」村山政権や宮沢政権、さらには自民党内部で「保守本流」とまで言われた党内主流派への批判がありました。それは自民党システムから排除された右側の人々による自民党主流派批判、エリート批判でもあったことになります。だけど、やがて自民党が政権に復帰し、彼らのメッセージを政府が取り込んでいくと、右側からの動きの中に自民党批判やエリート批判の部分が影を潜めていく。中国や韓国への批判だけが残り、むしろそれが政権維持のロジックにさえ使われるようになる。

こうして見ると時々の世論も重要だ、ということがわかります。例えば、軍事政権時代には韓国政府の対日姿勢は安定していました。その一つの理由は軍事政権は、世論を気にする必要がないからです。だけど、民主化すると世論を気にするようになり、その中で慰安婦問題への関心が高まってくると、約束を翻してしまう。ただ、考えたら日本政府にも似たところがないわけじゃありません。「つくる会」のグループの発言力がどんどん強くなって、小渕恵三首相が1998年に日韓首脳会談で交わしたような「日韓で協力を深めよう」という誓約は省みられなくなって、世論に近い、強硬な方向にシフトしていくことになります。

まとめると、とても難しいんだけどこんな感じになります。単に交流が増えるだけでは解決しない。民主主義だから、国民の感情は政策に影響を与えるのは当たり前で、それ自身も決して悪いことじゃない。しかもグローバル化でお互いの重要性は落ちているから、相手の批判はしやすくなっている。「日韓関係は重要です」と言っても「なんで重要なの?」という質問が返ってくる。そして、その答えは意外に難しい。「インドや東南アジアでビジネスができれば、韓国なんてどうでもいい」という人が多くなり、財界で汗をかいてくれる人もいない。「中国はさすがに重要だけど、韓国は別にいいんじゃないの」という話でいいのか、それをどうするのか、考えていかないといけない気がします。

ミニ講義後、木村教授は学生の質問に答えた。

■大きく影を落とす「1965年の問題」

――日韓基本条約で締結されたことがひっくり返ってるということだと思うんですけど、その日韓基本条約自体の結び方も、なんでお互い齟齬がある状況で結んでしまったんでしょうか。

1965年の韓国は、一番大きな問題は貿易赤字なんですよ。1950年代年代のある時期なんか、輸入が輸出の10倍あるんですからね。貿易赤字どころか、いつ破綻してもおかしくない状態。それをアメリカの援助で支えてたんだけど、1964~65年はベトナム戦争が激化していく時期。アメリカは韓国からベトナムにどんどんお金を移していた。だから今すぐお金がほしいというのが朴正熙政権当時の状態。アメリカも「日本にもらえ」と後押ししたんですね。さらに朴正熙政権は軍事政権で正統性がなかった。1963年に大統領選挙をするんだけど、僅差でギリギリ勝つ選挙だったんですよ。なんとか経済復興させたくて、日本に譲ったわけね。この時代は冷戦で、経済力は北朝鮮のほうが韓国より若干上回っている状態。韓国政府も日本政府も危機感があったんですね。

ドイツは分断されて、フランスや周辺国に認めてもらえないと国連にもEUにもNATOにも加盟できない状態だった。だからドイツは譲るべき理由があったし、仕方ないとみんな思った。でも日本の場合、45年と65年の間に20年もあって、戦争に負けた国がもう復興している。いつの間にか勝者と敗者が入れ替わったような感じになりました。今の日朝の問題でも、もし今、条約を結ぶなら拉致や援助の問題がメインになって、過去の問題はうやむやになるでしょう。同じことです。結局、人間には「過去」より「現在」の方が重要ですからね。

右側の人たちはよく、日本の外交はいつも屈辱的で譲歩ばかりしてると言うけど、対アジア外交に関して言うと、少なくとも法律的には中国には賠償金を払ってないし、韓国に払ったお金も「経済協力金」という名目でした。植民地支配していた側が金を出して「経済協力だ」と言われたら、屈辱的ですよね。でも、韓国はそれに反発できない状態だったんです。そんな思いが韓国人にあるので、日韓基本条約はいずれ改正されないといけないと思っている。韓国が力をつけてきて、日本が重要でなくなってくると、言いたいことが皆言えるようになってくる。

実は、過去の問題の出発点は、1945年の問題と別に、1965年の解決の仕方でやはり不満を残した。実は本当に大きいのは45年以前じゃなくて、65年なんです。だから結局、日韓基本条約の解釈の問題に全部集中するわけです。徴用工の問題もそう。

――お話を伺ってると、慰安婦問題などで、市民運動の考え方を政治家が受け入れる風潮もあるみたいですけど、国民とか市民の受け止め方にはマスコミが作用していて、それを変える必要があると思うんですが。

市民運動の側でも、韓国と何ができるのかという話をちょっと真面目に考えないといけないですよね。たとえばドイツが原発をやめられるのはフランスから電気が来るからで、隣の国としかできないことはやっぱりある。いろんな知恵を出さないと、ネットでいっぱい出ている「韓国なんか重要じゃない」という議論に対して誰もちゃんと答えられない。ある意味、日韓関係を改善したい人にとってはすごく深刻だと思いますよ。

――世論が変わっていっても、政権側は「解決済み」という態度じゃないですか。日本としてのプライドを守ろうとしている部分があると思うんですよ。そういう部分は世論が変わっていくことで変えられるものなんですか。

それは変えられるんじゃないですかね。条約の例外を執行しているケースはいくつかあるんですよ。例えば、ほとんど知られていないけど、在日韓国・朝鮮人の軍人と軍属。日韓基本条約の交渉当時も当然議論したけど、韓国籍でない朝鮮籍の人に払っていないのは不公平だからと、2001年から在日永住外国人、つまり、在日韓国・朝鮮人や台湾人の元日本人軍人・軍属に戦没者遺族へ260万円、戦傷者本人へは見舞金・老後生活設計支援特別給付金として400万円を支払っています。でも、慰安婦問題は、みんなが過度に注目しているから役所も表だって動けない。日本政府は、一旦崩すと例外が際限なく出てくるんじゃないかと恐れている。文化財の問題も、どこかで線を引かないと延々と議論が続いて、日韓関係が悪化すると考えているんですね。

実は日本と韓国の関係は世界的にも興味深いケースです。昔の植民地と宗主国の間で、宗主国が有利な条約はたくさんあるけど、韓国が先進国になり、第2次世界大戦以前の旧宗主国と旧植民地の関係がほぼ平行になった最初の事例になりました。だからこそ韓国との問題は中国にも、インドネシア、フィリピンにも波及する。日韓基本条約のような、古い時代に作られた条約やそれに支えられた国際秩序を巡るかつての植民地諸国の不満をどう解決するか。実はこれ世界の誰もまだ深刻に直面したことのない問題なんですね。

もう一つ、運動団体でなく、本当の被害者は何を求めているのかも大事です。たとえば僕は最近、韓国の元軍人・軍属の遺族に聞き取り調査しているんだけど、「結局何がほしいんですか」と聞くと、「とにかくうちのお父さんが死んだ場所がどこなのか教えてほしい」とか「うちのお父さんがこうして死んだという記念のものを残してほしい」という話なんかが出てきたりする。「遺骨を捜してくれ」なんていうのもよくある答え。確かに太平洋戦争中に死んだ朝鮮人軍人・軍属を祈念した施設は靖国神社にも千鳥ヶ淵にもない。靖国神社に行け、という人もいるかも知れませんが、神道を信じていない彼らに神社に行け、というのはやはり無理があります。ここはもう法律や条約の問題じゃない。でも、例えば祈念碑一つ作るだけで、だいぶ状況は変わるんじゃないかと思うんですよね。

慰安婦の人たちも同じところがあって、どうやって相手の尊厳に配慮するのか。市民運動団体にフィルターされて、個人の意見が見えにくくなっている部分もあるけど、個々の元慰安婦の人たちはそれぞれ立場も違うし、意見も違う。

――当事者の人たちでもあと数十年とかで亡くなってしまうじゃないですか。そしたら、このままだんだん見えなくなってよくわからない状態になってくる。

そうだよね。だから死んだら解決するという人もいるけど、実際には「日本が謝らなかった」という事実だけが残るだけで、永遠に解決しないということになるだろうと思います。ただ、逆に言えば、当事者がいる間こそ、当事者全員に話を聞いて、こまめに対応することもできる。実は、アジア女性基金の解散した今でも、日本政府は元慰安婦へのフォローアップ事業をずっとやっている。あれを拡大するのも一案かも知れません。

――イギリスとフランスは歴史的にずっと戦争してて、でも今なんだかんだでまあお互い仲悪いよね、ぐらいな間柄になってるわけじゃないですか。この先100年、200年を考えたら、日韓もこのままうやむやにすることってできないんですかね。

そこはなんとも言いがたいですよね。ただ、歴史認識問題で「台湾と韓国は違う」とか、「サイパンの人はあまり日本に敵対的な感情を持ってない」と言われますけど、台湾は日本が出て行った後に外省人(中国大陸出身者)の支配を受けていたり、サイパンはアメリカの植民地にもう1回戻ったりしている。イギリスとフランスは2回、世界大戦で協力して戦争したのが大きい。日韓はやっぱり、どうしても第2次世界大戦を起点に語らざるを得ない。今の状態で盛り上がってる以上、うやむやにはならないですよ。だからうやむやにするにしても、被害者の人たちにどうするのかという問題と、日韓関係を維持するためにどうクールダウンするかが、重要だし両者は分けて考えたほうがいいかもしれない。冷静に議論できないと解決方法も見つかりませんからね。

そもそも25年間、歴史認識問題はずっと火が消えていない。領土問題はともかく、歴史的な問題はもっとアカデミックに議論できるはずなんだけど、もはやそれさえできなくなっていること自体が問題だと思います。

――韓国は政権が代わるたびに、最初は日本に対して「未来志向で」と言っておきながら、後半に入ると手のひらを返して日本批判を強める傾向がある。5年の任期の後半に支持率が大きく下がる構造的な問題でもあると思うんですが、朴槿恵政権と金大中(キム・デジュン)政権はそれがなかったように思います。なぜですか?

それは簡単で、政権が保守的なのか進歩的なのかが大きいですよ。特に慰安婦問題をやってる人たちは、もともと民主化運動から出てきた人たちなので、彼女らの運動は日本批判だけではなくて、政権批判の要素をかなり含んでいるんです。だから保守系政権の時のほうが政権への攻撃が強くなるんですよ。盧泰愚、金泳三、李明博政権のときは、ものすごく強い攻撃がかかって、政権は結果として屈服する。李明博政権では訴訟まで起こされて、「慰安婦問題で政府が動かないのは憲法違反である」という判決が確定した。それに対して、特に金大中さんと進歩系の団体は近いので、運動団体は味方を攻めにくいし、内側から政府を動かすこともできた。ただ、同じ進歩系の盧武鉉(ノ・ムヒョン)政権の時には、盧武鉉さんの個性と、小泉首相とうまくいかなかったこと、そして島根県が制定した「竹島の日」条例が大きかった。

基本的に保守の朴槿恵政権は、最初から日本に対して強硬策を取っているので、支持率が落ちてもこれ以上の日本叩きは難しい。なんで最初からそうなったのかは、やっぱり最高裁判所の判決が出たからでしょうね。2012年以降、韓国の最高裁と憲法裁判所が戦後補償問題について「日韓基本条約で解決済みでない」という見解を出しているから、行政府は司法に逆らえないんだよね。歴史認識が違うという公式見解が政府ではなく裁判所から出ている。実は本当にややこしいのはここかもしれないね。

――少し気になったんですけど、その理屈でいくと、今後の韓国の大統領は全部反日姿勢を頭から取ってくるってことになりませんか。

その可能性が高いでしょうね、何もしなければ。ここ25年で、日韓基本条約に関する公式見解が日韓で分かれてしまった。するとどうなるか。もう日韓両国だけで議論することは難しい。日韓基本条約の付属協定には「もめた時には仲裁委員会を作る」と書いてある。ただ、両国から仲裁委員が出て、その2人の仲裁委員が第3国から3人目の仲裁委員を同意の上で選ぶ手続きですけど、一致するはずがないので選べない。それに、万が一負けるとえらいことだから、役所は絶対そのリスクは取らない。領土問題で韓国が国際司法裁判所(ICJ)に行かない理由もそこなんです。

ではどうするか。セカンドトラックとして、擬似仲裁委員会や擬似ICJを作る。僕は似たようなものに関わった経験があるんです。「韓国併合は合法か違法か」という議論で、実は2000年から2001年に韓国政府がお金を出して、世界の国際法学者と歴史学者を集めて共同シンポジウムを3回やりました。結果的にその議論は韓国政府にとって不利な形で終わり、その後韓国政府はこの問題をあまり取り上げないようになりました。日韓基本条約の解釈も、どういう妥協策があり得るのか、ゴールが見えなくなっている状態です。いずれにせよ最終的には国際社会の中で決着をつけるしかない。国際法の権威の人をアメリカやヨーロッパから呼んで、専門的に議論したらいいんですよ。

――この前「日米韓でエネルギー問題を考える」というフォーラムに参加してきたんですけど、日米韓でエネルギー問題を解決するとき、日韓の歴史問題がネックになると思うんですよ。歴史問題を解決して、そのエネルギー問題に100%協力できるかどうかというところに、アメリカが入ることで解消されるということもありうるんですか。

それは両方でしょうね。歴史認識問題と違うイシューで、日韓の意見が実は一致してるけど、歴史認識問題があるから外交的に動けない時がある。そんな時には後ろから背中を押してもらうかたちで他国が入ってもらうのはすごく意味がある。だけど、日韓の利益が対立している時にアメリカが間に入ると、逆にアメリカをそこに巻き込むだけの効果しか持たない。日韓はエネルギーの輸入国で、同じシーレーンに依存していている。だからこそ、協力することによって得られる利益はものすごくあるんですね。ただ現状は、歴史認識問題で、アメリカを戦場にしてしまっている。そうするとアメリカにも世論があるので、アメリカ国内で嫌気がさしてしまいます。安全保障に関しても、中国に関する考え方が日本とアメリカと韓国で全然違うから、アメリカが間に入るとむしろ混乱するかな、と思う時があります。

――安保法案が通った時に、近隣諸国の中で韓国と中国だけが反対を表明したじゃないですか。韓国はなんで反対するんですかね。

中国はターゲットだから当然わかりますよね。だけど同じ同盟にあるはずの韓国がなぜ反対するかというと、イメージとして朝鮮半島に自衛隊がやってくることへの拒否感なんですよね。朝鮮半島有事が起こった時に自衛隊が救出作戦をするのは、国民感情的に嫌なんですよ。日中韓で協力できることとしてよく挙げられるのが災害救援活動だけど、韓国人は、中国人民解放軍と自衛隊が韓国に上陸するところも絶対見たくないと思っている。

もう一つは、韓国は中国と軍事的に対抗したくないので、日中の対立に巻き込まれたくないと思っているんですよ。韓国の政府や世論は、アメリカと中国が基本的に協調関係にあると思ってます。日本人は尖閣問題があるからアメリカにもっと頑張ってほしいと思ってるでしょう? そういう日本は韓国から見ると、米中対立を煽っていると見えるんですよ。

――以前、韓国人の特派員を3人呼んで座談会をしたんですけど、彼らは朝鮮戦争でアメリカと組んで中国や北朝鮮と戦ったし、ベトナム戦争でアメリカ軍と南ベトナムを支援するという集団安全保障もやっている。だけど、やっぱり豊臣秀吉だったり、1910年代の記憶が怖いと言いました。

米韓関係を重要視する韓国の政策担当者は、その世論が刺激されることが嫌なんだよね。アメリカと韓国の関係はスムーズなのに、日本が入ってくるとややこしくなるという考え。もう一つは、正しいかどうかはともかく、長い目で見れば日本も韓国にとって脅威ですから、いろんな理屈をつけて防ぎたい思いもあります。それは別に不思議なことでもないと思います。とにかく自衛隊、日本軍は嫌という気持ちはわかりますね。日本人だってアメリカ軍はいいけど中国軍は嫌だっていう人、いるわけだし。

学生は氏田あずさ(慶応義塾大学)、小室翔子、吉野友梨(以上、東京学芸大学)、鶴賀慎太郎(成蹊大学)が出席しまし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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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내 ‘한류(韓流)’는 ‘한류(寒流)’...NHK,한국 드라마 방송 완전 중단

2003년 <겨울연가>를 방송해 일본 내 ‘한류(韓流)’의 결정적인 계기를 마련한 NHK가 최근 한국 드라마에 대한 방송을 완전히 중단했다. 일본 내 지상파 민방들도 한국 드라마의 방송을 잇따라 중단하는 등 ‘한류’가 ‘한류(寒流)’로 전락하고 있다는 지적까지 나오고 있다.


NHK가 2003년 4월 <겨울연가>를 위성방송(BS) 전파를 통해 내보낸 것을 시작으로 지난 8월까지 위성방송과 지상파방송에서 한국 드라마를 계속 방송해 왔으나, 지난 8월 <기황후>를 끝으로 더 이상 한국 드라마를 내보내지 않고 있다.


이와 관련, NHK 측은 “현 시점에서는 (한국 드라마에 대한) 방송예정은 없다”고 밝혔다고 11일 도쿄신문이 보도했다.


NHK는 일본 안에서의 한류에 불을 당기는 역할을 했다. NHK는 2003년 4월부터 9월까지 위성방송을 통해 <겨울연가>를 방송한데 이어 이듬해 4월부터 8월까지 지상파에서도 같은 프로그램을 내보내면서 한류를 일으켰다.


이후 <아름다운 날들>, <올인>, <대장금>, <첫사랑>, <국희>, <태왕사신기>, <이산>, <마의> 등의 드라마를 잇따라 위성방송과 지상파 방송을 통해 소개해왔다. 


도쿄(東京)에 있는 5개 민방의 지상파들도 한국 드라마의 방송을 대부분 중단했다. 지금은 평일 오전 TV도쿄의 전파를 타고 있는 <야경꾼일지> 1개만 남아 있다.


NHK 등이 한국 드라마를 더 이상 방송하지 않기로 한 배경과 관련, 전문가들 사이에서는 한국 드라마 자체의 문제점을 지적하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대중문화 분야를 취재해온 언론인 후루야 마사유키(古家正亨)는 “2005년 이후 한류가 일본과 중국에서 붐을 이루기 시작하면서 해외를 의식한 스토리와 스타를 채용한 작품이 늘어났다”면서 “<겨울연가>에서 ‘첫사랑’ 등의 아련한 추억을 느껴온 일본인 한류팬 들에게는 (새로 등장한 드라마에서) 뭔가 부족함을 느끼게 된다”고 분석했다.


일각에서는 <겨울연가>의 배용준을 이을 수 있는 새로운 스타가 떠오르지 않는 점을 지적하기도 한다. 작가 도야노 가오루(都與野かおる)는 “한국에서는 젊은 배우가 인기를 얻지만, 팬의 연령층이 높은 일본인에게는 반향이 없다”고 지적했다.


한·일 관계의 악화 등에 따른 ‘혐한’ 분위기도 일본에서 한국 드라마가 자취를 감춰가는 요인이라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2011년 민방인 후지TV 앞에서 이 방송국의 프로그램 편성이 한류에 편중돼 있다는 것을 지적하는 항위 시위가 일어나기도 했다.


도쿄신문은 “2012년 8월 이명박 대통령이 독도를 방문한 이후 일본 안에서 혐한 분위기가 갑자기 확산됐다”면서 “후지TV가 같은 달 한국 드라마의 방송을 중단했고, TBS는 2014년 3월부터 한국 드라마에 대한 방송을 하지 않고 있다”고 전했다.


한편, 일본의 민영 위성방송인 BS와 CS에서는 매월 200편 이상의 한국 드라마가 방송되고 있다고 도쿄신문은 덧붙였다. 그러나 BS와 CS는 시청차의 폭이 지상파에 비해 좁다.


<도쿄|윤희일 특파원 yhi@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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中 위안부기록 등재 실패에 "한국이 다시 준비중" 기대(종합)

난징대학살 문건 등재엔 "일본 과거사 반성 촉구 계기" 


(상하이=연합뉴스) 정주호 특파원 = 중국이 제출한 난징(南京)대학살 문건이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된 데 대해 중국은 "침략전쟁의 잔혹성을 인식하고 역사를 되새기는 계기를 마련해줬다"며 환영의 뜻을 표명했다. 


하지만, 함께 등재를 신청한 일본군 위안부 자료가 등재 목록에 포함되지 않

자 아쉬움을 나타냈다. 


관영 신화통신은 10일 유네스코가 난징대학살 문건을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했다는 소식을 속보로 전한 뒤 신청 경위와 배경, 등재의 의미 등을 상세하게 풀어주는 장문의 기사를 게재했다. 


신화통신은 '기록유산 전승의 신기원을 이룩했다'는 제목의 기사를 통해 일본이 2차대전 시기 자살특공대 유서를 세계기록유산 후보에 올리는 등 역사를 왜곡하거나 은폐하려는 기도를 물리치고 등재를 성공시켰다는데 의미를 뒀다.


통신은 또 주청산(朱成山) 난징대학살 피해 기념관 관장과 인터뷰를 통해 "역사는 일종의 기록"이라며 "인류가 역사를 기록하는 목적은 현재와 미래에 다시는 역사의 잘못을 범하지 말고 평화로운 생존과 발전을 누리기 위함"이라고 강조했다는 내용을 전했다.


중국 공산당 기관매체인 인민망(人民網) 역시 난징대학살 문건이 등재에 성공했다며 이로써 중국은 이미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된 본초강목, 황제내경, 전통음악 녹음 기록 등과 함께 총 10건의 세계기록유산을 보유하게 됐다고 보도했다.


하지만, 이들 중국 언론은 일본군 위안부 관련 기록이 기록유산에는 오르지 못했다는 사실은 짤막하게 언급하며 아쉬움을 나타냈다. 

그러면서 한국이 일본군 위안부 및 강제징용 관련 문건과 자료를 세계기록유산에 등재할 것을 고려 중이라는 소식을 전하며 군 위안부 기록이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될 가능성이 여전하다고 기대감을 내비쳤다. 


중국이 신청한 난징대학살 자료는 도쿄재판소 및 난징군사법정 기록과 일본군인이 촬영한 대학살 관련 사진, 미국 선교사가 촬영한 영상 등이 포함돼 있다. 

앞서 화춘잉(華春瑩) 중국 외교부 대변인은 9일 정례 브리핑에서 "난징대학살 관련 자료의 세계기록유산 등재는 일본을 포함한 각국 국민이 침략전쟁의 잔혹성을 새롭게 인식하는 한편 역사를 되새기고 평화를 소중히 여기며 인류 존엄성을 공동 수호하는데 도움을 줄 것"이라고 말했다.


화 대변인은 "난징대학살과 위안부 강제동원은 일본 군국주의가 중국 침략전쟁 시기에 저질렀던 엄중한 범죄로 중국은 역사에 대한 책임감으로 이번에 세계기록유산 등재를 신청했다"고 밝혔다. 


화 대변인은 이어 "역사적 사실은 부인할 수 없고 역사는 왜곡과 수정을 허용치 않는다"며 "온갖 방법으로 세계기록유산 등재를 저지하려는 일본의 움직임은 또다시 역사를 직시하지 않는 잘못된 태도를 보여주고 있다"고 비판했다.


jooho@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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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美대표 친일파' 사사카와재단 이사장 "8月 아베담화는 책임회피로 일관했다"

[오늘의 세상]

데니스 블레어, 이례적 비판 "아베, 지지받을 기회 놓쳐"


일본의 대미(對美) 공공 외교를 책임지는 '사사카와(笹川) 평화재단 USA'의 데니스 블레어(68·사진) 이사장이 아베 신조(安倍晋三) 일본 총리의 지난 8월 전후(戰後) 70년 담화를 "책임 회피로 일관한 실망스러운 문서"라고 강력히 비판했다. 미 국가정보국장 출신으로 대표적인 '친일파'로 꼽히는 블레어 이사장은 아베 총리가 담화를 발표한 당일 작성한 논평을 최근 재단 홈페이지에 전격적으로 올렸다.


'사사카와 USA'는 A급 전범 용의자 출신인 사사카와 료이치(笹川良一)의 '사사카와 평화재단 재팬'이 후원해 1990년 워싱턴DC에 만든 핵심 싱크탱크로 일본 관련 세미나와 콘퍼런스를 주관하거나 후원한다. 지난 4월 말 아베 총리 방미(訪美) 때도 워싱턴 DC의 최고급 호텔에서 일본과 가까운 미국 내 여론 주도층 400명을 모아놓고 특별 강연회를 단독으로 열어 '친일 여론' 형성에 앞장섰다. 블레어 이사장은 2014년 미국인으로서는 처음으로 이사장으로 취임했었다.


블레어 이사장은 논평에서 "아베 총리가 '우리는 역사의 교훈으로부터 미래를 위한 지혜를 얻어야 한다' '무고한 사람에게 우리나라가 헤아릴 수 없는 상처와 고통을 끼쳤다'고 말했지만, 20년 전 무라야마 담화에 크게 못 미쳤다"며 "일본이 과거사를 정면으로 직시하고, 타국에 일본이 그렇게 했다는 점을 인정하는 데는 턱없이 부족했다"고 말했다.


블레어 이사장은 "아베 담화는 실망스러우며, 아베 총리에 대한 지지자를 교육하고, 다른 나라를 안심시킬 큰 기회를 놓쳤다"며 "우리는 일본의 지도자들이 일본인이 자국의 과거를 더 잘 이해하는 데 도움을 주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블레어 이사장은 올해 초 한 세미나에서 일본의 과거 악행을 언급하면서 동시에 "한국도 베트남전 때 무자비한 행동을 많이 했다"고 주장해 논란을 일으켰다. 이 때문에 일본의 이익을 대변하는 재단의 최고 책임자가 일본 총리를 직설적으로 비판한 글을 홈페이지에 올린 배경을 놓고 워싱턴 외교가에서는 다양한 분석이 나오고 있다. 일부는 재단 측이 이사장을 교체하려는 상황에서 블레어 이사장이 선수를 친 것으로 보고 있다.


[워싱턴=윤정호 특파원 jhyoon@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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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케이, 유흥수 대사 '명성황후 칼럼' 사과 요구 거부

【서울=뉴시스】박근혜 대통령을 '민비'에 비유한 산케이신문 노구치 히로유키(野口裕之) 정치부 전문위원이 작성한 칼럼.<사진출처: 산케이신문 홈페이지 캡쳐> 2015.09.15
【서울=뉴시스】박근혜 대통령을 '민비'에 비유한 산케이신문 노구치 히로유키(野口裕之) 정치부 전문위원이 작성한 칼럼.<사진출처: 산케이신문 홈페이지 캡쳐> 2015.09.15

【서울=뉴시스】이재준 기자 = 유흥수 주일 한국대사가 15일 산케이 신문 측에 박근혜 대통령을 일본 낭인에 의해 잔혹하게 시해당한 명성황후에 비유해 논란을 빚은 칼럼을 삭제하고 사과하라고 요구했다.


산케이 신문에 따르면 유흥수 대사는 이날 산케이 신문 본사를 직접 방문, 8월30일자 산케이 뉴스에 실린 노구치 히로유키(野口裕之) 정치부 전문위원의 '미중(美中) 양다리 한국이 끊지 못하는 민족의 나쁜 유산'이라는 제하 칼럼에 대해 "분노를 느끼게 하는 내용으로 박근혜 대통령과 한국 국민을 모독하고 있다"며 삭제와 사죄를 강력히 촉구했다.


또 유 대사는 노구치 전문위원이 칼럼에서 박 대통령의 중국 열병식 참석을 '사대주의'라고 폄하한 대목을 비판하면서 박 대통령이 방중을 통해 한중일 정상회의 개최에 소극적이던 중국에서 긍정적인 답변을 이끌어냈다고 강조한 것으로 신문은 전했다.


이에 대해 유 대사를 만난 구마사카 다카미쓰(熊坂隆光) 산케이신문 사장은 "기사는 기자의 자유로운 논평, 평론이기에 삭제와 사죄를 할 생각은 없다. 자유 저널리즘의 표현은 자유 사회를 구성하는 요소의 하나"라며 요청을 거부했다고 한다.


노구치는 칼럼에서 박 대통령의 전승절 열병식 참관이 내외정세 변화에 따라 사대주의 상대를 바꿔온 조선 말기를 연상시킨다며 한국이 그 때의 사대주의 DNA를 계승해 발휘하는 것이라고 비꼬았다.


아울러 조선이 사대주의 상대를 교체할 때마다 일본이 존망의 위기를 맞았다고 망발하면서 조선을 독립시키려는 일본을 오히려 청나라, 러시아와 전쟁을 벌이도록 유인했다고 왜곡했다.


또 노구치는 명성황후를 비하하는 '민비'와 비정상적인 행위를 의미하는 '도착(倒錯)'이라는 일본식 표현을 동원해 조선 말기에 박 대통령 같은 여성 권력자로서 '민비'가 있었다며 명성황후가 겪은 비운을 자세히 서술하면서 박 대통령의 불운을 암시하기도 했다.


하지만 산케이는 노구치의 칼럼이 한국 외교의 특징으로서 사대주의를 거론하고 박 대통령의 항일전쟁 70주년 기념 열병식 참관을 예로 들었을 뿐이라고 옹호했다. 노구치는 산케이 신문 내에서도 대표적인 강경 우익 보수로 꼽히는 기자로 알려졌으며 주로 한국과 중국 등 과거사 문제로 대립하는 국가에 대해 뒤틀린 논조의 칼럼을 자주 실어왔다.

yjjs@newsi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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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인사이드] 긴 잠에서 깬 日 젊은세대, '反아베' 외치다

중장년층이 대부분이던 일본의 집회 풍경이 실즈 소속의 젊은 대학생들의 참여로 바뀌고 있다.  도쿄=AP연합뉴스
중장년층이 대부분이던 일본의 집회 풍경이 실즈 소속의 젊은 대학생들의 참여로 바뀌고 있다. 도쿄=AP연합뉴스

록 공연·발랄한 구호로 무장… 反아베 외치는 日 젊은이들… 안보법 반대 선봉에 선 ‘실즈’


일본 정국에 긴장이 감돌고 있다. 아베 신조(安倍晋三) 일본 총리와 집권 자민당이 집단자위권 행사를 포함한 안보 관련 법안을 다음주 중 강행 처리할 것으로 예상되면서다. 민주당과 유신당 등 야당들은 물론 지식인, 학생, 시민사회단체들이 대대적인 저지 시위를 계획하고 있다. 양측 모두 절대 밀릴 수 없다는 각오여서 벌써부터 격렬한 충돌이 예상된다.

그동안 일본 국민들은 내각과 거대 집권당이 정책적 결정을 내리면 군말없이 이를 받아들이는 데 익숙했다. 서구의 민주주의 관점에서 보면 지나치게 복종적 국민이라는 비판도 들어왔다. 그러나 이번만큼은 상황이 다르다. 그 중심에는 일본 대학생들의 모임 ‘자유와 민주주의를 위한 학생긴급행동’(SEALDs·실즈)이 자리 잡고 있다. 


◆긴 잠에서 깬 日 젊은세대

1970년대 초반 좌파 학생운동인 ‘전공투’가 소멸한 뒤 일본 대학가에서는 학생운동이 아예 종적을 감췄다. 대학생들은 사회공동체의 문제나 정치 이슈 대신에 취업이나 취미, 연애 등 개인 관심사에 몰두했다. 1990년대 초 버블경제 붕괴 이후 이런 현상은 한층 가속화했다. 불황이 장기화되면서 청년 학생들은 움츠러들기만 했다. 해외로 유학가는 학생의 수가 격감했고, 창업에 도전하는 청년도 찾아보기 어려웠다. 대부분의 학생이 이르면 3학년 2학기부터 ‘슈카쓰’(취업활동)에 뛰어들었다. 이들의 독특한 행동 방식은 프리터(아르바이트로 생계를 이어가는 젊은이)와 오타쿠(한 분야에 열중하는 사람), 사토리(돈벌이와 출세에 관심 없는 젊은이), 초식남(연애나 결혼에 소극적인 젊은 남성) 등 수많은 신조어를 낳았다.

그런데 아베 정권이 안보 법안을 밀어붙이기 시작하면서 이런 분위기가 확 바뀌었다. 대학생들이 실즈를 조직해 ‘반안보법 반아베 투쟁’에 적극 동참하면서 일본 내 시위 양상이 눈에 띄게 달라졌다. 영국 BBC가 “일본의 젊은이는 눈을 떴다”고 평가할 정도다. 도쿄신문에 따르면 실즈의 핵심 멤버인 요코하마시립대 4학년 다키모토 미키(22)는 이런 변화에 대해 “최근 젊은이들이 시위를 하게 된 것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삶과 자기 자신까지 정부의 생각으로 바뀌어버릴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서다. 그래서 목소리를 높이고 싶다고 생각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매주 금요일 국회의사당 앞에서 열리는 안보법안 반대 집회를 알리는 실즈의 포스터.
매주 금요일 국회의사당 앞에서 열리는 안보법안 반대 집회를 알리는 실즈의 포스터.

◆안보법 반대 투쟁의 기폭제

실즈는 특정이념이나 정치이론에 경도됐던 일본의 과거 운동세력과는 여러 면에서 확연히 다르다. 정치평론가 모리타 미노루(森田實)는 “당시(1960∼70년대) 운동은 노동조합, 학생 운동조직 등 이른바 ‘프로(전문가)들의 운동이었고 지금은 일반인, 아이가 있는 주부, 여성의 운동”이라며 “프로가 아니므로 경찰과의 대립과 충돌은 없지만, 평화의식이 매우 깊어지고 넓어지는 계기가 되고 있다”고 평가했다. 

실즈는 심오한 주장을 하는 대신 시민사회의 건전한 상식을 이야기한다. 실즈는 지난 2일 인터넷에 공개한 전후 70년 선언문에서 “아시아·태평양 전쟁이 끝나고 70년의 세월이 흘렀습니다. 우리는 그중에서 20여년밖에 모릅니다. 전쟁의 시대를 살아오지 않은 우리가 모르는 일, 알 수조차 없는 일이 많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과거와 마주하는 일을 포기하지 않겠습니다. 우리는 과거를 진솔히 받아들이고 평화로운 미래를 만들어 나가겠습니다”고 밝혔다.

이들은 시위하는 모습도 머리띠를 둘러매고 헬멧을 쓰고 죽도를 휘두르며 경찰과 싸우던 전공투와는 확연히 다르다. 이들은 록밴드 공연을 방불케 할 만큼 격렬한 음악과 구호를 쏟아낸다. 기성세대가 보기에도 젊고 발랄하고 흥겹다. 이들 때문에 자칫 심각해질 수 있는 시위가 평화를 사랑하는 시민들의 축제로 변했다. 이들이 기폭제 역할을 하면서 1960∼70년대 학생운동 세대 출신의 고령자들이 대부분이었던 일본의 평화시위 현장에 주부와 샐러리맨, 고교생, 지식인 등 다양한 연령과 계층의 사람들이 대거 동참했다. 

지난 6일 실즈와 ‘안보 관련 법안에 반대하는 학자의 모임’이 도쿄 신주쿠에서 개최한 안보법 반대 집회에는 장대비에도 불구하고 약 1만2000명이 경쾌한 음악을 틀어놓고 “전쟁 반대” “날치기 반대” “헌법을 지켜라” “아베는 물러가라” 등의 구호를 외쳤다. 앞서 지난달 30일 일본 국회의사당 앞에 12만명의 대군중이 집결했던 것도 실즈의 역할이 컸다. 

 

지난 6일 비가 쏟아지는 가운데 도쿄 신주쿠 번화가에서 열린 안보법 반대집회에 1만2000여명의 시민이 모인 광경.  도쿄=AP연합뉴스
지난 6일 비가 쏟아지는 가운데 도쿄 신주쿠 번화가에서 열린 안보법 반대집회에 1만2000여명의 시민이 모인 광경. 도쿄=AP연합뉴스

 

◆아베 정권과의 일전…쉽지 않은 싸움

실즈의 등장과 함께 일본의 시민사회 세력이 ‘반아베’ ‘평화수호’ 기치 아래 결집하고 있다. 그 여세를 몰아 아베와의 일전을 벼르고 있다. 자민당 정권이 1960년 미·일 안보협약을 강행 처리했을 때 30만명 이상의 인파가 국회의사당을 둘러싸고 항의해 결국 아베 총리의 외조부인 기시 노부스케 총리가 퇴진했다. 이번에는 그 이상의 ‘피플 파워’를 보여주겠다는 입장이다. 불과 몇개월 전까지 아베의 독주를 막을 세력이 일본 내에서는 없을 것으로 보였던 것에 비하면 분명히 큰 변화다. 

하지만 실즈를 중심으로 한 시민사회의 결집이 8대 2, 또는 7대 3 정도로 아베 쪽에 절대 유리했던 싸움판을 거의 엇비슷하게 변화시켰지만 여전히 쉽지 않은 승부라는 게 전문가들의 대체적 평가다. 일본 내 평화를 염원하는 사람들이 결집하는 만큼 그 반대로 보수우익세력도 강하게 결집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실제로 중의원에서 안보법안을 강행 통과시키면서 30%대까지 곤두박질쳤던 아베 내각의 지지율이 최근 조사에서 46%(니혼게이자이 8월 30일)까지 반등했다. 지난 8일에는 아베 총리가 임기 3년의 자민당 총재 선거에 단독후보로 출마, 무투표로 연임을 확정 지어 장기집권의 길을 열었다.

아베 총리는 대규모 반대 시위에도 불구하고 오는 27일 국회 회기 말까지 안보 관련 법안을 확실히 성립시킨다는 방침이다. 현재 법안을 심의 중인 참의원 평화안전법제특별위원회는 15일 표결의 전제가 되는 중앙공청회를 연다. 자민당은 16일 특별위에서 법안을 가결해 이르면 이날 참의원 본회의에서 최종 통과시키고, 늦어도 18일까지 마무리한다는 계획이다. 야당의 저지로 참의원 통과가 어려울 경우 중의원이 통과시킨 법안을 참의원이 60일 이내에 표결하지 않으면 중의원의 출석 의원 3분의 2 이상의 찬성으로 재의결하면 법안이 성립한다는 일본 헌법상의 ‘60일 룰’까지 활용한다는 입장으로 알려졌다. 

 

◆낡은 정치 뛰어넘는 새로운 피로 성장할까

실즈는 안보법 반대 투쟁 때문에 탄생했지만 안보법 투쟁만으로 생명이 끝나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 실즈의 시야는 이미 이번 안보법 투쟁 성패를 넘어 일본 사회의 제반 문제로 확대되고 있기 때문이다. 

실즈의 핵심 멤버 3명은 지난 8일 도쿄에서 가진 강연에서 안보 법안이 통과되더라도 계속해 투쟁을 이어나갈 방침을 밝혔다. 쓰쿠바대 3학년 혼마 노부카즈는 “법안이 어떻게 되든 일본의 안보에 관한 논의는 계속될 것”이라며 “이 밖에도 사회보장 등 문제가 산적해 있다”고 말해 다양한 활동으로 확대될 가능성을 내비쳤다. 내년 여름 참의원 선거에서 야당이 각 선거구 통일 후보를 공천하도록 촉구할 방침도 내부에서 거론되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일본 정치권은 내년부터 18세로 투표연령이 낮아지는 것과 맞물려 실즈의 역할에 주목하고 있다. 민주당의 간 나오토(菅直人) 전 총리는 10일 도쿄 외국특파원협회에서 열린 기자회견에서 실즈의 향후 전망에 대해 “기존 노동조합이나 학생운동 분파적인 행보와 다르다”고 높게 평가하면서 “현존하는 야권 개편을 넘어 새로운 무브먼트와 연동할지가 포인트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시민운동의 테마를 이해하고 이를 정책으로 전개할 수 있는 인사들을 만들 수 있을 때 정부 개편을 넘어 시민 정치 세력이 형성된다”며 “내년부터 18세부터 투표할 수 있게 된다. 실즈 등을 포함해 젊은 세대의 후보자를 응원하는 활동이 나타나지 않을까 기대하고 있다”고 말했다.

김동진 기자 bluewins@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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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韓피폭자소송지원 40년' 이치바 씨 "해야할일 했을 뿐"

'한국원폭피해자들을 돕는 시민모임'의 이치바 준코(59·市場淳子) 회장이 8일 일본 최고재판소 판결이 나온 뒤 도쿄에서 기자회견을 하는 모습이다.
'한국원폭피해자들을 돕는 시민모임'의 이치바 준코(59·市場淳子) 회장이 8일 일본 최고재판소 판결이 나온 뒤 도쿄에서 기자회견을 하는 모습이다.

전화인터뷰서 '재외피폭자에 동등한 의료비 지급' 日대법판결 소회 밝혀

"건강진단·간병수당 지급까지 실현되도록 日정부와 협상할 것"

(도쿄=연합뉴스) 조준형 특파원 = "외국인(한국인)이 피해를 봤지만, (식민지 지배의) 가해자는 일본인입니다. 가해자의 나라에 살고 있는 시민으로서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일본 시민단체인 '한국원폭피해자들을 돕는 시민모임'의 이치바 준코(59·市場淳子) 회장(오사카 거주)은 9일 연합뉴스와의 통화에서 이같이 말했다. 

약 40년간 한국인 피폭자들의 소송을 지원해온 이치바 회장은 재외 피폭자에게 일본 내 피폭자와 마찬가지로 의료비 전액을 지급하라는 일본 최고재판소 판결(8일)을 유도한 숨은 공신이다. 

그럼에도 그는 끝까지 포기하지 않은 한국인 피폭자들과 변호인단에 공을 돌리는 한편, 향후 일본 정부와의 협상을 통해 한국내 피폭자에 대한 건강진단, 간병수당 지급 등 남은 과제들까지 해결하겠다는 결의를 불태웠다. 

이치바 회장은 간사이(關西) 지역 소재 한 대학에 재학했던 1970년대, 히로시마(廣島)·나가사키(長崎) 원폭 피해자 중 한반도 출신자들이 많았다는 사실을 알게 돼 큰 충격을 받은 것을 계기로 줄곧 한국인 피폭자 지원에 매진해왔다. 

한국인 피폭자들이 피폭 전 일본에서 어떤 삶을 영위했으며, 피폭 이후 고국 또는 일본에서 어떻게 살아왔는가를 심층적으로 다룬 책 '한국의 히로시마'를 펴내기도 했다. 

다음은 이치바 회장과의 전화 인터뷰 일문일답이다. 

--8일 일본 최고재판소 판결의 의미는 무엇인가. 

▲피폭자 원호법(일본법)을 평등하게 적응하라는 소송을 한국 원폭 피해자를 중심으로 약 40년간 계속해 왔고, 드디어 의료비라는 지원이 (차별없이) 이뤄지게 됐다. 피해자에게 가장 우선적으로 필요한 지원이 가장 늦게 40년이나 지나서 인정됐다. 지금 살아계신 한국인 피폭자분들이 적다는 것은 아쉽지만 그래도 생존자분들에게 가장 필요한 지원이 실현된 만큼 큰 도움이 될 것이다. 

앞으로의 여생을 의료비 걱정없이 보낸다는 것은 중요한 일이다. 그런 의미에서도 판결의 의의가 크다.

'피폭자 건강수첩'을 교부받은 피폭자라면 어디에 살고 있든 원호 대상이 된다는 점을 명시한 판결이었다. 피폭자 원호법 중 아직 재외 피폭자에게 적용되지 않은 것이 7조의 건강진단과 31조의 개호(간병) 수당 지급이다. 의료비 지급뿐만 아니라 아직 시행되지 않은 건강 진단과 간병 수당 지급도 조속히 시행하라는 것을 어제의 판결을 바탕으로 (일본 정부에) 요구할 수 있을 것이다. 

--승소의 원동력은 무엇인가. 

▲의료비 소송을 담당한 변호인단이 오사카 지법, 오사카 고법에서 매우 훌륭한 변론을 해왔다는 것이 가장 큰 요인이라고 생각한다. 원고 측의 변론이 허술하면 이길 수 있는 재판도 이기지 못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한국인 피폭자들이 수십년간 굳건히 싸워온 결과라고 생각한다. 

--어떤 마음으로 외국인인 한국인의 피폭 문제에 천착하게 됐나. 

▲외국인이 피해를 보았지만, (식민지 지배의) 가해자는 일본인이다. 가해자의 나라에 살고 있는 시민으로서 당연히 우리가 해야할 일이라고 생각했다. 

--앞으로의 과제는 무엇인가. 

▲재판을 안 해도 되도록 일본 국회의원의 힘을 빌려가며 협상을 통해 후생노동성의 변화를 유도한다는 것이 우선 방침이다. 재외 피폭자 의료비는 얼마나 조기에 지급 절차를 완비하느냐가 남아 있지만 이미 8일 판결로 해결된 것이다. 나머지 건강진단과 개호 수당을 실현함으로써 완전하게 평등한 법 적용을 가능케 하는 것이 과제다. 이제까지는 재판으로 해왔지만 생존 피해자들도 고령인 만큼 남은 과제에 대해서는 협상을 통해 일본 정부가 (자발적으로) 조치를 취하도록 유도하고 싶다. 

--한국 정부와 정치권에 바라는 바는 없는가. 

▲한국 정치권에는 원폭피해자지원 특별법 법안을 통과시키길 기대한다. 한국 정부에는 하루 빨리 군위안부 문제, (일제에 의해 강제로 이주한) 사할린 동포 문제와 함께 피폭자 문제(피해자 구제조치 등)를 일본 정부와 협의해 잘 해결하길 바란다. 

--전후 70주년을 맞이한 일본이 최근 원폭 피해만 강조하고 전쟁 가해국이었다는 사실은 강조하지 않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 어떻게 생각하는가?

▲우리 모임은 한국의 원폭 피해자를 돕는 시민 모임인데, 일본 피폭자 운동이 그 피해만을 강조하고 일본의 가해 책임을 묻지 않는 것은 괴상한 일이라는 인식에서 출발했다. (8일 최고재판소 판결을 계기로) 한국 원폭 피해자에게 의료비 전액 지원을 하게 된 일은 곧 '일본의 원폭 피해자 운동이 일본은 피해자라는 사실만을 생각해서는 안 된다'는 메시지라고 생각하며 운동에 임하고 있다. 

--최근 한일 정상회담 전망이 나오는 등 양국 관계 개선의 기운이 고조됐다. 어떤 기대를 갖고 있는가. 

▲양국 정부에서 논의하지 않으면 문제는 해결되지 않는다. 양국 관계가 험악하게 된 원인은 아베 정권이 잘못된 역사 인식을 갖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우선 일본 정부가 아시아 침략, 조선 식민지 지배에 대한 역사 인식을 가지고 회담에 임하지 않는 한 절대로 중국, 한국과 좋은 관계를 만드는 정상회담을 할 수 없다고 본다. 

--모임 회원 규모는 어느 정도인가. 

▲회원 수는 약 600명이다. 회원은 회비를 내며 모임을 지탱해온 사람들이고 중심적인 역할을 하는 사람들이 오사카와 히로시마, 나가사키 지부에 몇명씩 있다. (취재보조: 이와이 리나 통신원)

 

jhcho@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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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보법안 반대 시위, 일본 열도 300여곳서 동시다발로 열려

국회 주변에 시위대 대거 몰려… 주최측 "12만명"·경찰 "3만명"

야당 대표도 시위 현장에…내달 14일부터 중의원서 '밀어붙이기' 가능

(도쿄=연합뉴스) 이세원 특파원 = 일본 아베 신조(安倍晋三) 정권의 안보 법안 강행 처리가 임박하면서 이에 반대하는 시위가 각지에서 동시 다발적으로 열렸다.

안보법안에 반대하는 시민모임인 '전쟁하게 하지 마라·9조를 부수지 마라! 총궐기 행동실행위원회'(이하 위원회)는 30일 도쿄(東京) 국회의사당 주변에서 대규모 시위를 열었다.

참가자들은 비가 내리는 가운데 국회 의사당을 에워싸고 "전쟁하게 하지 마라", "지금 바로 폐안(廢案)", "헌법을 지켜라" 등의 구호를 외치며 현재 심의 중인 안보 법안의 폐기를 요구했다.

'아베 그만둬라'는 구호가 적힌 현수막이 내걸리는 등 아베 정권에 대한 불신과 비판도 쏟아졌다.

시위대는 주변 인도는 물론 국회 의사당 정문으로 향하는 왕복 10차선 도로를 가득 채울 정도로 많이 몰려들었다.

경찰이 의사당과 시위대 사이에 버스로 벽을 만들어 차단할 만큼 이례적으로 대규모 시위였다.

일부 참가자가 경찰이 설치한 바리케이드를 걷어내려고 시도하면서 몸싸움이 벌어지기도 했으나 주최 측이 질서 유지를 촉구하는 등 큰 충돌로는 번지지 않았다.

교도통신에 따르면 경시청은 이날 시위 과정에서 경찰관을 폭행한 혐의(공무집행방해)로 참가자 2명을 체포했다.

위원회는 이날 참가자가 약 12만 명이라고 발표했다. 이는 아베 정권에서 하에서 열린 안보법안 반대 시위 가운데 가장 큰 규모인 것으로 보인다.

이와 달리 경시청은 시위대 규모를 3만여 명으로 추산했다고 NHK는 전했다.

안보 법안에 반대하는 대학생 중심의 청년 단체 '실즈(SEALDs)'를 비롯해 남녀노소가 참가했으며 도쿄 아키하바라(秋葉原)에서 성적소수자(LGBT) 등 약 100명이 모여 전쟁 반대를 외치는 등 각계가 도쿄에서 반대 목소리를 냈다.

또 민주당, 공산당, 사민당, 생활당 등 4개 야당 대표도 국회 앞 시위장에 모습을 드러내 국회에서 법안 통과 저지를 위해 모든 노력을 다하겠다고 밝혔다.

오카다 가쓰야(岡田克也) 민주당 대표는 "헌법을 위반한 법안"이라며 "국민이 위기감을 느끼고 분노하는 것을 아베 정권은 알아야 한다. 함께 법안을 폐안하자"고 말했다.

시이 가즈오(志位和夫) 공산당 위원장은 "심의를 하면 할수록 아베 정권은 궁지에 몰리며 성실한 답변을 할 수 없게 되고 있지 않느냐"고 지적했다.

음악가 사카모토 류이치(坂本龍一) 씨도 시위에 참가해 "민주주의를 되찾을 매우 중요한 시기"라며 "함께 행동하겠다"고 언급했다.

TV아사히에 따르면 주최 측은 이날 전국 300곳 이상에서 시위가 벌어졌다고 밝혔다.

니가타(新潟)시에서는 약 2천 명(주최 측 발표, 이하 동일)이 시내를 행진하면서 안보법안에 반대하는 구호를 외쳤다.

홋카이도(北海道) 구시로(釧路)시에서는 고모리 다카시(小森隆·63) 씨가 반대 행동 동참을 촉구하는 인터넷 게시물을 보고 '아베 정치를 용서하지 않는다'는 문구가 적힌 플래카드를 들고 오후 1시30분께 JR구시로 역 앞에 섰으며 동참자가 잇달아 오후 3시 30분 무렵에는 약 250명으로 참가자가 늘었다.

나가사키(長崎)시에서는 약 800명이 안보법안 반대 시위를 벌인 뒤 "헌법을 지켜라"는 등의 구호를 외치며 시내를 행진했다.

나고야(名古屋)역 주변에서는 아이를 키우는 여성들이 모여 '누구의 자식이든지 (전쟁에서) 죽게 할 수 없다'며 일본이 전쟁하게 할 우려가 있다는 비판을 받는 안보 법안 반대를 외쳤다.

일본 정부의 미군 기지 정책에 대한 반대 여론이 높은 오키나와에서는 나하(那覇)시에서 열린 시위에 2천500명가량이 모여 아베 정권을 비판했다.

일본이 집단자위권을 행사할 수 있도록 한 무력공격사태법 개정안 등 안보관련 11개 법 제·개정안은 지난달 중의원 본회의를 통과했으며 현재 참의원에서 심의 중이다.

참의원이 법안을 가결하지 않으면 아베 정권은 중의원에서 참의원으로 법안이 송부되고 나서 60일이 지난 후 이른바 '60일 규칙'에 따라 연립 여당인 공명당과 함께 중의원에서 3분의 2 이상의 찬성으로 재가결해 법을 성립시킬 수 있다.

60일 규칙은 다음 달 14일부터 적용 가능하다.

아베 정권은 자민당 총재 선거 일정 등을 고려해 9월 14일 전에 법안을 표결 처리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는 분석이 나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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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日정부, 한국의 수산물 금수에 WTO 강제절차 추진 방침"

이르면 20일 소위원회 설치 요청

(도쿄=연합뉴스) 이세원 특파원 = 한국 정부가 후쿠시마(福島) 원전 사고를 이유로 일본 수산물 수입을 금지한 것에 대해 일본 정부가 세계무역기구(WTO) 소위원회를 통한 강제 해결을 추진하기로 방침을 굳혔다고 교도통신이 19일 보도했다.

보도에 따르면 일본 정부는 한국과의 협의에서 이견을 좁히지 못했으며 이에 따라 이르면 20일 WTO에 분쟁 처리를 위한 소위원회(패널) 설치를 요청할 계획이다.

일본 정부는 그동안 '수입금지가 과학적인 근거가 없으며 WTO 협정 위반'이라고 주장했고 한국 정부는 '국민의 안전을 고려한 정당한 조치'라고 반론해 양국 간에 문제가 해결되지 않았다.

교도통신은 실제로 소위원회 설치가 인정되는 것은 9월 무렵이 될 것으로 전망했다.

한국 정부는 후쿠시마 원전 사고 후 원전의 오염수가 바다로 유출되면서 방사성 물질 오염에 대한 국민의 불안이 고조하자 2013년 9월 후쿠시마·이바라키(茨城)·군마(群馬)·미야기(宮城)·이와테(岩手)·도치기·지바(千葉)·아오모리(靑森) 등 8개 현에서 나오는 모든 수산물의 수입을 금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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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만하라 할 때까지 사죄" 아베 압박해온 日 양심 7인

아베 신조 일본 총리가 전후 70년 담화를 발표한 가운데 과거 일본 총리의 양심적 담화문이 다시 주목을 받고 있다.

 

'식민지배, 침략, 사죄, 반성'이라는 4대 키워드를 처음으로 확실하게 담아 담화문을 발표한 무라야마 전(前) 총리와 일본군 위안부의 존재를 인정하고 공식 사과한 고노 전(前​) 총리의 담화는 양심적 담화로 평가받고 있다.

 

아베 담화가 발표되기 전 "일본은 상대국이 인정할 때까지 사죄해야 한다"며 아베 총리를 압박해온 일본 양심 7인을 소개한다. 


1. 하토야마 유키오 (일본 前​ 총리)

 

 

지난 12일 서대문 형무소를 찾아 무릎 꿇고 사죄하면서 한국인들에게 유명해진 일본 정치인이다. 

 

그는 이번 아베 담화가 발표되기 전 "한국이 '그만' 할 때까지 계속 사죄해야 한다"며 "진정한 애국심이란 과거 역사적 사실에 눈감지 않고 잘못한 것에 대해 사과할 줄 아는 용기"라고 말했다.

2. 무라야마 도미이치 (일본 前​​ 총리)



1995년 전후 50년에 발표한 '무라야마 담화'로 유명한 전(前) 총리다. 지난해 국회 강연에서 "위안부는 형언할 수 없는 잘못"​이라며 과거사 반성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그는 총리 시절, 정치 생명을 걸고 '식민지배'와 '침략'에 대한 통절한 '반성'과 '사죄'를 담은 50주년 담화를 발표하며 일본 총리의 양심적 전후 담화문의 교과서가 됐다.

 

"일본은 식민지 지배와 침략으로 많은 국가, 특히 아시아의 많은 국가 사람들에게 큰 손해와 고통을 주었습니다. 다시 한 번 '통절한 반성'의 뜻을 표하며 진심으로 '사죄'의 마음을 표명합니다"라고 말해 아베와 달리 식민지배와 침략전쟁의 주체를 명확히 했고 반성과 사죄를 현재형으로 표명했다.

3. 고노 요헤이 (일본 前​ 총리)



1993년 고노 요헤이 당시 관방장관이​ '일본군위안부들에게 사과와 반성의 마음을 올린다'는 '고노 담화'를 발표했다​. 무라야마 담화와 함께 일본의 대표적 담화로 유명하다.​

 

그는 "위안소는 당시 군 당국의 요청에 의해 설치된 것이며 위안소의 설치 관리 및 위안부 이송에 관해서는 구 일본군이 관여했다"고 발표했다.

 

"여성들의 상처가 컸다"며 위안부에 대한 일본의 잘못 인정을 회피한 아베와 달리 위안부에 대한 일본과 일본군의 강제성을 인정하며 명확한 사과를 했다.

4. 호소카와 모리히로 (일본 前​ 총리)



'침략 전쟁'의 주체를 생략한 이번 아베 담화와 달리 취임 기자회견 당시 "일본이 일으킨 2차 세계대전은 침략전쟁이었다"고 발언해 일본 내에서 반발을 일으켰다.

 

나중에도 "상식적으로 중국과 한국 동남아에 큰 고통과 희생을 유발한 만큼 가슴에 손을 얹고 보면 침략이 아니라 할 수 없다"고 회고하며 당시 발언을 뒤집지 않았다.

5. 무라카미 하루키 (작가)



'상실의 시대' 등 수없이 많은 베스트셀러를 낸 작가로 한국에서 큰 사랑을 받고 있는 일본 작가다.

 

지난 4월 아베 총리의 우경화 움직임에 반대하며 "상대국이 됐다고 할 때까지 일본은 사죄해야 한다"고 말했다.

 

누리꾼과의 채팅 도중에 아베 총리의 인격조차 의심스러워하며 "아베 따위..."라는 표현을 써 논란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6. 미야자키 하야오 (애니메이션 감독)



'하울의 움직이는 성' 등으로 알려진 애니메이션 계의 거장으로 지난 13일 아베에게 "평화헌법 고치려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라며 작심한 듯 비판했다.

 

그는 "침략을 반성하는데 정치적인 고려가 있어서는 안 된다",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다른 나라를 침략해서는 안 된다"고도 말했다.

7. 오에 겐자부로 (노벨상 작가)



1994년 노벨문학상 수상식 자리에서 "일본이 특히 아시아인들에게 큰 잘못을 저질렀다는 것은 명백한 사실이다"고 말했다.

 

평화헌법 개정하려는 아베 신조 총리에 대해 "헌법에 대한 경외심이 없는 인간"이라고 비난했다.

 

지난 3월 서울을 방문했을 때는 "위안부 문제에 대해 일본 정부가 충분히 사과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며 "제대로 사과해야 한다"고 아베를 압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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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토야마 "식민지 시대 가혹한 고문, 죄송하고 사죄드린다"

전 일본 총리가 서울 서대문형무소를 방문, 취재진 질문에 답하고 있다.
전 일본 총리가 서울 서대문형무소를 방문, 취재진 질문에 답하고 있다.

"아베 담화, 식민통치·침략, 반성·사죄 담겨야"

독립투사 영령에 11번 고개숙인 일본 전 총리…추모비 앞에선 무릎꿇고 큰 절

(서울=연합뉴스) 황철환 기자 = 하토야마 유키오(鳩山由紀夫) 전 일본 총리는 12일 일제강점기 독립투사들에게 행해진 고문 등 가혹행위에 대해 진심으로 사과했다.

광복 70주년을 맞아 서울시·경기도, 여야 정치권과 시민사회가 여는 '2015 동아시아평화국제회의' 참석을 위해 한국을 찾은 하토야마 전 총리는 이날 오후 서대문형무소역사관을 방문했다.

유관순 열사가 수감됐던 여옥사 8호 감방을 시작으로 과거 일제강점기 독립투사들이 투옥돼 고문을 당한 흔적을 돌아 본 하토야마 전 총리는 사전에 준비한 원고 없이 즉석에서 기자회견을 가졌다.   

12일 오후 한국을 찾은 하토야마 유키오(鳩山由紀夫) 전 일본 총리가 서울 서대문형무소를 방문, 추모비 앞에서 무릎을 꿇고 있다.
12일 오후 한국을 찾은 하토야마 유키오(鳩山由紀夫) 전 일본 총리가 서울 서대문형무소를 방문, 추모비 앞에서 무릎을 꿇고 있다.


하토야마 전 총리는 "전후 70주년의 해를 맞아 아베 신조(安倍晋三) 일본 총리가 오는 14일 담화를 내놓는다고 들었다. 발표가 된다면 당연히 일본이 과거 어떤 일을 했는지에 대한 내용이 담겨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여기에는 한국의 식민지 통치, 중국 침략 등이 역사적 사실로써 담겨야 하고 당연히 반성과 사죄의 마음이 담겨야 한다"며 "그런 내용이 아베 총리의 진심으로부터 나오길 저 또한 진심으로 기대한다"고 말했다.

하토야마 전 총리는 일제강점기 독립투사들에게 행해진 고문 등 가혹행위에 대해서도 진심으로 사과했다.

그는 "일본이 한국을 식민지 통치하던 시대에 독립운동, 그리고 만세운동에 힘쓰신 유관순을 비롯한 많은 분들이 수용되어 고문을 당했고, 가혹한 일이 벌어졌으며, 목숨까지 잃었다는 사실을 이자리에서 떠올리며, 진심으로 죄송하고 사죄드린다는 말씀을 드린다"고 말했다.

그는 "(서대문형무소에는) 처음 500명 정도가 수용됐지만 독립운동에 힘쓴 분들이 붙들려와 규모가 더 커졌다고 들었다"면서 "이것만으로도 여러분의 선조가 얼마나 독립을 위해 힘썼고 목숨을 걸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고 말했다.

그는 "고문 등 해서는 안 될 일 했다는 것을 깊이 사죄하고 무거운 마음으로 여기 서 있다"면서 "한국인 여러분들이 민주주의를 피와 땀으로 쟁취해낸 원점이 여기 있지 않나 하며 많은 것을 배웠다"고 강조했다.   

하토야마 유키오 전 일본 총리가 광복 70주년을 앞둔 12일 오후 서울 서대문형무소를 방문, 유관순 열사가 수감됐던 요옥사 내 8호 감방 앞에서 헌화를 한 뒤 예를 표하고 있다.
하토야마 유키오 전 일본 총리가 광복 70주년을 앞둔 12일 오후 서울 서대문형무소를 방문, 유관순 열사가 수감됐던 요옥사 내 8호 감방 앞에서 헌화를 한 뒤 예를 표하고 있다.

하토야마 전 총리는 약 40분간 서대문형무소역사관을 돌아보는 동안 모두 11차례나 고개를 숙였다.

그는 유관순 열사가 갖혔던 8호실 앞에서는 유 열사가 아우내 장터에서 만세운동을 주도하고 옥고를 치르다 숨지기 까지의 연표를 일일히 읽어봤고 "부모님이 다 (만세운동) 현장에서 돌아가셨느냐", "고문은 지하에서 맞았느냐" 등 질문을 던졌다.

하토야마 전 총리는 서대문형무소역사관 방명록에는 '만세운동에 힘을 다한 모든 영혼에게 편안함이 있길 바락 독립, 평화, 인권, 우애를 위해서'란 글을 남겼다.

마지막으로 추모비 앞에 선 유키오 전 총리는 신발을 벗고 헌화한 뒤 그 자리에서 무릎을 꿇었고, 합장하고 7초간 고개를 숙인 뒤 독립투사들의 영혼을 기리는 큰 절을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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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잊어버린 최초의 위안부 증언자…그 이름, 배봉기

할머니의 말년을 가족같이 돌봤던 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총련) 오키나와 지부의 일꾼이었던 김수섭(74), 김현옥(73)씨 부부와 함께 나들이를 갔다가 찍은 사진. 사진 김수섭씨 부부 제공
할머니의 말년을 가족같이 돌봤던 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총련) 오키나와 지부의 일꾼이었던 김수섭(74), 김현옥(73)씨 부부와 함께 나들이를 갔다가 찍은 사진. 사진 김수섭씨 부부 제공

한국 사회가 기억하지 못하는 배봉기(1914~1991) 할머니는 한반도 출신 여성들 가운데 자신이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였음을 처음 밝힌 인물이다.


배 할머니는 1914년 9월 충남 예산군 신례원리에서 태어나 1991년 10월18일 나하시 마에바시 2초메에서 숨졌다. 사진은 할머니의 말년을 가족같이 돌봤던 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총련) 오키나와 지부의 일꾼이었던 김수섭(74), 김현옥(73)씨 부부와 함께 나들이를 갔다가 찍은 사진이다. 김씨 부부는 사진을 찍은 정확한 시점은 기억하지 못했다.


배 할머니는 한국 사회에서 본격적인 위안부 운동이 시작된 계기가 된 김학순 할머니의 첫 증언이 나오기 무려 16년 전인 1975년 <교도통신> 등 일본 언론을 통해 자신이 일본군 위안부임을 밝혔다.


그러나 배 할머니의 증언은 사회의 폭넓은 반향을 부르지 못했고, 그래서 곧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잊혀지고 말았다. 우린 왜 할머니를 기억에서 지운 것일까. 그 실마리를 찾기 위해 배봉기 할머니기 위안부 생활을 강요당했던 오키나와의 작은 섬, 할머니가 살던 작은 헛간, 할머니가 마지막 숨을 거둔 동네를 찾아가 봤다. 그곳에서 발견할 수 있었던 것은 자신이 당했던 피해를 감춘 채 생을 마감해야 했던 수많은 위안부 피해 여성들의 쓸쓸한 뒷모습이었다.

한국에서 서울올림픽이 열리던 1988년 9월 무렵 배봉기 할머니가 자신을 찾아온 일본 주간지 <여성자신> 기자들 앞에서 자신의 고향인 충남 예산 신례원리의 위치를 표시하고 있다. 지도는 당시 총련 오키나와 지부의 벽면에 걸려 있던 것이다. 배 할머니는 당시 고향에 같이 가자는 일본 기자들의 제안에 서럽게 울음을 터뜨렸다고 한다. 김수섭씨 부부 제공
한국에서 서울올림픽이 열리던 1988년 9월 무렵 배봉기 할머니가 자신을 찾아온 일본 주간지 <여성자신> 기자들 앞에서 자신의 고향인 충남 예산 신례원리의 위치를 표시하고 있다. 지도는 당시 총련 오키나와 지부의 벽면에 걸려 있던 것이다. 배 할머니는 당시 고향에 같이 가자는 일본 기자들의 제안에 서럽게 울음을 터뜨렸다고 한다. 김수섭씨 부부 제공

일본군이 져 분하다던 할머니가 일왕의 사죄를 말했다


▶ 자신이 일본군 위안부였음을 최초로 밝힌 배봉기 할머니는 1945년 8월15일 일본이 패망한 뒤에도 고국행을 택하는 대신 오키나와에 남았다. 이후 자신의 사연이 알려지게 되는 1975년 10월 무렵까지 말도 통하지 않는 먼 이국땅을 전전하며 홀로 살았다. 할머니는 왜 전쟁이 끝난 뒤 고국으로 돌아가는 대신 낯선 이국땅에 남았을까. 할머니는 생전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전쟁터에서의 ‘일’이 창피해서 전후에 본국으로 돌아갈 수가 없었다”고 말했다. 배 할머니를 기억하는 이들은 “할머니가 참 깔끔하신 분이었다”고 회상했다.


“안따, X%$# 돗떼 이루노?”(당신 X%$# 찍고 그래?)


한적한 어촌 골목을 헤집고 다니며 닥치는 대로 사진을 찍고 있는 기자의 등 뒤에서 느닷없이 앙칼진 목소리가 들려왔다. 일본어와 오키나와 방언이 섞인 듯한 독특한 문장이어서 정확한 의미는 알 수 없었지만, 대략의 뜻은 짐작할 수 있었다. 뒤를 돌아보니, 70대 후반 정도로 보이는 할머니 한 분이 성난 얼굴로 기자의 얼굴을 쏘아보고 있었다. ‘당신 누군데 남의 집 사진을 함부로 찍느냐’는 항의의 눈빛이었다.


지난달 26일 오전 11시, 오키나와 본섬의 중심도시 나하의 도마린을 출발한 499t(정원 450명)짜리 여객선 ‘페리 도카시키’는 서쪽으로 1시간20분을 달려 오키나와 게라마제도의 가장 큰 섬인 도카시키섬에 도착했다. 사정없이 내리쬐는 오키나와의 뙤약볕 아래, 섬의 중심지인 도카시키 마을은 낮게 엎드려 있었다. 휴일인 탓에 마을의 공공시설은 모두 문을 걸어 잠근 채였고, 손에 쥔 것은 20여년 전에 찍은 흑백사진 한 장뿐이었다. 그곳에서 반드시 찾아야 하는 건물이 있었다.


“이 마을에 예전에 일본군 위안소가 있었다는 얘길 들었습니다. 위치를 몰라 한 시간째 헤매고 있습니다.”

“우린 잘 몰라.”

노인이 오키나와의 뙤약볕에 벌겋게 달아오른 기자의 얼굴을 힐끗 쳐다봤다.

“저기 저 공터야. 우린 몰라. 안다고 해야 서너살 때 일이야. 사람들에게 얘기만 들었지. 저곳에 위안소가 있었어.”

1944년 11월부터 1945년 3월 무렵까지 배봉기 할머니가 일본군 위안부 생활을 강요당했던 오키나와현 도카시키섬의 위안소가 있던 자리. 지붕이 빨간 기와로 되어 있어서 ‘빨간 기와집’으로 불렸다. 항구에서 걸어서 3분 정도 거리에 있다. 길윤형 특파원
1944년 11월부터 1945년 3월 무렵까지 배봉기 할머니가 일본군 위안부 생활을 강요당했던 오키나와현 도카시키섬의 위안소가 있던 자리. 지붕이 빨간 기와로 되어 있어서 ‘빨간 기와집’으로 불렸다. 항구에서 걸어서 3분 정도 거리에 있다. 길윤형 특파원

그가 가리킨 빈터 앞에 도착해 20년 전의 사진과 현재의 모습을 비춰봤다. 저만치 산의 능선과 옥상으로 향하는 앞집 계단의 위치가 정확히 일치했다. 도카시키 항구에서 걸어서 고작 3분. 1944년 11월부터 1945년 3월말까지 이곳에 있던 ‘빨간 기와집’에서 배봉기(1914~1991) 할머니를 포함한 조선인 여성 7명이 일본군에 의해 위안부 생활을 강요당했다. 현재 빈터에는 ‘마티즈’와 비슷하게 생긴 폐차 한대가 방치돼 있고, 반대쪽 담장 위엔 “책 안에서는 가족여행도 가능합니다”라는 영문을 알 수 없는 글귀가 적혀 있었다.


한반도 출신 위안부 피해 여성 중

자신의 경험 증언한 최초의 인물

위안부 운동의 결정적인 계기 된

1991년 김학순 할머니 증언보다

무려 16년 전인데 우린 왜 모를까

오키나와가 일본 반환되던 1972년

글자 몰라 서류접수 못해 추방위기

위안부로 오키나와 오게 된 사연

지인에게 털어놓고 탄원서 제출

감추고 싶었던 개인사 알린 계기

빨간 기와집, 그 자리에 가다


한국인들이 기억하지 못하는 배봉기란 인물은 현재 한-일 관계의 최대 현안이 되어 있는 위안부 문제의 역사를 기록할 때 빼놓을 수 없는 독특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한반도 출신 위안부 피해 여성들 가운데 자신이 옛 일본군 위안부였음을 증언한 최초의 인물이기 때문이다. 배 할머니의 존재가 확인된 것은 한국에서 위안부 운동이 시작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는 1991년 8월 김학순(1924~1997) 할머니의 ‘역사적인 증언’이 이뤄지기 무려 16년 전이다. 왜 우린 배봉기 할머니를 기억에서 지운 것일까. 또 배 할머니와 김학순 할머니 사이에 존재하는 16년이라는 광막한 공백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오키나와의 작은 섬 항구에서 쉽게 답을 내릴 수 없는 질문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배 할머니가 살아온 고단한 삶의 모습은 일본의 독립언론인 가와다 후미코가 1988년 펴낸 저서 <빨간 기와집>(책엔 최봉기라는 가명으로 등장한다)에 자세히 기술돼 있다. 배 할머니는 1914년 9월 충남 예산군 신례원리에서 태어났다. 그의 부친은 다른 농가에 더부살이를 하며 간신히 입에 풀칠만 하는 가난한 농사꾼이었다.


그 때문에 할머니는 만 6살 때 다른 집의 ‘민며느리’가 된다. 명목이 민며느리였을 뿐, 가난한 집에서 입을 하나라도 덜기 위해 사실상 식모로 팔려간 것이었다. 17살에 첫 결혼을 하지만 실패했고, 이후 조선 각지와 만주 등을 정처 없이 헤매며 살았다. 책에 담긴 할머니의 인생사는 너무나 처참해 자주 책장을 덮으며 한숨을 내쉬게 된다.


배 할머니의 인생에 결정적인 불행이 찾아온 것은 그가 29살이 되던 1943년 늦은 가을이었다. 그는 함경남도 흥남에서 “일을 하지 않고도 돈을 벌 수가 있다. 누워만 있으면 입으로 바나나가 떨어지는 곳에 간다”는 위안부 모집 업자의 꾐에 속아 위안부 모집에 응하고 만다.


1943년 말이면 이미 태평양전쟁의 전황은 미국 쪽으로 기울어진 상황이었다. 미군 잠수함의 적극적인 활동으로 일본의 병참선은 이미 무너져 있었다. 할머니가 흥남, 서울, 부산, 일본의 모지, 가고시마 등을 거쳐 나하에 도착한 것은 위안부 모집에 응한 지 1년이나 지난 1944년 11월이었다.


당시 할머니가 목격한 나하는 미군이 1944년 10월10일 오키나와 각지를 집중 공습한 이른바 ‘10·10 공습’으로 폐허가 되어 있었다. 배 할머니는 이후 다른 조선인 여성 6명과 함께 오키나와 본섬이 아닌 도카시키섬으로 배치돼 ‘빨간 기와집’이라 불린 일본군 위안소에서 아키코라는 가명으로 일본군을 상대하는 위안부 생활을 강요당했다. 이후 일본이 패전한 뒤엔 미군 수용소에서 이번엔 미군을 상대로 똑같은 일을 했다고 한다.

배봉기 할머니를 16년간 돌봤던 총련 일꾼 김수섭씨가 1975년 10월 할머니와 처음 만났던 난조시 사시키에 있던 헛간의 위치를 설명하고 있다. 현재 헛간 건물은 철거됐고, 그 위치엔 창고로 보이는 건물이 들어서 있다.
배봉기 할머니를 16년간 돌봤던 총련 일꾼 김수섭씨가 1975년 10월 할머니와 처음 만났던 난조시 사시키에 있던 헛간의 위치를 설명하고 있다. 현재 헛간 건물은 철거됐고, 그 위치엔 창고로 보이는 건물이 들어서 있다.

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이하 총련) 오키나와 지부의 ‘일꾼’이었던 김수섭(74)씨가 배 할머니를 처음 만난 것은 지금으로부터 30년 전인 1975년 10월이다. 당시 할머니는 오키나와 동남부의 난조시 사시키에 살고 있었다. 지금은 주변이 반듯한 택지로 구획돼 있지만, 김씨는 “예전에 이 주변은 온통 사탕수수밭이었다”고 말했다. 당시 배 할머니는 수수밭의 안쪽에 있던 ‘가스도 없고 수도도 들어오지 않는’ 2~3평 정도의 헛간에 살고 있었다. 헛간은 이미 오래전에 헐려 이젠 2층 건물 높이의 창고가 들어서 있다.


김씨는 “배 할머니는 당시 오랜 방랑생활로 심신이 극도로 피폐해진 상황이었다”고 말했다. 같은 총련의 일꾼이었던 아내 김현옥(73)씨와 할머니를 찾아가면 “어느 날은 잘 맞아주다가도 기분이 바뀌면 ‘만나기 싫다’며 문전박대를 하기 일쑤였다”고 말했다. 할머니가 두통, 신경통, 신경쇠약 등으로 작은 헛간에서 계속 소리를 지르다 보니 동네 아이들이 할머니에게 “미친 할머니”라고 돌을 던질 정도였다.


당시 배 할머니는 우리말을 이미 잊은 상황이었다. 그런 배 할머니가 일본말로 김씨 부부에게 자주 하던 말은 “유군가 마케타노가 구야시이사”(일본군이 져서 분하다)는 얘기였다. 김현옥씨는 “할머니 입장에선 일본군이 이겨야 (위안부인) 자신도 살 수 있었으니 그렇게 생각했던 것 같다”고 말했다. 할머니는 일본군이 져서 세상이 변했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그게 ‘조국 해방’을 뜻하는지는 이해하지 못했고, 한국전쟁으로 조국이 남북으로 분단됐다는 사실도 모르고 있었다. 그러면서 “내가 가난했으니까”, “그게 내 팔자다”라며 자신에게 일어난 불행을 모두 자신의 탓으로 돌리고 있었다.


일본 출입국정책에 의해 강제 커밍아웃


배 할머니가 자신이 일본군 위안부였음을 밝히게 된 계기는 1972년 5월 이뤄진 ‘오키나와의 일본 복귀’였다. 오키나와의 시정권을 회복한 일본 정부가 1945년 8월15일 전에 일본에 입국한 사실이 확인되는 오키나와현 거주 조선인들에게 특별영주를 허가한다는 조처를 발표했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신고 기간을 3년으로 제한했다.


배 할머니는 정규교육을 받지 못한 탓에 일본어와 우리말 모두를 읽고 쓰지 못했다. 서류를 내지 못해 강제추방의 공포에 시달리던 배 할머니는 예전에 함께 일한 적이 있는 식당 주인에게 자신이 ‘위안부로서 오키나와에 와서 지금까지 살아왔다’는 얘길 털어놓는다. 식당 주인은 이러한 사연을 담은 탄원서를 오키나와현 입국관리사무소에 제출했다.


이를 통해 할머니는 추방당하지 않고 특별영주 자격을 얻을 수 있었지만, 감추고 싶었던 쓰라린 개인사가 세상에 알려지게 된다. 1975년 10월 일본 언론을 통해 배 할머니의 사연이 기사화됐기 때문이다. 그 무렵 나온 1975년 10월22일 <고치신문>의 기사 속에서 뒷모습의 할머니는 “전쟁터에서의 ‘일’이 부끄러워 고국으로 돌아갈 수 없었다”고 말하고 있다.


1972년 5월 오키나와가 일본에 반환된 뒤 총련은 1972년 8월15일 오키나와에서 이뤄진 조선인 강제동원의 진상을 규명하기 위한 ‘조선인 강제연행 진상조사단’(이하 조사단)을 만들게 된다. 또 한달 뒤인 9월6일엔 김씨 부부 등을 중심으로 오키나와 총련 지부도 결성했다. 그해 10월 조사단이 발표한 A4용지 60쪽 분량의 ‘진상조사 보고서’를 보면, 조선인 위안부와 관련해 “10월10일 공습 무렵 일본군 어떤 부대의 사기 고무를 위해 위문대원으로 보내졌다. 전쟁에 내팽개쳐진 이들은 말도 통하지 않고 지리도 모르는 전쟁터를 떠돌 뿐이었다”는 기술을 싣고 있다. 김씨 부부는 “당시엔 배 할머니와 같은 생존 위안부들을 직접 만나지 못했지만, 오키나와인들의 여러 증언과 기록을 통해 조선인 위안부의 실체는 확인한 상태였다”고 말했다.


총련 일꾼이었던 김수섭씨가 할머니의 사연을 듣게 된 것도 이케다라는 이름의 <교도통신> 기자를 통해서였다. 배 할머니는 처음엔 김씨 부부를 차갑게 내몰았다. 그러나 2~3년이나 꾸준히 할머니를 찾아오는 김씨 부부의 정성에 할머니는 조금씩 마음의 문을 열게 된다.


배 할머니의 ‘커밍아웃’은 자발적인 선택이었을까. 재일 조선인 2세인 김미혜 도쿄대학 특임연구원은 “김학순 할머니는 ‘위안소를 만든 것은 민간업자’라는 일본 정부의 거짓말에 분노해 직접 투쟁을 결심한 것인 데 비해, 배봉기 할머니는 일본의 출입국 정책에 의해 강제로 ‘커밍아웃’을 강요당한 것”이라고 말했다. 그 때문에 배 할머니는 원치 않은 외부의 취재 요청에 적잖은 고통을 받게 된다.


배 할머니의 사연은 한국 사회엔 본격적으로 전해지지 않는다. 김씨 부부는 그 이유에 대해 “배 할머니가 우리(총련의 활동가)와 가깝게 생활하다 보니, 남쪽에선 이를 인정하고 싶지 않았던 게 아니냐. 한국 언론과 만난 것은 이번 <한겨레> 취재가 처음”이라고 말했다. 1977년 4월 총련 기관지인 <조선신보>가 배 할머니의 사연을 대대적으로 보도하자 이런 경향은 더 강화된다. 윤정옥 이화여대 명예교수는 1990년 1월 <한겨레> 기고에서 배 할머니를 둘러싼 이런 상황에 대해 “할머니는 몸도 성치 않고 여전히 인간기피증에 걸려 있어 조총련계의 김(김현옥씨)이라는 여성의 요청에만 응해 준다고 했다”는 한 문장으로 정리하고 있다.


한국 언론이 배 할머니의 사연을 적극 보도했다 해도 그 영향력은 크지 않았을 것으로 보인다. 배 할머니의 거주지가 한국이 아닌 오키나와였던데다, 1980년 말까지 한국의 군사정권은 일본에 대한 강제동원 피해자와 유족들의 배상·보상 요구를 강하게 억눌렀기 때문이다. 김학순 할머니의 용기있는 증언이 나오게 된 것도 1987년 6월항쟁 이후 일제 피해자들이 자신들의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사회적인 분위기가 형성된 뒤다.


배 할머니는 김씨 부부와 왕래가 잦아지며 사탕수수밭 한가운데 있던 사시키의 헛간을 나와 나하 시내로 이사를 오게 됐다. 김씨 부부와 배 할머니의 공존은 그렇게 16년 동안 이어졌다. 할머니가 기분이 좋아져 ‘오늘은 드라이브를 가자’고 하면 셋이 모여 근처의 온천에 다녀오곤 했다. 김수섭씨는 “매달 5일이 할머니의 생활보호금이 나오는 날이었다. 그럼 할머니가 사무실로 와 ‘니꾸 갓떼 기나사이”(고기 좀 사와)라고 말하면 집사람이 슈퍼에 가서 불고기와 맥주를 사왔다. 할머니가 한달에 한번씩 우리에게 한턱을 낸 셈”이라고 말했다.

고향 예산 떠나 만주 등 떠돌다
29살 되던 1943년 업자 꾐에 넘어가
아키코라는 가명으로 일본군 상대
전쟁터에서의 일이 부끄러워
고국에 돌아갈 수 없었다고 한다

헛간서 살며 두통과 신경쇠약으로
“미친 할머니” 소리까지 들었지만
총련 김수섭씨 부부와 교류하며
인생 말년을 아주 값지게 보내다
91년 10월18일 영원히 잠들어

배봉기 할머니의 사연을 일본에 전한 <고치신문> 1975년 10월22일 기사. 할머니는 얼굴을 공개하지 않고 뒤를 돌아본 채 증언하고 있다. 김미혜씨 제공
배봉기 할머니의 사연을 일본에 전한 <고치신문> 1975년 10월22일 기사. 할머니는 얼굴을 공개하지 않고 뒤를 돌아본 채 증언하고 있다. 김미혜씨 제공

“원수를 갚아달라”


김씨 부부와의 교류를 통해 배 할머니는 사회를 바라보는 나름의 안목을 키워갔던 것 같다. 김현옥씨는 “할머니와 얘기하면서 ‘아지매가 그렇게 된 것은 아지매의 팔자가 아니다. 우리가 일제의 식민지가 되어서 그렇게 된 것이다’라고 말했다. 처음엔 그런 말을 듣기 싫어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할머니가 마음속에 의문을 품게 되고, 그러면서 나름대로 여러 생각을 하게 된 것 같다”고 말했다.


오키나와엔 동포들이 별로 살지 않았기 때문에 총련 지부의 주요 사업은 미군기지 반대운동을 하는 오키나와 민중들과의 ‘연대 사업’이었다. 당시 오키나와에선 한-미 연합 군사훈련인 팀스피릿 훈련(1976년부터 1993년까지 실시. 현재는 키리졸브로 대체)에 대한 반대운동이 치열하게 이뤄지고 있었다. 이 훈련에 참여하는 미 공군이 오키나와 가데나 기지를 활용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 김씨는 팀스피릿 훈련에 반대하는 가데나 기지 앞 반대 집회에 자주 연대 연설을 갔다.

김현옥씨는 “할머니가 ‘바깥사람은 어디 갔냐’고 하면 ‘반대 집회에 갔다’, ‘그것은 뭐 하는 거냐’ 그러면 ‘그건 이러저러한 것이다’라고 설명을 하곤 했다”고 말했다. 특이한 차림새의 할머니가 총련 관련 집회에 빠지지 않고 참석하다 보니 한번은 다이라 료쇼 나하시장(1968~1984년 재임)이 배 할머니의 사연을 듣고 “오랜 시간 고생하셨습니다. 원래 일본 정부가 책임을 지고 보상해야 하는데 생활보호밖에 못하고 있습니다”라고 사죄를 한 적도 있었다.


1989년 1월의 일이었다. 텔레비전으로 히로히토 일왕이 숨졌다는 뉴스를 보던 배 할머니가 갑자기 “왜 사죄도 안 하고 죽었냐”고 말했다. 배 할머니가 그런 말을 할지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던 김현옥씨는 할머니에게 ‘일왕이 구체적으로 뭘 해줬으면 좋았겠냐’고 물었다. 그러자 배 할머니는 “사죄를 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배 할머니가 이 무렵엔 자신에게 닥친 불행의 원인에 대해 나름의 견해를 갖게 됐음을 짐작하게 한다. 배 할머니는 김씨 부부에게 종종 “원수를 갚아 달라”는 말을 하기도 했다.


김씨 부부에겐 만년의 배 할머니를 생각하면 잊을 수 없는 사연이 많다. 한국에서 서울올림픽이 열리던 1988년 9월, 일본의 주간지인 <여성자신>(조세이지신)의 기자들이 할머니를 찾아왔다. 일본 기자들이 할머니에게 고향이 어디인지를 지도에 표시해보라고 했다. 할머니는 충남 예산 신례원리를 가리켰다. 마침 사진기자인 후지이가 근처에 산 적이 있었다. 흥분한 일본 기자들은 배 할머니에게 “우리들이 여비를 댈 테니 고향에 한번 가보지 않겠느냐”는 제안을 했다. 배 할머니는 “글쎄, 가고 싶지, 한번 가야지” 하면서도 확답을 하지 못했다. 그러다 한참을 엉엉 울고 만다. 김수섭씨는 “할머니와 오래 지내면서도 그렇게 서럽게 우는 모습을 본 것은 그때가 처음”이라고 말했다.


또 한번은 배 할머니를 주인공으로 <오키나와의 할머니>라는 다큐영화를 만든 야마타니 데쓰오라는 영화감독이 상영회에서 모은 성금을 할머니에게 전달한 일이 있었다. 배 할머니는 처음엔 이 돈을 김씨 부부에게 주면서 받지 않으려 했다. 잠시 실랑이가 일다 김현옥씨가 예전에 “여자는 결혼해서 가정을 꾸려 애 낳고 잘 사는 게 행복”이라고 했던 할머니 말을 떠올려 “함께 반지를 하러 가자”고 제안했다. 김씨 부부는 할머니와 함께 오키나와의 중심가인 국제로에 있는 제일 유명한 금은방에 가 금반지를 샀다. 김현옥씨가 배 할머니에게 “아지매, 이거 갖고 갈래요, 하고 갈래요?”라고 물었다. 할머니는 기쁜 얼굴로 “하고 갈래”라고 답했다.


할머니가 숨을 거둔 것은 1991년 10월18일이다. 그해 오키나와에선 예년보다 무더운 날들이 이어졌다. 배 할머니의 건강을 걱정했던 김씨 부부는 10월초 할머니에게 “함께 병원에 가자”고 했다. 그로부터 며칠 뒤, 김씨 부부는 “할머니 방문을 두드려도 답이 없다”는 나하시 사회복지 담당 직원의 연락을 받게 된다. 복덕방에서 열쇠를 빌려 방문을 열었더니 배 할머니는 침대에서 잠시 휴식을 취하는 것처럼 편안히 누워 숨져 있었다.

배 할머니의 49재를 겸해 추도식이 열리는 날 그를 기억하는 많은 사람들이 모였다. 김씨 부부가 공개한 당시 추도식 사진을 보면 추도식 제단 앞에 나하시장과 오키나와현 지사가 보내온 화환도 찾을 수 있다. 할머니가 살던 나하시 마에바시 2초메 주민들은 할머니를 김씨 부부의 친척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나중에 할머니가 어떤 삶을 살았는지를 알게 된 주민들은 적잖이 놀랐다고 한다. 지난달 24일 오후 할머니가 만년을 보낸 2초메 골목을 찾아가 봤다. 25년 전 할머니의 뒷모습을 담은 사진에 찍혀 있는 ‘쇼와 부동산’ 간판이 여전히 거리를 지키고 있었다. 서민들이 사는, 어느 도시에서나 흔히 볼 수 있는 한적하고 쓸쓸한 거리였다. 김수섭씨는 “할머니가 위안부로 엄청 고생해서 불쌍한 사람처럼 되어 있지만, 나는 할머니를 불쌍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할머니가 인생 말년을 아주 값있게 살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1991년 12월6일, 배봉기 할머니의 49재를 겸해 오키나와 나하에서 열린 추모식 모습. 할머니를 기억하는 많은 사람들이 모여 그의 죽음을 추도했다. 사진 뒤쪽으로 오키나와현 지사, 나하시장 등이 보낸 화환도 보인다. 김수섭씨 부부 제공
1991년 12월6일, 배봉기 할머니의 49재를 겸해 오키나와 나하에서 열린 추모식 모습. 할머니를 기억하는 많은 사람들이 모여 그의 죽음을 추도했다. 사진 뒤쪽으로 오키나와현 지사, 나하시장 등이 보낸 화환도 보인다. 김수섭씨 부부 제공


김학순 할머니의 조위금 1만엔


할머니의 49재가 열리던 1991년 12월6일은 우연히도 김학순 할머니가 도쿄지방재판소에 최초의 위안부 피해보상 소송을 청구한 날이었다. 김 할머니가 어디서 알았는지 배 할머니의 추모식에 1만엔의 조위금을 보내왔다. 배봉기 할머니가 김학순 할머니와 같은 ‘투사’였는지는 알 수 없다. 아마도 할머니는 자신이 위안부였다는 사실이 밝혀지는 것을 그리 원하지는 않았던 것 같다. 어쨌든 배 할머니는 김 할머니와 역사적인 ‘바통 터치’를 하고 저세상으로 갔다. 그리고 김학순 할머니도 숨지고, 많은 시간이 흘렀다. 할머니들은 계속 숨져 이제 48명이 남았다.

김미혜 특임연구원은 “배봉기 할머니를 통해 위안부 할머니들이 전쟁 뒤 어떤 삶을 살았고 어떤 고통을 겪었는지 우리가 조금은 알 수 있게 됐다. 배 할머니는 전쟁이 끝나고 위안부 여성들이 어떤 삶을 감당해야 했는지를 보여주는 창문 같은 존재가 아니었나 싶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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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사람 잡는 허위신고·위증 늘었다… 韓 무고죄 유독 많아

[뉴스데스크]◀ 앵커 ▶

엉뚱한 사람을 공범으로 몰거나 죄 없는 사람을 신고하는 일이 늘고 있습니다.

생사람 잡는 무고와 위증 범죄, 그 천태만상을 현재근 기자가 파헤쳤습니다.



◀ 리포트 ▶

50살 이 모 씨는 최근, 필리핀에서 필로폰을 들여온 혐의로 체포됐습니다.

생판 처음 듣는 얘기였지만 자신의 이름과 주소가 적힌 소포를 들이미는 경찰 앞에서 어떤 부인도 통하지 않았습니다.

누명은 검찰 수사 과정에서 벗겨졌습니다.


앞서 수감돼 있던 마약사범 일당이 평소 사이가 좋지 않았던 이 씨 집에 일방적으로 마약을 보냈던 겁니다.

[장인호 검사/서울남부지검 형사4부]
"다른 마약 사범들을 제보함으로써 자기 사건에서 양형 또는 구형에서 선처를 받으려는.."

여성이 일단 피해자로 간주되는 점을 악용한 거짓 성폭행 신고도 늘고 있습니다.

20살 김모 양은 알고 지내던 한 대기업 직원과 합의하에 성관계를 가졌음에도 성폭행을 당했다며 경찰에 신고했습니다.

그러나 수사 과정에서 이 직원이 2억 원 가까운 퇴직금을 받았다는 걸 듣게 된 김 양이 합의금을 받아낼 생각으로 꾸민 일이었다는 게 밝혀졌습니다.

이처럼 생사람 잡는 무고죄는 유독 우리나라의 발생 비율이 높은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지난 2007년 기준으로 일본과 비교해 217배, 인구 차이를 감안하면 5백 배가 넘는단 통계가 나온 적도 있지만, 그 이후에도 발생 건수는 줄지 않고 있습니다.

[고민석/서울남부지검 형사2부장]
"진실 여부를 찾기 위해서 필요없이 수사력이 낭비되고 재판과정에서 법정비용이 높아지는.."


검찰은 무고범들을 '사법질서 교란사범'으로 규정하고 철저히 단속할 방침이라고 밝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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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인 41% "日공격당하면 비폭력으로 저항"…"싸울 것" 29%

교도통신 전후 70년 여론조사…"아베담화서 식민지·침략 사죄해야" 67%

(도쿄=연합뉴스) 조준형 특파원 = 타국에 대한 공격을 자국에 대한 공격으로 간주하고 무력을 행사하는 집단 자위권이 오는 9월께 일본에서 법제화할 것으로 예상된다. 그러나 정작 국민 40% 이상은 심지어 일본이 공격당한 경우에도 '비폭력으로 저항하겠다'는 생각인 것으로 나타났다.

교도통신은 종전 70주년을 맞아 5∼6월 우편 방식으로 진행한 여론조사 결과 '만약 외국이 일본을 공격하면 당신은 어떻게 하겠느냐'는 질문에 가장 많은 41%가 '비폭력으로 저항할 것'이라고 응답, '무기를 들고 싸운다(29%)'는 응답보다 많았다고 29일 보도했다. '도망친다'가 16%, '항복한다'가 7%로 뒤를 이었다.

이는 교전권을 부정한 헌법 9조 수정을 희망하는 아베 정권과 일반 여론의 괴리를 보여주는 조사결과로 풀이된다.

이번 조사에서 헌법을 이대로 존속시켜야 한다는 응답은 60%, 바꿔야 한다는 응답은 32%로 각각 집계됐다.

일본이 말려들 대규모 전쟁이 일어날 가능성에 대한 질문에는 '충분히 있다'는 답(12%)과 '어느 정도 있다'는 답(48%)을 합쳐서 60%가 '있다'고 답했다. '별로 없다(33%)'와 '전혀없다(6%)'는 답을 합한 것보다 20% 포인트 이상 높았다.

과거 일본이 벌인 전쟁에 대해 '침략전쟁이었다'는 응답이 가장 많은 49%를 차지, '자위를 위한 전쟁이었다'는 답(9%)을 크게 상회했다. 하지만 '어느 쪽이라고도 말할 수 없다'는 답이 41%로 만만치 않은 비율이었다.

아울러 쇼와(昭和) 일왕의 전쟁 책임에 대해 '있다(어느 정도 있다 포함)'는 답이 총 62%로 '없다(36%)'보다 훨씬 많았다.

아베 신조(安倍晋三) 총리의 전후 70주년 담화에 식민지배와 침략에 대한 사죄 표현을 넣을지에 대해 '포함해야 한다'는 답이 67%로 '포함할 필요가 없다(30%)'는 답을 크게 웃돌았다.

하지만, 중일전쟁과 태평양전쟁에서 일본이 피해를 준 주변국에 대한 사죄가 '충분히 이뤄졌다'는 답이 28%, '어느 정도 이뤄졌다'는 답이 54%로 집계돼 '사죄는 할 만큼 했다'는 것이 대체적인 인식임을 보여줬다.

더불어 A급 전범이 합사된 야스쿠니(靖國) 신사에 총리가 참배할지 여부에 대해 '참배해야 한다'는 답이 55%로 과반이었다.

일본 외교가 무엇을 가장 중시해야 하느냐는 물음에 '아시아 국가와의 관계'라는 응답이 42%로 가장 많았다. 또 한일관계에 대해 '개선해야 한다'는 답이 70%였다.

이와 함께 일본이 '나쁜 방향으로 가고 있다'는 비관적 견해를 가진 사람이 총 52%로 집계돼 '좋은 방향으로 가고 있다'는 답(46%) 보다 많았다.

아울러 '전후(戰後)'를 상징하는 3가지 일을 택하라는 질문에 2011년 3월 11일 동일본대지진과 후쿠시마(福島) 제1원전 사고가 가장 많은 49%였고 '고도경제성장(41%), 헌법 시행(29%) 등이 그 뒤를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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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은 어리광쟁이, 김치 안 팔려도 일본 탓”… 한중일 삼국지

‘한국에서는 일본 경제마저 악당 취급받고 있다.’

‘한국에서는 아베노믹스에 따른 엔화 약세로 한국의 수출기업 경쟁력이 저하되고 있다는 내용으로 일본에 대한 피해자 의식이 한국 언론을 중심으로 확산되고 있다.’

일본 산케이가 20일자 지면에서 한국 언론 등이 자국의 경제 부진을 일본 탓으로 돌린다는 주장을 담은 칼럼을 내보냈습니다. 일본 넷우익들은 이에 화답이라도 하듯 ‘한국은 어리광쟁이’라며 손가락질하고 있습니다. 22일 한중일 삼국지입니다.

문제의 칼럼은 산케이 서울특파원 나무라 다카히로 편집위원이 ‘김치와 한국 자동차, 북한 경제 악화도 일본 때문인지’라는 제목으로 쓴 것입니다.

나무라 다카히로 편집위원은 지난해 10월 가토 다쓰야 산케이 전 서울지국장 사태 당시 우리 외교부 대변인을 향해 “한국에 언론의 자유가 있느냐”면서 “가토 다쓰야 기자가 3개월간 여기를 떠날 수 없다. 사실상 인권문제 아니냐”고 따져 물었던 장본인입니다.

나무라 다카히로 편집위원은 한국에서 경제 고전의 이유로 아베노믹스로 인한 엔화 약세를 들먹인다고 분석했습니다. 그는 이를 ‘일본에 대한 피해자 의식’이라고 표현하기도 했는데요. 일본을 가해자로 묘사한다는 것입니다.

그는 수출 분야에서도 일본과 경합하는 한국 기업들은 엔화 약세로 일본 기업에 당했다고 초조해하고 있는 등 한국 언론은 역사 인식에서 뿐만 아니라 경제에서도 일본탓을 한다고 분석하기도 했습니다.

“김치나 소주, 라면 등 몇 년 전까지 일본에서 인기가 있던 한국 제품이 안 팔린다거나 한국 자동차가 일본에서 팔리지 않는다 등의 불만은 일본에서도 통한다. 엔저 이외에 대일 수출 부진의 원인으로 일본에서의 혐한감정을 들 수 있다거나 국산 차의 자존심이 일본 시장을 닫고 있다는 해석도 있다.”

그는 이런 한국 내 주장에 대해 반박했습니다.

“한국이 싫으니까 한국 물건을 안 사는 게 아니다. 일본 소비자가 한국처럼 자국 차에 특별한 자부심을 갖고 있는 것도 아니다. 좋은 물건을 사고 싶을 뿐이다.”

나무라 다카히로 편집위원은 아베노믹스를 적극 옹호하면서 칼럼을 마무리 지었습니다.

“아베노믹스가 이웃 나라는 핍박하는 정책이라는 감정적인 주장을 한국 국민 상당수가 그걸 그대로 믿고 있다. 한국에서 일본 경제도 악당 취급되고 있다.”

일본 네티즌들은 이 칼럼을 놓고 한국산 제품에 대한 조롱을 퍼붓고 있습니다.

“인기는 원래 없었다. 처음엔 신기해서 산 사람도 드물게는 있었지만 두 번째 산 사람은 없지.”

“한국은 항상 피해자인 것처럼 말한다. 어리광을 부리지.”

“재일(한국인)이 사면 그만이지.”

“일본에서 팔리지 않으면 경제 대국 중국에서 팔면 좋다.”

“현대차는 우선 애프터서비스를 일본 차 수준으로 좀 해라. 본국에서도 부품이 없다면서.”

“김치를 사는 놈을 보면 ‘너 조선인이지’라고 꼭 묻곤 한다.”

“일본인은 한 번 먹어보고 맛없으면 다시는 사지 않는다.”

“칼럼이 틀렸다. 난 한국이 싫어서 한국 물건을 사지 않는다. 질 좋은 대체품이 넘치는데 싫어하는 나라의 물건 따위 피한다.”

“근처 슈퍼에 신라면은 가장 싼 치킨라면보다 10엔이 저렴했지만 거의 팔리지 않았다.”

일부 김치를 너무 좋아한다는 댓글도 있긴 합니다.

“우리집은 일본인 집이지만 김치는 식탁에서 끊을 수가 없네요. 특히 여름에는 하루라도 없으면 가족들이 왜 김치 없냐고 아우성이에요. 최근 우리와 같은 집들이 늘고 있는 것 같은데.”

“진지하게 대답하자면 조선 김은 맛있다.”

한국제품은 사지 않는다고 하면서도 한편으로는 한국 관련 게시글에 우르르 몰려와 댓글을 다는 것 자체가 한국을 질투하는 것 아니냐는 비판도 있습니다.

“한국에 대한 질투로 JAP(일본인 비하 단어)은 사지 않겠지. 비열한.”

“세계는 모두 한국 제품을 많이 산다. JAP은 작은 허영심에 피하고 있지만.”

“한국 질시가 심하네. 다들. 군대나 가라.(아베 정권의 안보 법원 통과를 비판한 듯)”

김상기 기자 kitting@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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日 "한국의 수산물 수입규제 WTO 강제해결절차 돌입 방침"

농림수산상, 기자회견서 "더 대화해도 같은 결과"

(도쿄=연합뉴스) 조준형 특파원 = 일본 정부는 한국 정부의 일본산 수산물 수입 규제에 대해 세계무역기구(WTO)에서의 강제해결 절차에 돌입할 방침을 밝혔다고 NHK가 21일 보도했다.

하야시 요시마사(林芳正) 일본 농림수산상은 이날 각의(국무회의) 후 기자회견에서 "대화의 가능성은 부정하지 않지만, 같은 식으로 대화를 하면 같은 결과(결렬)가 될 것으로 예상된다"며 강제 해결 절차에 들어갈 뜻을 분명히 밝혔다.

한국 정부는 2011년 3월 동일본대지진으로 후쿠시마(福島) 원전 사고가 발생한 직후 방사능 오염 위험이 큰 후쿠시마 주변에서 생산되는 50개 수산물에 대해서만 수입을 금지했다.

그러다 후쿠시마 원전의 오염수가 바다로 유출되면서 방사능 오염에 대한 국민 불안이 고조되자 2013년 9월 후쿠시마·이바라키(茨城)·군마(群馬)·미야기(宮城)·이와테(岩手)·도치기·지바(千葉) ·아오모리(靑森) 등 후쿠시마 주변 8개 현에서 나오는 모든 수산물의 수입을 금지하는 조치를 취했다.

일본의 거듭된 문제 제기 속에 양국 정부는 최근 스위스 제네바에서 WTO협정에 근거한 양자 협의를 했지만 협의 기간(협의 요청일로부터 60일) 안에 입장 차이를 좁히지 못했다. 이에 따라 일본은 협의 기간이 끝난 지난 20일부터 WTO에 제소할 수 있게 됐다.

일본이 제소하면 분쟁처리를 위한 소위원회가 설치되며 이후 WTO가 지정한 전문가가 양국 정부의 주장을 청취한 뒤 결정을 내리게 된다. NHK는 1년 안에 결정이 이뤄질 것으로 보인다고 전했다.

jhcho@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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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日외무성 '세계유산 표결시 부결우려' 지난달 아베에 보고"

(서울=연합뉴스) 일본 근대산업시설을 세계유산으로 등재한 결정문이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WHC) 홈페이지에 공식 게재된 것으로 19일 확인됐다. 해당 결정문은 제39차 세계유산위를 총정리한 문서의 177~181페이지에 'Decision:39 COM 8B.14'라는 제목으로 포함됐다. 사진은 결정문이 포함된 부분. 2015.7.19 << 세계유산위 제공 >> photo@yna.co.kr

교도통신 보도…"아베, 'forced to work' 수용 지시"


(도쿄=연합뉴스) 조준형 특파원 = 일본 외무성이 메이지(明治) 산업시설의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록을 둘러싼 한일간 외교전 와중에 표결까지 갈 경우 부결될 우려가 있다는 취지로 아베 신조(安倍晋三) 총리에게 보고했다고 교도통신이 19일 보도했다.

이 같은 보고를 받은 아베 총리는 한국의 요구를 일부 받아들여 표결 없이 만장일치로 결정되도록 하라는 취지의 지시를 했다고 교도는 전했다.  

교도에 의하면, 외무성은 지난달 상순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한일 포함 21개 위원국)의 정세를 총리 관저에 보고하면서 "의장국 독일을 포함해 많은 나라가 (조선인 강제징용 문제와 관련한) 한국의 호소를 받아들여 가결에 필요한 3분의 2 찬성표 확보가 되지 않고 있다"고 밝혔다.


이후 지난달 19일 서울에서 진행된 차관급 협의 등 계기에 한국은 최초 거론한 '강제노동(forced labour)'에서 한발 물러나 한반도 출신자들이 '노동을 강요당했다(forced to work)'고 밝힐 것을 일본 측에 요구했고 아베 총리는 6월 하순 외무성 간부에게 "그걸로 가자"며 타협을 지시했다고 교도는 전했다.


일본 정부는 '전쟁시기 징용은 강제노동이 아니다'는 입장이었기 때문에 '노동을 강요당했다(forced to work)'는 한국 측 안을 받아들여도 기존 주장과의 일관성이 유지된다는 것이 아베 총리의 판단이었다고 교도는 소개했다.

지난 5일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에서 세계문화유산 등재가 결정된 일본 23개 산업시설 중에는 나가사키(長崎) 조선소, 하시마(端島·일명 '군함도') 탄광 등 조선인 수만 명이 강제노동한 현장 7곳이 포함됐다.

등재 추진 과정에서 조선인 강제노동 사실을 어떻게 반영할지를 놓고 한일 정부는 우여곡절 끝에 '의사에 반해 끌려가 노동을 강요당했다(forced to work)'는 표현으로 타협점을 찾았다.


하지만, 이후 한국 정부는 일본이 최초로 조선인 강제노역을 인정한 것이라고 홍보하고, 일본 정부는 '강제노동을 인정한 것은 아니다'고 주장하면서 양국 정부 사이에 심각한 신경전이 벌어졌다.


jhcho@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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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대기업 ‘강제징용’에 처음 머리 숙인다

ㆍ미쓰비시, 2차대전 미군 포로 900여명 강제노역 사과하기로

ㆍ한국인 징용자에겐 ‘침묵’
일본 대기업 미쓰비시 머티리얼이 2차대전 당시 강제노동에 징용된 미군 포로들에게 공식 사과하기로 했다. 강제징용 피해자에 대한 일본 대기업의 공식 사과는 이번이 처음이다. 미쓰비시 측은 한국인 강제노동 징용자에게는 아직까지 공식 사과를 한 적이 없다.

미국의 유대인 인권단체 ‘시몬 비젠탈 센터’는 미쓰비시 머티리얼의 최고 중역을 비롯한 대표단이 이번 주말 미국에서 징용 피해자인 제임스 머피(94)를 만나 공식 사과할 예정이라고 밝혔다고 AP통신이 14일 보도했다. 시몬 비젠탈 센터의 부소장인 에이브러햄 쿠퍼는 “일본 대기업이 이런 표현을 한 것은 이번이 최초이며, 다른 기업들도 동참하는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주미 일본대사관의 오타카 마사토 대변인은 “사과는 미쓰비시 측의 자체 결단이며 일본 정부는 관여한 바 없다”고 설명했다. 일본 정부는 미국인 포로 징용 문제에 대해 앞서 2009년과 2010년 공식 사과한 바 있다.

미쓰비시 머티리얼의 전신인 미쓰비시 광업은 2차대전 당시 900여명의 미군 포로를 일본으로 이송해 공장 4곳에서 강제노역을 시켰다. 2차 대전 당시 강제노동에 징용된 미군 포로는 모두 1만2000여명으로 이 중 10% 가량이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 회사에서 노역한 미군 포로 가운데 소재가 확인된 생존자는 2명이지만, 건강 문제로 머피만 사과행사에 참석키로 했다. 머피는 “음식도, 의약품도, 옷도, 위생시설도 없는 노예생활이었다”라고 회상한 뒤 “일본인들은 이미 용서했지만, 지난 70년 동안 늘 사과하길 바랐다”고 말했다.

AP통신은 미쓰비시 측의 방침을 ‘역사적인 사과’로 평가하면서 다음달 2차 세계대전 종전 70주년을 앞두고 과거사에 대한 일본의 태도를 둘러싼 비난 여론이 높아지는 가운데 나온 것이라고 분석했다.

<정유진 기자 sogun77@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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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도인 도망을 막아라"…'강제노동 방증' 日문서 발견(종합)

日야마노탄광 문서…"'높이 7척·길이 140간' 울타리 설치"

"조선인, 사실상 감금상태에서 강제노동 사실 보여주는 것"

(서울=연합뉴스) 이귀원 기자 = 일본이 근대산업시설의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 결정문에 반영된 조선인 강제노역(forced to work)에 대해 '강제노동을 인정한 것이 아니다'고 말 바꾸기에 나선 가운데 당시 일본 탄광에서 조선인들의 탈출을 막기 위한 목적으로 구조물을 세웠다는 기록이 발견됐다.

한일관계 전문가인 김문길(부산외국어대 명예교수) 한일문화연구소장은 11일 일본 미쓰비시가 운영해온 것으로 알려진 후쿠오카(福岡) 소재 야마노(山野) 탄광의 물자명세서를 일본의 한 박물관에서 입수해 연합뉴스에 공개했다.

용도를 '반도인(半島人) 합숙소'라고 명기한 총 3장짜리 물자명세서 서류에는 공작물의 규모 또는 구조 항목에 '반도인 도망방지를 위해 합숙(소) 주위에 높이 7척(尺, 30㎝) 연장 140간(間, 1.818m)의 '판병'(板�)을 신축하라'고 명시돼 있다.

일본 전문가들은 '판병'을 나무판자형 울타리를 의미한다고 해석했다.

그러나 김 소장은 "7척의 나무판자형 울타리 위에 철조망을 얹은 것으로 풀이된다"면서 울타리의 구성물과 관련해 다소 다른 해석을 내놨다.

반도인은 조선인 강제 징용자를 말한다. 7척은 약 2m10㎝(1척은 약 30㎝)에, 140간은 약 255m에 해당한다.

한 소장은 또 "도망 방지를 위한 구조물을 설치한 것은 당시 조선인들이 강제로 동원돼 사실상 감금상태에서 강제노동에 시달렸음을 보여주는 명확한 증거로 볼 수 있다"고 설명했다.

물자명세서에는 공사 착수예정일을 '쇼와(昭和) 19년(1944년) 3월1일', 공사 완료예정일을 같은 해 '3월31일'로 기록하고 있다.

특히 '반도인 도망 방지'를 언급한 것은 당시 주변 탄광에서 조선인 강제 징용자들의 탈출이 잇따랐던 상황이 반영된 것으로 보인다.

일제 치안국 특별고등과가 1944년 9월3일 작성한 '반도인 노무자에 관한 조사표'에 따르면 1943년말 현재 후쿠오카에 강제 징용된 노무자 11만3천51명 가운데 51.7%인 5만8천471명이 탈출했다는 기록이 있다.

물자명세서에는 합숙소와 관련 시설의 면적도 표기돼 있다.

우선 공동숙사는 '1층 1,34954 평방미터(㎡), 2층 611.01 평방미터, 3층 611.01 평방미터'로, 사감주택은 39.85 평방미터, 창고는 39.60 평방미터 등이다.

일본 정부는 조선인 강제노동 현장이 포함된 근대산업시설이 지난 5일 독일 본에서 열린 세계유산위원회에서 세계유산으로 등재 결정이 이뤄지자마자 강제노동을 인정한 것이 아니라면서 '일하게 됐다'('하타라카사레타'(동<人변+動>かされた)는 표현으로 번역, 물타기를 시도했다.

당시 일본측 대표가 세계유산위원회에서 영어로 'brought against their will'(의사에 반해), 'forced to work'(강제로 노역) 등의 표현을 사용했고, 우리 정부는 이에 대해 누가 봐도 강제노역을 인정한 것이라고 밝히고 있다.

일본 정부 대변인인 스가 요시히데(菅義偉) 관방장관는 "1944년 9월부터 1945년 8월 종전(終戰) 때까지 사이에 '국민징용령'에 근거를 두고 한반도 출신자의 징용이 이뤄졌다"며 이런 동원이 "이른바 '강제노동'을 의미하는 것이 전혀 아니라는 것은 (일본) 정부의 기존 견해"라고 밝히기도 했다. 이는 일제의 침략과 식민지배가 합법이었다는 일본측 기존 주장과 왜곡된 역사인식을 그대로 드러낸 것이라는 지적이다.

그러나 스가 장관이 언급한 1944년 9월 이전에도 조선인 강제징용은 있었다는 점에서 스가 장관 주장은 맹점을 드러내고 있다.

lkw777@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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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과 제3세계 국가들의 ‘식민지 청산의 머나먼 길’… 진정한 화해, 대부분이 아직도 ‘미완’

ㆍ‘역사비평’서 한·일협정 50주년 맞아 특집으로 다뤄

▲ 독일 - 폴란드

독일 브란트 ‘크니팔’로 모범적 사과


▲ 프랑스 - 알제리
프랑스 올랑드 “고통 인정”에 “미흡”


▲ 이탈리아 - 에티오피아·리비아
피식민지 자국 내 혼란으로 어영부영


35년에 걸친 일본의 식민지배는 해방 70년이 된 지금도 한·일관계의 발목을 잡고 있다. 한국과 일본처럼 식민·피식민 관계에서 벗어난 유럽과 제3세계 국가들은 어떤 과정을 통해 관계 정상화를 도모했을까. 최근 발간된 계간 ‘역사비평’(111호)은 한일협정 50주년을 맞아 식민지배국과 피지배국의 다양한 과거사 청산 노력을 특집으로 다뤘다. 종합하면, 관계 정상화는 그 어떤 곳에서도 쉽지 않았다.

1970년 12월, 폴란드 바르샤바의 유대인 게토 추모비 앞에서 무릎꿇고 사죄하는 빌리 브란트 독일 총리.
1970년 12월, 폴란드 바르샤바의 유대인 게토 추모비 앞에서 무릎꿇고 사죄하는 빌리 브란트 독일 총리.

모범적이라고 평가받는 독일의 과거사 청산 과정에도 우여곡절이 많았다. 폴란드는 포츠담 회담에서 폴란드 서부의 오더강-나이세강에 이르는 땅을 영토로 인정받았다. 하지만 수백년간 이 지역에 살고 있던 독일인들은 오더-나이세 국경을 인정하지 않았다. 독일은 1970년 빌리 브란트 정부가 폴란드와 바르샤바 조약을 맺고 나서야 오더-나이세 국경을 인정했다.

결정적 장면은 브란트가 바르샤바의 유대인 게토 희생자 추모비 앞에서 무릎을 꿇은 이른바 ‘크니팔’이었다. 오늘날까지 화해와 참회의 상징이 된 크니팔은 사실 브란트의 측근들조차 예상치 못한 행동이었다. 브란트는 훗날 “나는 어떤 것도 계획하지 않았지만, 숙소였던 빌라프 궁전을 떠날 때 이미 게토 희생자 추모비 앞에서 특별한 방식으로 추모해야만 한다는 감정에 휩싸여 있었다”고 회고했다. 크니팔은 독일 내에선 “과장됐다”는 등 ‘배신행위’라는 반응을, 폴란드에선 아예 무반응을 얻었지만 세계적으론 과거에 대해 진심으로 용서를 구하는 독일의 이미지를 각인시켰다. 이용일 대구교대 교수는 크니팔을 브란트식의 ‘감정의 정치’가 성공적으로 작동한 사례로 평가했다.

130여년에 걸친 프랑스의 알제리 식민지배는 1954년부터 8년간 이어진 알제리 독립전쟁의 직접적 결과인 에비앙 협정(1962년)으로 끝났다. 그러나 양국 모두 적극적인 과거사 청산 움직임을 보이지 않았다. 쿠데타가 이어진 알제리에선 독립투쟁사를 정권의 정당성을 홍보하기 위한 수단으로 왜곡하기 바빴고, 유례없는 경제발전기에 들어선 프랑스에서 알제리전쟁은 ‘잊혀진 전쟁’이 됐다. 10여년의 내란을 거친 뒤인 1999년 치러진 민주선거에서 알제리 대통령에 당선된 압델라지즈 부테플리카는 민족정체성을 되찾기 위해선 “알제리인이 자신의 역사와 화해”해야 한다고 여겼다. 그는 2000년 프랑스를 방문해 “어제의 피지배자들에 대해 옛 종주국이 짊어지는 도덕적 부채는 지워질 수 없고, 굳이 말하자면 공소시효가 있을 수 없다”고 연설했다. 정부 사이의 줄다리기와 양국 여론의 공방이 이어졌다. 2012년 알제리를 방문한 프랑수아 올랑드 대통령은 “식민통치가 알제리인들에게 끼친 고통을 ‘인정’한다”고 말했다. 하지만 알제리인들이 요구한 ‘사과’에는 못 미치는 표현이었다. 이용재 전북대 교수는 “두 나라의 진정한 화해는 아직 미완”이라고 봤다.

자국 내 혼란으로 식민종주국에 강력한 사과 요구를 하지 못한 건 이탈리아의 식민지였던 에티오피아, 리비아도 마찬가지였다. 독재자가 집권 중이던 에티오피아와 리비아는 국제무대에서 강한 발언권을 갖지 못했다. 장문석 영남대 교수는 “(에티오피아의) 멩기스투 정권과 (리비아의) 가다피 정권이라는 ‘더 큰 악’에 비하면 이탈리아의 식민지배는 ‘문명적인’ 것이었다는 자기합리화도 나타났다”고 밝혔다.

정병욱 편집주간은 “식민지배·피지배의 역사는 해방 이후 당연히 탈식민의 길로 이어질 것 같지만 각각의 필요와 관계에 따라 무시되거나 좁혀지거나 비틀어졌다”며 “제국주의적 관계의 과거사는 당장은 성가신 짐 같지만 그 과거 속에서 희망의 불꽃을 피워 올린다면 미래를 열어가는 힘이 될 수 있다”고 밝혔다.

<백승찬 기자 myungworry@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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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노, 무라야마와 대담서 "군위안부 강제연행 있었다"(종합)

1993년 8월 4일 오후 일본 총리관저에서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관한 일본 정부의 조사 결과를 발표하는 고노 요헤이(河野洋平, 왼쪽) 당시 관방장관과 1995년 8월 15일 역시 총리관저에서 일본의 패전 50주년을 맞아 무라야마담화를 발표하는 무라야마 도미이치(村山富市, 오른쪽) 당시 일본 총리의 모습.
1993년 8월 4일 오후 일본 총리관저에서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관한 일본 정부의 조사 결과를 발표하는 고노 요헤이(河野洋平, 왼쪽) 당시 관방장관과 1995년 8월 15일 역시 총리관저에서 일본의 패전 50주년을 맞아 무라야마담화를 발표하는 무라야마 도미이치(村山富市, 오른쪽) 당시 일본 총리의 모습.

"명확하게 드러난 사실…모집과정에서 감언·거짓말 등도"

(도쿄=연합뉴스) 조준형 이세원 특파원 = 고노 요헤이(河野洋平) 전 관방장관은 일본군 위안부 모집 과정에 관해 명백하게 강제연행이 있었다고 9일 밝혔다.

그는 이날 일본 도쿄도 지요다(千代田)구 소재 일본기자클럽에서 열린 무라야마 도미이치(村山富市) 전 일본 총리와의 대담에서 일본군이 인도네시아에서 네덜란드 여성을 위안부로 삼은 사건을 거론하며 "군이 명백하게 강제적으로 데려가서 위안부로서 일을 시킨 사례"라고 말했다.


일본의무라야마 도미이치(村山富市, 오른쪽) 전 총리와 고노 요헤이(河野洋平) 전 관방장관이 9일 오후 일본 도쿄도(東京都) 일본기자클럽에서 열린 '전후 70년을 말한다'는 주제로 열린 대담에 참석했다.
일본의무라야마 도미이치(村山富市, 오른쪽) 전 총리와 고노 요헤이(河野洋平) 전 관방장관이 9일 오후 일본 도쿄도(東京都) 일본기자클럽에서 열린 '전후 70년을 말한다'는 주제로 열린 대담에 참석했다.

고노 전 장관은 이는 네덜란드 측의 조사에서도 명확하게 드러났고 네덜란드 정부도 인정하는 것이라며 부정할 수 없다는 뜻을 강조했다.

그는 BC급 전범재판 등에서 인도네시아의 위안소에 관여한 옛 일본군이 처벌받았으므로 이제 끝난 일이라고 하는 일각의 주장에 관해 "그렇다고 그런 사실이 없었다고는 절대 말하지 못한다"고 지적했다.

고노 전 장관은 고노담화 발표 당시 목덜미를 잡고 끌고 간 사례 등을 보여주는 문서를 발견한 것은 아니라서 결국 '강제 연행'이라는 표현이 아니라 '대체로 본인들의 의사에 반해 행해졌다'고 기술했으나 강제성을 부정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설명했다.

그는 위안부 동원 방식에 관해 "감언에 의하거나 거짓말을 해서 모았다. 다른 곳에서 일한다고 하고 모집한 것도 있을 것이다. 최근 아베 총리의 얘기처럼 인신매매의 사례도 있을 것"이라며 이들은 결국 본인의 의사에 반해서 모은 것이라고 규정했다.


9일일본 도쿄도 일본기자클럽에서 무라야마 담화의 주인공인 무라야마 도미이치(村山富市) 전 총리와 고노담화의 주역인 고노 요헤이(河野洋平) 전 관방장관의 전후 70주년 대담이 열렸다. 내외신 기자들이 행사장을 가득 채운 모습.
9일일본 도쿄도 일본기자클럽에서 무라야마 담화의 주인공인 무라야마 도미이치(村山富市) 전 총리와 고노담화의 주역인 고노 요헤이(河野洋平) 전 관방장관의 전후 70주년 대담이 열렸다. 내외신 기자들이 행사장을 가득 채운 모습.


그는 위안부를 모으고 나서 매우 강제적으로 일을 시켰다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며 "군이 이동하면 군이 준비한 차에 타고 이동했다. 완전히 군의 관리에 의한 것이고 이를 보면 명확하게 강제성이 있다고 보는 것은 당연하다"고 강조했다.

고노 전 장관은 고노담화가 미야자와 기이치(宮澤喜一) 당시 총리가 한국을 방문해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조사하겠다고 약속을 하고 나서 이뤄진 조사에 기반한 것이고 고노담화 본문에 한반도 출신을 따로 언급하기도 해 고노담화 자체가 한국에 국한한 것이라고 오해하는 경우도 있으나 군 위안부 문제 전반을 대상으로 한 것이라고 부연했다.

고노 전 관방장관은 1993년 8월 4일 일본군 위안부 동원이 '군의 요청을 받은 업자가 주로 맡았으나 그런 경우에도 감언(甘言), 강압에 의하는 등 본인들의 의사에 반해 모집된 사례가 많았으며 더욱이 관헌(官憲) 등이 직접 이에 가담한 적도 있었다는 것이 밝혀졌다'는 내용의 고노담화를 발표했다.

sewonlee@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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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기획]겉은 비슷한데 韓-日속이 다르네

[동아일보]
한일 공통 간식, 삼각김밥 탐구


삼각김밥은 작은 혁명이었다. 1000원도 안 되는 가격에 밥을 그것도 김밥을 먹을 수 있다니. 맨밥도 아니었다. 마요네즈를 버무린 참치, 고추장 양념을 한 쇠고기 등 짭조름한 속 재료가 심심함을 달래 줬다. 삼각김밥이 대중에게 알려지기 시작한 건 2000년이다. 그때 가격은 700원, 15년이 지난 지금 가격은 800원, 비싼 건 900원이다. 여전히 1000원도 안 된다. 15년 전이나 지금이나 1000원 미만으로 밖에서 밥과 반찬을 한 번에 맛볼 수 있는 건 삼각김밥이 유일하다. 삼각김밥은 주머니가 가벼운 중고교생들의 배를 채워 준다. 가볍게 한 끼를 때우려는 여성들에게도 안성맞춤이다.

이 혁명적 먹을거리가 뜬 것은 대한민국 축구사(史)에서 혁명과도 같았던 2002년 한일 월드컵 때다. 길거리 응원에 나선 사람들은 허기를 달래고자 편의점으로 몰렸다. 편의점마다 삼각김밥이 동이 났다. 2002년 월드컵을 기점으로 삼각김밥은 국민 간식이 됐다. 삼각김밥의 인기는 편의점을 대중화시키는 데도 기여했다.


삼각김밥 부동의 1위는 ‘전주비빔’

2002년 월드컵 때 삼각김밥이 유명해졌지만 사실 삼각김밥은 오래전부터 있었다. 1989년 한국에 편의점이 처음 문을 열 때부터 삼각김밥은 판매대의 한 구석을 지켰다. 눈길을 주는 손님이 거의 없었을 뿐이다. 삼각김밥은 2000년대 이전에는 편의점보다는 백화점에서 살 수 있는 식품이었다. 일본에서 ‘오니기리’라고 불리는 삼각김밥이 백화점 식품 매장에서 판매됐다. 지금과는 삼각김밥 내용물이 많이 달랐다. 연어알 명란 등 일본인들이 즐겨 먹던 재료였다. 가격도 900∼1000원으로 2000년대에 편의점에서 판매된 삼각김밥 가격보다 비쌌다.

한국인의 입맛에 맞는 삼각김밥이 개발되기 시작한 것은 2000년대 들어서다. 2001년 처음으로 방영된 삼각김밥 TV 광고는 삼각김밥을 알리는 데 큰 역할을 했다. 그러던 것이 2002년 월드컵 때 인기가 급성장한 것이다. 한국인에게 가장 인기 있는 삼각김밥이 나온 것도 그때다. 2002년 출시된 전주비빔삼각김밥은 이후 지금까지 판매 순위에서 부동의 1위다. 전주비빔삼각김밥은 한국의 전통 음식인 비빔밥을 삼각김밥에 접목시켰다. 달콤한 고추장 소스와 야채를 밥과 비벼 김에 싸먹는 것이 한국인의 입맛에 들어맞았다. 삼각김밥을 살 때면 으레 전주비빔을 고른다는 직장인 허정민 씨(31)는 “전주비빔은 다른 삼각김밥에 비해 상대적 박탈감이 덜하다”고 말한다. 무슨 말인가 하면, 다른 삼각김밥들은 흰 밥 가운데에 속 재료가 있어서 처음과 마지막에는 흰 밥만 먹어야 한다. 하지만 전주비빔삼각김밥은 처음 베어 물 때부터 마지막 한 입까지 동일하다. 편의점 관계자들도 고개를 끄덕이는 부분이다.


전주비빔이 나오기 전까지는 참치마요삼각김밥이 가장 인기가 많았다. CU의 2000년 삼각김밥 판매 순위를 보면 참치마요가 1위다. 참치마요는 인기 반찬인 참치에 마요네즈 소스를 버무렸다. 꾸준한 인기를 누리고 있지만 전주비빔삼각김밥을 넘어선 적은 없다. 전주비빔삼각김밥 출시 이후 만년 2위다.

1위와 2위는 변함이 없지만 나머지 재료의 삼각김밥들은 시대별로 조금씩 다르다. 2000년대 중반에는 소고기고추장 화끈불갈비 등 매운맛의 속 재료가 인기를 끌었다. 유선웅 CU 간편식품팀장은 “2000년대 중반부터 2010년까지는 금융위기 등으로 불황이 이어지며 식자재부터 모든 음식에서 매운맛이 인기를 끌었다”고 말했다. 2010년 판매 순위를 보면 전주비빔과 참치마요에 이어 소고기고추장이 3위다. 핫불닭 불삼겹볶음 등도 당시에 인기를 누렸다.


삼각김밥 신메뉴?… 살아남기 쉽지 않아요

시대별로 달라지는 소비자의 입맛에 따라 삼각김밥도 달라진다. 편의점 상품기획자들은 소비자들의 선호 음식, 일본 편의점 업계의 동향, 경쟁 업체의 움직임 등을 고려해 새로운 메뉴를 제안한다. 20, 30대 여성을 겨냥할지 직장인 남성이 간식으로 즐길 메뉴를 개발할지 등 공략 대상에 따라 결정도 달라진다. 주로 바뀌는 것은 삼각김밥의 속 재료다. 최근에는 밥도 다양해지고 있다. 과거에는 흰쌀밥뿐이었다면 요즘에는 흑미나 현미를 쓰기도 한다. 밥의 품질을 전문적으로 관리하는 사람도 있다. CU에는 밥 소믈리에 2명이 삼각김밥에 들어가는 쌀을 꼼꼼히 살핀다. 수분 함량 등이 주요 점검 대상이다. 갓 도정한 쌀을 써야만 수분 함량이 높아 차지고 향이 깊은 밥맛을 낼 수 있다. 편의점들이 대부분 도정한 지 1, 2일 이내의 쌀을 사용하는 이유다.

상품개발팀에서 시제품을 만들면 우선 내부 평가를 거친다. 또한 소비자들에게 미리 맛보게 함으로써 개선점을 찾기도 한다. 대학생 모니터링단이 대표적이다. 삼각김밥을 즐겨 먹는 이들이 주로 젊은이들이기 때문에 그들의 입맛에 맞는지는 매우 중요하다.

이런 복잡한 과정을 거쳐 신상품이 출시되지만 살아남기는 쉽지 않다. CU 간편식품팀에 따르면 1년에 새롭게 나오는 삼각김밥은 20여 종류다. 이 중 살아남는 것은 절반이 채 되지 않는다. 나오자마자 소리 없이 사라지는 경우도 있다. 올해 3월 나온 ‘알래스카연어주먹밥’도 그런 경우다. 연어 통조림의 소비가 늘어나며 연어가 참치처럼 대중적인 반찬으로 자리 잡은 것에 근거한 출시였다. 하지만 소비자의 평가는 냉정했다. 참치와 맛이 크게 다르지 않은 통조림 연어에 소비자들은 호응을 보이지 않았다. 게다가 참치를 넣은 삼각김밥보다 100원 비쌌던 것이 소비자의 외면을 받았다. 현재 해당 상품의 생산은 중단됐다.

CU에서 2010년 출시한 와사비김 주먹밥도 두 달 만에 자취를 감춘 상품이다. 당시 업계에서는 최초로 김에 고추냉이(와사비) 가루를 뿌린 제품이었다. 중장년층에서는 호응이 좋았다. 문제는 삼각김밥의 주된 고객인 중고교생 및 여성이 외면한 것. 편의점에서 파는 간편 식품은 대부분 남성이 구매하는 비중이 높다. 유일하게 여성의 구매가 많은 것이 삼각김밥이다. 편의점에서 팔리는 대표 제품인 도시락의 경우 남녀 비율이 6 대 4인 데 비해 삼각김밥은 남녀 비율이 4.5 대 5.5 정도로 여성이 더 높다. 한 끼 식사 대용으로 삼각김밥을 찾는 여성이 많기 때문. 또한 다른 간편 식품에 비해 옷에 냄새가 밸 염려가 적다. 컵라면처럼 옷에 국물이 튈 걱정도 없다. 이런 여성 고객의 호응을 얻지 못하는 삼각김밥은 생존하기 쉽지 않다.

예상과는 다른 시장 반응 때문에 사라진 상품도 있다. 2008년 나온 삼각용기형 주먹밥은 비닐을 양쪽에서 벗기는 방식이 아닌, 삼각김밥을 질소충전형 삼각형 용기에 넣어 포장했다. 그 덕분에 유통 기한은 하루 늘어났다. 편의점은 소비자들이 좋아할 거라 기대했지만 정반대였다. 유통기한이 연장되자 고객들은 오히려 신선도에 의구심을 가졌다. 결국 출시 2개월 만에 생산이 끊겼다.


200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역사

삼각김밥이 처음 만들어진 곳은 일본이다. 일본 음식 연구가들은 794년부터 시작된 헤이안시대부터 밥을 김으로 싸 먹는 식문화가 시작됐다고 본다. 김으로 밥을 싸면 밥이 손에 붙지 않아 편하게 집어 먹을 수 있기 때문이다. 김으로 싼 주먹밥은 에도시대(1603∼1867년)에 이르러 지금과 같은 모습을 갖추게 됐다. 일본어로 오니기리인 ‘김으로 싼 주먹밥’ 중 가장 흔한 형태가 삼각형 모양이다. 왜 하필 삼각이었을까. 음식 연구가들은 오니기리란 이름에서 그 이유를 추측한다. 오니기리는 일본어로 ‘쥐다’ 또는 ‘잡다’라는 뜻의 ‘니기루(にぎる)’라는 동사의 명사형인 ‘니기리(にぎり)’에서 왔다. 손에 쥐고 한 입씩 먹으려면 사각형이나 공 모양보다는 삼각형이 편하다. 삼각형이 다른 모양에 비해 먹을 때 밥알이 입에 덜 묻는다. 또 마지막까지 모양을 부서뜨리지 않고 먹을 수 있다.

1970년대 일본에 편의점이 생기면서부터 삼각김밥이 판매되기 시작했다. 집에서도 비슷한 주먹밥을 즐기던 일본인들은 거부감 없이 편의점에서 삼각김밥을 사 먹었다. 일본 세븐일레븐에 따르면 지금과 같은 포장 방식이 나온 것은 1978년이다. 바삭바삭이란 의미의 ‘바리바리’에서 파생된 ‘바릿코 필름’으로 불리는 포장지가 개발됐다. 6년 뒤인 1984년에는 이 필름의 개봉선을 위에서 아래로 내리고 양옆을 당겨서 벗기는 포장 방식이 쓰이기 시작했다. 현재 한국에서도 주로 사용하는 방식이다. 한국에 처음 삼각김밥이 들어왔을 때는 이런 식으로 포장을 뜯는 게 생소했다. 무심코 비닐을 뜯으려다 김이 찢어지는 경험을 한두 번씩은 해야 했다. 정우현 씨(33)는 “한때는 삼각김밥을 제대로 뜯을 수 있느냐가 신세대와 구세대를 가르는 기준이었다”며 웃었다. 바릿코 필름 방식은 김과 밥이 분리돼 있다. 비닐을 벗겨 내야 김이 밥에 붙는 식이다.

일본에는 김을 밥에 직접 싸는 ‘지카마키’ 방식의 삼각김밥도 있다. 과자 봉지를 뜯듯 포장지를 뜯어서 꺼내 먹으면 된다. 처음부터 김이 밥에 붙어 있기 때문에 김이 눅눅해진다는 게 단점이다.

일본 편의점에서 처음 팔린 삼각김밥의 속 재료는 ‘연어, 매실장아찌, 다시마, 가쓰오(가다랑어)’ 등이었다. 일본인들이 즐겨 먹는 반찬들이 한 가지씩 재료로 쓰인 것이다. 1980년대에 들어서는 참치마요, 참치양파, 연어양파처럼 하나가 아닌 2가지 식자재를 혼합한 삼각김밥이 나오기 시작했다. 이후 쇠고기 돼지고기 등 사용되는 재료는 더욱 늘어났다.


삼각김밥에 담긴 한국 일본의 차이

일본에서 삼각김밥에 들어가는 재료는 다양해졌지만 인기 있는 재료는 30, 40년 전이나 지금이나 크게 변하지 않았다. 일본의 포털 사이트인 ‘익사이트 저팬’이 운영하는 ‘익사이트 뉴스’의 올해 4월 기사를 보면, 일본인들이 선호하는 삼각김밥의 속 재료 1위는 구운 연어다. 2위는 매실장아찌, 3위는 명란젓이다. 이어 미역 대구알 가쓰오 참치 등이 뒤따른다. 모두 한 종류의 반찬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이 점이 한국 삼각김밥과 다른 점이다. 유선웅 팀장은 “일본은 양념을 하지 않은 속 재료 자체를 좋아하는 반면 한국인들은 삼각김밥에 양념이 배어 있는 것을 선호한다”고 말했다. 전주비빔이 인기가 많은 이유다. 소고기고추장 참치김치 등에서 보듯 다른 속 재료들도 대부분 양념한 것이다. 현재 CU에서 팔리고 있는 삼각김밥은 13종류. 이 중 일본처럼 연어, 다시마같이 재료 하나를 양념 없이 그대로 넣은 경우는 없다. 일본은 정반대다. 한국의 전주비빔처럼 밥 자체에 강한 양념을 하는 경우는 없다. 매콤한 양념의 재료도 거의 쓰이지 않는다. 한일 양국에서 모두 인기 있는 메뉴는 맵지 않은 참치마요삼각김밥 정도다. 일본의 음식 뉴스 사이트인 엔타베의 지난해 12월 발표를 보면 일본의 3대 편의점 업체-세븐일레븐 패밀리마트 로손-의 삼각김밥 판매 순위에서 참치마요는 모두 1위 또는 2위였다.

이러한 양국 간 차이를 삼각김밥을 즐기는 연령층의 차이에서 찾기도 한다. 한국에서 삼각김밥은 2000년대 들어 젊은층이 간식거리로 먹기 시작한 음식이다. 자극적인 맛이 인기가 높을 수밖에 없다. 일본은 오래전부터 삼각김밥을 먹었다. 편의점에서 팔기 전에도 집에서 만들어 먹었다. 길거리에서 사는 것도 어렵지 않았다. 즉 어린애부터 노년층까지 누구나 먹는 음식이었던 것. 한국도 일본처럼 오래전부터 삼각김밥을 먹었다면 멸치볶음 우엉 명란젓이 들어간 삼각김밥이 존재했을 수도 있다.

한국이나 일본이나 삼각김밥이 진화하고 있는 것은 공통적이다. 한국 편의점에서는 밥을 직사각형 형태로 만들어 그 위에 스팸햄이나 너비아니구이 같은 재료를 밥 크기만큼 얹은 ‘밥 바’란 상품이 나왔다. 밥 이외의 반찬 재료도 배불리 먹고 싶은 사람들을 위한 것이다. 일본에서는 소 갈비살과 돼지 항정살 등 구운 고기를 넣은 삼각김밥이 나왔다. 최근에는 삼각김밥 이름에 쌀의 산지를 넣어 고급 쌀을 썼음을 강조하는 경우도 있다. 서로의 식문화를 모방하며 발달해 온 한국과 일본의 공통 국민 간식 삼각김밥이 앞으로는 어떻게 변해 갈지 지켜볼 일이다.

한우신 기자 hanwshi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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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상이 좋지 않다"…한·일 국민감정 '최악'

한일 국민감정에 대한 양국의 공동조사 결과가 나왔는데, 예상대로 최악이었습니다. 양국 응답자의 절반 이상이 서로에 대해 인상이 좋지 않다고 대답했습니다.

도쿄에서 최선호 특파원입니다.

<기자>

한국과 일본 사람이 상대국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3년째 같은 질문으로 추적 조사한 결과입니다.

인상이 좋다는 응답은 15.7과 23.8%에 불과했고, 한국인의 72.5, 일본사람의 52.4%가 인상이 좋지 않다고 답했습니다.

특히 2년 연속으로, 절반 이상의 일본 사람이 한국에 부정적인 반응을 보였습니다.

원인은 역시 역사문제, 한국인의 74%가 "제대로 반성하지 않는 일본"에 반감을 느꼈고, 일본인 74.6%는 "한국이 일본을 너무 비난한다"고 답했습니다.

한국 응답자 10명 중의 9명은 일본 하면 군국주의, 패권주의를 떠올렸고, 일본은 같은 비율로 한국 하면 반일 민족주의, 국가주의를 떠올렸습니다.

그러면서도 이런 상황은 바람직하지 않고 개선돼야 한다는 의견이, 양국 모두 3분의 2를 넘었습니다.

미약하지만, 반전의 가능성은 있다는 분석입니다.

[정한울/동아시아연구원 선임연구원 : 한국 국민이나 일본 국민 모두, 방문을 많이 해 본 경험이 있을수록, 그리고 상대국에 대한 정보가 늘어날수록 우호적인 태도를 갖고 있다, 라는 것이 확인이 되었습니다.]

정상회담의 필요성에는 두 나라 사람 모두 80% 이상 공감했습니다.

그러나 한국인은 위안부 문제를 정상회담 최우선 의제로, 일본은 '포괄적 관계 개선'을 강조해 온도 차도 뚜렷했습니다.

(영상취재 : 한철민, 영상편집 : 우기정)  

최선호 기자 choish@s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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싱가포르 총리 "일본, 2차대전 잘못 인정해야"

"한국도 더는 일본에 사죄 요구 말아야"

(싱가포르 교도=연합뉴스) 리셴룽(李顯龍) 싱가포르 총리는 29일(현지시간) 일본이 '보통 국가'가 되고 지역에서 적극적인 역할을 맡으려면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저지른 잘못을 인정해야 한다고 강력히 당부했다.

리 총리는 이날 국제전략연구소(IISS) 주최로 열린 제14차 아시아안보회의(일명 샹그릴라 대화) 개막식에 참석해 기조연설을 통해 "일본은 과거의 잘못을 인정하고 일본 여론도 우익 학자와 정치인의 역사 왜곡을 한층 솔직하게 거부하고 나서야 한다"고 밝혔다.

또 리 총리는 "일본이 이미 전쟁에 대해 막연하나마 깊은 반성과 사과를 표명했다고는 하나 위안부와 난징(南京) 대학살 같은 특정 사안에 대해선 덜 분명한 태도를 보이고 있다"고 지적했다.

리 총리는 올해 종전 70주년을 맞지만, 전쟁의 상흔이 "과거 당사국 간 특히 일본과 이웃인 중국, 한국 사이에 여전히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다"며 "70년이면 유럽에서처럼 과거사를 더는 적절히 문제 삼지 않을 때가 지났으며 이를 위해선 당사자 쌍방의 정치력과 포용력이 요구된다"고 강조했다.

다만 리 총리는 중국과 한국으로선 일본 침략으로 겪은 고통에 대해 일본이 충분히 보상하지 않았다고 생각하겠지만, 이젠 일본의 잘못 인정을 받아들이고 더는 일본의 사죄를 요구하지 말라고 권고했다.

리 총리는 "전쟁 역사가 일본을 수세로 몰리게 하거나 후손에까지 증오를 대물림하는 데 쓰여서는 안 된다"며 "화해야말로 일본이 스스로도 원하는 '보통 국가'가 되도록 도울 것"이라고 덧붙였다.

jianwai@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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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일 총성없는 역사전쟁..'유네스코 왜란'

조선인 징용 나가사키조선소
내달 세계유산 등재 유력시
독도·위안부 이은 또다른 도발
한국 “강제노동 적시” 日 부정적
정부, 유네스코 통과여부 주시


한국과 일본이 총성 없는 또 다른 역사전쟁을 벌이고 있다.

일본은 최근 조선인 강제노동 시설이 포함된 근대산업시설의 유네스코 등재를 추진하면서 일본제국주의 시절 한국의 아픔을 자극하는 ‘유네스코왜란’을 야기했다.

일본이 최근 신청한 23개 근대산업시설 가운데는 나가사키 현에 자리한 미쓰비시 나가사키 조선소에 포함된 제3드라이독<사진>과 자이언트 크레인, 목형장(木型場) 그리고 다카시마 탄광과 하시마 탄광, 후쿠오카현에 있는 미이케 탄광과 야하타 제철소 등 7곳이 강제징용된 조선인의 한이 서려있는 곳이다.

일본은 이들 산업시설들의 세계유산 등재를 추진하면서 대상기간은 경술국치조약에 의한 한일합방 이전인 1910년 이전으로 한정하면서 역사논쟁을 피하려는 ‘꼼수’를 부리기도 했다.


일본이 이미 제주 해녀문화와 중첩되는 일본의 ‘아마(海女)’를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를 추진하고 있다는 점을 떠올리면 독도와 군 위안부에 이은 또다른 역사전쟁 도발이라 할 수 있다.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 산하 민간자문기구인 국제기념물유적협의회(ICOMOS)는 지난 4일 일본 근대산업시설의 세계유산 등록을 권고해 오는 6월말 독일 본에서 열리는 제39차 세계유산위원회에서 통과가 유력시되는 상황이다.

한국과 일본은 이와 관련 22일 최종문 외교부 유네스코 협력대표와 신미 준(新美潤) 일본 외무성 국제문화교류심의관 등이 만나 협의를 가졌지만 타협점을 도출하지는 못한 것으로 알려졌다.

한국은 등재냐 아니냐는 이분법적 사고가 아닌 역사를 기억하자는 취지에서 ‘등재 결정문’에 강제노동을 명시하거나 관련 내용을 적시하는 방법을 제시했지만 일본은 부정적 반응을 보였다.

이와 관련, 일본 정부 대변인인 스가 요시히데(菅義偉) 관방장관은 “유네스코에서 ICOMOS의 권고가 그대로 실현되기를 바란다”며 부정적 반응을 보였다.

한ㆍ일 양국은 추가 협의도 배제하지 않는다는 입장이지만 일본이 태도를 바꿀지는 미지수다.

일본의 이 같은 태도는 한국 정부의 안보와 경제, 역사와 정치 문제를 분리대응하겠다는 대일 ‘투 트랙’ 전략에도 부정적 영향을 미칠 가능성이 크다.

한국과 일본은 23일 2년6개월만에 열린 재무장관회의와 2년1개월만에 열린 통상장관회의에 이어 오는 30일에는 제14차 아시아안보회의를 계기로 4년여만에 국방장관회담을 갖기로 하는 등 안보와 경제적인 측면에서는 관계개선을 도모하고 있다.

하지만 일본의 독도와 군 위안부 문제에 이은 조선인 강제노동시설이 포함된 근대산업시설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 추진 도발은 양국관계의 발목을 잡을 가능성이 크다.

조선인 강제노동 시설이 포함된 근대산업시설의 유네스코 등재 여부는 결론이 어떻게 날지 전망하기 쉽지 않은 상황이다. 정부 고위관계자는 26일 “한국의 국력이 그렇게 약하지 않다”며 “한국이 죽자고 덤비는데 유네스코에서 쉽게 통과시키기 어렵다”며 자신감을 내비쳤다.

ICOMOS 역시 일본의 세계유산 신청을 유네스코에 등재 권고하면서도 조선인 강제노동 사실을 적시하라는 직접적 표현을 적시하지는 않았지만 “탁월한 보편적 가치에 기여하는 방향으로 해석할 수 있는 전략을 준비하라”면서 “각 시설의 전체 역사를 알 수 있도록 하라”고 요구해 한국측의 손을 들어준 것이라는 해석을 낳고 있다.

하지만 지난 10년간 ICOMOS의 등재 권고가 통과하지 않은 경우는 이스라엘과 아랍국가 간 영토문가가 연루된 단 1건에 불과했다는 점에서 회의적이라는 관측이 사라지지 않고 있다.

한편 최종 등재 여부는 다음달 28일부터 7월8일까지 독일 본에서 열리는 제39차 세계유산위원회에서 결정되며 세계유산위는 한국과 일본을 포함해 알제리, 콜롬비아, 크로아티아, 핀란드, 독일, 인도, 자메이카, 카자흐스탄, 레바논, 말레이시아, 페루, 필리핀, 폴란드, 포르투갈, 카타르, 세네갈, 세르비아, 터키, 베트남 등 총 21개국으로 구성돼 있다.


신대원 기자/shindw@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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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사 왜곡] 아베의 ‘위안부 왜곡’ 제동 걸릴까… 日 역사학자들도 조목조목 질타

일본인 역사학자들의 집단성명으로 아베 신조(사진) 일본 총리의 위안부 왜곡행보에 제동이 걸릴지 주목된다. 오는 8월로 예상되는 전후 70주년 담화에서 아베 총리가 분명한 위안부 사과를 하지 않을 것이라는 게 일반적인 예상이었으나 이번 사태로 아베 총리가 발언의 수위를 조절할지도 관심이다.

◇위안부 왜곡에 조목조목 질타=일본인 역사학자들의 집단성명은 위안부의 역사적 왜곡을 조목조목 비판했다.

첫째, 위안부의 역사적 사실을 분명히 했다. 성명은 “강제연행된 위안부의 존재가 많은 사료와 연구에 의해 실증돼 왔다”며 “‘고노 담화’의 근거가 무너진 것이 아니다”고 지적했다. 일본 정부는 1993년 8월 고노 요헤이 당시 관방장관이 군 위안부의 존재를 인정하고 사과하는 담화를 발표했었다.

둘째, 위안부를 성노예로 규정했다. 이는 아베 총리가 위안부를 ‘인신매매의 피해자’로 두루뭉실하게 표현한 것에 대해 일침을 가한 것이다. 성명은 “위안부 여성은 성노예로서 필설로 다하기 어려운 폭력을 받았다”며 “성매매의 계약이 있었다고 해도 정치적, 사회적 배경을 무시하는 것은 문제의 전체로부터 눈을 돌리는 것”이라고 반박했다.

셋째, 위안부 왜곡은 인권 침해이자 학문 탄압이라고 밝혔다. 성명은 “위안부 문제를 외면할 경우 일본이 인권을 존중하지 않는다는 것을 국제적으로 홍보하는 것과 같다”고 말했다. 성명은 또 위안부 문제를 제기하는 대학 교원에 대한 사직과 강의 취소 등은 ‘학문의 자유에 대한 침해’라고 비판했다.

성명에 참가한 단체는 일본역사학협회, 오사카역사학회, 규슈역사과학연구회, 센슈대학역사학회, 종합여성사학회, 조선사연구회간사회, 도쿄학예대학사학회, 도쿄역사과학연구회, 나고야역사과학연구회, 일본사연구회, 일본사고구회, 일본사상사연구회, 후쿠시마대학사학회, 역사학연구회, 역사교육자협의회 등이다.


아베 총리의 미 의회 연설 이후 위안부 왜곡을 비판하는 성명에 참여한 학자들은 미국, 유럽, 호주, 남미 등 전 세계적으로 확산됐다. 지난 5월 6일 187명의 역사학자들이 첫 집단성명을 낸 이후 지난 19일까지 450여명으로 늘어났다. 이번에 가해국인 일본의 학자들까지 가세하면서 아베 정부의 입지는 더욱 좁아졌다.

우리 정부 당국자는 “일본 정부는 대부분의 일본 역사학자의 총의를 반영한 성명을 직시하고 위안부 협상 등 과거사 문제에 성의 있게 대응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중국도 위안부 자료를 국가기록으로 승격=한국에 이어 중국도 일본의 위안부 자료를 국가기록을 승격하는 등 일본의 역사왜곡 대응에 나섰다.

25일 중국 현대쾌보에 따르면 중국 국가기록국은 최근 29건의 문서·문헌을 제4차 중국 기록문헌 유산으로 공포하면서 이 중 중앙기록관 등 9개 기록관이 함께 신청한 ‘위안부-일본군 성노예 문서’를 국가급 기록문헌 유산으로 승격시켰다.

샤베이 난징기록관 연구원은 “일본당국이 침략의 와중에서 각국 부녀자를 강제로 일본군 성노예로 충당했고 소위 ‘위안부' 제도를 제정했다”며 “1937년 12월 일본 화중방면군 사령관 마쓰이 이시네가 위안부 제도를 난징에서 실시하도록 명령한 게 역사적 사실”이라고 지적했다.

중국에서는 최근 위안부 강제동원을 소재로 하는 영화 ‘다이한(大寒)’이 제작 발표되면서 일반의 관심을 끌고 있다.

전석운 기자, 베이징=맹경환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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