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1 대지진, 일본 민족주의 강화 계기 될수도"-일본의 시민운동

"3.11 대지진, 일본 민족주의 강화 계기 될수도"

프레시안 | 2011.10.03 오후 3:26
최종수정 | 2011.12.01 오후 1:16
[수정일본사회운동 탐방]<4> 오하시 마사아키(大橋正明) JANIC 이사장

 [프레시안 조희연 성공회대 교수,이영채 케이센대 교수]

 한국의 사회운동은 80년대 이후 30여년 동안 장족의 발전을 해왔으며 수많은 단체들이 출현했다. 하지만 무한 상승곡선을 그릴 것으로 예상했던 한국의 민중운동과 시민운동도 여러 지점에서 발전의 '병목지점'에 도달해 있으며, '전환적 위기'에 직면해 있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반면 일본의 사회운동은 대체로 '실패의 역사'로 한국에는 알려져 있다. 그러나 실패에서도 배울 점이 있으며, 실패의 역사라는 피상적 인식 이면에서 전개되어온 건강한 운동들은 정체기로 진입해가는 한국 사회운동 진영에 많은 시사점을 던져준다.

이런 취지에서 한국의 사회운동을 전공하는 성공회대 조희연 교수와 일본 사회운동을 전공하는 케이센대학교의 이영채 교수가 일본 사회운동의 중요한 전환점과 위기의 지점들에 대해서 성찰적 이야기를 해줄 수 있는 활동가나 학자 등을 두루 만나 연쇄 인터뷰를 진행했다. 호사카 노부토(사타가야 구청장), 가와사키 아키라(피스보트 공동대표), 토리이 잇페이(노동운동가), 아하시 마사아키(학자), 요시다 유미코(생협운동 이사장), 우쯔미 아이코(평화운동가), 무토 이치요(신좌파 활동가), 우에무라 히데키(인권활동가) 등이다.

네번째로 일본의 대표적인 국제협력 지원 활동가이자 개발학자인 오하시 마사아키 JANIC 이사장을 만났다. 편의상 두 교수의 질문은 구분하지 않고 '조희연+이영채(조+이)'로 통일했다.<편집자>


오하시 마사아키

현재 해외협력 및 지원활동을 하는 국제 NGO 단체들을 지원하는 센터 자니크(JANIC: 일본 국제협력 엔지오센터)의 이사장을 하고 있다. 1980-87년 샤프라닐(SHAPLA NEER : 시민에 의한 해외협력모임) 방글라데시 주재원 및 사무국장을 역임했고, 90-93년 국제적십자산하 이슬람적십자(赤新月社連盟) 겸 일본적십자사의 방글라데시 주재원으로 일했다. 93년부터 케이센 대학의 국제사회학과 및 평화학 연구과 교수로 재직하고 있으며, 인도 및 방글라데시 등 서남아시아지역과 깊은 네트워크를 가지고 있다. 일본의 국제협력 NGO 단체를 대표하여 일본정부에 대한 정책제언활동도 지속적으로 해 오고 있다.
 작게보기
▲ 오하시 마사아키 JANIC 이사장 ⓒ조희연 이영채

"한국을 가르치려는 국제연대는 위험천만"
 
조+이 : 먼저 대학교수를 하면서도 일본의 엔지오 운동을 대표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오래 활동했는데, 국제협력 NGO 운동에 관심을 갖게 된 계기는 무엇입니까?

오하시 : 저는 93년부터 케이센여자대학교에서 근무를 하고 있습니다. 본대학교 이사였고 초대학장이었던 무라이 수게나카(*村井資長 : 1909년-2006년 와세다대학교 10대총장) 교수의 소개로 부임을 했습니다. 무라이 학장은 제가 70년대 초반 와세다 대학교 학생이던 시절에 와세다대학교 총장이었는데 당시 학원 자치운동을 전개하다가 협상이 결렬되자 저희가 감금을 했던 분이십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국제적십자사에서 일하고 있는 저를 교수로 초빙해주었습니다.
 
시민단체에서 일본 NPO 센터 부대표이사, 샤프라닐(*SHAPLA NEER : 시민에 의한 해외협력모임. 샤프라닐은 방글라데시 언어로 연꽃의 집. 72년에 설립함. 방글라데시와 네팔의 남아시아를 지원하는 시민단체로 09년부터 인정) 부대표이사, 아유스불교국제협력 네트워크(*일본의 불교신자들이 중심이 되어 설립한 국제협력 NGO) 이사 등 여러 가지 직책을 맡아서 활동하고 있습니다. 주요직책은 샤프라닐의 대표입니다. 72년에 만들어진 단체이고, 78년부터 참여했습니다.

저는 학생운동을 했는데, 그 당시에는 국제협력 NGO에 관심이 없다가 78년부터 관계를 맺기 시작했습니다. 대학의 학생운동이 출구를 찾지 못하는 시기 인도의 비하늘주에 유학을 가게 되었는데 그 지역은 간디주의에 기반한 농민운동이 강했던 지역이었습니다. 귀국후 샤프랴닐에서 일하고 있는 친구의 소개로 방글라데시 주재원(78-80년)으로 가게 되었고, 그때 힌두어를 배웠습니다. 현지에 체류하면서 인도 및 방글라데시 농촌의 빈곤한 민중들에 대해서 관심을 가졌고 이들을 어떻게 지원하고 역동화시킬 것인가가 저의 관심이었습니다. 당시 일본은 80년대 중반부터 인도차이나 난민들을 받아들이고 있어서 국제협력활동이 싹트기 시작하고 있던 시기이기도 했죠.
 
조+이 : 샤프라닐을 포함해서 매우 폭넓은 다른 국제 엔지오 활동도 하고 계시는 데요. 활동내용을 좀더 구체적으로 소개해 주시지요.
 
오하시 : 샤프라닐(SHAPLA NEER)은 71년 방글라데시의 독립이후 생긴 조직입니다. 엔지오 내에서는 상당히 오래된 조직이지요. 저는 82년 일본으로 돌아왔고 샤프라닐의 사무국장을 하면서 급료를 줄 수 있는 엔지오 조직으로 만들었습니다. 당시는 일본에서 엔지오 붐이 시작되던 때였고, 그런 영향으로 84년까지 활발하게 활동을 할 수 있었습니다. 처음에는 옥상의 작은 방, 이 회의실의 1/2정도에서 활동을 시작했죠. 당연히 운영이 어려웠지요. 아내가 고등학교 선생이었으므로 재정적 도움도 받았습니다. 이 시기부터의 주된 활동내용은 방글라데시의 빈민층과 연대를 하는 것이었습니다.
 
엔지오의 모범적 형태가 없었던 시기인데, 조직의 지속성을 위해서 규약도 만들고 회원제도 만들었습니다. 3-4명의 간사로 움직이는 조직이 많이 확대되었죠. 87년에는 샤프라닐의 사무국장을 그만두고, 미국에 유학을 했으며 대학원 졸업후 국제적십자 일을 시작했고, 5년 근무후인 93년에 케이센여자대학으로 부임하게 됩니다. 일본으로 돌아와서 다시 샤프라닐의 임원을 계속 하게 되었고 지금 부대표를 하고 있는데, 2007년 자니크 이사장으로 가면서 대표를 그만두었습니다.

2년 전부터는 일본 NPO 센터(*NPO를 지원하기 위한 NPO. NPO관계자를 중심으로 96년에 설립)의 부이사장을 맡고 있습니다. 이 조직은 국제협력을 위한 시민단체라고 할 수 있는 엔지오(Non-govnermental organization. 비정부기구)와 비영리단체인 엔피오(Non-profit organization) 간의 연결을 담당하는 조직입니다. 샤프라닐은 지역 주민에 의한 풀뿌리운동을 중시하므로 일본의 엔피오 센터와도 협력을 하고 있어서 관여하게 되었습니다. 현재 일본 엔피오 센터 사무국장도 샤프라닐의 임원 출신이 하고 있습니다. 일본 엔피오센터도 중립적이고 대중적인 단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또한 일본의 진보적인 불교조직이라고 할 수 있는 아유스 불교 국제협력 네트워크의 이사를 93년부터 하고 있습니다. 아유스는 국제협력 엔지오 중 특정 단체를 선정하여 그 사업을 지원하는 조직입니다. JANIC는 국제협력 엔지오의 네트워크이므로 모든 국제협력 엔지오를 동등하게 지원하는 입장을 취해야 하지만, 아유스는 진보적인 엔지오에 지원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이외에도 팔레스타인 아동 지원을 하는 엔지오 단체의 감사를 하고 있고, 와세다대학교 부설인 와세다 봉사원이라는 단체의 이사도 하고 있습니다. 이 와세다 봉사원은 많은 엔지오 단체들에게 사무실 공간을 빌려주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여성들의 전쟁과 평화자료관(*女たちのと平和資料館 : WAM. 2005년에 설립)이라는 단체가 들어가 있는데, 이 단체는 일본군 성노예제도 문제에 대한 국제형사재판을 열어서 천황을 유죄화했던 조직이기도 합니다(*2000년 도쿄에서 개최된 일본군 성노예제를 재판하는 여성전범국제법정). 재판 당시 관계자들이 일본의 우익들에 의해 위협을 받을 때, 1주일 동안 봉사원에 숨겨준 적도 있었습니다. 저 자신이 직접 전후보상운동의 전문가는 아니지만, 진보적인 사회운동을 엔지오 입장에서 지원하는 활동을 해 왔습니다.
 
사회복지단체인 코멧트라는 단체도 있는데, 이는 지적장애인이 만든 상품을 가게에 보내는 활동을 하고 있고, 거기서 감사로서 봉사하고 있습니다. 이 코멧트는 사무국장부터 임원, 대표까지 상당히 오랜 동안 일관되게 활동해 온 좋은 모델이기도 합니다.
 

 작게보기
▲ JANIC의 국제연대 활동 팜플릿 ⓒ조희연 이영채

일본 국제협력의 역사
 
조+이 : 일본의 엔지오활동은 풀뿌리 조직으로 많이 알려져 있습니다. 일본 국제협력 엔지오의 역사에 대해서 간단히 소개를 해주시지요.
 
오하시 : 일본의 국제협력 엔지오 활동은 60년대부터 시작됩니다. 제2차 세계대전 중에도 엔지오는 있었지만, 아주 미약했어요. 초기에 3개의 대표적인 국제협력단체가 있었습니다. 먼저 오이스카(*OISCA; The Organization for Industrial, Spiritual and Cultural Advancement-International, 61년에 설립. 농촌을 중심으로 아시아의 농촌개발, 인재양성, 환경보존 등의 활동)라는 단체가 있는데, 아나나이교(*죠몽대마의 정령 아나나이(麻柱)를 숭배하고 복권을 지향하는 종교)라는 신토계열의 단체가 만든 엔지오입니다. 민족주의적 성향이 강한 단체였는데, 나고야에 신자가 많았습니다. 지금도 종교법인은 아니지만, 유기농업을 하면서 근면한 농업활동을 아시아에 가르쳐 주자는 지향을 가지면서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농업이 국가의 부를 만든다는 생각을 하고 있고, 일본인의 민족주의적 정체성을 강조하기에 일장기를 거는 것도 당연한 것으로 생각합니다.
 
다음으로 JOICFP(*Japanese Organization for International Cooperation in Family Planning; 1968년 설립)라는 단체가 있습니다. 여성들을 대상으로 한 민간단체인데, 미국의 마그렛 상가(Margaret Higgins Sanger : 1879-1966 미합중국의 산아제한 활동가)가 만든 자매단체입니다. 한국에도 관련단체가 있을 것입니다. 2차대전 이후 여성이 피임을 통해서 가족계획을 조정한다는 캠페인을 했지요. 사회당의 가토시제(*加藤シヅエ : 1879-2001 일본의 부인행방 운동가)의원도 개인적인 경험을 통해 적극 주장했지요. 2차대전 이후 일본에서 피임을 통해 인구를 감소시킨 정책을 아시아 및 아프리카 지역에 전달하고자 했던 것입니다. 조이세프는 IPPF(국제가족계획연맹)의 산하단체이기도 합니다. 이것은 종교적인 단체는 아니지만 민주적인 정치단체들과 연결되어 있었습니다.
 
셋째로, JOCS(*Japan Overseas ChristianMedical Cooperative Service, 1960년 설립)라는 단체로 일본 그리스도교 해외의료협회입니다. 이 단체만이 일본의 전쟁책임에 대한 보상의 측면에서 아시아에 의료를 제공한다는 의식이 있었습니다. 앞의 두 단체와는 지향이 좀 달랐지요. 리버럴한 기독교인의 속죄의식이 있었던 것입니다. 일본의 국제협력 엔지오 단체에서 전쟁책임을 확실히 밝히는 단체는 이곳이 유일하다고 봅니다. 일본 엔지오 단체들은 대체로 아시아에 대한 책임의식을 갖고 있지는 않습니다.
 
단지 아시아에 봉사하고 지원하는 것 또는 민족주의적 관점에서 아시아와 사업을 하는 것과 일본의 전쟁책임을 속죄하는 차원에서 아시아를 지원하고 국제협력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실행하는 것은 조금 다른 차원이지요. 70년대의 학생운동인 소위 [전공투 운동]에서 처음으로 아시아에 사죄해야 한다는 역사의식 나오게 되었으니까요. 진보적 운동 속에서는 물론 빠른시기에 전후책임의 의식이 있었지만, 국제협력 엔지오영역에서는 희박했습니다. 일본의 엔지오에서 사죄의식이 없는 것을 보면, 신좌익의 운동 경험자들이 꼭 엔지오로 전환된 것은 아니라고도 말할 수 있습니다.
 
일본의 대표적인 베트남전쟁 반대를 위한 평화연대운동이라고 할 수 있는 베헤련(베트남에 평화를 시민연합) 활동의 경험자들 중 아시아대한 역사인식 있는 사람들이 모인 것이 아시아태평양자료센터(*PARC : Pacific Asia Resource Center, 베트남 반전운동 이후 아시아민중과의 연대를 목표로 설립된 시민단체. 73년 설립)였습니다. 배헤련은 베트남 전쟁이 끝나면서 해체하게 되고, 이 운동은 파르크를 통해 일본시민사회가 아시아와 새롭게 접하게 되었다고 할 수 있죠.
 
샤프라닐에는 시민에 의한 아시아교류협력 모임이라고 하는 정체성이 있었습니다. [시민에 의한 교류협력]이라고 하는 개념을 제가 속한 단체가 만든 셈이지요. 그 전까지는 급진적인 혁명주의적 맥락에서 [인민연대]라는 개념이 지배적이었습니다. 좌측에서의 인민연대나 우측에서의 자선이나 구호지원이라는 개념과 달리, 시민연대라는 새로운 생각을 하게 된 것이지요. 일본의 국제협력의 방향성을 샤프라닐이 연 셈이지요.
 
일본 해외지원 기구들
 
조+이 : 정부 차원의 해외개발원조인 ODA와 관련된 국제지원사업의 시민파트너인 JANIC가 중요한 위치를 갖는 것으로 압니다. JICA(*Japan International Cooperation Agency : 국제협력기구. 2002년 설립된 일본의 해외원조본부)라는 기구도 있는데, 일본의 해외개발지원과 관련기구에 대해서 설명을 해주시면 좋겠네요. 한국에서도 해외개발원조 감시가 시민운동의 새로운 감시영역으로 등장하고 있는데요.
 
오하시 : JICA는 외무성 산하의 정부단체입니다. 정부의 해외개발원조자금의 실시기관이지요. JANIC는 1987년에 만들어졌습니다. 국제협력사업을 하는 JVC(*일본국제볼란티어센터. 1980년에 설립된 해외원조의 실무단체. 분쟁지역에서의 지원활동. 현재 이라크, 아프가니스탄 등에서 활동 중), 샤프라닐 등의 엔지오 단체들이 80년대 중반에 많이 만들어지고, 이런 단체들의 연합단체로 자니크(JANIC)가 만들어지게 됩니다. 국제협력 엔지오 약 500개 중 약 100개 정도가 가입되어 있지만, 국제협력 엔지오 전체를 대변하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전체로 보면 네트워크로서는 가장 큰 조직입니다. 성향은 리버럴한 조직입니다. 제가 나름대로 그런 방향으로 노력하고 있고요. JVC라는 단체는 샤프라닐만큼 그렇게 리버럴한 성향은 아니지만, 그래도 진보적인 성향을 유지하려고 노력하고 있는 단체입니다.
 
일본 엔지오 단체에는 실제 시민에 의한 민주주의를 생각하는 사람이 많이 있습니다. 물론 월드비전, 보수적 기독교단체, 신토회 등 보수적인 단체도 폭이 크고 다양합니다. 자선단체도 많이 있고요. 하지만 국제협력 엔지오 단체들은 남북격차의 주된 원인이 북반부 국가들의 이익추구에 있다는 정도의 비판적 공감대는 있습니다. 하지만, 신좌익의 진보적 혹은 리버럴한 지향과는 다릅니다.
 
조+이 : 80년대 왜 엔지오가 많이 만들어졌는지요.
 
오하시 : 가장 큰 이유는 일본 기업의 해외진출과 관련됩니다. 일본기업의 해외진출지에서의 사회적 문제점을 지적하면서 출발한 단체가 많습니다. 부유해지니까 해외로 나가는 사람들이 많이 생기고, 실제 경험을 하니까 그 경험으로 지원단체를 만들게 된 것이지요. 90년대에도 역시 엔지오가 증가합니다. 90년 전후에는 일본정부가 엔지오단체를 위한 공적지원금을 확대하면서 그 흐름은 더 가속화되고요. 예컨대 우생성(총무부)이 만든 국제봉사 적금 등 약 7-8억엔의 기금이 있고, 환경성의 경우 지구환경기금, 외무성의 경우는 엔지오 보조금을 지급하고 있습니다. 매년 약 50억엔을 엔지오 단체들에게 지원하고 있습니다.

조+이 : JANIC의 경우 ODA 예산을 어떻게 사용하는지 구체적으로 설명해 주시지요. 단순전달자인가요.

오하시 : 해외개발지원 자금(ODA: official development assistance)은 자이카에서 받기도 하고, 외무성에서 받기도 합니다. 대부분 실시하는 프로젝트에 대한 지원금의 형태이지요. 특정 지역을 위한 지원계획서를 제출하면 심사 후 지원금이 나오는 식입니다. 자이카의 경우는 자이카의 사업을 위탁받는 식이 됩니다. 외무성의 경우는 지원적 성격이 강합니다. 프로젝트에 자기부담도 있지만, 프로젝트 지원입니다. 거기에는 인건비도 설정할 수 있고요. 프로젝트 비용의 몇 %를 인건비로 사용하는 식으로 계획서를 제출하면 됩니다. 퍼센트가 따로 정해져 있지는 않지만, 외무성의 지원예산 등도 모두 해외개발자금(ODA) 예산으로 카운트 됩니다.
 
조+이 : 그러면 일본의 오디에이 예산을 각 부서가 일정하게 관장하고 그것을 엔지오에 배분하는 형식이 되는 것 같은데 맞습니까?
 
오하시 : 그렇습니다.
 
시민단체가 공적 자금을 사용하는데 따른 논란
 
조+이 : 일본의 경우 시민단체가 공적 자금을 사용하는 것에 대해 부정적인 견해가 많은 것 같습니다. 오하시 선생은 공적자금에 대한 어떤 견해를 가지고 계십니까.
 
오하시 : 단체에 따라 공적 자금을 받기도 하고 안 받기도 합니다. 예를 들면, JOCS처럼 기독교의 진보적 지향이 강한 조직들은 공적 자금을 받지 않습니다. 그 외에는 대체로 받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진보성이 매우 강했던 PARC는 외무부의 프로젝트 지원의 공적 자금을 받는 것이 내부 갈등이슈가 되어 분열까지 한 경험이 있습니다. 당시 저도 이사였는데, 98년에 인도네시아의 민주화운동으로 수하르토 정권이 붕괴하고 동티모르가 독립운동을 하게 되지요. 저는 PARC가 동티모르를 지원해야 한다는 입장이었지만, 공적자금을 활용하는 것 까지는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PARC는 국제엔지오가 아니었고, 그 단체의 생성 역사와 성격이 있기 때문에요. 하지만, 대표 이사 중에는 정부의 해외개발지원금이나 국제협력기금을 받는 단체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을 했지요. 저는 그때 그만두었는데, 결국 이것이 문제가 되어 단체는 분열하게 되었습니다.
 
2002년에 스리랑카에서 지진이 일어났지요. 스리랑카 지역에 대한 외무성의 지원금이 집중되었고 엔지오단체들이 스리랑카 프로젝트로 전환하기도 했습니다. PARC도 스리랑카 프로젝트를 실시하여 외무성 자금을 지원받았습니다. 그런데 일본정부는 홍보를 하기 위하여 PARC 마크와 일장기가 함께 실린 모자를 주민들에게 배부하게 되었고 진보적인 단체가 일장기를 주민들에게 배부해야 하는 상황이 발생한 것입니다 (*전공투 세대와 같은 진보적 운동가들에게 일장기는 일본제국주의의 상징이고 이것을 거부하는 것은 진보운동의 기본적인 인식이다). 결국 이 문제를 둘러싸고 PARC는 많은 사람들이 탈퇴하는 등 분열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단지 PARC만의 문제가 아니고 일본정부의 공적자금을 지원받는 일본 엔지오단체들에게 매시기 강요되어지는 사례 중 일부입니다.

자위대와 함께 국제원조를 한다고?
 
조+이 : 일본의 ODA에 대한 감시네트워크 활동을 해온 것으로 아는데, 이 활동에 대해서 좀 설명을 해주시지요. 특히 9.11사태와 이라크전쟁 이후 무슨 변화가 있었습니까.
 
오하시 : 샤프라닐의 경우 내부 규정이 있습니다. 전체 수입의 25%를 넘는 외부지원을 받으면 안 됩니다. 단체의 독립성을 유지하기 위해서 내부 규칙을 만든 것이지요. JVC는 정부에 비판적이지만, 외부자금의 의존율이 많이 높습니다. 어려운 지점이 바로 그 지점입니다. 예를 들면 정부이니까 조심해야 한다고 하지만, ODA는 세금이니까 활용해야 한다는 입장을 가진 JVC(일본볼란티어센터)와 같은 단체도 있습니다.
 
우리는 ODA의 군사화에 대해 경계해야 한다고 주장을 해왔습니다. 9.11 사태와 이라크 전쟁 이후 일본정부는 자위대를 파병하여 이라크와 아프간에 PRT(*provincial reconstruction team : 군과 민간에 의한 전후복구팀)라는 부흥계획을 실시하고 있는데, 여기에 엔지오를 함께 동원하는 것에 대해서 문제제기를 했습니다. 엔지오의 중립성이 훼손될 수 있는 것이니까요. 물론 ODA로 가는 것은 중립성이 있는가? 자위대가 ODA지원금으로 움직이는 것은 문제가 없는가? 등 논의의 여지가 있습니다. 그런데 한국의 ODA 활동에서는 엔지오단체와 군이 밀접하게 활동하는 경우가 많이 있다고 저는 파악하고 있습니다만.
 
조+이 : 아주 중요한 문제 같은데, 구체적으로 이야기해 주면 좋겠네요.
 
오하시 : PKO(국제평화유지군)에는 엔지오도 같이 활동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일본에는 전전의 경험들이 있어서 민간단체인 엔지오가 자위대와 같이 해외에서 활동하는 것에 대해서 경계심이 있습니다. 한국에도 해외개발원조, 즉 오디에이를 받는 한국엔지오들의 연합체가 있습니다. KICOC(Korea international coalition for overseas cooperation)라고 하지요. 그런데 이 점에서는 한국의 해외원조단체들도 경각심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조+이 : 중요한 지점인 것 같습니다. 이야기하실 때 엔지오를 이야기하시는데 한국과는 의미가 좀 다른 것 같습니다. 최근에 선생님이 쓴 [일본의 엔지오 활동의 실태와 유형](日本におけるNGO活動の實態と類型)을 보면, 엔지오, 시민사회조직, 블론티어 등의 개념을 정리하고 있는데요. 예를 들어 엔지오를 [비정부, 비영리적인 입장에선 시민이 주도하는 자발적인 조직으로서, 동시에 국제적인 과제에 대해서 타익 또는 공익적인 활동을 행하는 조직]으로 정의하고 있는데, 다른 아시아 나라에서의 엔지오의 개념과 많이 다른 것 같습니다. 한국은 엔지오가 사회운동적 의미를 많이 내포하고, 엔피오(NPO. 비영리단체)가 오히려 탈정치적인 중립적인 활동을 한다거나 하는 것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오하시 : 일본에서는 엔지오의 개념이 한국과 다릅니다. 일본에서는 국제협력을 하는 단체를 먼저 엔지오로 연상합니다. 반면 한국에서의 엔지오는 사회운동적 성격을 갖는 단체를 의미하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국제협력분야는 기독계열의 국제협력단체라던가 보수적, 비정치적인 단체들이 주로 하게 되고, 엔지오는 별로 참여하지 않는 현상이 있습니다. 그래서 사각지대에 군과 엔지오가 중첩되는 것에 대해 경계심이 없는 현상도 나타나는 것 같습니다. 시민운동적 문제의식이나 리버럴한 문제의식도 없이 국제협력이라는 이름으로 해당 지역에서 무의미한 사업이 이루어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바로 이런 점에서 역으로 엔지오가 감시활동을 해야 합니다.

80년대부터 세계은행이 엔지오를 파트너화함으로써, 엔지오가 국제협력분야의 일부가 됩니다. 병목지점에 서 있던 세계 각국의 엔지오단체들이 이를 받아들이게 되면서 대신 운동적 에너지를 잊어버리게 됩니다. 인도가 전형인데, 엔지오와 사회운동단체를 대립적인 것으로 인식하게 됩니다. 민중단체 활동가의 눈으로 보면, 엔지오는 정부와 결탁해서, 주민들을 위한 공공사업을 해 주는 단체의 이미지가 있습니다. 예컨대 엔지오는 댐 건설을 찬성하고 보상금을 이야기합니다. 하지만 사회운동은 댐 건설을 반대하지요. 이렇게 해서 인도에서는 사회운동과 엔지오가 대립적으로 보이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방글라데시에서는 사회운동이 약하므로 운동이라고 하면 엔지오를 의미하고, 감시활동을 하는 단체들이 운동도 하는 식이 되고 있습니다. 저는 국제협력 엔지오 단체들은 현지의 리버럴한 단체와 파트너관계를 형성해서 감시활동을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작게보기
▲ 오하시 이사장과 대담중인 조희연 교수(맨 오른쪽)와 이영채 교수 ⓒ조희연 이영채

해외지원 활동할 때 한국 경제발전과 민주주의를 가르쳐주려고 해서는 안돼
 
조+이 : 일본의 오디에이 감시활동을 리드하고 있는 오하시 선생의 입장에서 한국의 엔지오 단체들의 활동에 대해서 조언을 한다면 어떤 점이 있을까요. 현지의 리버럴한 단체와 파트너십을 형성하라는 조언도 중요한 것 같습니다.
 
오하시 : 저의 선입견일지도 모르지만, 한국의 국제교류협력단체들은 아시아의 현실에 대해서 아시아의 각국이 갖고 있는 문화의 풍부함을 잘 알고 있지 못한 것으로 보입니다. 문화적으로 후진적인 지역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민주주의도 뒤쳐져 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고요. 그래서인지 엔지오 활동의 목표와 한국의 경제발전의 성과와 민주주의를 가르쳐주려고 한다는 인상을 받을 때가 많습니다. 그것은 아주 위험한 것으로, 한국을 마치 아시아의 큰형이라는 생각하게 하는 것으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아시아는 일본이나 한국의 문화를 뛰어넘는 문화의 다양함과 풍부함이 있습니다. 또한 아시아에는 글로벌화가 진행되면서도 그것에 저항하려는 흐름도 있습니다. 그러한 지역사회 및 민중과의 연대가 중요합니다. 이런 것을 국제협력이라고 불러도 좋습니다. 글로벌 시민연대라는 관점에서 국제협력이 이루어져야 합니다. 현지 프로젝트를 한다는 관점이 아니고요.
 
샤프라닐도 현지 프로젝트를 하고 있지만, 저는 현지민에게서 배우려는 생각을 하자고 매번 주장합니다. 좋은 단체들이 있고 연대도 하려고 하지만, 현지에서의 우리들의 개발의 모습이 바람직한가하는 의문을 가지고 언제나 논의를 합니다. 외람되지만 저는 그런 인식이 한국의 국제협력단체의 활동에서는 아직 부족하다고 생각합니다. 아시아의 다양성과 풍요로움을 존중하는 인식을 가져야 합니다. 프로젝틀 제공해준다는 인식은 금물이지요.
 
조+이 : 인도의 불가촉천민들에 대한 교육지원활동도 참여하고 책까지 쓴 것을 보면서 인상적이었습니다. 인도의 불가촉천민 지원운동에 참여하게 된 계기는 무엇입니까.

오하시 : <불가촉 천민과 교육>이라는 책의 부제를 보면, [인도 간디주의의 농지개혁과 붕양의 사람들]이라는 부제가 달려 있습니다. 간디는 인도의 독립운동의 정치지도자로만 알려져 있지 사회정치활동에 대해서는 별로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는 농촌개혁에 대해서도 많은 힌트를 주었죠. 개발은 농촌이 중심이 되어야 한다, 물레를 돌리는 것도 그런 인식의 바탕위에서 이루어진 것이지요. 그런 점에서 간디의 사상은 독특합니다.
 
인도가 독립하고 간디가 죽은 후에, 간디주의에 기반하여 농촌사회를 어떻게 개혁해야 하는가라는 새로운 과제가 대두됩니다. 인도에는 불완전한 농지개혁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좌파가 봉기를 해서 농지를 장악하는 현상이 많이 나타나죠. 그런데 무장봉기와 토지장악을 중국이 지원한다는 의혹이 있어서 인도가 반발하기도 합니다. 간디주의는 비폭력주의이기 때문에 좌파의 무장봉기에 대해서 간디주의는 어떤 입장을 취하지 못합니다.
 
간디의 제자 중에 제이피 나라양(*Jayaprakash Narayan : 1902년-1979년. 정치가)과 아차리야 비노바 라고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비노바는 점령투쟁을 사용하고 지주와 농민의 매개역할을 하죠. 농민이 진정 토지를 원하면 주겠다는 지주의 발언을 끌어내기도 합니다. 예를 들면, 간디의 비폭력사상에는 토지는 계급투쟁에 의해서 획득하는 것이 아니라 신이 준 선물이라는 식의 사고를 하지요. 그래서 토지가 있어도 천국에 못가지고 가기에 기부운동을 요구하게 됩니다. 소위 [부단운동](부는 토지, 단은 기부를 의미)을 합니다. 토지기부를 의미합니다. 이것이 50년대에 활발했는데, 비하르주에서 특히 과격하게 일어납니다. 거기에서 불가촉천민에게 토지를 주자는 운동이 일어납니다. 그래서 [부단 빌리지]라고 불렸지요. 거기는 불교가 시작된 곳이기도 하고, 간디주의도 활발합니다.

제가 1974년에 주재원으로 가게 되었을 때 부단 빌리지를 지원하는 활동을 했습니다. 도로를 만들고, 간디주의를 선전하는 활동도 했지요. 하지만, 이런 운동을 하던 중 부단 빌리지의 마을 중 한 곳에서 위기가 발생하게 됩니다. 많은 사람들이 아사로 죽는 비극이 나타나게 되는 것이지요. 물론 그 아사의 최대의 피해집단이 바로 최하층 불가촉천민(*인도의 최하층 불가촉천민은 약 16%인데, 10개로 나뉨)이 되었습니다. 그때 아시라는 간디의 또 다른 제자가 부단지역에서 불가촉천민의 자식들에게 기숙사를 만들어 교육하는 활동을 시작했습니다. 저는 74년부터 거기에 가서 지원하는 활동을 하기도 했습니다.
 
당시는 인도전역에서 반정부 투쟁이 많이 일어나는 시기였고, 특히 비하르 주에서 많았습니다. 간디의 제자 제이피 나라양이 이 지역의 비폭력 반정부운동을 주도하게 됩니다. 이렇게 되자, 비노바가 이끄는 반정부운동과 제이피 나라양의 반정부운동으로 분열되게 됩니다. 아시라는 비노바 파였지만, 비하르 주의 주변에는 제이피 나라양 계의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바로 이러한 상황에서 전개되는 이 지역의 문제에 대해서 제가 논문으로 썼습니다.
 
제이피 나라양의 비폭력 운동과 간디의 비폭력운동의 차이는 계급투쟁을 인정하는가 아닌가에 있다고 논문에서 주장했습니다. 나라양은 계급투쟁을 인정하는 입장이었지요. 나라양은 인도에서 첫 사회당을 세운 사람이었는데, 이후에 사회당을 떠나 간디주의자가 되었습니다.
 
조+이 : 당시 주로 어떤 활동을 했습니까.
 
오하시 : 제가 개인적으로 구체적인 활동을 한 것은 아니고요. 이 책은 이러한 기숙사제도에 의해 교육을 받은 아이들이 20년 후에 어떤 활동을 하는지를 보고한 내용입니다. 예컨대 한 엔지오가 지원하면, 장래에 어떻게 결과가 나타나는 가하는 다양한 사례들을 보여주고자 했습니다. 교육을 시키는 것만으로 인간이 바뀌지 않는다. 그 이후의 지원이 더 필요하다는 것을 전하고자 했습니다. 예를 들면 아슈라무 지역에서의 교육지원활동은 8년간만 하고 종결됩니다. 이후 지원을 하지 않지요. 그러니까 8년이 지난 후, 원래의 빈곤의 생활상태로 되돌아가버리게 됩니다. 그래서 8년 이상의 지원이 필요하다는 것을 드러내고자 한 것이지요.
 
이슬람적십자연맹, 적신월사연맹(赤新月社聯盟)

조+이 : 적십자활동도 오랫동안 했는데 거기에서 얻게 된 성과는 어떻습니까. 90년부터 93年까지는 일본적십자사 방글라데시 주재원이면서 국제적십자 산하 적신월사연맹(赤新月社連盟) 주재원이기도 했는데요. 적신월사연맹(赤新月社聯盟)이 이슬람계 적십자사라는 것도 이번에 처음 알았네요. 이슬람권에서 일하면서 느낀 점, 이슬람세계에 대한 동북아시아권의 시각 교정을 위해서 경험을 이야기해 주시지요.
 
오하시 : 이슬람권에서의 적십자는 십자가를 쓰지 않기에 적신월사(赤新月社)라는 이름을 쓸 뿐이고, 적십자의 이념이나 활동은 동일합니다. 저는 국제적십자사 산하 국제적신월사 방글라데시 사무실에서 일을 한 것이지요. 샤프라닐에서 일할 때는 빈곤층의 사람들을 위한 활동을 했는데, 국제적십자사 활동은 마을 전체를 대상으로 합니다. 마을 전체를 대상으로 하다보면 그 해당마을 속에는 계급분화가 있고(지주와 소작농 등), 그래서인지 마을 전체를 위해서 일하는 방법을 배우게 됩니다. 현지 부대표는 대표를 대행하는 업무도 합니다. 또한 국제적십자사는 중립적이어야 하는데 권력과의 유착관계계가 존재하는 것도 알게 되었습니다. 예를 들면, 난민들 피난처를 만들 때 관료들이 특정 지역에서 물건을 사라는 요청이 있기도 했습니다. 또한 적신월사의 간부가 자기 마을에 많은 지원 물자를 배부하는 경우도 보았습니다.
 
일본 엔지오들의 다양한 모금활동, 공정무역 등
 
조+이 : 일본의 엔지오단체들은 운영을 위해서 다양한 재정조달과 모금활동을 하는 것으로 압니다. 한국의 단체에게도 도움이 될 것 같은데, 구체적인 사례를 소개해 주시면 좋겠네요.
 
오하시 : 일본엔지오가 쓰는 재정규모가 300억엔 정도 됩니다. 약 500개의 엔지오 중, 예산규모가 40억엔이 되는 엔지오가 3개나 있습니다. MSF(국경없는 의사회)라고 하는 프랑스계의 엔지오가 50억엔 정도 규모이고 월드비젼이나 플랜인터내셔날도 큰 규모의 단체입니다. 이 3개를 제외하면 JOICFP가 약20억엔 정도의 규모이고요. 제가 일하는 샤프라닐은 재정규모상 약25위쯤 될까요. 재정은 약 2억8천만엔 정도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전체예산의 조달은 기부(33%), 회비(7.6%), 수공예품(크라프트) 판매(24%)로 충당되고 있습니다. 정부지원금인 공적자금은 작년에는 30%를 차지했네요. 정부지원금은 가능하면 25%를 유지하고자 합니다.
 
주목할 점은 일종의 공정무역(평등무역)이라고 할 수 있는 크라프트의 제작이, 샤프라닐의 전체 지출에서 27%를 차지합니다. 그러니까 적자인 셈입니다. 지출에는 해외활동비(37%), 관리비(28%)가 있습니다. 저는 조성금이 25%, 회비가 7-8%, 기부금이 30%를 넘으면 이상적이라고 생각합니다.
 
샤프라닐이 재정을 충당하는 방법은 다양한데요. 예를 들어 중고 책을 기부 받는 것이 있습니다. 기부자가 필요 없는 책을 [BOOK OFF](*중고책 및 CD, 음반 취급 체인점)에 가져다 주면 북오프는 한 박스당 1000엔을 샤프라닐에 기부합니다. 책 한 박스를 기부하면 물건에 따라 다르지만, 시가가 약 3천엔 정도 된다고 할 때, 북오프는 10%를 붙여서 다시 샤프라닐에 기부를 합니다. 이 헌책에서 나오는 돈이 1년에 대체로 600만엔(약7천200만원)이 됩니다. 작년에는 1,500건 정도의 기부가 있었습니다. 북오프는 새 책을 팔면서도 샤프라닐에 기부금을 보내주고 있습니다.
 
엽서사업이라는 것도 있습니다. 엽서사업으로 얻는 돈은 약 1500만엔에서 2천만엔이 됩니다. 쓰지 않은 엽서 또는 주소 등이 틀려서 버리게 되는 엽서를 기부받는 것이지요. 일본에는 매년 신년에 보내는 연하장에 복권형식의 번호가 있습니다. 100장에 두장정도는 당첨됩니다. 당첨된 연하장은 우체국에 가져가면 우표를 살 수 있는 티켓으로 바꾸어 줍니다. 한국에는 이런 제도가 없는 것으로 알고 있고요.
 
조+이 : 크라프트 즉 수공예품은 방글라데시의 현지 주민과 공동으로 제작하여 일본에 수입하여 판매하는 일종의 [공정무역](평등무역) 으로 운영되고 있는 것인가요?
 
오하시 : 공정무역의 일종입니다. 초기에 수공예품은 현지 주민에 대한 동정심으로 사주는 형태로 출발했습니다. 하나를 사더라도 5-10년 쓰게 되니, 사주는 사람도 결국 한정되었지요. 그래서 15년 전부터 일반사람들도 살 수 있는 물건을 만들자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이후 소비자층이 바뀌게 된 것이지요. 그러다 보니 2천엔, 3천엔짜리가 늘어나게 되더군요. 고급 상품을 사고자 하는 층을 대상으로 신상품을 개발하는 것과 동시에 한번 구매하면 오래 쓸 수 있는 신상품도 개발하게 되었습니다. 비누도 시작을 했고요. 공예품 등 다양한 물건들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커피가 전형적인데, 생산과정에서부터 모든 것을 감시하는 공정무역이 있지요. 반면에, 일부만 공정무역 기준을 적용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런 식으로 유럽도 변화하고 있고 일본도 변화하고 있지요. 우리는 성실하게 실천하고 있는 공정무역의 한 단체에 속한다고 생각합니다. 어떤 단체가 구입하고 있고, 생산자단체에 어떤 이익이 돌아가고 있는지도 소비자에게 상세히 설명을 합니다.
 
조+이 : 일본의 엔피오법 제정(*98년 제정된 특정비영리활동촉진법) 이후 각 단체들은 어떤 세제혜택을 받고 있는지요?

오하시 : 2011년 6월에 엔피오법이 개정되었습니다. 당시에는 1만엔 기부를 하면, 1만엔의 기부금이 소득공제가 되는 식이었죠. 그런데 지금은 천엔을 뺀 나머지의 절반 즉 4500엔을 세금에서 빼 줍니다. 이전에는 전체소득에서 기부금을 빼고, 나머지에 세금의 비율을 부과하는 형태였는데, 지금은 만엔을 내면, 천엔을 뺀 나머지의 금액 중에서, 예를 들어 50%세금의 비율을 공제해주는 식으로 합니다. 그러면 나에게 4500엔이 되돌아오기에 실질적으로 5500엔만 기부하고 1만엔 기부한 혜택을 받는 셈이 됩니다. 공제혜택을 많이 주어서 납세자의 기부를 늘리고자 하는 것이지요.
 
엔피오의 경우에는 인정(認定) 엔피오(*국세청장이 인정하는 세제상의 면세조치를 받는 NPO법인, 인정제도는 2001년에 시작됨. 실적판정기간의 기부금 등 수입금액이 경상수지금액의 원칙 20%이상을 인정조건으로 하고 있음)가 되어야 이러한 혜택을 받을 수 있습니다. 인정 엔피오가 되기 위해서는 기부서포트 테스트(PSP)를 증명해야 했습니다. 까다로운 절차로 수준이 높았지요. 기존에는 PSP 증명이 50%가 되어야 했는데, 개정법에서는 20%까지 내렸습니다. 게다가 이번 개정법에서는 1천엔 이상을 내는 회원이 100명 이상이 되면 그 기준이 충족이 되는 것으로 바뀌었습니다. 조건이 완화된 것이지요. 그래서 인정 엔피오가 많이 늘어나게 되었고, 인정 엔피오가 되면 면세조치가 주어지구요.
 

 작게보기
▲ 오하시 이사장 ⓒ조희연 이영채
3.11 원전사고 이후의 엔지오활동
 
조+이 : 일본 후쿠시마에서 3월 11일 지진 및 원전 누출 사고는 일본의 엔지오활동에도 많은 영향을 미쳤다고 보이는데요. 원전사고 지역이나 재난 지역 중에는 아직 접근조차도 어려운 지역도 있다고 하는데, 엔지오와 볼론티아 조직들이 어떻게 지원활동을 전개하고 있는지요.
 
오하시 : 3·11 이후에 35개 단체가 긴급지원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원래 엔지오의 긴급구조활동은 해외지원이 그 대상인데, 이번에는 이례적으로 국내 문제로 긴급구조를 하는 셈입니다. 그 이유로는 너무 큰 재해였다는 점, 많은 엔지오 단체들이 긴급구호활동을 한 경험이 풍부하다는 점, 그리고 엔지오단체들이 긴급구호를 위한 재정을 가지고 있었다는 점을 들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샤프라닐도 긴급구조기금 약 1천만엔을 비축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제팬 플랫폼(*JPF:Japan Platform,NGO,경제계, 정부, 미디어 등이 파트너쉽을 형성하여, 자연재해, 국제긴급원조, 부흥지원 등을 신속 및 효과적으로 실시하는 국제인도지원 시스템, http://www.japanplatform.org/top.html)으로 대규모 원조가 집중된 곳입니다. JPF는 직접 기업이나 국민을 대상으로 모금을 해서 배분을 합니다. 대기업 등도 정치적 부담이 없으므로 JPF에 거액의 기탁을 하기도 하지요. JPF는 긴급구호활동시 정부와 기업이 돈을 투자하는 시스템인데, 긴급구호자금으로 엔지오에 재정지원이 신속하게 이루어집니다. 결국 계획과 시스템, 그리고 재정이 국제협력 엔지오에 있었기에 긴급지원이 가능했던 것 같아요.
 
하지만 제팬 플렛폼은 문제가 있는 조직입니다. 앞서 말씀드린 PARC도 소속단체인데, 이 네트워크에 들게 되면 제일먼저 일본정부와 가까워지게 됩니다. 하지만, 제팬 플랫폼은 지원 대상에서 북한을 배제하고 있어요. 그래서 JVC는 북한 지원을 하려는 목적이 있기에, 저팬플랫폼에 들어가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긴급구호활동을 하는 단체는 제팬플렛폼이 좋은 기반이기도 합니다. 제팬플랫폼의 경우, 작년에 60억엔을 모았죠. 월드비전은 30억엔을 모았고요. 제팬플랫폼은 이런 큰 모금에 기초하여 대규모 활동을 합니다.
 
일본에서 엔피오는 엔지오보다 작은 조직들을 의미합니다. 예를 들면 제팬플랫폼은 큰 단체들이 들어가 있습니다. 샤프라닐 같은 경우는 상대적으로 작은 단체죠. 이런 의미에서 보면, 제팬플랫폼에 들어가지 않는 단체들이 어떤 의미에선 NPO단체로 인식된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긴급지원의 경우 모금이나 정부지원금은 대부분 큰 규모의 엔지오에 지원되고, 다음에 1주일 정도 후에 샤프라닐, 작은 엔피오단체 등의 순서로 지불되어 활동이 시작되게 됩니다. 엔피오는 그런 의미에서 제일 늦게 움직이는 자원봉사 조직으로 움직이는 셈이지요.
 
조+이 : 이번의 지원활동이 고베 지진(*95년1월17일, 고베, 한신, 아와지(淡路) 일대에 발생한 대지진. 진도7.3, 사망자6000명, 부상자 약 4만3천명) 당시의 지원활동과 다른 점이 있습니까.
 
오하시 : 고베 지진 당시에 많은 자원봉사단들이 참가했지만, 이렇게 많은 국제협력 엔지오 조직이 움직이지는 않았습니다. 당시는 작은 엔피오들이 움직였습니다. 이번에는 대규모 국제구호조직인 엔지오가 움직인 셈입니다. 제팬플랫폼에 가입한 대규모 엔지오단체들이 매우 신속하게 움직이는 특징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제팬플랫폼은 기업에서 모인 많은 돈을 지원받는 대신에 자위대와의 공동활동이 확대되게 됩니다. 샤프라닐은 현지의 단체와 협력하지만, 자위대와는 공동활동을 하지 않습니다.
 
제팬플랫폼은 2000년에 만들어졌는데요. 앞서 언급한 JANIC에는 100개 단체, 제팬 플랫폼에는 큰 단체 중심으로 39개 단체가 가입되어 있습니다. 제팬플랫폼은 민간기업이나 정부에게서 돈을 받아서 엔지오 단체들에게 배분합니다. 문제는 배분 기준입니다. 자니크는 엔지오단체들의 순수 네트워크이고 공동으로 정책제안을 하는 데 일차적 목적이 있습니다. 정부입장에서는 당연히 제팬플랫폼 쪽에 재정지원을 하게 됩니다. 정부 말을 잘 들으니까요. 더구나 자위대가 너무 많이 활동하면 비판이 있을 수 있으므로, 자위대 활동 중의 어떤 임무를 이런 대형 엔지오 단체에게 부탁해서 대행시키는 방식도 나타나게 됩니다.
 
일본의 국제엔지오활동이 활발한 것 같지만, 민족주의에 기반하고 자위대와의 협력 하에 진행되는 프로젝트가 확대되는 딜레마의 문제를 안고 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제팬플랫폼 참가단체의 경우 민족주의에 대한 경계심 없이 활동하게 되고, 이와 관련해서 앞서 언급한 PARC라는 단체처럼 내부에서 자위대와의 협력문제로 논쟁이 발생하고 있습니다. 결국 PARC는 분열한 후 제팬플랫폼에 가입해서 국제협력활동을 하는 새로운 단체인 파르시크(PARCIC: PARC Inter-Peoples Cooperation)라는 단체를 만들어 가입 회원들의 불만을 잠재우고 있는 상황입니다.
 
조+이 : 3·11이 일본 엔지오 및 사회개혁운동에 어떤 변화를 가져오고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오하시 : 지금은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제가 우려하는 것 중 하나가 공적개발원조(ODA) 예산이 삭감되는 것입니다. 즉 해외에 지원하는 원조자금이 줄어드는 것입니다. 일본인들은 후쿠시마 등의 동북지방의 원조가 먼저라는 인식을 하고 있습니다. 국내재해지역이 우선시 됨으로 국제협력이나 지원에 대한 관심은 자연히 줄어들게 되는 것이고요. 이는 일본사회가 국내 중심적인 시각을 갖게 될 수도 있고, 나아가 이런 상황은 일본 내의 민족주의를 강화하는 계기가 될 수도 있습니다.
 
한국의 경우 고도경제성장기에 아프리카 등 122개국으로부터 원조를 받아왔기에, 이제 그 은혜를 갚아야 한다는 인식이 있어서인지 국제지원예산이 확대되는 추세입니다. 일본의 경우 재해극복이 이루어지고 정상화되더라도 국제지원예산이 다시 확대되어 질지는 전망하기가 어렵습니다. 물론 이번 재해사건은 탈원전을 근본적으로 제기할 수 있는 찬스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어떤 영향을 미칠지 전망하기가 쉽지 않은 것 같습니다.
 
조+이 : 국제협력지원활동에 참여하게 된 과정과 관계가 있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선생님은 전공투 세대로서 70년대 초반 급진적 학생운동에도 참여하셨죠. 당시의 학생운동 상황에 대해서 마지막으로 들었으면 합니다. 70년대 초반은 전공투 운동을 포함해서, 일본의 사회운동이 고양국면에서 급속한 하락국면으로 전환하는 중요한 시기였다고 보이는데요.
 
오하시 : 고등학교 때부터 반전운동에 참여했습니다. 60년대 말-70년대 초의 당시 분위기가 그랬고요. 저희 아버지도 리버럴한 분이셨어요. 고등학교 때 검도부였는데, 선배가 공산당 출신이었습니다. 그 때 처음 데모에 참여했습니다. 베트남 반전데모였지요. 처음에 공산당 계열의 반전운동에 참여했는데, 사실 공산당 계열의 운동은 그다지 매력적이지 않았습니다. 그 후 베헤련(베트남평화 시민연합)에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고등학교 3년 때 자치회 활동을 했고, 교복 자유화운동도 했습니다. 와세다대학 부설 고교였기 때문에 자동으로 와세다대학에 진학하였습니다. 71년에 들어가면 전공투 운동이 고양기를 지나 분화기에 들어가게 됩니다. 당시 연합적군파가 주도한 아사마 산장사건이 일어났지요. 연합적군파의 무장투쟁의 최종결정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사건은 좌익내의 연합적군파들끼리 서로 동지를 죽이는 린치 사건으로 확대되었고, 일본 사회가 받은 충격은 사회운동의 쇠퇴를 가져왔습니다.

아사마 산장 사건 이전에도 폭력 사건들이 있었습니다. 적에 대해서뿐만 아니라 동지에 대해서 폭력을 사용하면서, 그것을 정의나 혁명이라고 인식하는 행태가 있었습니다. 운동이 권력에 대한 저항이 아니고 내부 대결의 구도로 전개된 시기였지요. 당시 와세다대학의 학내 분파투쟁을 설명한다면, 가장 강력한 세력은 가쿠마루세력(*일본혁명적공산주의자동맹혁명적마르크스파(日本革命的共産主義者同盟革命的マルクス主義派)의 약칭. 가쿠마루[革マル]파. 50년대 일본공산당의 무장투쟁노선에 대한 비판과 1956년 스탈린 격하 운동을 배경으로 일본트로츠키연맹의 전신인 혁명적공산주의자동맹의 탄생으로 신(新)좌익운동을 주도)이었습니다. 이들은 자신들만이 정당하다고 믿었고, 일종의 반일본공산당 혁명그룹의 일원이었기 때문에 일본공산당과는 극단적 대립을 했습니다. 일본공산당에 반대하는 혁명적 그룹을 일반적으로 신좌파 혹은 신좌익이라고 부르지요. 가쿠마루는 사상적으로는 신좌파내에서 가장 우익적인 경향이었다고 할 수 있지요. 그렇기 때문에 일본공산당이 체제내화되었다고 즉 비혁명적이라고 비판하는 것으로 자신의 정체성을 드러내고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와세다 대학에 입학했을 때 법학부는 일본공산당계 민청(*일본민주청년동맹; 1923년에 설립된 일본공산청년동맹이 민청의 전신, 신좌파의 폭력주의에 대항하여 평화주의를 내세우며 대립. 70년 전성기에는 약20만명의 조직원을 확보하였으나, 현재는 약2만명)이 지배했으나, 대부분의 학부는 가쿠마루가 파가 장악을 했습니다. 베트남 전에 대해 수업에서 토론할 때 가쿠마루파 학생이 제 발언을 제지하기도 했지요. 일본공산당계의 학생들이나 다른 정파의 학생들이 가쿠마루파에 납치되어 린치당하기도 했고요. 공포스런 분위기가 지배하고 있었습니다. 저는 미타카지역의 베헤련 사무실을 자주 드나들었고, 거기서 활동을 했기에 학내에서는 거의 활동을 하지 않고 있었습니다.

71년 여름인가요, 사가미 하라(*相模原市,가나가와현에 위치. 49년미군이 접수한 이후 한국전쟁 및 베트남전쟁을 수행한 미군부대)지역의 미군기지 앞에서 점거농성을 하면서 한달여동안 베트남전에 배치되는 전차의 파송 저지활동을 하기도 했습니다. 거기는 부서진 전차를 수리하는 곳이기도 했습니다(*베트남전에서 사용되는 미군 무기를 생산하는 일본의 군수품 회사를 점거하는 반전투쟁이 전개됨). 결국 경찰에 전원 연행되었고요. 당시 다치가와(*立川市、도쿄도위치. 45년이후 미공군기지, 55년부터 57년까지 미군부대의 확장에 반대한 수나카와(砂川)투쟁이 일어남)에 있는 미군기지의 자위대가 진압하려 온다는 설이 있기도 했었습니다.
 
조+이 : 당시 학교와의 교섭이 결렬된 후 무라이 와세다 총장을 감금해서 큰 사회적 문제가 된 적이 있고 그것으로 수배도 받았던 것으로 아는데요.
 
오하시 : 당시 일어난 와세다 대학 총장 납치사건에 대해서 좀 설명을 해야겠네요. 그때 가쿠마루 파가 문학부 2학년인 가와구치 다이사부로 학생을 납치해서 린치로 인해 죽은 사건이 있었습니다(*川口大三 살해사건, 1952-72년, 학생운동에 참가한 비당파의 학생으로 가쿠마루파에 의해 납치되어 도쿄대병원 근처에서 변사체로 발견) 학생회실에서 맞아서 즉사를 했지요. 이 사건으로 학내 학생들이 가쿠마루 파에 대해 분노하게 됩니다. 기묘하게도 당국은 이것을 묵인하고 있었습니다. 가쿠마루 파가 와세다를 장악하고 있었기 때문에, 학교도 가쿠마루 파와 충돌을 피하려고 묵인하고 있었던 것 같아요. 다수의 학생은 대학당국이 일본공산당파를 누르기 위해, 가쿠마루 파와 공존하고 있다는 판단을 했습니다. 가쿠마루 파에 학생회비가 흘러들어가고 있었기 때문에, 이런 판단을 했고 학생 다수가 학교당국에 분노하게 됩니다.
 
일반 학생들에 의한 반가쿠마루 투쟁이 일어나고 학교 당국에 면담을 요구 한 것입니다. 일반학생들의 투쟁이었으므로, 비조직적이었고, 이런 움직임에 대해 가쿠마루 파는 쇠파이프로 일반학생을 공격하기도 했지요. 학생들의 투쟁은 학교당국에 대한 단호한 조치를 요구하는 투쟁으로 전개되었고, 4월에는 입학식을 저지하는 투쟁이 벌어집니다. 이때 총장이 무라이 씨였죠. 무라이 총장이 연설을 하는 입학식이었는데, 우리는 당시 대학총장과 만나 담판하기를 원했습니다. 그러나 총장은 입학식에서 기다리는 우리를 두려워해서인지, 입학식 자체에 나오지 않았고 결국 입학식도 파행으로 끝나기도 했습니다.

당시 와세다대학내의 상황은 여러 정파들이 연합을 해서 가쿠마루 파에 대항하는 식이었습니다. 하지만, 가쿠마루 파가 강력해서 연합에도 불구하고 언제나 지는 형국이었죠. 당시 와세다 대학 등의 학생운동은 관료제적인 대학행정권력에 대해 비판적이었고 대학권력을 비판하는 것이 학생운동의 하나의 중요한 이슈였습니다. 이 과정에서 무라이 총장을 감금하는 사태가 나타나게 된 것이고요. 당시 큰 사회적 문제가 되었습니다. 사실 총장과의 대화도 잘 풀렸고, 다음에 다시 이야기하기로까지 했는데, 경찰의 개입으로 소위 주동자들이 학교에 들어가지 못하는 형국이 되었습니다. 가택수색도 들어오고 난리였지요. 저에게도 체포장이 발부되었습니다. 그래서 반년동안 잠수함(도피생활)을 탔습니다.
 
경찰 및 학교당국의 탄압에 대한 항의의 표시로 수배자들과 학생들이 검은 헬멧을 쓰고 도서관 점거농성을 하기도 했지요. 그때 점거농성자들을 트럭으로 안내하는 역할을 했습니다. 결국 2달 후에 체포되었는데, 3주간 경찰서에서 묵비권을 행사했습니다. 나중에 불기소 처분을 받아서 풀려났고요. 당시 17명 중 9명 기소되었고, 그 중에는 무정부주의자가 많았습니다. 이 시기에 무정부주의자파가 도서관의 맑스주의 책을 불태우기도 하는 사건도 있었습니다.

감금했던 학생을 교수로 초빙한 총장
 
조+이 : 학생 시절 자신이 감금했던 무라이 총장이 오하시 선생님을 대학교수로 초빙했다고 하는 것은 참 일본적 삽화인 것 같습니다. 방금 설명하신 혁명적 그룹들 간의 테러, 무정부주의자에 의한 맑스주의 책 소각 사건 등 극단적이라고 할 까 하는 현상이 일본 사회운동에서 왜 일어났다고 생각하시는지요. 한국에서도 사실 80-90년대 낮은 수준이지만 이런 현상이 있기도 했지만, 그렇게 극단적이지는 않았던 것 같은데 말입니다.
 
오하시 : 맑스주의의 부정적 측면, 즉 전위주의가 과도하게 표출되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일본공산당의 부정적 측면은 비공산당계 좌익운동에도 존재했습니다. 사실 일본 공산당의 역사를 보면, 몇번이나 비극적인 내부 당파투쟁이 있었습니다. 역으로 어느 공산당에도 있었다고 생각하는데, 오히려 한국에 왜 그런 것이 없었는지 하는 생각도 들고요. 60년대 말 이후 당국의 탄압이 점점 강해지고, 이런 상황에 맞서서 좌익진영에서도 내부대립이 훨씬 격화됩니다. 일부에서는 스파이가 있어서 대중과 좌익을 분리시키기 위해 오히려 추동하고 조작했다는 설도 있습니다. 그런지도 모르겠지만, 저는 그런 극단적 대립 때문에, 당파운동을 부정적으로 보았고 그래서 당파 혹은 정파에 들어가지 않았던 것이지요. 사실 생각해보면, 혁명에는 [전위]가 필요하고, 당이건 비공산당 그룹이 그런 전위역할을 해야 한다는 강박적인 인식이 그런 극단적 현상을 낳았는지 모르겠습니다.
 
일본 신좌익의 특성
 
조+이 : 사실 20세기 좌익운동의 흐름에서는 그런 강한 전위주의로 인하여 극단적인 대립이 불가피했던 결과라는 생각이 듭니다. 한국에서도 80년대 이후 혁명주의가 출현하면서 그런 경향이 있었고요. 단지 독재 상황, 혹은 남북대립의 엄혹한 조건이 그런 극단성을 제약해 준 긍정적 측면이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드는군요. 당시 학생운동 중에서 올드좌파에 대한 신좌파가 갖는 정체성과 지향은 무엇이었을까요?
 
오하시 : 당시 신좌파는 일본공산당을 위시로 한 좌익노동운동에 대립하는 성격이 있었습니다. 일본의 전통적인 좌익운동은 노동조합을 중심으로 전개되었습니다. 일본공산당은 레닌주의에 기초하였고, 소련공산당의 방침과 움직임에 연동되어 긴밀한 관계에 있었습니다. 신좌익계열은 이러한 일본공산당에 대해 부정적인 생각이 일반적으로 많았습니다. 또한 일본공산당이 의회주의에 빠져있다는 비판의식도 공통적으로 존재했고요. 당시 사회운동은 일본사회당에 대한 동정심이 많았는데, 사회당도 기본적으로는 노동조합의 지배를 받았습니다. 노조에 기초한 계급투쟁노선이었고 의회주의를 지향하였지요. 신좌익은 이러한 일본공산당과 일본사회당의 의회주의에 반대하고 이들과 차별성을 보이기 위해서도 과격노선을 지향했다고 보입니다. 의회민주주의가 아닌 직접 폭력 혁명 노선을 선택한 것이지요. 당시는 그랬습니다.
 
조+이 : 서구의 신좌파는 현대성을 끌어안으려는 경향을 의미하고, 한국에서의 네오맑시즘은 오히려 레닌주의, 볼셰비키노선적인 것이 아닌 정치노선을 의미한다고 보입니다. 하지만, 일본의 신좌파는 일본공산당의 우경성과 민주집중제를 비판하면서 더욱 폭력적이고 혁명적인 투쟁노선을 고집하는 흐름이었던 셈이군요. 결국 일본공산당으로 상징되는 올드좌파의 의회주의화, 제도화, 체제내화에 반대하는 급진주의적 흐름이 신좌파였다고 규정할 수 있을 것 같은데요. 신좌파는 이후 어떤 행보를 하게 됩니까. 또한 일본사회당의 흐름에 대해서는 어떤 견해를 가지고 계십니까?
 
오하시 : 일본사회당의 경우는 일본공산당의 소련파적 노선과는 거리를 두는 입장이었습니다. 상대적으로 북한과 오랫동안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했지요. 그런데 2002년 일본인 납치사건으로 북한에 대한 부정적인 여론이 강화되면서 일본사회당에 대한 신뢰가 추락했습니다. 일본공산당은 어떤 의미에서 공산당원만의 정당이라는 비판이 있을 정도로 일관되게 자신의 조직내부만의 입장을 견지해왔고 외부로부터의 의견을 반영하지 않았습니다. 일본의 시민운동은 비폭력 사민주의적 입장을 가지고 있는데, 일본공산당의 배제주의를 비판하면서 일본사회당과 가까웠다고 보입니다. 그러나 일본사회당이 붕괴하고, 사회 내부에서도 그것을 대체할 새로운 주도세력이 나타나지 못하는 상태가 지속되고 있습니다. 신좌익의 최근 동향과 관련해서는 당파조직원이 아니기 때문에 자세히는 모르겠습니다만, 크게 보면 대부분의 단체들이 해체단계에 있다고 봅니다. 가쿠마루파, 중핵파 등이 남아 있지만, 특정 노조를 장악함으로써 조직의 생존방식을 찾아가는 정도의 수준입니다.
 
급진적 전공투 운동세대가 엔지오 운동을 하는 까닭
 
조+이 : 와세다 대학 시절 공산당계와 거리를 두었다고 해도 전공투 학생운동을 했던 세대인데요. 이후 학생운동과도 거리를 두고 당시로는 새로운 분야인 국제협력사업으로 [선회]라고 할까 [전향]이라고 볼 수도 있는 선택을 한 것인데요. 당시의 새로운 운동의 선택을 지금에 외서 개인적으로 어떻게 평가하시나요.
 
오하시 : 전체적으로 보면 비섹터운동, 비당파운동을 하던 그룹들이 이후 정당운동이 아닌 다양한 사회운동 분야로 진출하게 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제 개인적으로는 아버지가 외국으로 보낸 것이 계기가 되어, 인도에서 국제협력활동에 처음으로 눈을 뜨게 되었습니다. 당시의 새로운 운동에는 두가지 경향이 있었습니다. 신좌파의 운동은 결국 아시아연대로 확장되지 못하고 국내에서 끝나버렸습니다. 인민연대를 해야 한다는 이야기는 있었지만 실제로 그러지는 못했습니다. 신좌파에서 그래도 인민연대를 실현하고자 했던 곳은 PARC(아시아태평양자료센터)였다고 할 수 있죠.
 
70년대-80년대 일본정부의 아시아와 원조 및 일본기업의 아시아 진출문제는 사회운동의 중요한 이슈였습니다. 일본이 아시아에 경제협력 및 원조를 하는 것은 아시아 지역의 신종속주의를 낳는다는 논리로 아시아에 원조는 필요없다는 이야기도 있었을 정도이니까요. 저는 당시 샤프라닐의 사무국장이었는데, 좋은 원조와 나쁜 원조가 있다라는 식으로 양분을 하고자 했습니다.
 
당시 다나카 일본수상이 동남아시아를 방문했을 때 타이를 시작으로 인도네시아 및 말레이시아에서도 반일운동이 일어났습니다. 그 지역의 반독재운동과 일본기업 진출에 대한 반대운동이 동시에 나타나고 있었습니다. 이것은 일본사회에 아시아에 대한 새로운 충격을 가져왔습니다. PARC는 아시아 각 지역의 운동가 및 운동단체와의 연대가 필요하다는 인식을 하게 됩니다. 당시 신좌파가 상상하던 인민연대는 아니지만, 파르크는 운동가 연대를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저는 약간 다른 입장이었습니다. 사실 당시에는 정치투쟁을 해야 한다는 강박한 인식 속에 있었고요. 국제협력분야 같은 데로 나아가는 것에 대해 운동의 배신이라고 하는 지적도 받았습니다. 당시 중핵파 친구가 있었는데, 그녀가 [무엇이던지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하는 것이 좋다]라고 충고를 해 주더군요. [연애나 혁명이나 환상을 가지고 하는 것이다]라는 유명한 말이 있지 않습니까. 무엇인가 자신의 인생의 새로운 돌파구를 만들어야 했으나 찾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지요. 고민하던 중 인도를 좋아하니까 인도문제를 다루는 일을 하겠다고 결심하게 되었습니다. 졸업 후 1달 정도 샐러리맨을 하다가 인도장학금으로 결국 1년간 인도에 갔게 되었습니다. 샤프라닐의 방글라데시 주재원을 하면서 학생운동시절의 정세분석 및 전략수립의 방식들이 도움이 되었고, 빈민을 위한 전략을 세우는 일을 하게 되었습니다.
 
방글라데시의 제 사무실에도 좌파적 활동가들이 있었습니다. 실제 활동가의 경험이 엔지오에도 많은 도움이 되더군요. 운동권이었기 때문에 국제협력운동에 간 것은 아니지만, 엔지오 속에도 운동권의 구조와 유사하다는 느낌을 갖게 되었습니다. 샤프라닐의 경우 현재 학생운동가 출신은 저밖에 없었습니다. 학생운동을 못했던 사람 중에 미안함을 갖는 사람도 있지만요, 크게 보면, 저는 자유분방한 리버럴한 사람이었던 것 같습니다. 좌파적인 정치적 지향을 갖고 있는 리버럴한 사람이라고 스스로 평가해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국제협력분야에 투신하여 현재까지 만들어 온 길을 후회한 적은 없고요. 이사장까지 경험했지만, 언제든지 방글라데시의 샤프라닐의 사무실에 가서 다시 스텝으로 일하고 싶은 마음이 간절합니다. 대학은 정년 전에 그만두고 일본을 떠나 풍요로운 인간문화를 가지고 있는 아시아의 현지 사무실로 언젠가는 다시 내려갈 생각입니다.
 
조+이 : 한국에서 그동안 원조를 받던 나라에서 원조를 하는 나라로 바뀌었다고 민족의 자긍심으로 인식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단지 원조하고 있는 것에 자부심의 차원을 넘어서서 진정한 국제협력이 되도록 노력해 가는데 오하시 선생님의 경험과 지혜가 많은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오랜 시간 감사합니다.

* 이 인터뷰는 성공회대 민주주의 연구소의 후원으로 진행됐으며 시민사회신문에도 요약본이 실릴 예정입니다.

인터뷰 진행자

조희연 교수 : 성공회대 사회과학부 겸 NGO대학원 교수. 현재 민주화를 위한 전국교수협의회 공동대표. 성공회대 민주주의연구소 소장, 참여연대 집행위원장, 학술단체협의회 상임공동대표 역임. 저서로는 <한국의 국가 민주주의 정치변동>, <한국의 민주주의와 사회운동>, <빈곤과 계로>, <박정희와 개발독재체제>, <동원된 근대화> 등이 있다.

이영채 교수 : 일본 케이센대학교(惠泉女學院大學校) 국제사회학과 교수. 케이오대 및 와세다대학 객원연구원. 일본 PARC(아시아태평 자료조사센터) 연구원 및 현장잡지 [노동정보]편집위원 역임, 야스쿠니 반대 동아시아 촛불행동 일본실행위 사무국장. <참세상>에 일본사회운동에 대한 글을 연재하고, 일본의 노동현장 잡지 [노동정보]에 한국의 사회운동의 글을 연재하는 등 한일시민/민중연대를 위해 노력하고 있다. 저서로는 『「初恋」からノムヒョンの死まで』(梨の木舎), 『なるほど!これが韓国か--名言・流行語・造語で知る現代史』(朝日新聞社),『IRISで分かる朝鮮半島の危機』(朝日新聞社) 등이 있다.

조희연 성공회대 교수,이영채 케이센대 교수 (hilltop@pressia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