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도인 도망을 막아라"…'강제노동 방증' 日문서 발견(종합)

日야마노탄광 문서…"'높이 7척·길이 140간' 울타리 설치"

"조선인, 사실상 감금상태에서 강제노동 사실 보여주는 것"

(서울=연합뉴스) 이귀원 기자 = 일본이 근대산업시설의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 결정문에 반영된 조선인 강제노역(forced to work)에 대해 '강제노동을 인정한 것이 아니다'고 말 바꾸기에 나선 가운데 당시 일본 탄광에서 조선인들의 탈출을 막기 위한 목적으로 구조물을 세웠다는 기록이 발견됐다.

한일관계 전문가인 김문길(부산외국어대 명예교수) 한일문화연구소장은 11일 일본 미쓰비시가 운영해온 것으로 알려진 후쿠오카(福岡) 소재 야마노(山野) 탄광의 물자명세서를 일본의 한 박물관에서 입수해 연합뉴스에 공개했다.

용도를 '반도인(半島人) 합숙소'라고 명기한 총 3장짜리 물자명세서 서류에는 공작물의 규모 또는 구조 항목에 '반도인 도망방지를 위해 합숙(소) 주위에 높이 7척(尺, 30㎝) 연장 140간(間, 1.818m)의 '판병'(板�)을 신축하라'고 명시돼 있다.

일본 전문가들은 '판병'을 나무판자형 울타리를 의미한다고 해석했다.

그러나 김 소장은 "7척의 나무판자형 울타리 위에 철조망을 얹은 것으로 풀이된다"면서 울타리의 구성물과 관련해 다소 다른 해석을 내놨다.

반도인은 조선인 강제 징용자를 말한다. 7척은 약 2m10㎝(1척은 약 30㎝)에, 140간은 약 255m에 해당한다.

한 소장은 또 "도망 방지를 위한 구조물을 설치한 것은 당시 조선인들이 강제로 동원돼 사실상 감금상태에서 강제노동에 시달렸음을 보여주는 명확한 증거로 볼 수 있다"고 설명했다.

물자명세서에는 공사 착수예정일을 '쇼와(昭和) 19년(1944년) 3월1일', 공사 완료예정일을 같은 해 '3월31일'로 기록하고 있다.

특히 '반도인 도망 방지'를 언급한 것은 당시 주변 탄광에서 조선인 강제 징용자들의 탈출이 잇따랐던 상황이 반영된 것으로 보인다.

일제 치안국 특별고등과가 1944년 9월3일 작성한 '반도인 노무자에 관한 조사표'에 따르면 1943년말 현재 후쿠오카에 강제 징용된 노무자 11만3천51명 가운데 51.7%인 5만8천471명이 탈출했다는 기록이 있다.

물자명세서에는 합숙소와 관련 시설의 면적도 표기돼 있다.

우선 공동숙사는 '1층 1,34954 평방미터(㎡), 2층 611.01 평방미터, 3층 611.01 평방미터'로, 사감주택은 39.85 평방미터, 창고는 39.60 평방미터 등이다.

일본 정부는 조선인 강제노동 현장이 포함된 근대산업시설이 지난 5일 독일 본에서 열린 세계유산위원회에서 세계유산으로 등재 결정이 이뤄지자마자 강제노동을 인정한 것이 아니라면서 '일하게 됐다'('하타라카사레타'(동<人변+動>かされた)는 표현으로 번역, 물타기를 시도했다.

당시 일본측 대표가 세계유산위원회에서 영어로 'brought against their will'(의사에 반해), 'forced to work'(강제로 노역) 등의 표현을 사용했고, 우리 정부는 이에 대해 누가 봐도 강제노역을 인정한 것이라고 밝히고 있다.

일본 정부 대변인인 스가 요시히데(菅義偉) 관방장관는 "1944년 9월부터 1945년 8월 종전(終戰) 때까지 사이에 '국민징용령'에 근거를 두고 한반도 출신자의 징용이 이뤄졌다"며 이런 동원이 "이른바 '강제노동'을 의미하는 것이 전혀 아니라는 것은 (일본) 정부의 기존 견해"라고 밝히기도 했다. 이는 일제의 침략과 식민지배가 합법이었다는 일본측 기존 주장과 왜곡된 역사인식을 그대로 드러낸 것이라는 지적이다.

그러나 스가 장관이 언급한 1944년 9월 이전에도 조선인 강제징용은 있었다는 점에서 스가 장관 주장은 맹점을 드러내고 있다.

lkw777@yna.co.kr

Write a comment

Comments: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