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일민단 "윤봉길 의사 순국 골짜기 확인"

 

(가나자와=연합뉴스) 이충원 특파원 = 매헌(梅軒) 윤봉길(尹奉吉.1908∼1932) 의사가 순국한 지 78년 만에 고인이 최후를 맞은 일본 땅을 확인했다. 

일본 이시카와(石川)현 민단 본부는 구 일본군 내부 보고자료와 그 후 토지개량 관련 지도 등을 근거로 확인작업을 벌인 끝에 윤 의사가 처형된 '미쓰코지야마(三小牛山) 서북골짜기(西北谷間)'를 확인했다고 19일 밝혔다. 

이곳은 이시카와현 가나자와(金澤)시 교외에 있는 육상자위대 미쓰코지야마 훈련장 내부다. 

일본군은 1932년 12월19일 윤 의사를 총살한 뒤 당시 육군 9사단 주둔지였던 이 산의 다른 장소(동남쪽 평지 < 東南高臺 > )에서 총살했다고 발표했지만 패전 후 공개된 일본군 내부 문서에는 '미쓰코지야마 서북골짜기의 가나자와-오하라(小原) 사이 산중 도로의 동쪽, 교통이 뜸하고 공개될 위험이 없고, 동쪽 절벽은 높이 약 7m여서 총탄 차단에 적절한 장소'에서 총살했다고 기록돼 있었다. 

민단 지역 본부는 이를 근거로 지난 4월부터 부근에 사는 재일동포 2세와 일본인 시민운동가 등 3명으로 팀을 꾸려 1956년 지도와 1962년 항공사진, 2002년 지도 등을 찾아내 대조작업을 벌여왔다. 

2008년에도 국내의 한 방송국이 일본군 내부 문서에 첨부된 간단한 약도를 근거로 위성항법장치(GPS)를 이용해 처형 지점을 추정한 적이 있었지만, 이는 처형 이후 지형 변화를 고려하지 않은 것이었다. 이번 작업으로 윤 의사가 처형된 골짜기를 재차 확인한 것으로 풀이된다. 이시카와현 민단은 이 같은 내용을 담은 보고서를 조만간 민단 중앙본부와 윤봉길 기념사업회 등에 보낼 예정이다. 

변종식 이시카와현 민단 단장은 "고국에 있는 분들이 윤 의사가 중국 상하이에서 의거를 벌인 사실은 알아도 일본에 끌려와 산골짜기에서 처형당한 사실은 모르는 경우가 많다"며 "윤 의사가 최후를 맞은 골짜기를 찾아낸 것을 계기로 다양한 기념 사업을 벌일 계획"이라고 말했다. 

윤 의사는 1932년 4월29일 상하이 홍커우(虹口)공원에서 일본군이 도열한 기념식장에 물통 폭탄을 던져 시라카와 요시노리(白川義則) 대장 등 군간부를 즉사시켰다. 일제는 같은 해 5월25일 윤 의사를 군법회의에 넘겨 사형 선고를 한 뒤 12월19일 가나자와에서 총살해 부근 노다야마(野田山) 공동묘지로 가는 길 밑에 암장했다. 윤 의사의 유골은 1946년에 발굴돼 용산 효창공원으로 옮겨졌고, 암장지 부근에는 1992년 기념비가 세워졌다. 

 

2010년 12월 19일 (일) 05:32  연합뉴스

 

 

 

 

금메달 아키모토 왕기춘 페어플레이에 “존경과 경의”

 

[한겨레] 왕기춘은 너무나 아쉬웠다. 연장 종료 23초를 남기고 다리잡아매치기로 유효를 내준 뒤 자리에 그대로 누웠다. 한참 동안 일어나지 못했다. 울음조차 나오지 않았다. 승자와 심판진이 모두 떠난 뒤에도 한동안 매트 위에 머물렀다. 2008년 베이징 올림픽때 갈비뼈 부상으로 금을 놓친 불운과 지난해 용인의 한 나이트클럽에서의 20대 여성에 대한 손찌검 사건으로 물의를 일으킨데 대한 속죄까지 이번 아시안게임의 금메달로 모두 씻어내고 싶었는데. 

 결승전까지 왕기춘은 승승장구했다. 8강에서는 인도의 라마쉬레이 야다브를 업어치기 한판으로 간단히 이겼고, 4강 전에서는 다크호스 북한의 김철수를 누르기 한판으로 제압했다. 드디어 결승. 상대는 숙적 아키모토 히로유키. 올해 세계선수권 4강전에서 판정패로 자신을 꺾어 대회 3연패를 좌절시킨 선수다. 더구나 상대는 정상의 컨디션이 아니었다. 4강전에서 발목 부상을 당한 아키모토는 왕기춘에게 적수가 될 수 없었다. 

 

2010년 11월 16일 (화) 08:20  한겨레

 

 

 

 

한일정부, 日수탈 도서 1천205권 반환 합의(종합)

 


日수탈 도서 반환협정식 (요코하마=연합뉴스) 전수영 기자 = 김성환(왼쪽) 외교통상부장관과 마에하라 세이지(前原誠司) 외무상이 14일 요코하마 인터컨티넨털 호텔에서 이명박 대통령과 간 나오토(菅直人) 일본 총리가 지켜보는 가운데 일제 강점기 약탈된 조선왕실의궤를 비롯한 도서 1천205책의 한국 반환 협정서에 서명하고 있다. 2010.11.14 swimer@yna.co.kr

정상회담서 도서 반환협정..日총리 "가까운 시일내 반환"

양국 '셔틀외교' 재개 합의..李대통령 "다음 방일때 FTA 논의"

(요코하마=연합뉴스) 추승호 이승우 기자 = 일제 강점기 일본이 수탈한 조선왕실의궤를 비롯한 문화재급 도서 1천205권이 우리나라로 돌아올 전망이다.

반환에 합의된 '왕세자 가례도감의궤' (요코하마=연합뉴스) 전수영 기자 = 일제 강점기 일본이 수탈한 조선왕실의궤를 비롯한 문화재급 도서 1천205권이 우리나라로 돌아온다. 14일 요코하마 인터컨티넨탈 호텔에서 열린 일제 강점기 약탈된 조선왕실의궤를 비롯한 도서 1천205책의 한국 반환 협정식장에 반환에 합의된 '왕세자가례도감의궤(王世子嘉禮都監儀軌)'가 전시돼 있다. 채색그림으로 순종이 왕세자 시절 순명왕후(純明王后) 민씨와 결혼한 일을 다루고 있다. 2010.11.14 swimer@yna.co.kr

김성환 외교통상 장관과 마에하라 세이지(前原誠司) 외무상은 14일 일본 요코하마(橫浜) 인터컨티넨털 호텔에서 열린 이명박 대통령과 간 나오토(菅直人) 일본 총리와의 정상회담에서 `일본이 한반도에서 유래(수탈)한 도서 1천205권을 인도(반환)한다'는 내용의 협정문에 서명했다.

협정문에는 협정 발효 후 6개월 내에 도서를 인도하며 양국간 문화 교류를 발전시키고자 협력한다는 내용도 담겼다. 이날 협정식에는 한국 반환에 합의된 일부 도서가 전시됐다.

일본 정부는 빠른 시일 내에 협정문을 임시국회에 상정해 비준을 받는다는 방침이지만, 자민당을 비롯한 일부 야당이 다소 부정적 반응을 보이는 점이 걸림돌이다.

중의원 외교위원회와 본회의는 큰 문제없이 협정문이 통과될 것으로 전망되지만 `여대야소'인 참의원 외교국방위원회와 본회의에서는 비준에 다소 진통이 예상된다.

한.일 정상회담 (요코하마=연합뉴스) 전수영 기자 = 이명박 대통령과 간 나오토(菅直人) 일본 총리가 14일 요코하마 인터컨티넨탈 호텔에서 정상회담을 하고 있다. 양국 정상은 회담을 마친뒤 일제 강점기 약탈된 조선왕실의궤를 비롯한 도서 1천205책의 한국 반환 협정식에 참석했다. 2010.11.14 swimer@yna.co.kr

이 대통령은 이날 간 총리와의 정상회담에서 "이번 도서 반환이 한일관계에 획기적 변화의 시발점이 된다는 것을 인정한다"며 "간 총리와 일본 내각의 노력에 감사한다"고 밝혔다.

간 총리는 "일한 도서협정 서명식을 통해 앞으로 미래지향적인 관계를 펼쳐나갈 수 있을 것"이라며 "국회 동의를 얻어 가까운 시일내 도서가 전해지도록 하겠다"고 말했다.

두 정상은 또 사실상 중단됐던 한일 '셔틀외교'가 지속적으로 이뤄져야 한다는데 합의했다.

간 총리는 이 대통령에게 가급적 연내 한번 더 일본을 방문해줄 것을 요청했고 이 대통령은 긍정적으로 답했다.

인사 나누는 한.일 정상 (요코하마=연합뉴스) 전수영 기자 = 이명박 대통령과 간 나오토(菅直人) 일본 총리가 14일 요코하마 인터컨티넨탈 호텔에서 열린 정상회담에서 인사하고 있다. 양국 정상은 회담을 마친뒤 일제 강점기 약탈된 조선왕실의궤를 비롯한 도서 1천205책의 한국 반환 협정식에 참석했다. 2010.11.14 swimer@yna.co.kr

간 총리는 아울러 한일FTA(자유무역협정) 협상 재개를 희망했고 이 대통령은 다음 일본 방문때 FTA 협상 재개에 대해 진지하게 논의하자고 말했다.

양국 정상은 간 총리의 8.10 담화 후속 조치로 사할린 한인과 유골 봉환 문제 등이 착실히 진전되도록 노력키로 했다.

이와 함께 6자 회담이 '대화를 위한 대화'가 아니라 실질적으로 북한 비핵화를 진전시킬 수 있는 장이 돼야 하고 북한이 비핵화에 대한 진정성을 행동으로 보여야 한다는데 의견을 같이하면서 향후 대북 문제에 긴밀히 공조키로 했다.

이밖에 간 총리는 한일 자유무역협정(FTA) 협상의 조속한 재개를 희망했고, 이 대통령은 부품 소재 분야에서 양국간 협력 강화를 강조했다.

<그래픽> 일본내 주요 한국문화재 현황 (서울=연합뉴스) 김성환 외교통상 장관과 마에하라 세이지(前原誠司) 외무상은 14일 일본 요코하마(橫浜) 인터컨티넨털 호텔에서 열린 이명박 대통령과 간 나오토(菅直人) 일본 총리와의 정상회담에서 `일본이 한반도에서 유래(수탈)한 도서 1천205권을 인도(반환)한다'는 내용의 협정문에 서명했다. bjbin@yna.co.kr @yonhap_graphics(트위터)



 예상대로 경기는 왕기춘의 압도적인 우위 속에 진행됐다. 하지만 왕기춘의 공격은 단조로웠다. 유도 선수들이 흔히들 잡기 과정에서 보여주는 발목 공격을 하지 않았다. 주특기인 업어치기 공격에만 주력했다. 아키모토는 수비에 급급했다. 그럼에도 심판은 지도를 주지 않았다. 종료 23초전 왕기춘은 공격을 벌이다 아키모토로부터 역습을 당했다. 몸을 돌려 떨어졌지만 심판들은 유효를 선언했다. 골든스코어제로 치러지는 연장전. 패배였다. 

 그러나 왕기춘은 비운의 은메달리스트만은 아니었다. 경기를 마친 뒤 상대방의 부상 부위에 대한 공격을 피한 그의 페어플레이에 대한 찬사가 쏟아지고 있다. 금메달리스트 아키모토는 "나의 부상을 알고 있었고 그것을 이용하고 싶었을 텐데 그러지 않은 것에 대해 존경과 경의를 표한다"고 말했다. 아키모토는 준결승을 치르다 왼쪽 발목을 다쳐 결승에서 내내 절룩이는 모습을 보였지만 왕기춘은 주로 업어치기 공격을 폈다. 경기를 압도했지만 기술은 단조로울 수밖에 없었다. 아키모토는 "지도를 받을 수도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는 자신의 말처럼 수비에만 치중했다. 

 경기가 끝난 뒤 일본 언론은 왕기춘에게 왜 다친 발목을 공략하지 않았느냐는 질문을 했다. 왕기춘은 "아키모토가 발목을 다친 것을 알고 있었지만 부상 부위를 노리지 않았다. 그렇게까지 해서 이기고 싶지는 않았다"고 말했다. 왕기춘은 한국 언론과의 인터뷰에서도 "왜 그랬는지는 나도 잘 모르겠다"며 "내가 넘기지 못해 졌으니 다음번에는 넘길 수 있도록 열심히 하겠다"는 말만 하고 자리를 떴다. 베이징 올림픽에 이어 또 한 번의 불운에 속울음을 삼켜야했지만 왕기춘은 페어플레이를 통해 45억 아시아인들에게 금메달리스트 못지 않은 강한 인상을 남겼다. e뉴스팀 

 

2010-11-14

 

 

 

 

[G20 서울선언] 빈손으로 떠난 美… 발걸음 가벼운 中·獨… 구경꾼 된 日

 

美 한미FTA·中 압박 모두 실패… 양적완화 조치로 비난 화살만
中 위안화 방어에 사실상 성공… 신흥국 지지로 입지 재확인
獨 미국 정책에 강력하게 저항… 서울선언에 자국입장 담아내
日 외환시장 개입으로 명분 상실… G2대립에 치여 목소리 못내

김현수기자 hskim@sed.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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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요20개국(G20) 정상회의는 역대 어느 다자 간 회의에서 찾을 수 없는 첨예한 국가 간의 이해득실이 걸려 있었다. 당장의 경기회복은 물론 미래 경제 질서까지 좌우할 수 있는 매머드 의제들이 이해득실에 따라 국가별로 충돌했다. 

그렇다면 이번 회의는 어느 국가에 득(得)을 줬고 어느 국가에 실(失)을 주었을까. 

결과적으로 볼 때 G20 정상회의를 상대적으로 성공리에 마친 곳은 중국과 독일인 것으로 평가된다. 반면 미국은 사실상 그들이 원했던 해답을 거의 얻지 못했고 일본 역시 중국에 G2의 자리를 물려줘야 하는 거대한 경제질서의 흐름을 이번 회의를 통해 뼈저리게 느껴야 했다. 

◇사실상 빈손으로 떠난 오바마=11월 중간선거 패배로 궁지에 몰린 버락 오바마 대통령은 서울공항에 들어오면서 기대에 부풀었다. 도착 직후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의 결실을 그의 손에 쥘 수 있을 것으로 보았고 미국의 무역 역조를 개선하고 중국에 대한 확실한 통화 절상의 도장을 이번 기회에 찍을 것으로 믿었다. 지난달 경주 재무장관회의 당시의 분위기로만 놓고 보면 오바마의 이런 기대가 그리 무리는 아니었다. 
 
하지만 G20 회의를 마친 뒤 12일 서울을 떠나는 그는 사실상 ‘빈손’이었다. 

선거 패배 이후 처음으로 해외 정상들과의 접전을 펼쳤지만 FTA도, 위안화 절상을 압박할 수 있는 카드도 모두 얻지 못했다. FTA는 그나마 조기 합의라는 상징적 단어라도 얻을 수 있었다. 하지만 경주 회의때 제시했던 경상수지 목표제 도입은 중국과 독일의 완강한 저항에 부딪혀 무산됐고 초안에 있던 중국의 통화정책을 가리키는 ‘경쟁적 저평가(competitive undervaluation)’라는 표현도 채택되지 못했다. ‘경쟁적 평가 절하 자제’를 ‘저평가 자제’로 바꿔 조금이라도 중국의 위안화 절상 압력을 얻으려 했지만 도리어 중국과 신흥국들로부터 양적완화 조치에 대한 비난의 화살만 받았다. 

때문일까. 이명박 대통령과 정상회담 직후 기자회견 자리에 선 오바마 대통령의 얼굴에서 미소는 거의 찾을 수 없었고 오바마 특유의 역동적인 모습 역시 정상회의 내내 자취를 감추었다.

◇발걸음 가벼워진 후진타오, 위안화 사실상 방어 성공=후진타오 중국 국가주석은 가벼운 마음으로 일본 요코하마로 떠났다. 미국의 양적완화 조치에 문제를 제기, 오바마 대통령의 요구에 물러서지 않으며 미국에 대립할 수 있는 유일한 국가가 중국임을 과시했다. 

경주 재무장관회의 당시만 해도 미국의 일방적인 승리로 끝이 날 것처럼 보였던 G20은 오히려 중국을 중심으로 신흥국들이 똘똘 뭉치며 미국에 쓴맛을 안겨줬다. 

후 주석은 서울 정상회의에서 미국과의 환율담판은 물론 신흥국으로부터 전폭적인 지지를 받았다. 위안화 절상을 압박해오는 미국에 맞서 신흥국의 자본 규제를 골자로 한 거시건전성 강화 등에 대한 인정을 얻어냈다. 여기다 미국의 양적완화 조치에 반발하며 독일 등 유럽 선진국, 브라질 등 신흥국과 각각 전략적 동반관계를 보이며 국제 외교무대 중국의 위치를 올렸다는 평가를 받는다. 

후 주석은 특히 지난 11일 열린 미중 정상회담에서도 오바마 대통령이 집중적인 위안화 절상 압박을 한 데 대해 절상 프로세스가 ‘점진적으로’ 이뤄질 것이라며 예봉을 꺾었다.

◇메르켈 총리, “성공적 회담” 희색=독일은 이번 회의 내내 중국 이상으로 미국의 정책에 강력하게 저항했다. 그리고 끝내 서울선언에 그들의 입장을 담아내면서 성공적인 결실을 거두었다. 특히 미국의 경상수지 목표제에 반대를 하는 동시에 중국에는 경쟁적 환율저평가로 공격하며 독일의 입장을 국제사회에 확실하게 인식시켰다.

차기 G20 의장국인 프랑스는 이번 회의 결과에 속으로는 불만이지만 겉으로는 표현을 못하는 상황이다. 무역수지 적자에 허덕이고 있는 만큼 불균형을 개선하자는 미국 주장에 찬성하지만 그렇다고 독일과 중국을 비난하며 적으로 돌릴 경우 차기 의장국으로서 입장이 곤란하기 때문이다. 여기다 오는 2012년 대선을 앞두고 있는 니콜라스 사르코지 대통령의 경우 G20은 정치적인 변수이기도 하다. 

◇중국의 ‘빅2’ 부상을 보며 쓴웃음 지은 간 총리=일본은 이번 회의에서 별로 얻은 게 없다. 게다가 중국ㆍ러시아와는 영토분쟁으로 양자회담 한번 갖지 못하고 끝을 냈다. 물론 13~14일 요코하마에서 열리는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가 예정돼 있다고는 하지만 일본이 글로벌 무대에서 이렇게 주목 받지 못한 것도 이례적이다. 

오히려 통화 문제를 둘러싼 미국과 중국의 대립에 치여 제대로 된 목소리를 거의 내지 못했다. 일본은 당초 미국ㆍ유럽 등과 힘을 합쳐 중국의 위안화 절상을 압박할 방침이었지만 9월15일 엔고를 막기 위해 외환시장에 2조1,000억엔의 대규모 개입(달러 매수)을 한 뒤 국제사회의 비판의 표적이 되면서 명분을 잃고 끌려가는 입장이었다.

여기에 G20의 실력자로 부상한 중국ㆍ러시아와 영토 분쟁을 빚으면서 이들 국가에 대한 발언력을 상실했고 센카쿠 갈등을 처리하는 과정에서 간 나오토 내각의 지지율이 급락하면서 국정 장악력이 약화돼 G20에 전념하기도 어려운 상황이었다.

환율전쟁의 시발점이었지만 정작 환율전쟁의 해법을 찾는 자리에서는 별 역할을 하지 못하고 있는 셈이다.
 
2010-11-03
 
 
 
 

[주말화제] 열도는 왜 ‘소녀시대’에게 열광하는가

 

[서울신문] "가와이!"(귀여워)에서 "갓코이!"(멋있어)로. 29일 저녁 일본 도쿄 국제포럼홀. 한국 대중음악 쇼케이스 'K-팝 나이트 인 재팬'이 한창 진행 중이었다. 걸 그룹 포미닛을 비롯해 제국의아이들, 씨스타 등이 무대에 오르자 객석은 떠나갈 듯 환호했다. 5000여개 좌석은 예약 개시 30분 만에 동났다. 일본에서 불고 있는 K-팝 열풍이 생생하게 느껴지는 현장이었다. 그 한복판에 소녀시대(소시)가 있다. 일본의 대표적인 대중음악 순위인 오리콘 차트는 지난 26일 새벽 4시에 긴급뉴스를 내보냈다. 한국 걸 그룹 소시가 해외 여성 그룹으로는 30년 만에 처음으로 주간 싱글 '톱3'(2위)에 진입했다는 속보였다. 그날 저녁 소시의 대표곡 '지'(Gee)는 오리콘 일일 싱글 순위 1위로 올라섰다. 소시는 일본 연예 전문 월간지 '닛케이 엔터테인먼트' 10월호 표지를 장식하기도 했다. 일본의 연말 최고 이벤트인 NHK 홍백가합전 출전 가능성도 매우 높다. 또 다른 걸 그룹 카라의 일본 내 인기도 폭발적이다. 

걸 그룹 원조인 일본이 왜 소시로 대표되는 한국 걸 그룹, 즉 '역수출 상품'에 이토록 열광하는 것일까. 대중음악 전문가들은 그 이유를 일본 최고 인기 걸 그룹 AKB48과의 비교에서 찾는다. 

2006년 데뷔한 AKB48은 멤버가 무려 48명이다. '고등학교 한반 급우' 컨셉트다. 일본 걸 그룹이 깜찍함과 친근함을 앞세운 친구 같은 존재로 팬들에게 다가섰다면, 한국 걸 그룹은 폭발적인 가창력, 체계적이고 오랜 훈련을 거쳐 완성된 화려하고 전문적인 댄스 퍼포먼스, 그리고 무엇보다 일본 여성들이 선망하는 늘씬한 몸매를 뽐낸다. 

시나다 히데오 닛케이 엔터테인먼트 편집인은 "일본 여성들은 점점 친구 같은 스타보다 동경의 대상을 원하는 추세"라고 풀이했다. 소시의 소속사인 SM엔터테인먼트 김영민 대표는 "유난히 일본의 10~30대 여성 팬이 많은 까닭은 이들이 따라하고 싶은 워너비(wannabe) 스타일이 바로 소시이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AKB48 총프로듀서인 아키모토 야스시도 "노래와 춤이 되면서 늘씬하기까지 한 한국 걸 그룹은 확실히 일본 걸 그룹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스타일"이라고 평했다. 

아이돌 그룹의 세계 시장 공략이 늘어나면서 한 단계 발전된 마케팅 기법이 한몫 했다는 분석도 나온다. 김 대표는 "비틀스 프로젝트가 주효했다."고 전했다. 영국 비틀스가 음악을 먼저 히트시킨 뒤 일본을 방문한 것처럼, 소시도 히트곡 주인공을 보고 싶어하는 일본 팬들의 열망이 최고조에 이르렀을 때 현지 콘서트를 열어 열기를 극대화시켰다는 얘기다. '무국적' 솔로 스타로 진출한 보아와 '한국 국적'으로 신인처럼 단계를 밟은 동방신기에 이어 제3의 일본 공략 유형을 제시했다는 자부심도 컸다. 

 

2010년 10월 30일 (토) 03:36  서울신문

 

 

 

 

"한일해저터널 천문학적인 경제효과 유발"<부발연>

 

생산유발효과만 54조5천억원..고용효과 45만명 

최적노선으로 '부산~가덕도~대마도~후쿠오카' 제안 

(부산=연합뉴스) 신정훈 기자 = 거가대교 해저침매터널 개통 이후 초대형 토목공사인 한일해저터널 건설 사업을 둘러싼 논의가 수면 위로 부상하고 있는 가운데 한일해저터널이 천문학적인 파급 효과를 가져올 것이란 주장이 제시돼 주목을 받고 있다. 

부산발전연구원 광역기반연구실장인 최치국 박사는 '한일터널 기본구상 및 향후 과제'란 자료를 통해 한일해저터널의 파급 효과와 관련 "동북아 교역 활성화는 물론 동북아를 1일 생활권으로 묶을 것"이라고 13일 밝혔다. 

또 한일해저터널 사업의 투자액이 19조8천억원(한국 부담분)에 이를 것으로 추정하고, 이에 따른 생산유발효과는 54조5천287억원, 부가가치 유발효과는 19조8천33억원에 달하며, 고용유발효과는 44만9천900여명에 이를 것으로 전망했다. 

그는 한일해저터널 수요와 관련, 여객은 417만6천명(2030년 기준)이 이용할 것으로 추정했으며, 화물은 9만3천TEU(2030년 기준)에 이를 것으로 예측했다. 

그는 최적 노선으로 부산 강서구 국제물류산업도시~가덕도~남형제도~대마도~이키섬~후쿠오카를 잇는 222.6㎞(해저 146.8㎞+육상부 75.8㎞, 최대수심 190m, 교통수단 고속철도+카 트레인)를 제안했다. 

이 구간 해저터널을 짓는데 약 10년이 소요될 것으로 추정했으며, 건설비는 1㎞당 4천130억원, 총 92조원가량이 들 것으로 전망했다. 

이 구간은 일본 측 일한터널연구회 측이 제안했던 부산~가덕도~거제도~대마도~이키섬~카라츠간 220㎞(해저 128㎞+육상부 92㎞, 최대수심 160m, 교통수단 신칸센+카 트레인)구간보다 건설기간은 5~10년 앞당기고, 건설비는 최대 40조원 가량 줄일 수 있는 것으로 최 박사는 분석했다. 

그는 양국 정부 차원에서 한일해저터널 프로젝트를 새로운 100년의 한일 협력프로젝트로 선정하는 한편 한일해저터널 건설의 가시화를 위해 한일 양국의 부담으로 한일해협구간 지형.지질조사, 노선대 선정 및 공법연구 등을 담당할 한일터널연구원 또는 대학원을 설립할 것을 제안했다. 

최 박사는 이 자료를 15일 오후 부산발전연구원에서 열릴 '한일해저터널 국제세미나'에서 발표할 예정이다. 

이날 세미나는 부산발전연구원, 한국의 한일터널연구회, 일본의 일한터널연구회가 공동 주최하는 것으로, 한일해저터널 추진기구, 재정확보, 단계별 건설방안에 대한 논의가 진행될 예정이다. 



한 가지 흥미로운 사실은 소시는 일본 여성, 카라는 남성들 사이에서 더 인기가 있다는 점이다. 일본에서 5년째 직장생활 중인 김혜경(29)씨는 "일본 남자들은 키 큰 여자를 멀리하는 성향이 있다."면서 "소시보다 평균 신장이 작은 카라나 AKB48이 일본 남자들 사이에서 더 인기인 것은 그 때문"이라고 귀띔했다. '겨울연가' '대장금' 등 드라마로 대표되는 구(舊) 한류에 이어 노래, 패션, 화장법까지 전방위 소비 아이콘으로 떠오른 신 한류 열기는 당분간 지속될 것이라는 게 대체적인 관측이다. 

일본 내 한국음악 전문 채널 '엠넷 재팬'을 총괄하는 민병호 CJ미디어 재팬 본부장은 "내년에는 한국의 보이 그룹들도 본격 진출할 움직임"이라며 "양질의 아티스트를 꾸준히 배출한다면 한류 붐은 지속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도쿄 이종락특파원 

2010년 10월 13일 (수) 16:26  연합뉴스

 

 

 

 

 

 

日 상식밖 환율발언에 정부 '강력 항의'

 

(서울=연합뉴스) 정준영 김준억 기자 = 일본 정부가 중국은 물론 한국의 외환시장까지 싸잡아 비판한 것은 수세에 몰린 자국 상황의 돌파구를 찾으려는 시도로 보인다. 

우리 정부의 강력 항의에 대해 일본 측이 재발 방지를 약속하면서 일단 봉합되는 분위기지만 글로벌 '환율 전쟁'이 확산 추세에 있는 만큼 논란의 불씨가 쉽게 꺼지지는 않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는 상황이다. 

◇상식밖 日 환율발언..정치적 포석인듯 

일본 간 나오토(菅直人) 총리와 노다 요시히코(野田佳彦) 재무상은 13일 중의원 예산위원회에서 약속이나 한 듯 한국과 중국의 외환시장정책에 대한 비판을 쏟아냈다. 

간 총리는 글로벌 통화 절하 경쟁과 관련 "특정국이 자기 나라의 통화가치만을 인위적으로 낮게 유도하는 것은 주요 20개국(G20)의 협조에서 벗어나는 것"이라며 "한국과 중국도 공통의 룰 속에서 책임 있는 행동을 취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노다 재무상도 "한국은 원화 환율에 수시로 개입하고 있고, 중국도 지난 6월 외환제도 개선을 통해 위안화의 유연화 노선을 택했으나 걸음이 지체되고 있다"고 비판한데 그치지 않고 이달말 경주에서 열리는 G20재무장관회의에서 "한국은 의장국으로서 그 역할을 엄하게 추궁당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생사람을 잡는'듯한 이런 발언에 우리 측은 발언 배경에 촉각을 곤두세웠다. 

공식석상에서 특정국을 거명해 환율 정책을 비판하는 것은 상식 밖의 일인데다 자국 외환시장에는 대규모 개입을 하면서도 수출 경쟁국인 한국을 문제 삼는 `이중적 행태'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총리와 장관이 의회에서 예상치 못한 질의에 답변하는 과정에서 부적절한 발언이 나왔다는 일본측의 해명도 전해졌지만, 일단 외환정책을 놓고 수세에 몰린 일본의 상황이 반영됐다는 시각이 지배적이다. 

밖으로는 이달 초 공개적인 시장개입에 따른 국제사회의 따가운 시선을 감안해 한국까지 끌어들여 '물 타기'하는 것은 물론 자신들의 개입을 정당화하려는 의도가 엿보인다는 관측이다. 또 안으로는 엔고로 수출시장에서 경쟁력 저하를 우려하는 자국 기업들의 목소리를 무마하기 위한 정치적 포석 성격이 강하다고 전문가들은 분석했다. 

한 시장 참가자는 "일본 정부가 대규모 개입에도 엔화 강세가 지속돼 정부 정책이 실패하자 화살을 다른 곳으로 돌리기 위한 국내 `정치용'인 것 같다"며 "일본 기업들의 불만을 잠재우기 위해 괜히 한국과 일본을 걸고넘어진 것 같다"고 분석했다. 

아울러 G20 의장국을 맡아 '잘 나가는' 한국에 대한 견제심리가 작용한 게 아니냐는 분석도 없지 않다. 더욱이 일본이 주최하는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가 시기적으로 G20 서울회의에 이어 열리면서 뒷전으로 밀리고 있는 것도 일본 정부의 '한국 흠집내기' 정서의 배경일 수 있다는 얘기다. 

◇日정부 재발방지 약속..갈등 불씨는 안꺼져 

정부는 당초 일본 총리와 재무상의 발언에 대해 "다른 국가에 대해 대응하지 않는 것이 원칙으로 노코멘트"라고 공식 입장을 정리했으나 파문이 커지자 일본 당국에 강력하게 항의해 재발방지 약속을 받아낸 사실을 언론에 공개했다. 

정부가 강경 대응으로 선회한 것은 일본 정부가 단순히 외환시장 개입만 지적한 것이 아니라 G20 정상회의 의장국 지위를 걸고 넘어졌기 때문으로 분석된다. 

한국은 글로벌 환율전쟁을 서울 G20 정상회의에서 중재해야 하는 부담을 안고 있어 일본 측의 발언을 무시할 수 없는 상황이기 때문이다. 

이날 항의는 기획재정부 김익주 국제금융국장이 카운터파트인 일본 재무성 국제국장에게 전화를 통해 이뤄진 것으로 전해졌다. 

기획재정부 고위 관계자는 "일본 총리와 재무상의 의회 발언에 대해 일본 재무성 측에 전화를 걸어 강력히 항의하고 재발 방지를 요구했다"며 "일본 측은 '다른 나라 외환 정책을 언급하는 것은 부적절한 것임을 안다'며 '다시는 그런 일이 없도록 하겠다'는 취지의 답변을 해왔다"고 말했다. 

일본 정부가 공식적으로 재발 방지를 약속했지만 환율갈등의 불씨는 쉽게 꺼지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일본 총리의 발언이 중의원 예산위원회에 출석한 자리에서 나왔다는 점에서 '국내 정치용'으로 막대한 자금을 투입하고도 엔화강세를 막지 못했다는 비난의 화살을 돌릴 곳이 여전히 필요하기 때문이다. 

일본 기업들은 외환시장 개입에 실패한 일본 정부를 중국과 한국 정부와 비교하면서 불만을 터뜨리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 때문에 환율 전쟁을 예고하고 있는 오는 22~23일 G20장관회의에 이어 다음달 정상회의를 주목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우리 정부도 이런 점을 감안해 신중한 자세로 일관하고 있다. 환율이 급변동하는 쏠림 현상에 대해서는 미세조정에 나선다는 원칙적인 방침을 견지하고 있는 가운데 역외투자자들의 투기거래에 대한 공동검사 등을 통해 우회 전술도 펴고 있다. 

아울러 최근 진동수 금융위원장이 "관계부처와 협의하겠다"고 밝힌 외국인 채권투자에 대한 이자소득세 원천징수 재개와 관련해서도 기획재정부는 "국제적 정합성 차원에서 1년 반 전에 폐지한 것을 부활할 수 있겠냐"며 공식적으로 부인하고 있지만 시장에서 가능성을 배제하지 않는 상황에 대해서는 불만이 없다는 입장이다.

 

2010년 10월 13일 (수) 21:55  연합뉴스

 

 

 

 

 

 

 

 

 

막걸리 세계인의 술로- 일본서도 열풍(동아일보)

 



저녁식사 자리에서 막걸리를 마시는 일본인의 모습은 이제 낯선 광경이 아니다. 16일 저녁 일본 오사카의 한식당 ‘한일관’에서 막걸리를 마시고 있는 일본인들(왼쪽 사진)과 도쿄의 한 한식당 앞에 마련된 막걸리 광고판. 도쿄=한상준 기자 alwaysj@donga.com·사진 제공 aT 오사카지사
 

9일 저녁 일본 도쿄(東京) 우에노(上野) 거리에 위치한 한 한국식당. 

나카야마 다카테루(中山준彰·25) 씨가 거래처 사람들과 저녁식사를 하고 있었다. 테이블 한쪽에서는 삼겹살이 익고 있었고, 4명의 일행은 도토리묵과 모둠전을 안주로 막걸리를 마시고 있었다. 한국의 저녁 회식 자리처럼 보였다. 나카야마 씨는 “한 달에 한두 차례는 이곳에서 저녁을 먹으며 막걸리를 마신다”며 “한국에 가본 적은 없지만 친구의 권유로 처음 마셔본 뒤 자주 마신다”고 했다. 한국에서 불고 있는 막걸리 바람은 일본에서도 마찬가지였다. 

○ 20, 30대 여성에서 전 계층으로

나카야마 씨의 옆 테이블에 앉은 두 명의 여성은 생맥주 한 잔씩을 비운 뒤 곧바로 식사와 함께 막걸리를 주문했다. 익숙한 손놀림으로 막걸리 잔을 채우던 후지와라 아야노(藤原o及·31) 씨는 “막걸리칵테일 등 다양한 막걸리가 있어 처음 마실 때도 거부감이 적다”며 “한국 음식과 함께 마시기에는 맥주보다 막걸리가 좋다”고 말했다.

실제로 이 식당은 ‘거봉막걸리’ ‘매실막걸리’ 등 다양한 막걸리칵테일을 판매하고 있었다. 막걸리를 찾는 일본인 손님이 늘면서 이 식당은 아예 ‘막걸리+모둠전’(3500엔·약 5만 원)과 같은 세트 메뉴도 내놓았다.

일본에서 막걸리가 관심을 받기 시작한 것은 3년여 전부터다. 이종견 aT(농수산물유통공사) 도쿄지사장은 “한국과 일본의 막걸리 붐이 서로 교차하면서 지금처럼 양국에서 막걸리가 인기를 끄는 것으로 봐야 한다”며 “배용준과 대장금으로 대표되는 한류 바람은 이 같은 흐름에 불을 지폈다”고 설명했다. 한국을 다녀온 일본인들이 막걸리를 찾기 시작했고, ‘일본에서 막걸리가 인기’라는 사실이 알려지며 다시 한국에서도 막걸리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는 것. 이 지사장은 “소비층도 초기에는 20, 30대 여성 중심이었지만 이제는 더 넓고 두꺼워졌다”고 분석했다. 

○ 과당 경쟁 우려도

오사카(大阪)에서 15년째 한국 식당 ‘한일관’을 운영하고 있는 이명희 사장은 최근에 생막걸리 전용 보관 용기를 들여놨다. 10L들이 통 2개가 달린 이 용기는 차가운 상태를 유지해주고, 막걸리 특유의 침전물이 가라앉지 않도록 해준다. 이 사장은 “막걸리를 찾는 손님이 많아 용기 가득 막걸리를 채우면 딱 하루 판매량이 된다”며 “일본인 손님들이 주로 찾는다”고 귀띔했다. 이 식당의 손님 중 95%는 일본인이다. 이곳에서 만난 후지와라 쇼이치(藤原昌一·44) 씨는 “막걸리 자체가 좋아서 마신다”며 “독주를 싫어하는 일본인들의 특성에도 맞고, 목 넘김도 부드러우며, 무엇보다 맛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이처럼 일본 내 막걸리의 인기가 높아지면서 진출업체도 크게 늘었다. 그동안 포천 이동막걸리를 일본에 수출해온 이동저팬이 사실상 유일한 대규모 업체였지만, 지난해 말부터 진로저팬이 뛰어들면서 ‘빅2’를 형성했다. 

그러나 올해 초부터 40여 업체가 막걸리 시장에 뛰어든 탓에 벌써 과열 경쟁의 기미도 보이고 있다. 노태학 aT 오사카지사장은 “이제 막 무르익기 시작한 일본 내 막걸리 시장이 국내 업체들의 출혈 경쟁으로 무너질 수도 있다”며 “일단 현지 유통망을 확보한 뒤 진출해야 실패를 막을 수 있다”고 말했다.

 

2010-09-19

 

 

 

 

100m 줄서기는 기본…장사 너무 잘 돼서 '폐점'

 

< 8뉴스 > 

< 앵커 > 

일본 도쿄의 한 유명 라면집이 장사가 안 돼서가 아니라, '너무 잘 돼서' 문을 닫게 됐습니다. 

어떤 사연인지 유영수 특파원이 취재했습니다. 

< 기자 > 

도쿄 시나가와의 한 유명 라면집입니다. 

자리가 10여석 밖에 안 되지만, 점심시간이면 한꺼번에 2백 명 이상 몰려들어 대기하는 사람들이 100미터 가까이 늘어서 있습니다.

[손님 : 도쿄에서 가장 맛있는 집이니까요.] 

몇 시간을 기다려야 겨우 라면 한 그릇을 먹을 수 있습니다. 

[손님 : 6시간 기다렸어요. 기다린 보람이 있을 만큼 맛있었어요.] 

그런데 이 가게가 최근 문을 닫았습니다. 

이유는 다름 아닌 기다리는 손님들의 긴 줄 때문입니다. 

줄 서기가 좁은 골목길 차 통행에 방해가 되고, 여러 가지로 불편하다는 이웃 주민들의 민원이 끊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웃주민 : 항상 차가 다니는 길인데, 줄이 방해가 됩니다.] 

가게 문 여는 시간을 앞당기고 배달도 하는 등 자구책을 내놨지만, 소용이 없었습니다. 

[경찰 : 신고전화가 10분에 한번씩 와요. 주민들이 번갈아 전화해서 불평을 합니다.] 

결국, 장사를 접고 다른 곳을 물색하게 됐습니다. 

[라면집 종업원 : 좁은 곳에서 해서, 이웃에 폐를 끼치기만 해서요.] 

이 라면집의 폐점은 맛이 있으면 오래 기다려도 좋다는 일본의 독특한 줄 서기 문화와, 이웃에게 절대 폐를 끼쳐서는 안 된다는 일본인 특유의 사회적 인식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2010년 09월 18일 (토) 21:12  SBS

 

 

 

 

“독도는 일본땅”…일본 새 정권도 변함없어

 

2010년 방위백서 발표 

일본 방위성이 2010년판 방위백서에서도 "독도는 일본 고유의 영토"라는 표현을 그대로 유지했다. 한국 정부는 이에 논평을 내어 항의의 뜻을 밝혔다. 

일본 방위성은 10일 내각회의 의결을 거쳐 발표한 방위백서 제1부 '우리나라(일본)를 둘러싼 안전보장환경' 편에서 "일본 고유의 영토인 북방영토 및 다케시마의 영토 문제가 여전히 미해결인 상태로 존재하고 있다"고 표현했다. 

방위성은 자민당 집권기인 2005년 방위백서에서 처음으로 독도를 '일본의 고유영토'라고 표현했으며, 6년째 큰 변화없이 같은 표현을 유지하고 있다. 특히 올해 방위백서에 이런 표현이 담긴 것은 정권이 자민당에서 민주당으로 바뀌었어도, 영토문제에 대해서는 일본 정부의 태도에 변함이 없음을 보여준 것으로 해석된다. 

앞서 문부과학성은 지난해 12월 고교 학습지도요령 해설서에서 독도를 직접 언급하지는 않았지만 '(독도에 대한 영유권 주장을 담은) 중학교 학습에 입각한 교육'을 하라고 밝혀, 고교생들에게 독도 영유권 교육을 하도록 지시했다. 또 지난 3월엔 초등학교 교과서 검정결과를 내놓으면서 5종의 사회 교과서에 표시된 지도에 독도를 자국 영토로 표현하도록 했다. 

외교통상부는 이날 '당국자 논평'을 내어 "한·일 양국관계에도 도움이 되지 않는 것으로서 깊은 유감을 표하며, 이를 즉각 철회할 것을 요구한다"고 밝혔다. 외교부는 이어 "정부는 독도가 역사적·지리적·국제법적으로 명백한 우리 고유의 영토임을 재차 분명히 하며, 우리의 독도 영유권을 훼손하려는 어떠한 부당한 기도에도 단호히 대응해 나갈 것"이라고 강조했다. 

정부는 이날 오후 외교부 일본과장이 주한일본대사관의 정무참사를 외교부로 불러 항의했고, 국방부도 주한일본대사관 무관을 초치해 항의했다. 정부의 이런 대응은 예년과 같은 수준이다. 

한편 일본 방위성은 이번 백서에 '한국 초계함(천안함) 침몰사건을 둘러싼 우리나라(일본)의 노력'이란 제목의 별도 해설을 실어 "한국 초계함에 대한 북한의 공격은 지역·국제의 평화와 안정을 해치는 허용할 수 없는 행위라고 보고, 국제사회에 적극 호소했다"고 기술했다. 

방위성 관계자는 지난달 30일로 예정됐던 방위백서 발표를 늦춘 이유에 대해서도 "천안함 침몰사건을 둘러싼 일본의 적극적인 노력을 담을 필요가 있었다"고 설명했다. 

 

2010년 09월 10일 (금) 21:40  한겨레

 

 

 

 

대만사람이 사실상 일본인보다 잘산다

 

가난한 일본인이라는 자조 섞인 말이 빈말이 아니었다. 일본은 잃어버린 20년을 거치며 싱가포르 홍콩 대만 등에도 1인당 소득(구매력 기준 1인당 GDP 기준)이 추월당한 것으로 나타나 삶의 질 측면에서는 더 이상 아시아 최고 선진국이라고 말하기 어렵게 됐다. 한국 역시 일본과 소득 격차가 4127달러에 불과할 정도로 바짝 근접했다. 

국제통화기금(IMF)에 따르면 올해 말 일본의 구매력평가 기준 1인당 국내총생산(GDP)은 3만3478달러, 한국은 2만9351달러를 기록해 통계가 산출되기 시작한 1980년대 초 이래 가장 근접한 수준까지 좁혀질 것으로 전망됐다. 

구매력평가(PPP) 기준 GDP란 국내총생산을 인구로 나눈 1인당 명목 GDP와는 달리 물가와 환율이 동등하다고 가정한 채 상품을 구매할 수 있는 실질적인 국민의 생활 수준을 반영하는 통계지표다. 

니혼게이자이신문은 6일 IMF의 이 같은 통계를 인용해 "한ㆍ일 양국의 성장률 추세로 볼 때 2018년 한국이 구매력평가 기준 1인당 GDP에서 일본을 사상 처음으로 추월할 가능성이 크다"고 보도했다. 

이에 앞서 일본은 1990년대 중반 싱가포르에 1인당 GDP가 추월당한 데 이어 2000년대 들어서는 홍콩과 대만에도 잇달아 추월을 허용하며 아시아 국민의 생활 수준에도 지각변동이 초래된 것으로 파악됐다. 올해 구매력평가 기준 GDP도 싱가포르(5만2840달러), 홍콩(4만4840달러), 대만(3만3831달러) 등이 모두 일본을 상회한 것으로 추산됐다. 

니혼게이자이신문은 IMF의 GDP 통계를 인용해 "최근 10년간 아시아 국가들이 약진하고 있는 데 비해 유독 일본만 정체 상태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실제로 한ㆍ일 양국도 2000년 초 구매력평가 기준 GDP 격차는 1만달러를 상회했지만 불과 10년 사이에 격차가 절반 이하로 대폭 줄어든 것으로 조사됐다. 

한편 중국은 구매력평가 기준 GDP가 올해 현재 7240달러로 세계 96위, 명목 기준 1인당 GDP는 3999달러로 97위다. 중국은 전체 GDP에서 올해 일본을 제치고 세계 2위로 부상할 것으로 예상되지만 국민 개개인의 삶의 질은 아직 선진국 수준에 크게 미치지 못한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지표다. 

다만 중국은 2000년 구매력 기준 1인당 GDP가 2300달러에서 10년 만에 무려 3배 이상 늘어나며 가장 빠르게 성장 중인 국가로 확인됐다. GDP 통계는 명목가치와 구매력평가 기준 등 두 가지 방식으로 산출되는데 이 가운데 구매력평가 기준은 한 나라의 총생산을 실질적으로 구매할 수 있는 가치로 환산한 수치를 뜻한다. 

■ < 용어설명 > 

구매력평가(PPP) 기준 GDP = 각국의 물가상승률 차이, 환율 영향을 제외하고 순수하게 구매력을 기준으로 국내총생산을 산출한 통계. 명목 기준 GDP가 각국의 경제력 규모를 반영하는 데 비해 구매력평가 기준 GDP는 국민 개개인의 삶의 질을 반영하는 지표로 자주 활용된다. 

 

2010년 09월 06일 (월) 17:05  매일경제

 

 

 

 

日 공립 초중학교 18% 고래고기 급식

 

일본 공립 초.중학교의 18%가 고래고기 요리를 급식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5일 교도통신에 따르면 전국 공립 초.중학교를 대상으로 자체 조사한 결과 18%인 5천355개 학교가 작년에 한 차례 이상 고래고기를 학생들에게 급식했다.

일본에서 학생들에 대한 고래고기 급식은 1987년 남극해에서의 상업 포경(고래잡이)이 금지된 이후 격감했으나 지난 2005년께부터 증가하고 있다.

학교에서 급식하는 고래고기는 일본 고래연구소가 조사포경 명목으로 남극해에서 잡은 밍크고래 등으로, 시중가격은 ㎏당 2천60엔이지만 학교에는 3분의 1 가격에 공급하고 있다.

와카야마(和歌山)현과 나가사키(長崎)현 등 일부 지방자치단체는 일본의 고유 음식문화를 학생들에게 전해주기 위해 고래고기를 급식하고 있다고 밝혔다.

일본은 조사포경으로 잡은 고래의 3∼4%인 연간 약 150t을 학교에 급식하고 있다.

이에 대해 환경보호단체는 "조사포경으로 잡은 고래고기 재고가 1년분 정도 쌓여 있을 정도로 수요가 없는데도 고래잡이를 계속하고 있다"면서 "일반 판매가 되지 않자 학교의 급식수요가 있는 것처럼 처리하고 있어 국제문제화할 수 있다"고 경고했다.

 

 (도쿄연합뉴스) 김종현 특파원 kimjh@yna.co.kr 2010-09-05 14:43

 

 

 

 

"日 '독도영유권' 주장 방위백서 10일 발표"

 

(도쿄=연합뉴스) 이충원 특파원 = 일본이 10일 '독도는 일본땅'이라는 주장을 담은 2010년판 방위백서를 발표할 예정이라고 마이니치신문이 3일 보도했다. 

이 백서에는 '우리나라(일본) 고유의 영토인 다케시마(竹島.독도의 일본식 명칭)'라는 기술을 바꾸지 않은 채 그대로 포함했다고 신문은 전했다. 

이에 따라 지난해 방위백서와 마찬가지로 '우리나라 고유의 영토인 북방영토와 다케시마의 영토 문제가 여전히 미해결 상태로 존재하고 있다'는 문장을 집어넣었을 것으로 예상된다. 

일본은 앞서 7월30일 방위백서를 발표하려다 8월10일 간 나오토(菅直人) 총리의 한국강제병합 사죄 담화 발표와 강제병합 100년인 8월29일을 앞두고 한국과 외교 마찰을 우려해 발표를 미뤘다. 

당시 공식적으로는 천안함 사건 등 일본의 안전보장에 관한 최신 사안을 포함하기 위해 발간을 미뤘다고 설명했다. 

센고쿠 요시토(仙谷由人) 관방장관은 7월 말 기자회견에서 독도영유권에 대한 질문을 받고 "우리 국가의 입장은 일관돼 있다. 아무런 입장 변화가 없다"며 방위백서 발표를 미뤄도 표현은 바꾸지 않을 것이라는 점을 사실상 예고했다. 

일본은 1904년 2월에는 한일의정서, 같은 해 8월에는 한일협정서 체결을 강요해 대한제국의 손발을 묶은 뒤 1905년 1월 내각회의에서 '독도를 다케시마라고 부르고, 시마네(島根)현 오키도 소관으로 한다'고 결정했다. 이후 이를 근거로 독도영유권 주장을 해왔고, 2005년부터는 방위백서에 이 같은 주장을 포함했다. 

 

2010년 09월 03일 (금) 07:52  연합뉴스

 

 

 

 

[경술국치 100년] “15년전 순종황제 날인 날조확인 순간 日人들도 탄식”

 

[서울신문] 일이 벌어진 것은 1995년 어느 여름날. 일본 주오대(中央大) 강당에서 열린 을사늑약 90주년 학술대회장이었다. 연단에 자리한 수십명의 한·일 양국 학자들과 강당을 가득 메운 수백명의 일본인들은 호기심 어린 눈길로 바라보고 있었다. 먼저 일본 통감부 직원 마에마 교사쿠가 남긴 글에서 따와 합자한 '척(坧)'자가 제시됐다. 조금 뒤 순종 황제가 일본과의 외교문서에 서명한 '척(坧)'자를 겹쳐 보였다. 딱 맞아떨어졌다. 


대한제국 문서에 있는 순종 황제의 날인 서명이 실은 일본인 통감부 직원의 날조였다는 사실이 명백히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강당은 '아~' 하는 낮고도 무거운 탄식으로 가득 찼다. 학술대회 뒷자리를 떠나는 학자와 청중은 물론 신문·방송 기자들까지 훌륭한 연구성과라며 악수를 청해 왔다. 건네받은 명함만 수백장이었다. 그러나 다음날 어느 신문이나 방송에서도 이 얘기를 찾아 볼 수 없었다. 

경술국치 100년(29일)을 맞아 27일 서울 의주로 동북아역사재단 사무실에서 만난 이태진 서울대 명예교수는 당시 기억을 이렇게 더듬었다. 이때의 주장은 차츰차츰 불어나 15년 만인 2010년 한·일병합 조약은 원천무효라는 '한·일 지식인 공동선언'을 끌어내기에 이르렀다. 

→어떻게 마에마 교사쿠의 필체라고 확신했습니까. 

-말하자면 '표적 수사'였어요(웃음). 근거는 두 가지였습니다. 하나는 마에마가 쓰시마 출신으로 한국어에 능통했다는 겁니다. 또 하나는 그가 일본의 한국사 연구 1세대라는 점이었습니다. 마침 제가 학부 시절에 마에마가 남긴 서얼 제도나 훈민정음 연구논문을 많이 봤어요. 때문에 순종 황제의 위조된 친필 서명을 봤을 때 마에마 글씨 같다는 감이 확 오더라고요. 그래서 넌지시 마에마 유품을 볼 수 있는 곳이 어디냐고 일본인들에게 수소문해 보니 규슈대학에 있다는 거예요. 바로 날아가서 척(坧)자를 합자해 만들어본 뒤 비교했지요. 그 뒤 수사결과를 발표한 겁니다. 

→일본 반응에 변화가 있었나요. 

-주오대 때 반응이 워낙 열광적이었는데 다음날 언론보도가 하나도 없어서 이게 뭔가 했습니다. 나중에 들어 보니 우익 테러 같은 걸 두려워하고 있더군요. 그런데 요즘에 많이 바뀌었습니다. 지난해 10월 시민단체 초청으로 교토에 가서 설명했더니 모두들 "어떻게 이렇게 억지 조약을 맺을 수 있나. 부끄럽다."고 하더군요 

→그런 변화의 기미가 언제 감지됐나요. 

-2000년대 들어 8년 동안 을사늑약 원천무효 주장을 펼쳤습니다. 관련해서 국제학술대회를 열고 그 결과를 2008년 '한국병합과 현대'라는 책으로 일본에 내놨어요. 우리나라에서는 지난해 나왔고요. 일본어판이 나오면서부터 일본 학자들 사이에 "이제 우리도 양심적으로 뭔가 해야 하지 않겠느냐."는 목소리들이 나왔다고들 합니다. 학문적 사실만큼은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일본 학계의 높은 수준을 볼 수 있었습니다. 

→변화 원인이 어디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탈아론(脫亞論)에 대한 반성이지요. 일본은 뭔가 특별한 존재니까 아시아를 벗어났고, 미개한 한국과 중국은 우리가 이끌어 줘야 한다는 게 탈아론입니다. 그런데 최근 한국과 중국이 눈부시게 성장하면서 일본만 특별히 우월하다는 얘기를 하기 어렵게 된 것이지요. 결국 예전 탈아론은 침략주의에 불과하지 않았느냐는 반성이 나오게 된 겁니다. 이 같은 반성은 일본 지식인들 사이에서 특히 광범위하게 공감대를 얻는 것 같아요. 예전에는 논쟁을 하다 보면 지식인들이 더 답답해서 뭔가 큰 정치적 계기가 없으면 일본의 변화가 힘든 게 아닌가 싶기도 했는데 지금은 양심적 지식인들이 더 앞장서 주고 있습니다. 

→선생님의 연구가 고종 황제를 지나치게 미화한다는 비판도 있습니다. 고종이 결국은 전제군주 아니었냐는 것이지요. 

-그건 지금이 민주주의 시대다 보니 군주정에 대한 부정적인 시각이 있기 때문이 아닌가 합니다. 가령 민중사학적 시각에서는 고종의 근대화 계획보다는 동학혁명이 더 중요합니다. 동학혁명이 있었는데 고종 황제가 탄압했다, 그러니 전제군주는 나쁜 것 아니냐는 겁니다. 그런데 그런 주장은 머릿속으로 생각한 틀을 가지고 있을 뿐 구체적 사료를 세심히 보지 않았기에 나오는 겁니다. 당시 동학의 주장을 보면 고종을 비난하는 내용이 없습니다. 고종 역시 일본이 동학혁명을 핑계 삼아 개혁을 하라고 강요하자 농민군과 충분히 협상할 수 있으니 입 다물고 가만히 있으라고 반박합니다. 이런 구체적인 사료를 들여다보라고 권하고 싶어요. 나도 한때 고종이 무능하다고 생각한 적이 있습니다. 그러나 사료를 보면서 인식이 완전히 뒤바뀌었습니다. 일제가 자신의 강탈을 정당화하기 위해 채색했던 논리가 너무 상식처럼 퍼져 있다는 말이지요. 

→탈민족론은 어떻게 보십니까. 그들 입장에서는 선생님의 연구가 결국 '강도' 일본과 '피해자' 조선이라는 이분법을 더 강화하는 것처럼 보일 텐데요. 얼마 전 내놓은 선생님 논문도 일본 정한론(征韓論)의 기원을 조슈(長州) 지역 파벌, 그러니까 결국 임진왜란 주범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까지 거슬러 올라간다는 내용인데요. 

-메이지유신을 추진한 조슈 세력은 한마디로 천황의 영광을 드높이기 위해서는 천황에게 조공을 바치는 국가가 있어야 한다. 그것이 바로 조선이라는 논리입니다. 정한론이지요. 사실 일본이 근대화를 이루기 위해 들인 엄청난 노력과 어쨌든 그걸 성공적으로 이뤄냈다는 점은 높이 평가할 만합니다. 그러나 정한론과 친근할 수밖에 없는 메이지유신의 근본적인 한계도 지적해 줘야 합니다. 당시 일본에서는 굳이 남들을 침략할 필요까지 있느냐는 소일본주의가 나옴에도 이걸 무시해 버립니다. 이 문제는 우리가 피해자라서 더 정확하게 지적해 줄 수 있는 겁니다. 

→고종 시대사 연구가 얼마나 더 진행될 수 있을까요. 

-무궁무진하다고 생각합니다. 일본이 1995년 '무라야마 담화' 이후 (한국 강제병합에 관한) 사료 공개 작업을 추진 중인데 국립공문서보관소의 목록상태가 아주 나빠요. (일본에) 장기체류하면서 눌러앉아 뒤져보지 않으면 뭐가 들었는지 잘 모를 가능성이 높습니다. 좀 더 정리가 되면 차근차근 둘러볼 여유가 더 많을 거예요. 요즘 들어 자료가 많이 올라오고 있으니 고종 시대사는 앞으로 분명 크게 바뀔 겁니다. 

→고종이 독살됐다고 보는 소신에도 변화가 없으신 거지요. 

-물론입니다. 얼마 전 (독살설 근거) 자료를 공개하지 않았습니까. 1905년의 을사늑약 유효성을 인정하라는 일본의 요구를 고종이 거부하자 독살한 겁니다. 

간도 협약에 대해서도 기대와 우려가 교차합니다(일본이 간도를 청나라에 넘긴 간도협약은 1909년 체결됐다. 이 협약이 가능할 수 있었던 것은 대한제국 외교권을 일본에 넘긴 을사늑약 때문이다. 따라서 을사늑약이 원천무효라면 간도협약도 원천무효가 된다. 때문에 한쪽에서는 이번 기회에 간도까지 되찾자고 하는 반면 현실적으로 가능하겠느냐는 우려도 나온다). 

-논리적으로는 무효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일본에 책임을 묻는 것도 힘겨운 싸움인데 중국과 또 싸울 수 있을까요. 힘을 분산하지 않았으면 해요. 조선과 중국은 간도협약 이전부터 영토 문제를 두고 갈등을 빚었습니다. 그래서 맺은 게 1899년 한·청조약인데 이때 간도 문제를 빼버립니다. 고종은 중국과의 조공관계에서 벗어나는 것, 그래서 중국과 협상을 통해 대등하게 조약을 체결하는 것 자체를 독립국에 대한 하나의 징표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간도 문제를 비워 두는 방식으로 진행했습니다. 그런 원칙이 원용될 수 있지 않을까요. 

→마지막으로 다른 질문 하나 드리겠습니다. 일본 일각에서는 한국도 베트남전에 대해 털어낼 것은 털어내라고 요구합니다. 

-그쪽 연구자가 아니라 뭐라 말하기 어렵습니다만, 자세히 들여다보고 문제가 있다면 그렇게 해야지요. 다만, 일제의 한국 병합과 같은 수준의 문제인지에 대해서는 의문이 있습니다. 우리가 주체였느냐, 어느 정도 피해를 끼쳤느냐는 문제도 있고요. 그런데 그런 주장은 일본 쪽에서 자신의 책임을 부정하기 위해 내놓는 성격이 짙습니다. 그런 부분은 조심해야겠지요. 

 

2010년 08월 29일 (일) 16:56  서울신문

 

 

 

 

日 아키타현, 드라마 '아이리스'에 감사장

 

<한국일보>
日 아키타현, 드라마 '아이리스'에 감사장

 
(도쿄=연합뉴스) 이충원 특파원 =
 
 
일본 아키타(秋田)현이 지역 이미지 상승에 공헌했다며 한국 드라마 '아이리스' 출연자와 제작자 등 10명에게 감사장을 줬다고 마이니치신문 등 현지 언론이 28일 보도했다. 

아이리스 출연자 중 한 명인 정준하씨와 제작사인 태원엔터테인먼트의 정태원 대표는 27일 아키타현 현청을 방문해 사타케 노리히사(佐竹敬久) 지사로부터 감사장을 받았다. 

정씨는 "서울에서 일본에 올 때 비행기가 만석인 걸 보고, 아이리스의 효과를 느꼈다"며 "아이리스를 통해 (앞으로 방영이 예정된) 아시아 다른 나라에도 아키타를 소개하고 싶다"고 말한 것으로 전해졌다. 

아키타현은 이 지역의 호수와 온천 등을 배경으로 촬영된 아이리스가 방영된 뒤 서울-아키타 편 항공기의 탑승률이 높아지는 등 한국 관광객이 급증하자 조만간 촬영될 '아이리스 2'도 아키타에서 촬영해달라고 부탁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2010-08-29

식민지배는 분단 부른 현재적 사건… 韓日, 역지사지 태도 필요해(한국일보)

 

<<한국일보 특집>>
 
"식민지배는 분단 부른 현재적 사건… 韓日, 역지사지 태도 필요해" 

[한일 강제병합 100년]
정재정 동북아역사재단 이사장- 미즈노 나오키 교토대 교수 대담

진행·정리= 이왕구기자 fab4@hk.co.kr   
사진= 류효진기자 jsknight@hk.co.kr  
미즈노 나오키 교수

 

정재정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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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0년 8월 29일 한일강제병합조약 공포 이후 36년간 지속된 일제의 한국 강점은 한국 민족사에서 가장 불행한 사건이었다. 주체적인 근대 국민국가를 수립할 기회를 잃어버렸고, 유례없는 강압통치는 헤아릴 수 없는 물적ㆍ정신적 상처와 후유증을 남겼다.

한일강제병합조약이 공포된 지 꼭 100년이 되는 29일을 앞두고 한일 양국의 중진 역사학자인 정재정(59) 동북아역사재단 이사장과 미즈노 나오키(水野直樹ㆍ60) 교토대 인문과학연구소 교수의 대담을 마련했다. 지난 25일 동북아역사재단에서 만난 두 사람은 일본의 식민지배가 초래한 양국의 역사갈등의 원인과 해법을 모색하고, 양국이 진정한 역사의 동반자가 되기 위해서는 어떤 노력이 필요할지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 일본의 조선에 대한 식민통치의 성격에 대해서 어떻게 평가하는가. 서구 제국주의 국가들의 식민통치와 비교한다면.
 
▦정재정= 서구 제국주의 국가들도 식민지 경영을 했지만 국경을 접하고 있는 나라를 식민지로 삼은 예는 없다. 일본이 조선 지배의 명분으로 '동문동종'(同文同種ㆍ같은 한자를 쓰고 같은 황색인종임)을 내세운 것처럼 양국은 역사적ㆍ문화적으로 가까운데, 이런 나라를 식민지화한 경우는 없다. 일본은 또 소위 내선일체를 내세워 성명을 일본식으로 바꾼다든지 일본어 사용을 강제한다든지 하는 강경한 동화정책을 썼는데 이는 한 민족의 정체성을 송두리째 파괴하는 통치방식이었다. 일본은 조선을 대륙 진출의 교두보로 삼았다. 식민지사회에 사회, 경제 인프라를 구축했는데 이것도 좀처럼 볼 수 없는 방식이다. 물론 경제개발을 했다고 하지만 그 과실은 주로 일본인들에게 집중됐다.

▦미즈노 나오키= 일본의 식민지정책은 동화정책을 강화하면서도 차이를 해소하지 않거나 차이를 남긴 채 동화하는 방식이었다. 서양 제국주의 국가들은 피지배자의 일부, 엘리트만 동화하려는 정책을 썼다. 가령 프랑스는 식민지 알제리의 엘리트들을 기독교로 개종시키고 프랑스어를 교육해 프랑스 시민으로 만들고자 했다. 그리고 그들을 전적으로 프랑스 시민으로 대우했다. 반면 일본은 모든 조선인을 일본인으로 동화하려 했지만 실제로 일본인과 동등한 지위와 권리를 부여하지 않았다. 일본어 상용, 황국신민화정책 같은 것은 조선인을 전쟁에 동원하려는 정책이었다.

- 논란이 있지만 식민지근대화론에 비판적인 학자들도 식민지시기 조선이 근대적 면모를 갖추게 된 점을 부인하지 않는다. 식민지 근대화의 성격을 어떻게 봐야 하는가.

▦정= 식민지근대화론은 평균수명의 증가, 취학률ㆍ무역액의 확대, 도로ㆍ철도의 확충 등을 중시하는 것으로 주로 경제적 측면에 주목한 것이다. 그러나 식민지라는 특수상황에서 이뤄졌다는 점을 고려해야 된다. 파이는 커졌지만 과연 그 근대화의 과실을 누가 향유했는가를 물어야 한다. 식민지 말기 조선인이 2,500만명, 재조(在朝) 일본인은 70만명이었다. 그런데 조선 자본의 90%가 일본인의 수중에 있었고 대기업과 대토지의 경영자도 일본인이 대다수였다. 이것을 정상적 국민국가의 경제성장과 같다고 볼 수 있을까.

▦미즈노= 결과적으로는 도시화가 진행됐고 도시로 인구가 몰려들었고, 생활상에 있어서 근대화가 된 부분은 있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러나 조선사회 전체를 봤을 때 근대적인 생활의 혜택은 극소수에게 집중됐다. 식민지 근대의 성격을 해명할 때 경제적 측면을 중시하는 '근대화'와 문화ㆍ사회상을 주목하는 '근대성'은 구분될 필요가 있다. 또한 식민지 조선에 이식된 근대는 서양적 근대와는 다른 '일본적 근대'라는 성격도 있었다. 이런저런 문제들을 종합적으로 분석해야 한다.

▦정= 근대화를 '좋은 것' 또는 '이룩해야 할 것'이라는 긍정의 시각으로만 보아서는 안된다. 근대화의 과정에서는 정교한 폭력과 강력한 동원이 난무했다. 긍정과 부정의 측면을 감안하여 문제를 이해해야 한다.

- 지난 10일 발표된 간 나오토 일본 총리의 담화에 대해 평가한다면.

▦미즈노= 일본 내에서는 담화의 진정성이 불충분했다는 의견과 왜 한국에 몇 번이고 사과해야 하느냐는 의견이 엇갈렸지만 일본 언론매체들은 대개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것 같다. 병합조약이 '무효' 라고 말하지는 않았으나 한국인들의 '뜻에 반한 식민지 지배'라는 표현은, 내 생각에 그것을 우회적으로 인정한 것이라 생각한다. '반성과 사과의 뜻을 표명한다'고 했던 1995년 무라야마 담화보다 진전됐다고 본다.

▦정= 한국병합이 강제적이고 불법적이고 부당하게 이뤄졌다고 생각하는 한국인들의 처지에서 보면 대단히 불충분하다. 그러나 기준을 낮춰 보면 3가지 점에서 평가할 수 있다. 일본 총리가 강제병합 100년에 맞춰 담화를 발표했다는 점, 한국인의 의사에 반해 식민지배를 했다는 것을 인정한 점, 말로만 그친 것이 아니라 조선왕실의궤 반환, 사할린 한국인 문제의 해결 등 행동플랜을 제시한 점이다. 불충분한 점은 양국이 협의를 통해 진전시켜야 한다.

- 일본 총리가 여러번 사과를 해도 한국인들은 '진정성이 없다'고 비판하고 일본인들은 '언제까지 사과만 해야 하느냐'라고 불평한다. 어떻게 접점을 찾을 수 있을까.

▦정= 한국인들은 피지배자로서, 일본인들은 지배자로서 한국강제병합 이후의 근현대사를 이해하기 때문에 시각 차가 클 수밖에 없다. 역사인식의 접점을 찾기 위해서는 먼저 사실을 정확히 이해해야 한다. 그리고 상대방의 처지에서 사태를 바라보려는 역지사지의 자세가 필요하다.

▦미즈노= 일본인과 한국인의 역사인식이 다른 것은 이상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왜 상대방이 그런 생각을 하는가?'를 이해하려는 자세다. 지금까지 일본도 한국도 이 문제를 생각해보지 않았다.

- 근현대사 교육을 의도적으로 외면한 일본이나 식민사관 극복을 역사교육의 지상과제로 삼았던 한국 모두 문제가 아니었을까.

▦미즈노= 일반인들의 역사인식은 교육보다는 오히려 역사드라마나 영화 같은 매체에 영향을 받는다. 요즘 일본에서는 메이지시대를 긍정적으로 해석한 시바 료타로(司馬遼太郞)의 역사소설 <언덕 위의 구름>을 원작으로 한 TV드라마가 인기다. 이 드라마는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을 통해 일본이 강대국이 됐다는 역사관을 깔고 있다. 한반도에서 전쟁이 벌어졌고 조선인들이 피해를 입었다는 사실은 나오지 않는다. 한국인들도 TV 드라마를 통해 역사를 공부하고 이해하는 경우가 많지 않은가.

▦정= 식민지에서 해방된 한국이 민족주의적 역사교육을 실시한 것은 당연한 일이다. 한국의 TV도 1년에 두 번, 3ㆍ1절과 광복절을 전후해 역사 관련 특집방송, 드라마를 자주 편성한다. 어떤 시각에서 구성하느냐가 중요한데 얼마전까지 무조건 일본인은 '탄압자', 한국인들은 '저항자'로 묘사하는 것이 대부분이었다. 최근에는 식민지시기 다양한 유형의 인간생활을 보여주려는 쪽으로 바뀌고 있다. 역사를 보는 시각이 넓어지고 깊어지리라고 생각한다.

- 한국에서는 일본 민주당의 아시아 중시 외교를 주시하고 있다.

▦미즈노= 냉전체제가 해체되면서 일본은 동아시아라는 세계 속에서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라는 문제에 직면하게 됐다. 아시아를 중시하는 것은 당연한 선택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앞으로 잘될지는 모르겠다. 민주당 정권의 한계가 아니라 일본사회의 한계 때문이다. 냉전기 일본은 미국과 동맹관계를 맺었는데 많은 일본인들은 아직도 그 선택을 중시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전쟁 전의 '대동아공영권'과 같은 생각은 아니지만 아시아 각국들과 대등하게 서로 돕는 관계를 맺기보다는 일본이 중심국가가 돼 이끌어가야한다는 생각이 일본사회에서는 지배적이다.

▦정= 한중일을 중심으로 동아시아 각국의 상호의존관계가 심화하고 있다. 한국의 대일본, 대중국 교역액은 한국과 미국, 한국과 유럽연합의 교역액을 뛰어넘고 한국과 일본은 1년에 500만명, 한국과 중국은 700만명이 왔다갔다한다. 양국에 어떤 정권이 들어서든 현실적으로 아시아 중시 외교정책을 펼 수밖에 없다. 미즈노 교수가 일본의 한계를 말했는데 사실 우리도 한계가 있다. 지금처럼 남북관계가 악화되고 한중관계가 긴장되면 미국과 일본에 더욱 밀착할 수밖에 없다. 동아시아지역의 냉전을 완화하고 평화롭게 공존공영하는 방법을 고민해야한다.

- 유럽공동체에서 보듯 지역공동체의 형성은 세계사적 과제다. 한일관계의 발전을 밑거름으로 동아시아공동체를 이뤄낼 수 있을까.

▦미즈노= 민주당이 출범하며 하토야마 전 총리가 동아시아 공동체에 대해 이야기하긴 했는데 구체적으로 진전된 것은 없는 것 같다. 양국 정부 차원에서는 자유무역협정과 관련된 얘기가 오가고 있는 것 같은데 협정만 맺는다고 동아시아 공동체가 되는 것은 아니다. 시민 차원의 교류가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관광객 수백만명이 오가는 것보다 양국의 시민들이 동시대를 살고 있다는 공감대를 형성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

▦정= 대동아공영권을 시도했다가 좌절한 경험이 있는 일본이나, 중화제국이라는 역사적 경험을 갖고 있는 중국은 동아시아 공동체 이야기를 별로 하지 않는다. 우리가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은 의미가 있지만 유럽공동체를 상상하면 적어도 20~30년이 지나야 가능한 얘기라고 본다. 주권의 상당부분을 공동체에 이양하고 안보도 같이해야 하는데 지금과 같은 상호 불신과 대립과 갈등으로는 쉽지 않다. 현실을 인정하고 공동의 이익이 되는 분야부터 함께하다보면 상대방에 대한 이해도 깊어지고 불신감도 사라질 것이다.

- 한일강제병합 100년은 역사학자의 입장에서도 의미가 새로울 것이다. 향후 양국 역사학자들 앞에 놓인 과제는 무엇인가.

▦정= 10년 전에 비하면 한일관계 연구는 비약적으로 발전했다. 지금까지는 한국사면 한국사, 일본사면 일본사로 자기 나라 자료로만 연구했는데 지금은 자료 공유의 시대다. 동아시아라는, 더 나아가 세계사라는 폭넓은 시야에서 역사를 바라봐야 한다. 나는 지난 20여년간 한일간 역사대화, 한일 공동 역사교재 편찬에 주력해왔다. 앞으로도 그런 노력을 계속한다면 두 나라의 상호이해에 조금이라도 도움을 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미즈노= 10년, 20년 전만해도 한일 역사학자들이 서로 역사에 대해 이야기하는 기회가 올 것이라고 생각하지 못했다. 일본의 역사연구자로서 식민지배의 역사를 아직도 해명할 수 없는 부분이 많다. 창씨개명, 황국신민의 서사, 치안유지법 등 식민지하 일상에서의 지배정책을 해명하는 연구를 하고 싶다. 일본인들은 한반도의 침략과 지배가 결과적으로 남북분단으로 이어졌다는 사실을 이해하지 못하고 병합은 단순히 100년 전의 역사적 사실로 생각하는 사람이 많다. 그러나 한국인들에게 이 사건은 남북분단으로 이어지고 있는 현재적 사건이라고 생각한다. 이런 역사적 의미를 일본사회에 전하는 역할을 하고 싶다.

미즈노 나오키 교수 

▦1950년 교토 출생 
▦1981년 교토대 박사(현대사)
▦2001년~ 교토대 인문과학연구소 교수(조선근현대사, 동아시아관계사)
▦2009년~ 교토대 인문과학연구소장
▦2010년 '한국병합 100년에 즈음한 한일 지식인 공동선언' 서명 
▦저서 <천황제와 조선>(1989) <'아리랑의 노래'각서> <생활 속의 식민지주의>(2004ㆍ이상 공저) <창씨개명>(2008) 번역서 <한국민족운동사론>(강만길 저ㆍ1985)

정재정 이사장

▦1951년 충남 당진 출생 
▦1974년 서울대 역사교육학과 졸업 
▦1982년 도쿄대 석사(한국사학)
▦1992년 서울대 국사학과 박사 
▦1994년~ 서울시립대 국사학과 교수
▦2003~2005년 제1기 한일역사공동위원회 위원 
▦2006년~ 국사편찬위원회 위원
▦2009년~ 동북아역사재단 이사장 
▦저서 <일제침략과 한국철도>(1999) <역사 교과서 속의 한국과 일본>(2000) <교토에서 본 한일통사>(2007) 번역서 <식민통치의 허상과 실상>(2002) <한국병합사연구>(2008) 등
2010-08-29
 
 
 
 
 
 
 
 
 
 

日외상 "韓 문화재 추가인도 없다"

 

(도쿄=연합뉴스) 김종현 특파원 = 오카다 가쓰야(岡田克也) 일본 외상이 조선총독부가 반출한 도서 외의 문화재 반환 요구에는 응하지 않겠다는 뜻을 밝혔다고 아사히신문이 25일 보도했다. 

이 신문에 따르면 오카다 외상은 24일 민주당 정책조사회의 외교부문 회의에 출석해 간 나오토(菅直人) 총리가 한일병합 100년 담화에서 밝힌 조선왕실의궤 등의 '인도'와 관련 "이 것으로 매듭을 짓고 싶다"고 말했다. 

이 신문은 "오카다 외상의 발언은 한국에 돌려줄 문화재를 조선총독부를 통해 입수한 문화재에 한정하고 그 외의 문화재 반환요구에는 응하지 않겠다는 생각을 표명한 것이다"고 해석했다. 

신문은 이어 "일본 정부가 구체적인 인도 대상 문화재를 밝히지 않고 있으나 한국 측은 조선왕실의궤 외에 제실도서, 경연 등의 인도도 기대하고 있다"고 전했다. 

신문은 또 "한국 측은 조선총독부 시대 이전의 문화재에 대해서도 반환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있지만 오카다 외상은 '다른 문화재에 대해서는 이미 결착이 끝났다'고 말했다"고 보도했다

 

 

 

 

 

李대통령 "한일관계, 뛰어넘을 것 넘어야 발전"

 

 

(서울=연합뉴스) 안용수 기자 = 이명박 대통령은 23일 무토 마사토시(武藤正敏) 주한 일본대사 등 8명의 신임 대사로부터 신임장을 제정받고 환담했다. 

이 대통령은 무토 대사에 "간 나오토(菅直人) 총리가 어려운 시기에 한일 관계와 관련한 담화를 발표해 주신 것을 평가한다"면서 "동북아시아에서 한국과 일본은 힘을 합쳐야 하며, 양국관계를 미래지향적으로 발전시켜 나가야 한다"고 말했다고 홍상표 청와대 홍보수석이 전했다. 

이 대통령은 "정치적으로 부닥치는 문제가 있기는 하지만, 현 민주당 정권이 전향적으로 하고 있는데 대해 기대가 크다"면서 "뛰어넘을 것은 뛰어넘어야 양국관계가 발전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이어 이 대통령은 "FTA(자유무역협정)도 양국이 노력하면 극복할 수 있는 문제"라면서 "특히 경제는 글로벌 차원으로 협력해서 함께 발전해 나가야 한다"고 밝혔다. 

이에 대해 무토 대사는 "한일간 협력의 여지가 크고 경제적으로 볼 때도 FTA 등 앞으로 공동으로 협력해 나갈 분야가 적지 않다"면서 "한일 관계는 앞으로도 떼려야 뗄 수 없는 협력 관계로 갈 수밖에 없다"고 답했다. 

이날 신임장 제정식에는 당초 온두라스 대사로 내정됐던 강영신씨의 사위인 미첼 이디아께스 바라닷 대사도 참석했다. 

 

2010년 08월 23일 (월) 18:35  연합뉴스

 

 

 

 

 

日언론 "한국 반일(反日) 감정 진정"

 

"日정부, '합병 유효' 공식언급 자제키로" 

(도쿄=연합뉴스) 김종현 특파원 = 일본의 일부 언론은 22일로 한일 강제병합 체결 100년을 맞았으나 한국에서의 반일 감정은 과거처럼 높지않은 것으로 보인다고 전했다. 

도쿄신문은 이 날짜 서울발 기사에서 "한국 언론은 연초부터 병합 100년을 기념하는 특집기사와 프로그램을 내보냈으나 경제가 호조를 보이는데다 11월 서울에서 G20 정상회의를 여는 등 자신감이 커지면서 과거와 같은 반일 감정의 고조는 보이지 않고 있다"고 전했다. 

이 신문은 "간 나오토 총리가 병합100년 담화에서 식민지지배에 대해 '통절한 반성과 함께 마음으로부터의 사죄'를 표명한데 대해이명박 대통령이 '일본의 진일보한 노력으로 평가한다'며 환영했다"는 사실을 환기시켰다. 

신문은 이어 "한국의 학자와 시민단체는 총리담화에서 한일합병조약의 무효와 일본군 위안부 문제 등의 보상에 대한 언급이 없었다고 불만을 표시하고 있다"면서 "다음달 독도를 일본땅으로 기술한 방위백서가 나올 경우 일한 관계가 악화될 우려가 있다"고 내다봤다. 

우익지인 산케이신문도 "한일병합 100년을 맞아 한국에서는 병합조약의 무효와 사죄.보상을 요구하는 주장이 무성하지만 총리의 사죄담화 이후 (반일)여론이 진정되고 있다"면서 "최근의 양호한 일한관계를 반영하고 있음인지 반일 분위기가 고조되는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고 전했다. 

신문은 "한국측은 병합조약이 강제된 만큼 무효라고 주장하는 반면 일본은 병합조약이 유효하기 때문에 식민지지배도 합법적이고 정당하다는 입장이어서 상호 견해차가 크지만 간 총리의 담화를 전면 부정하는 목소리는 적다"면서 향후 한일관계에 대해 전향적으로 전망하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고 보도했다. 

한편 교도통신은 일본 정부가 한일 강제병합과 관련 '당시의 국제법에 비춰 유효했다'는 기존의 정부 공식 견해를 언급하지 않고 '봉인'하기로 입장을 정했다고 보도했다. 

이는 '한일병합이 강제였으므로 무효'라고 반발하는 한국측을 자극하지 않기 위한 것이라고 통신은 전했다. 

오카다 가쓰야(岡田克也) 일본 외상은 지난 20일 기자회견에서 한일병합의 합법성 여부에 대한 정부 견해를 묻는 질문에 "1965년 체결된 한일기본조약에 '이미 무효'라는 표현이 있다"는 점을 언급한 뒤 "여기에 뭔가를 덧붙일 것이 있다고 생각지 않는다"면서 직접적인 답변을 피했다. 

일본 정부는 한일기본조약 2조의 '1910년 8월22일 및 그 이전에 대한제국과 대일본제국 간에 체결된 모든 조약 및 협정이 이미 무효임을 확인한다'는 부분의 '이미 무효'를 '원래는 유효하게 체결됐지만 한국의 독립으로 무효가 됐다'고 풀이하는 반면 한국은 '체결 당시부터 원천 무효'라고 해석하고 있다. 

 

2010년 08월 22일 (일) 10:54  연합뉴스

 

 

 

 

 

<한일강제병합100년> ②풀어야 할 과제들-연합뉴스

 

 

<한일강제병합100년> ②풀어야 할 과제들

독도.군대위안부.문화재반환.유골봉환 등
"식민지지배 인식차서 비롯..日정부 태도 관건"

(서울=연합뉴스) 유현민 기자 = 한일강제병합 100년의 뼈아픈 의미를 상기하고 바람직한 미래를 지향하자는 결의는 현해탄을 사이에 둔 한.일 양국에서 쏟아지고 있지만 여전히 피할 수 없는 공허함이 느껴진다. 
한반도를 강제로 병탄했던 과거에 대해 진정한 반성을 하지 않고 있는 일본, 그런 이웃나라를 안타깝게 바라보는 한국 사이에는 인식의 괴리가 자리잡고 있는 게 냉엄한 현실이다.

   이를 좁히기 위해 2002년 이후 한일역사공동연구위원회가 2차례에 걸쳐 활동하는 등 양국이 다양한 노력을 전개했지만 손에 잡히는 성과를 도출하지 못했다는 게 대체적인 평가다.

   이는 특히 일본 제국주의 강점기에 대한 양국 정부의 '상반된 시각'에서 여실히 드러난다.

   제2차 세계대전 종전 50주년인 1995년 8월15일 무라야마 도미이치(村山富市) 당시 일본 총리가 발표한 '무라야마 담화'는 일제의 식민지 지배에 대한 일본 정부의 입장을 파악하는 단초를 제공한다.

   '식민지 지배와 침략으로 많은 나라, 특이 아시아 여러 나라의 여러분에게 큰 손해와 고통을 줬다'거나 '통절한 반성의 뜻을 표하며 진심으로 사죄의 마음을 표명한다' 등의 내용을 골자로 한 무라야먀 담화는 당시 일본 정부가 과거 침략과 식민지 지배에 대해 표명한 가장 진일보한 내용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그러나 이 담화에서 드러난 일본 정부의 한국 강제병합에 대한 인식은 '식민지 지배가 초래한 결과에 대해서는 사과하고 반성하지만, 병합 자체에 대해서는 불법성과 강제성을 분명하게 인정하지 않고 객관적인 역사적 사실로 받아들인다'는 것으로 이해된다.

   간 나오토(菅直人) 일본 총리가 지난 10일 식민지 지배의 강제성을 간접적으로 인정한 담화를 발표하기는 했지만 이는 식민지 지배 자체의 강제성을 인정했을 뿐 병합과정의 강제성을 인정한 것은 아니라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병합 과정과 자체의 불법성과 강제성을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에 일본의 한국 병합은 아직 합법적인 조치로 남게되는 셈이다.

   이는 1965년 한일기본조약 등에 대한 해석 차이로 연결되고, 다시 독도영유권과 문화재 반환, 군대위안부, 원폭피해자, 사할린 한인, 강제동원 피해자, 유골 봉환 등의 현안으로 이어지고 있다는 게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1910년 8월22일 및 그 이전에 대한제국과 대일본제국 간에 체결된 모든 조약 및 협정이 이미 무효임을 확인한다'는 한일기본조약 2조가 대표적 예다.

   한국은 '이미 무효'라는 부분을 '체결 당시부터 원천 무효'라고 해석하는 반면, 일본은 '원래는 유효하게 체결됐지만 한국의 독립으로 무효가 됐다'고 풀이한다. 이 해석의 차이가 독도 영유권 문제로까지 연결되고 있는 것이다.

   군대위안부, 사할린 한인, 원폭피해자, 강제동원 피해자 문제 등의 배경에는 1965년 한일청구권협정에 대한 해석 차이가 자리잡고 있다.

   '무상 3억달러, 유상 2억달러, 민간차관 3억달러'를 한국에 제공하기로 하면서 '(협정) 체약국 및 국민의 청구권에 관하여는 어떤 주장도 할 수 없는 것으로 한다'는 문구를 근거로 일본 정부는 개인 청구권까지 소멸했다는 입장을 유지하고 있다.

   이에 대해 한국 정부는 반인도적 범죄 피해자인 군대위안부와 한일협정 체결 이후에 문제가 불거진 사할린 한인과 원폭피해자의 경우 개인청구권이 소멸하지 않았다는 입장이다.

   강제동원 피해자 역시 연금탈퇴수당과 미지급 임금(공탁금), 후생연금 등의 보상 문제를 놓고 다시 현안으로 부상하는 분위기다.

   다만, 사할린 한인과 원폭피해자 문제는 그동안 한.일 양국 정부가 추진한 영주귀국사업과 모국방문사업, 일본의 40억엔 지원 등 양국 정부의 노력으로 해결의 가닥을 잡았다는 게 정부 당국자들의 설명이다.

   양국 정부가 1970년대 초부터 시행 중인 유골봉환 사업도 일본 측의 관리 소홀 등의 잡음을 야기하면서도 꾸준히 진행되고 있다.

   간 총리도 올해 담화에서 "재(在)사할린 한국인 지원, 한반도 출신자의 유골 반환 지원이라는 인도적 협력을 성실히 실시하겠다"며 이 부문에 대한 협력 의지를 드러냈다. 
그러나 일본 각지의 사찰 등에 보관돼 있는 민간인 강제동원자 유골까지 포함하면 언제 유골 반환 사업이 언제나 마무리될 수 있을지 장담하기 어렵다.

   간 총리가 올해 담화에서 명시적으로 반환 의사를 밝힌 조선왕실의궤를 비롯한 한반도 유래 도서 등 문화재 반환 문제도 이제야 해결의 첫 걸음마를 뗀 수준이라는 게 외교가의 대체적인 평가다.

   여기에 재일한국인에게 지방참정권을 부여하는 문제와 안중근 의사 유해발굴 등 한.일 양국이 풀어야 할 현안은 아직 많이 남아 있다는 게 정부 당국자들과 전문가들의 공통된 지적이다.

   문제는 이런 현안 대부분이 한번에 쉽게 해결할 수 있는 사안이 아니라는 점이다.

   정부 당국자는 17일 "한.일 양국간 현안의 대부분은 천천히 시간을 두고 해결해 나아갈 과제들"이라며 "양국 정부는 새로운 한일관계의 100년을 위해 이를 위해 꾸준히 노력해 나간다는 입장"이라고 말했다.

   결국 양국이 직면하고 있는 과제를 말끔하게 해결하기 위해서는 일제 강점기에 대한 일본 정부의 인식이 바로잡혀야 한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일본 정부가 스스로 한국 병합의 불법성을 인정하고 한국에 대한 식민지 지배가 원천 무효임을 받아들일 때 궁극적으로 양국 간 남은 과제들이 풀릴 수 있다는 얘기다.

   외교 소식통은 "과거사 문제를 비롯한 양국간 현안 대부분은 일본 정부가 한국 병합의 불법성을 인정하지 않는 데서 비롯된다고 볼 수 있다"며 "궁극적 문제 해결을 위해서는 일본 정부가 얼마나 전향적이고 실천적인 태도를 보이느냐가 관건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2010-08-17

 

 

 

 

 

<한일강제병합100년> ①한.일관계 현주소-연합뉴스

 

<한일강제병합100년> ①한.일관계 현주소

새로운 '우호협력 100년' 향한 출발선
총리담화 후 日사회 실천 주목.."제2 국교정상화 실현해야" 

(서울=연합뉴스) 노효동 기자 = 오는 22일로 다가온 `한일강제병합 100년'은 지나온 한 세기의 역사를 매듭짓고 새로운 100년의 주춧돌을 놓는 역사적 이정표로서의 상징성이 있다.

   일제에 의한 강제병합과 일제강점기의 수탈, 2차 세계대전 종전에 이은 해방, 1965년 국교정상화 이후 협력과 갈등으로 점철돼온 역사의 굴곡을 딛고 한일 양국이 진정한 화해와 우호.협력의 새로운 페이지를 열어가는 출발선으로서의 의미를 갖는 것으로 평가된다.

   이는 단순히 시의(時宜)적 상징성만을 뜻하지 않는다. 거대한 변화의 물줄기를 타고 있는 국제질서 속에서 한.일관계는 점차 양자적 대립구도에서 벗어나 다자적 협력구도로의 질적인 전환을 요구받고 있는 시점이다.

   역사의 큰 굽이를 돌아선 한.일 양국이 이제 '과거' 대신 '미래'를 키워드로 근본적인 관계 재정립을 모색하는 중대한 전환점에 올라선 셈이다.

   돌이켜보면 한.일관계의 지난 100년은 두개의 대조적인 '그림'으로 다가서고 있다. 강제병합의 짙은 그늘이 지배하고 있는 반목의 역사와 국교정상화를 계기로 움트기 시작한 협력의 역사가 그것이다.

   1910년 8월22일 육군대신 데라우치 마사타케와 이완용의 강제합병조약 조인으로 시작된 일제의 침략과 식민지화는 우리 민족과 국가발전사에 씻을 수 없는 고통과 아픔을 가져다준 비극의 시기였다. 그래서 `경술국치(庚戌國恥)'라는 용어가 '강제병합'과 함께 따라붙는다.

   이 시기 일제가 안겨준 민족적 상처는 1945년 일본의 패망과 한국의 독립 이후로도 계속 이어지며 한.일관계의 '암흑기'를 형성했다. 1948년 대한민국 정부수립 이후 1965년 국교 정상화 때까지 양국정부 차원의 교류는 거의 없었다.

   그러던 와중에 1965년 6월22일 도쿄에서 양국이 조인한 국교정상화 조약은 한.일관계에 의미있는 전기를 가져왔다. 당시 경제개발을 위한 외화가 절실했던 상황에서 일본으로부터 받은 3억 달러의 '경제협력자금'(청구권 자금)이 나라의 근대화와 경제발전의 기틀을 마련하는 종자돈이 된 점을 부정하기 힘들다는 평가가 나온다.

   하지만 당시 양국간 협정을 통해 개인피해 청구권이 법적으로 소멸되는 효과를 낳아 경제적 실리에 급급한 나머지 역사부채 청산의 기회를 희생시켰다는 비판도 엄존한다.

   특히 일제 강제동원 피해자 보상과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배상을 큰 숙제로 남기면서 한.일 과거사 갈등의 씨앗이 됐다. 결국 국교정상화는 '미완의 정상화'에 그친 셈이다.

   이런 탓에 국교정상화 이후의 한.일관계는 큰 틀에서 협력의 길로 나아가면서도 갈등요인들이 끊임없이 내연(內燃)하는 비정상적인 관계가 됐다. '가깝고도 먼 이웃'이라는 모순된 조어가 나온 것도 이 때문이다.

   물론 양국의 '경제관계'는 비약적 성장을 거듭했다. 1965년 연간 1만여명에 불과하던 사람들의 왕래가 작년 기준으로 연간 464만명이 넘어섰다. 양국간 교역액은 연간 2억 달러에서 작년 712억 달러로 늘어났다. 이는 중국, 미국에 이어 세번째 규모다.

   이는 사회.문화 교류에도 활기를 불어넣었다. 일본 대중문화 개방과 한류로 양국간 쌍방향 문화교류가 활발해진 가운데 2002년 월드컵 공동 개최는 양국 국민들의 상호 인식과 호감도를 획기적으로 높이는 모멘텀이 됐다.

   그러나 미완의 과거사 문제는 한.일관계의 성숙을 근본적으로 제약하는 '질곡'으로 작용해왔다. 독도문제와 맞물려 잘못된 과거를 미화하고 우리의 아픈 상처를 건드리는 일본 일부 정치인들의 망언이 때만 되면 망령처럼 살아나 국민들의 반일감정을 자극했다.

   물론 일본이 과거사 문제를 전향적으로 풀어보려는 시도가 없었던 건 아니다. 1995년 무라야마 도미이치 일본 총리가 종전 50주년을 맞아 식민지배와 침략을 시인한 '무라야마 담화'가 대표적이다. 그 연장선에서 1998년 김대중 대통령과 오부치 게이조 총리가 합의한 '신 한.일 파트너십 선언'이 나왔다.

   하지만 이는 '진정성'이 담보되지 않은 '선언'에 그쳤다. 일본측의 과거사 도발은 그 후로도 계속됐고 한.일관계는 지금껏 냉탕과 온탕을 오가고 있는게 현실이다.

   이런 맥락에서 간 나오토(菅直人) 정부 총리가 10일 강제병합 100년 담화를 통해 '통절한 반성'과 '마음으로부터의 사죄'를 재차 표명한 것은 상당한 의의를 갖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는 강제병합 100년을 맞아 과거사 문제를 '매듭'짓고 새로운 미래지향적 한.일관계를 열어나가겠다는 전향적 역사인식과 자세를 진지하게 드러낸 것으로 평가된다.

   특히 사할린 동포지원, 징용피해자 유골 반환, 조선왕실의궤 반환 등 '말'뿐이 아니라 '행동'으로 반성의 뜻을 표하려는 태도는 일본의 과거사 입장이 '진일보'한 것으로 볼 수 있다는게 외교가의 시각이다.

   그러나 일본이 진정으로 한.일관계를 미래지향적 모델로 만들어나가려면 일회적 행사로 그칠게 아니라 지속적이고 성실하게 과거사 후속작업을 매듭짓는게 중요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특히 과거사 갈등의 불씨로 남은 징용피해자 보상과 위안부 배상문제에 대해 보다 과감한 문제해결의 자세를 보이고 독도문제에 대해서도 터무니없는 '도발'을 자제하는 노력이 필요해 보인다.

   양국관계를 '가깝고도 가까운 이웃'으로 만드는 과제는 일본만의 몫이 아니다. 우리도 일본을 감정적으로 몰아세우기 보다는 이성적으로 '어른스럽게' 대응하면서 과거사 바로세우기의 '대의'와 우호협력 확대의 '실리'를 확보해야 한다는 지적이다.

   '미래'를 향한 양국의 공동노력이 순조롭게 이어진다면 이번 강제병합 100년이 과거사의 어두운 터널에서 벗어나 진정한 동반과 협력의 선순환 구조가 형성되는 '제2 국교정상화'를 이루는 획기적 전기가 될 것이라는 기대섞인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양국이 지금 '과거'에 매달려 서로 에너지와 역량을 소모하기에는 함께 부딪히며 풀어가야할 '미래'의 도전이 너무 크다는게 외교가의 공통된 시각이다. 소모적인 양자적 대립관계에서 탈피해 한반도와 동북아, 글로벌 이슈에 공동대응하는 다자적 대등관계가 양국이 꿈꾸는 미래 공동비전의 핵심이다.

 

2010-08-17

 

 

 

 

日帝, 침략은폐 위해 '倂合' 용어 지어내

 


한일강제병합 부당 (서울=연합뉴스) 백승렬 기자 = 강제병합100년 공동행동 한국실행위원회 대표들이 12일 서대문형무소 역사관에서 강제병합 100년 한일시민대회 기자회견을 통해 강제병합의 부당성을 강조하고 있다. 2010.8.12 srbaek@yna.co.kr

외무성 정무국장 회고록.."倂呑은 침략적이어서 못쓴다"

안중근 의사 처리놓고 日 수뇌부 비상한 암투

"어떻게해서든 안중근 사형시켜라..뤼순서 재판 배경"

(서울=연합뉴스) 노효동 유현민 기자 = 한.일 강제병합 당시 일제가 대한제국을 '병탄(倂呑.다른 나라의 영토를 한데 아울러 제 것으로 만드는 것)'하면서도 침략적인 의도를 은폐하려고 '병합(倂合)'이라는 용어를 의도적으로 만들어냈던 사실이 17일 공개됐다. 

또 안중근 의사의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암살 사건이후 안 의사를 어떻게해서든 사형시키기 위해 중국에서 재판을 받게했고, 이 과정에서 외무성측과 '한국황제의 사주사건'으로 조작해 조기 병합강행의 명분으로 삼으려는 군 및 통감부측간에 내부암투가 벌어졌던 것으로 나타났다. 

이는 연합뉴스가 최서면 국제한국연구원장으로부터 최근 입수한 구라치 테쓰기치 (倉知鐵吉.한일병합 당시 외무성 정무국장)의 회고록『한국병합의 경위(韓國倂合ノ經緯)』를 통해 통해 드러났다.

회고록은 일본 '외무성조사부제4과(外務省調査部第四課)'가 1939년(昭和14년11월)에 `비(秘)'문으로 구분해 발간했다. 전문가들은 이 문건이 2010년 6월 일본의 한 서점에서 출판했다고 전하고 있으며, 일본 국회도서관 사이트에 의하면 일본 국회도서관이나 도쿄도립중앙도서관 등 전국 7개 도서관에서 이 책을 소장하고 있다고 돼있다.

회고록은 "한국을 일본에 합병한다는 의논은 세상에 널리 주장됐지만 의미가 잘 이해되지 않았었다"며 "마치 회사 합병과 같이 일.한 양국이 대등하게 합동한다는 사고방식도 있고, 한편으로는 오스트리아와 헝가리 같은 연합국적 형태를 취해야 한다는 사고방식도 있었다"고 소개하고 "문자도 '합방(合邦)' '합병(合倂) 등 여러가지로 표기됐다"고 밝혔다. 

이어 "당시 고무라 외상은 한국은 완전히 일본 내에 포함된 것이며 한국과 외국과의 관계도 없어진다는 생각이었다"면서 "'합병'이라는 단어는 적절치 않고 그렇다고 '병탄'이라고 해버리면 침략적이라서 또한 쓸 수 없다"고 술회하고 "여러 고심끝에 나는 지금까지 사용된 일이 없는 '병합'이라는 단어를 안출했다"고 조어(造語) 사실을 공개했다. 

회고록은 "'병합'이면 다른 영토를 일본제국 영토의 일부로 삼는다는 의미가 '합병'보다도 강하다"며 "그 이후로는 '병합'을 공문서에 사용했으며 맨 처음 사용한 것은 대한(對韓)방침서"라고 밝혔다. 

회고록은 특히 "'병합'이라는 단어는 완전히 새롭게 만들어진 것으로 논란이 일어나는건 필연적이었으므로 나는 조용히 이 단어를 사용했고 일을 복잡하게 만들지 않았다"면서 "가쓰라 총리 등은 대한방침서를 읽을 때 가끔 '병합'을 '합병'이라고 읽어도 눈치채지 못하는 일이 있을 정도였다"고 덧붙였다. 

안중근 의사의 이토 히로부미 암살사건과 관련, 회고록은 "조사결과 도쿄에서 일부 사람들이 상상했던 것처럼 대규모가 아니고 블라디보스토크에 있던 약간의 불온 한인 등이 계획해 만주에서 결행한 사건으로 결론지었다"며 "뤼순(旅順) 법정에서 적법하게 사건을 처분하면 충분하다고 인정해, 이제 가능한 한 사건을 조그맣게 취급하도록 해야 할 필요가 있어 그 뜻을 정부에 전달했다"고 기록했다. 

이와 관련, 최서면 국제한국연구원장은 "일본 정부는 안의사를 반드시 사형시킨다는 입장이었으나 만일 안의사를 도쿄로 데려가 심리할 경우 당시 사법부의 분위기 하에서는 사형이 여의치 않다고 판단했던 것"이라며 "이에 따라 일본 정부는 구라치 정무국장을 만주로 보내 사건을 축소킨 뒤 뤼순 현지에서 처리토록 했던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러나 당시 한국에 주둔하고 있던 군과 통감부측은 이번 사건을 조기병합의 명분으로 만들기 위해 대한제국 황제가 사주한 사건으로 조작하려고 했던 것으로 드러났다. 

회고록은 "한국거주 일부 일본인중에는 이토공 암살을 한국황제가 사주했다고 하고 이를 이유로 단번에 병합을 단행해야 한다며 무리해 증거를 만들려고 했다"며 "한국 주류군 참모장인 아카시 소장이 달려왔고 검사측에서도 나카가와 이치스케 검사장이 오고 한국어가 가능한 통감부 관계자도 왔다"고 밝히고 "이들은 뤼순에 체재하면서 안의사를 감시하며 어떻게든 증거를 만들려고 계책을 꾸미고 있었다"고 적었다. 

이어 "그러나 나로서는 정부가 병합의 대방침을 결정한 이상 가장 적당한 시기를 고르는 일이 필요하고 무리해 병합을 강행하는 것은 단연 불가하다고 믿었으며 시라니 민정장관과 히라이시 고등법원장 등도 사건을 정략적으로 이용하는데 대해 반대했고 단호히 외부압력에 응하지 않았다"고 소개하고 "이토공 암살사건을 이용해 병합을 실행하려고 했던 계획은 끝나고 말았다"고 밝혔다. 

한편, 한상일 국민대 명예교수는 1920년 고마쯔 미도리(小松綠)가 발간한 `조선병합의 이면'이라는 책자에도 일본이 병합이라는 용어를 만들어 사용하게 된 배경에 대한 구라치의 진술이 언급돼 있다고 밝혔다.

한 교수에 따르면 구라치는 1913년 당시 외무성에서 조선통감부에 파견된 고마쯔 미도리에게 `각서'를 전달했고, 고마쯔 미도리는 이를 토대로 1920년 `조선합병의 이면'이라는 책자로 발간하고 책자에 각서도 첨부했다.

한 교수는 또 1950년 4월 일본에서 발간된 `외교사화 제4집'에도 일본이 병합 용어를 만들어 낸 배경에 대해 구라치가 술(述)한 내용이 포함돼 있다고 말했다.

한 교수는 "일본이 병탄이라는 용어가 주는 강제성을 은폐하기 위해 병합이라는 용어를 만들어낸 사실이 확인된 것"이라며 "이번 기회에 그동안 잘못 사용돼온 병합이라는 용어를 병탄으로 바로잡아야 한다"고 말했다.

구라치 테쓰기치는 일본 메이지(明治).다이쇼(大正) 시대의 외교관으로 조선통감부 서기관을 거쳐 외무성 정무국장으로 재임하면서 한국병합을 위한 외교문서를 준비한 인물이다.

rhd@yna.co.kr    hyunmin623@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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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라치 회고록'으로 드러난 새로운 사실들>
조직적으로 '倂合'이란 조어 만들어
처음부터 '안중근 의사' 처형 의도 

(서울=연합뉴스) 김연숙 기자 = 구라치 데쓰기치(倉知鐵吉)의 회고록 『한국병합의 경위(韓國倂合ノ經緯)』에는 일제가 대한제국을 병탄하려는 의도를 은폐하기 위해 '병합(倂合)'이라는 용어를 지어냈으며,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암살한 안중근 의사를 '처형'하기 위해 일본 외무성 등이 조직적으로 움직인 사실 등이 담겨있다.

   회고록은 일본 '외무성조사부제4과(外務省調査部第四課)'가 1939년(昭和14년11월)에 `비(秘)'문으로 구분해 발간했다.

   서언과 ▲한국병합방침의 확립 ▲병합의 의미 ▲대한세목요강 기초안 ▲우치다 료헤이(內田良平) 씨의 '회상록' ▲이토공 암살사건 전후 ▲병합의 단행 등 7부분으로 이뤄져 있다.

   문건은 2000년 6월 일본의 한 서점에서 출판됐으며, 현재는 입수 불가 상태이나 일본 국회도서관과 도쿄도립중앙도서관 등 일본 내 7개 도서관에 소장된 것으로 전해진다.

   구라치는 "세상에 전해지는 소위 한국병합의 진상에는 사실과 떨어진 점이 있어 이를 정정하고, 그 진상을 후세 역사가를 위해 여기에 작성한다" 회고록을 쓴 이유를 서두에 분명히 밝히고 있다.

   일본 메이지(明治).다이쇼(大正) 시대의 외교관인 구라치는 1870년 이시카와(石川)현에서 태어나 1894년 도쿄제국대학 법대를 졸업했다. 이후 같은 해 일본 내무성에 들어가 외무성 참사관과 독일주재 공사관 서기관 등을 거쳐 정무국장, 외무차관 및 제국의회 정부위원(政府委員)을 8차례 역임했으며, 1913년 사임하고 귀족원 위원으로 임명됐다.

   특히 그는 조선통감부 서기관을 거쳐 한일병합 당시 외무성 정무국장으로 재임하면서 한국병합을 위한 외교문서를 준비한 인물이다.

   회고록은 다음과 같은 새로운 사실을 밝히고 있다.

  
◇병합에 찬성한 이토 히로부미
조선통감부 통감이었던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는 애초 한일병합에 반대했던 것으로 알려져있다. 그러나 회고록에 의하면 기존에 알려진 것과 다른 내용이 나온다. 요지는 다음과 같다.

   『일본 가쓰라 총리 등은 내부적으로 한일병합 방침을 세운다. '적당한 시기에 한국의 병합을 단행'하고, '병합의 시기가 도래할 때까지 병합의 방침에 따라 충분히 보호의 실권을 쥐고, 가능한 노력해 실력을 키울 것'이 그 요지다.

   이 같은 원안은 가쓰라 총리와 고무라 외상만이 공유하고 극비에 부쳐졌는데, 이토의 의견이 확인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토는 평소 조선에 대해서는 그 진의를 감추고 마음에도 없는 논의를 하는 경향이 있어, 그의 진의가 무엇인지 아무도 알 수 없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1909년 4월 가쓰라 수상과 고무라 외상은 마침 도쿄를 방문한 이토 히로부미를 찾아가 위와 같은 내용을 담은 대한(對韓)방침서를 보여주며 병합 실행 계획을 설명한다.

   두 사람 모두 이토가 반대할 것이라 생각하고 반박 논리를 단단히 준비해 갔으나, 의외로 이토가 선뜻 동의하자 '어안이 벙벙했을 정도'였다.

   이토의 의사를 확인한 두 사람은 비로소 안심하고 이후 후임 통감인 소네 자작에게 대한방침서를 처음으로 보여줬으며, 극비상태를 유지하던 대한방침서는 7월 6일 각의에서 통과된다. 』

◇병합의 채택과정
『당시 한국을 일본에 합병한다는 논의는 많았으나, 어떤 형태로 할 것인지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했다. 대한방침서에서도 '한일합방', '한일합병' 등 여러가지 방식이 혼동되어 쓰였다.

   '합방'과 '합병' 모두 적절치 않다고 판단한 구라치는 고심 끝에 이전까지는 사용된 적 없는 '병합'이라는 단어를 처음으로 사용한다.

   '합방'(合邦)은 '두 나라가 완전히 동등한 수준으로 합한다'는 의미다. 따라서 한일합방이 이뤄질 경우 오스트리아와 헝가리가 합방한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의 예처럼 국호가 '대일본-대한제국'이 된다.

   '병탄'(倂呑)이란 용어 역시 '다른 나라의 영토를 한데 아울러 제 것으로 만든다'는 뜻으로, 침략적 성격을 강하게 내포한 자극적인 표현이라 적절치 않다고 판단해 구라치는 '병합'이라는 용어를 고안한 것이다.

   그러나 새로 만들어진 용어 '병합'이 논란이 불러 일으킬 것을 우려한 구라치는 조용히 이 단어를 사용했고, 가쓰라 총리 등은 대한방침서를 읽을 때 병합과 합병을 혼동해서 읽어도 눈치 채지 못할 정도였다』.

   이에 대해 최서면 국제한국연구원장은 "이러한 사실도 모르고 국내에서는 '한일합방'이란 말을 많이 썼다"라며 "실제로는 '병탄'이지만 용어가 너무 노골적이어서 그 의도를 숨기기 위해 '합병'이란 말을 만들어 낸 것"이라고 말했다.

  
◇안중근 의사가 뤼순에서 재판받은 까닭
『일본 정부에서 한국 병합 방침 확정 후 실행까지는 절대 비밀을 유지한 가운데, 1909년 10월 26일 안중근 의사의 이토 히로부미 암살 사건이 일어난다.

   소식을 듣고 일본은 놀라 구라치를 한달간 뤼순(旅順)으로 보내 진상 조사와 함께 대책 마련을 지시한다.

   한국에 거주하는 일부 일본인들은 한국 황제가 이토 암살을 사주했다고 주장하며 이를 병합 추진의 근거로 활용하려 하기도 했다.

   그러나 현장에 도착한 구라치는 도쿄에서의 판단과 달리 블라디보스토크에 있던 약간의 불온 한인 등이 계획한 사건으로 규정하고 사건을 축소하기 위해 노력한다.

   한일병합에 반대하는 한국인들의 뜻이 알려져 병합 업무 추진에 지장을 초래할까 걱정한 까닭이다.』 
안중근 의사가 당시 관례대로 일본 본토가 아닌 뤼순에서 재판받은 이유도 이와 관련이 있다.

   최 원장은 "1905년 맺은 을사보호조약으로 인해 외교권을 빼앗겼으므로, 해외에 있는 한국인의 범죄는 일본 사람과 똑같이 현지 일본 영사의 재판을 거친 후 일본 나가사키(長崎) 고등법원에서 재판받아야 했다"며 "그러나 미국 하버드 법대에서 유학해 법을 잘 알고 있던 법무장관 고무라 데타로가 외무장관과 상의해 안중근 의사를 뤼순에서 재판받도록 한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그는 "당시 일본에서는 파렴치범에게는 사형을 내리는 일이 있었지만, 사상범은 사형을 내리지 않는 게 일관된 판례였다"며 "안 의사가 비록 조선인이긴 하지만 사법부는 사건을 정략적으로 이용하는 데 반대해 정부 압력에 응하지 않았다"고 전했다.

   안중근 의사가 나가사키에서 재판을 받을 경우 대법원이 최종 판결을 내려 사형을 면할 수 있지만, 당시 일본 식민지였던 뤼순에서 재판을 받게 되면 외무장관이 대법원장 역할을 하기 때문에 정부 뜻대로 사형 판결을 내릴 수 있었다고 최 원장은 배경을 설명했다.

   내각에서 결정한 한일병합에 반대하는 자는 철저하게 처벌받는다는 걸 보여줘야겠다는 단호한 의지를 바탕으로 내린 결정이었다는 것이다.

   이에 따라 외무장관이 직접 뤼순에 가서 안중근 의사의 재판을 조정하고, 병합과 관련한 정보는 통감부에서 다루고 이토 히로부미 살해와 관련한 취조는 검찰에서 하는 식으로 이뤄졌다.

   최 원장은 "한국 합방이 아니고 '병합'이란 것이 일본의 기본 방침이었으며, 안중근 사건은 일본의 의도에 의해 축소된 사건"이라면서 "역사적 사실을 바르게 알고 지난 과오를 되풀이하지 않도록 해야한다"고 강조했다.
 
2010-08-17
 
 
 
 
 

中, 세계 2위 경제대국 등극 GDP 첫 日 추월

 

 

 

 

中, 세계 2위 경제대국 등극
2분기 GDP 첫 日 추월

이진희기자 river@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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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이 경제규모를 나타내는 핵심지표인 국내총생산(GDP)에서 처음으로 일본을 제치고 세계 2위에 올랐다. 일본은 42년 만에 3위로 밀려났다.

16일 외신에 따르면, 물가변동을 반영하지 않은 명목 GDP에서 중국은 올해 2분기(4~6월)에 1조3,369억 달러를 기록, 일본(1조2,883억 달러)을 제쳤다. 일본은 1968년 국민총생산(GNP)에서 독일을 제치고 미국에 이어 세계 2위 경제대국으로 부상했으나, 이번에 중국에 자리를 내주었다.

일본 내각부도 이날 2분기에 중국에 추월 당한 사실을 인정했다. 다만, 쓰무라 게이스케(津村啓介) 내각부 정무관은 "명목 GDP만으로 비교하는 것은 오해 소지가 있다"며 중국이 발표를 꺼리는 물가변동을 반영한 실질 GDP로 따질 경우, 결과가 다를 수 있음을 시사했다.

상반기(1∼6월) 전체로는 일본의 GDP가 2조5,871억 달러로 중국(2억5,325억 달러)을 조금 앞섰다. 지난달 30일 중국 인민은행의 상반기 일본 추월 예상은 빗나갔지만, 중국경제의 일본 따돌리기는 앞으로 계속될 전망이다. 더구나 중국은 10%가 넘는 성장세를 지속하고 있어 연간 기준으로도 올해 처음 일본을 앞설 것으로 보인다. 반면, 일본은 2분기 실질 GDP성장률이 연율기준으로 시장 전망치(1.5~3.4%)에 훨씬 못 미치는 0.4%를 기록하는 등 경제 위기감이 확산되고 있다. 
 
뉴욕타임스는 중국이 2030년 초반에는 미국마저 제치고 세계 1위 경제대국에 오를 것으로 전망했다. 그러나, 불과 5년 전 중국의 연간 GDP가 일본의 절반 수준인 2조3,000억달러에 불과했던 점에 비춰보면 그 시가가 당겨질 것이란 예상도 나온다. 지난해 미국의 GDP는 중국의 3배에 달하는 14조달러대를 기록했다.
 
2010-08-17
 
 
 
 

日 호소카와 前총리 "한일병합 강제된 것"

 


일본의 호소카와 모리히로 전 총리(1993년 자료사진)

"천황 조속한 한국 방문 바람직" 

"재일 한국인에 지방참정권 부여해야"

(도쿄=연합뉴스) 김종현 특파원 = 일본의 호소카와 모리히로(細川護熙.72) 전 총리가 한일병합은 일본의 무력에 의해 강제된 것이라며 간 나오토(菅直人) 총리가 담화에서 병합의 강제성을 인정하지않은데 대해 아쉬움을 나타냈다.

호소카와 전 총리는 14일 보도된 아사히신문과의 인터뷰에서 간 총리의 한일병합 100주년 담화에 대해 "큰 획을 그은 담화"라고 평가하면서도 "좀 더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 어땠을까 생각한다"면서 "(한일병합은) 힘을 배경으로 강제된 조약이었다"고 말했다.

일본 국왕의 방한 문제와 관련해서는 "천황이 미국과 유럽, 중국, 동남아시아 등을 방문했으면서도 한국만 방문하지않은 것은 순서가 잘못됐다"고 지적하고 "경비에 대한 걱정 등이 있겠지만 조속히 방한하는 편이 좋다고 생각한다"고 밝혔다.

호소카와 전 총리는 또 재일동포의 지방참정권 부여 문제에 대해 "피선거권까지 주는 것은 위화감이 있겠지만 납세를 하고 있는 사람에게 선거권을을 주지않는 것은 문제가 있다"면서 "특히 (2차세계대전 이전에) 일본에 온 한국인 자손에게는 선거권을 줘야한다"고 강조했다.

호소카와 전 총리는 취임 기자회견 당시 2차 세계대전을 '침략전쟁'이라고 발언했다가 파문을 빚은 것과 관련 "상식적으로 중국과 한국, 동남아시아에 큰 고통과 희생을 유발한만큼 가슴에 손을 얹고 보면 침략이 아니었다고 할 수 없다"고 회고했다.

그는 "2차 세계대전 당시를 봐도 편협한 내셔널리즘이 오히려 국가를 위기에 빠뜨렸다"면서 "진정한 내셔널리즘은 상대의 입장에서 사리를 생각하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양국이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는 독도 문제에 대해서는 "이는 역사 해석이 어려운 부분이어서 서로 가능한한 감정을 억제하는 태도, 어른스러운 대응이 바람직하다"면서 "현재로서는 이 문제를 유보하는 것 외에 현실적 해결방법은 별로 없어 보인다"고 말했다.

호소카와 전 총리는 1993년 11월 경주를 방문, 김영삼 당시 대통령과의 정상회담에서 "일본의 식민지 지배에 의해 한국인이 모국어 교육 기회를 박탈당하고 이름을 일본식으로 개명당했으며 종군위안부, 징용 등 여러 형태로 괴로움과 슬픔을 당한데 대해 가해자로서 마음으로부터 반성하며 깊은 사죄를 드린다"고 밝혀 1995년 무라야마(村山) 담화의 토대를 닦았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호소카와 전 총리는 임진왜란 당시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의 명에 의해 조선 침략전쟁에 참여했던 구마모토(熊本)의 영주인 호소카와가(家)의 18대 당주다.

그는 정계에서 은퇴한뒤 도예가로 활동하고 있으며 특히 조선 찻사발(다완:茶碗)에 심취해 2년에 한차례씩 경남 산청을 방문해 직접 찻사발을 굽고 있다.
 
2010-08-14

 

 

 

 

 

안준생을 위한 변명

 

[정진홍의 소프트파워] 안준생을 위한 변명
 

#국가보훈처는 제65주년 광복절을 기념해 338명의 순국선열과 애국지사에게 훈·포장을 수여한다고 밝혔다. 이 중엔 안중근 장군의 4촌 동생인 안홍근 선생도 포함돼 건국훈장 애족장을 받게 됐다. 이로써 안 장군의 가문은 안홍근을 포함해 안명근·안춘생·최익형·안경근·안정근·안봉생·오항선·조순옥·안원생·안공근·안낙생·조성녀·안태순 등 모두 15명의 독립유공자를 배출한 최고의 애국명가임을 재삼 확인시켰다. 

#서울 장충동 국립극장 내 KB하늘극장에서는 ‘나는 너다’라는 연극이 공연 중이다. 안 장군 순국 100주년을 기념하는 공연으로 김좌진 장군의 후예인 배우 송일국이 열연해 더욱 화제가 된 작품이다. 그런데 이 연극의 속살을 들춰보면 거기엔 대한민국 최고의 애국명가 안중근 가문의 숨기고 싶은 치부와 아픔이 고스란히 배어 있다. 다름아닌 준생의 이야기다. 안 장군은 2남1녀를 뒀으나 장남 분도는 12세 때 사망했다. 독살당했다는 설이 유력하다. 차남이 준생이다. 그는 아버지의 얼굴 한 번 보지 못하고 자랐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를 가리켜 호부견자(虎父犬子) 즉 ‘호랑이 같은 아버지에 개 같은 자식’이라 했다. 어찌된 일인가? 

#1939년 10월 16일 지금의 서울 장충동 신라호텔 영빈관 자리에 있던 박문사(博文寺)에서 ‘일본과 조선은 하나’라며 내선일체(內鮮一體)를 외친 미나미 총독의 주선으로 준생은 이토 히로부미의 아들 히로쿠니에게 사죄했다. 안 장군이 하얼빈역에서 이토를 쏜 지 30년째 되던 해의 일이다. 박문사는 일본이 이토를 기려 남산 동쪽에 세운 절로, 명성황후를 지키다 죽어간 조선 군관들의 넋을 기리는 장충단을 내려다보는 위치에 있었다. 절 이름은 물론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의 이름에서 딴 것이었다. 정말이지 철저히 연출된 각본 속에서 준생은 ‘개’가 됐다. 

#대한의군 참모중장 겸 독립특파대장 안중근 장군 의거 100주년이었던 지난해 늦가을 강릉 선교장에서는 아주 특별한 모임이 있었다. 안중근을 생각하는 사람들의 조촐하지만 의미 있는 모임이었다. 거기서 안중근 연구의 최고봉이라 할 최서면(82·崔書勉) 선생과 밤새워 이야기를 나눴다. 그때 최 선생은 준생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준생을 욕할 것 없다. 오히려 준생과 그 가족들이 일제 경찰에 잡히게 된 사연을 주목해야 한다.” 그 사연이란 것이 뭘까? 

#1932년 4월 29일 상하이 훙커우공원에서 윤봉길 의사가 일본의 천장절과 전승기념 축하식 단상에 폭탄을 투척하는 거사를 감행하기 직전에 임시정부 요인들과 그 가족들은 모두 비밀 연락을 받고 피신했다. 하지만 어찌 된 일인지 안 장군의 식솔들에게는 그 비밀 연락이 닿지 않았다. 당시 프랑스 조계령에 있던 상하이 임정에는 평상시 일제경찰이 힘을 쓸 수 없었지만 윤 의사 의거가 있은 후 일제경찰은 범인 색출을 빌미삼아 상하이를 이 잡듯 뒤져 결국 준생과 그 가족들을 일거에 체포했던 것이다. 그 후 일제의 간교한 회유책에 넘어간 준생이 급기야 이토의 아들에게 아버지를 대신해 사죄하는 정치극이 연출된 것이었다. 아버지 얼굴 한 번 보지 못한 채 세 살 때 아버지를 잃은 준생이 아버지를 대신해 사죄한다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이었지만 그는 그렇게 해서 목숨을 부지한 대신 ‘개’가 된 것이다. 

#안 장군과 사돈이기도 했던 백범 김구는 준생을 암살하고자 했다. 그렇게 해서라도 민족영웅 안 장군의 오점을 지우고 싶었으리라. 하지만 오점도 치욕도 역사다. 올해는 경술국치 즉 한·일 강제병합 100주년이요, 안 장군 순국 100주년이다. 그리고 내일이 65주년 광복절이다. 국치 100년을 종지부 찍는 것은 안 장군의 위업과 그 아들 준생의 치욕을 그 시대와 함께 통째로 끌어안는 것이 되지 않으면 안 된다. 물론 역사는 엄정함과 준엄함으로 그 사실을 기록해야 한다. 그리고 그 바탕 위에서 우리는 다시 미래로 전진해야 한다.

 

2010-08-13

 

 

 

 

日帝 남획 독도 바다사자 멸종 선언 `눈앞'

 

日帝 남획 독도 바다사자 멸종 선언 `눈앞'

 


바다사자(자료사진)

생존소식 없어…내년 멸종위기종 선언될 듯

(서울=연합뉴스) 김남권 기자 = 1900년 초 독도 앞바다에 떼를 지어 몰려다녔던 `독도 바다사자'는 모두 어디로 간 것일까. 

국내 연구진이 국내에서 자취를 감춘 독도 바다사자를 찾으려고 2008년부터 본격적으로 조사를 벌였지만 끝내 찾지 못해 한때 독도의 상징 동물이었던 바다사자는 일제의 침탈로 인해 결국 멸종 선언을 눈앞에 두게 됐다. 

12일 환경부에 따르면 2008년 6월 환경부의 연구용역을 의뢰받은 한국환경생태연구소는 독도와 울릉도, 일본 등지에서 바다사자 복원을 위한 실태조사를 벌였지만 생존하는 바다사자 개체를 찾지 못했다.

바다사자는 몸길이 2.4m, 무게 490kg까지 성장하며 선사시대 이전부터 우리나라 해역에 서식한 것으로 추정된다. 

1900년대 초 독도에 2만~3만 마리가 떼를 지어 살다가 러일전쟁 때인 1904년부터 일본 다케시마어렵회사가 남획을 시작해 1956년까지 1만6천500마리를 마구 포획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이후 1950년대 100여 마리의 바다사자를 봤다는 독도의용수비대 증언과 1970년대 목격담 이후에는 바다사자에 대한 흔적을 찾아 볼 수가 없었다. 

이에 정부는 1998년 바다사자를 멸종위기종Ⅰ급으로 지정했다. 일본은 1972년 홋카이도에서 1마리가 생포된 사례를 마지막으로 1991년 바다사자의 멸종을 공표했다. 

국립생물자원관은 바다사자의 연구가 이뤄지지 않은 북한 동해와 러시아 해역에 생존해 있을 가능성도 있다고 보고 러시아 측의 협조로 지난해 연구를 다시 시작했다. 

생물자원관 관계자는 "러시아 연해주 해역에 독도 바다사자의 마지막 개체가 남아있지 않을까 해서 러시아 측에 연구를 부탁했지만 바다사자가 살아있다는 소식이 없었다"며 "이제는 독도 바다사자의 멸종을 선언할 때라고 본다"고 말했다. 

생물자원관은 그동안의 연구 결과를 담은 최종보고서를 이르면 이달 내놓을 계획이다. 

환경부 관계자는 "내년에 멸종위기종 재지정 등을 위한 심사가 있는데 여기서 멸종 선언에 대한 이야기가 있을 것으로 본다"며 "보고서 결과를 검토하고 외부 전문가 자문 등도 얻은 뒤 멸종 선언을 위한 절차를 밟을 것"이라고 말했다.

세계적으로 바다사자는 독도를 비롯한 동해에 살았던 종과 북미 캘리포니아 연안에 사는 종, 남미 갈라파고스 군도에 사는 종 등 3개 아종으로 분류된다.
 
2010-08-12
 
 
 
 
[전문] 간 나오토 일본 총리 한일합방 100주년 사죄 
 
올해는 일한(한일)관계에 있어서 커다란 전환점이 되는 해입니다. 정확히 100년 전 8월 일한(한일)병합조약이 체결돼, 이후 36년에 걸친 식민지 지배가 시작됐습니다. 3.1 독립운동 등의 격렬한 저항에도 나타났듯이, 정치적. 군사적 배경 하에, 당시 한국인들은 그 뜻에 반(反)하여 이뤄진 식민지 지배에 의해, 국가와 문화를 빼앗기고, 민족의 자긍심에 깊은 상처를 입었습니다. 

저는 역사에 대해 성실하게 임하고자 합니다. 역사의 사실을 직시하는 용기와 이를 인정하는 겸허함을 갖고, 스스로의 과오를 되돌아보는 것에 솔직하게 임하고자 합니다. 아픔을 준 쪽은 잊기 쉽고, 받은 쪽은 이를 쉽게 잊지 못하는 법입니다. 이러한 식민지 지배가 가져다준 많은 손해와 고통에 대해 여기에 다시한번 통절한 반성과 마음으로부터의 사죄의 기분(심정)을 표명합니다. 

이러한 인식에 따라, 앞으로의 100년을 바라보면서, 미래지향적인 일한(한일) 관계를 구축해갈 것입니다. 또한 지금까지 실시해 온 이른바 재(在)사할린 한국인 지원, 한반도 출신자의 유골반환 지원이라는 인도적 협력을 앞으로도 성실히 실시해갈 것입니다. 

또한 일본이 통치하던 기간에 조선총독부를 거쳐 반출돼 일본 정부가 보관하는 조선왕실의궤 등 한반도에서 유래한 귀중한 도서에 대해, 한국민의 기대에 부응하여 가까운 시일에 이를 반환하고자 합니다. 

일본과 한국은 2천 년에 걸친 활발한 문화 교류나 인적 왕래를 통해 세계에 자랑할만한 훌륭한 문화와 전통을 깊이 공유하고 있습니다. 또한 오늘날 양국의 교류는 매우 중층(重層)적이고, 광범위하며 다방면에 걸쳐 있고, 양국 국민이 서로에게 느끼는 친근감과 우정은 전례가 없을 정도로 강해지고 있습니다. 또한 양국의 경제관계나 인적 교류의 규모는 국교정상화 이래 비약적으로 확대됐고, 서로 절차탁마(切磋琢磨)하면서 그 결합은 아주 공고해졌습니다. 

일한(한일) 양국은 이제 21세기에 있어서 민주주의나 자유, 시장경제라는 가치를 공유하는 가장 중요하고 긴밀한 이웃 국가가 됐습니다. 이는 양국관계에 그치지 않고, 장래 동아시아공동체 구축을 염두에 둔 이 지역의 평화와 안정, 세계경제 성장과 발전, 그리고 핵 군축이나 기후변화, 빈곤이나 평화구축이라는 지구 규모의 과제까지, 폭넓게 지역과 세계의 평화와 번영을 위해 협력하여 지도력을 발휘하는 파트너 관계입니다. 

저는 이러한 커다란 역사의 전환점에, 일한(한일) 양국의 유대가 더욱 깊고, 더욱 확고해지는 것을 강하게 희구(希究)함과 동시에 양국간 미래를 열어가기 위해 부단한 노력을 아끼지 않겠다는 결의를 표명합니다.
 
2010-08-11
 
 
 
 
사과 수위 어떻게 높아졌나…유감→통석의 염→통절한 사죄
 
간 나오토 담화문에 '통절한 반성과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사죄'(痛切な反省と心からのおわび)라는 표현이 삽입되면서 사과 수준을 놓고 다양한 해석이 나오고 있다. 일본인들은 공식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최상급의 사죄 표현이라고 이를 해석하고 있다. 실제로 일상생활에서 사용되는 '스미마셍'이나 '고멘나사이' 등의 단순한 표현보다는 훨씬 더 격식을 갖추고 상대를 배려한 표현이라고 볼 수 있다. 일본에서는 한자어로 '사죄'(謝罪)라는 표현도 쓰지만 접두어(お)를 붙인 '일본식 사죄'(おわび) 표현이 더 많이 사용된다. 

무라야마 담화에 처음 사용된 이 표현이 간 나오토 담화에도 그대로 사용되자 "사과 수위가 과거 수준을 벗어나지 못했다"는 지적도 나왔지만 사실은 일본에서 이보다 더 강도 높은 사과 표현은 찾아보기 힘들다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1998년 한ㆍ일 파트너십 선언 때 오부치 게이조 당시 일본 총리가 사용했던 과거사 관련 표현도 '사죄'(おわび)였다. 

이에 앞서 아키히토 일왕이 과거사를 놓고 '통석(痛惜)의 염(念)'이라는 표현을 사용해 화제를 모은 적이 있다. 

1990년 노태우 대통령을 환영하는 만찬에서 나온 이 발언은 그러나 불행한 과거에 대해 '유감'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을 뿐 과거사에 대한 뼛속 깊은 사죄는 아니라는 해석이 나오기도 했다. 실제로 일본에서는 잘못을 사과할 때보다 가까운 지인이나 유명인사가 사망했을 때 이 말을 더 많이 사용하고 있다. 하지만 아키히토 일왕의 당시 발언은 1984년 히로히토 일왕이 전두환 대통령 방일 때 한 '유감'(遺憾)이라는 표현보다는 강도를 훨씬 높인 표현이었다. 한ㆍ일 강제병합 이후 시간이 흐를수록, 그리고 한국의 글로벌 위상이 높아질수록 일본의 침략사 사죄 강도가 더욱 높아지고 있는 셈이다. 
 
2010-08-11
 
 
 
 
 
<일본의 식민지 지배 발언.사과 일지>
 
▲1972년9월29일 = 중일 공동성명에서 "책임을 통감하고, 깊이 반성한다"고 표현.(침략 책임 첫 인정)
▲1984년9월 = 전두환 대통령 방일시 쇼와(昭和) 일왕이 환영 궁중 만찬에서 "양국이 불행했던 과거를 되풀이해서는 안된다"고 말함. '유감'이라고 표현.

   ▲1990년 = 노태우 대통령 방일시 아키히토(明仁) 일왕이 "통석(痛惜)의 염(念)을 금할 수 없다"는 뜻을 한국측에 전달.

   ▲1993년11월6일 = 호소카와 모리히토 총리, 한국 경주에서 열린 한일수뇌회담에서 "식민지 지배에 의해 조선반도(한반도)의 사람들이 견디기 어려운 고통과 슬픔을 경험한 것에 대해 마음으로부터 반성하고 깊이 사과하고 싶다" 표명.

   ▲1995년8월15일 = 무라야마 담화("머지않은 과거의 한 시기, 식민지 지배와 침략에 의해 아시아 제국의 사람들에 대해 많은 손해와 고통을 안겼다. 통절한 반성의 뜻을 표하고, 마음으로부터의 사죄(おわび)의 기분을 표명하고 싶다")
▲1998년10월8일 = 오부치 게이조 총리, 한일 파트너십 선언(한일공동선언)에서 일본이 과거의 한 시기에 한국 국민에 대해 식민지 지배에 의해 많은 손해와 고통을 안겼다고 하는 역사적 사실을 겸허하게 받아들이고, 이에 대해 통절한 반성과 마음으로부터의 사죄(おわび)를 표명.

   ▲1998년11월22일 = 일, 중일공동선언에서 1972년 중일공동성명과 마찬가지로 '책임을 통감하고 깊이 반성한다'고 표현. 오부치 총리는 회담에서 구두로 사죄(おわび) 표명.

   ▲2002년9월17일 = 고이즈미 준이치로 총리, 북일평양선언에서 "통절한 반성과 마음으로부터 사죄" 표명.

   ▲2005년8월15일 = 고이즈미 총리, 전후 60년 총리 담화에서 "식민지 지배와 침략에 의해 아시아 제국의 사람들에 대해 많은 손해와 고통을 안겼다"고 표명.

   ▲2010년2월11일 = 오카다 가쓰야 외무상, 한일 외무장관 회담 공동 회견에서 "일본인이라는 데 대해 자긍심을 갖고 있는 만큼, 나라를 빼앗겨 민족의 자긍심을 억눌린 이들의 기분을 이해할 수 있다"고 표명.

   ▲2010년8월10일(예정) = 간 나오토 총리, 한국강제병합 100년 담화에서 "통절한 반성과 마음으로부터의 사죄" 표명 예상. (도쿄=연합뉴스)
 
2010-08-09
 
 
 
 
"'한일 관계 좋다' 韓 39% vs 日 62%"
 
KBS.NHK 양국 국민의식 조사

(서울=연합뉴스) 고현실 기자 = 현재의 한일 관계에 대해 한국인은 절반 이상이 '좋지 않다'고 인식한 반면 일본인은 과반수가 '좋다'고 느끼고 있다는 조사 결과가 나왔다.

   5일 경술국치 100년을 맞아 KBS 국제방송이 NHK 보도국과 한일 양국 국민의식을 조사한 결과 한국인의 경우, 한일관계가 '좋지 않다'는 응답이 59.9%로 절반을 넘었고 '좋다'는 답변은 39.2%로 집계됐다.

   반면 일본인은 '좋다'가 62.1%로 '좋지 않다'(29.3%)보다 많았다.

   일본은 '매우 좋다'란 대답이 4.9%로 '매우 좋지 않다'(1.1%)보다 많았으나 한국은 '매우 좋지 않다'는 대답이 3.2%였고 '매우 좋다'는 0.7%에 불과했다.

   과거 일본의 한반도 식민지배에 대해서도 한국 국민의 91.2%가 알고 있다고 답한 반면, 일본 국민은 68.0%만이 알고 있다고 답해 양국 간 역사인식의 차이를 드러냈다.

   그러나 과거사 문제의 중요도에 대해서는 한국 국민의 88.9%, 일본 국민의 80.6%가 모두 중요하다고 인식했다.

   향후 한일관계가 현재보다 더 강화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한국 국민은 49.6%, 일본 국민은 52.6%로 집계됐다.

   양국 관계 개선을 위한 중요 과제로는 한국 국민은 62.0%가 독도를 둘러싼 영유권 문제 해결을 꼽았으나 일본 국민은 '정치적 대화'라는 답변이 37.1%로 가장 많았고 영유권 문제 해결은 23.6%로 나타났다.

   한국은 '영유권 문제 해결'에 이어 '역사인식 문제 해소'(34.3%), '식민지배에 대한 보상 문제 해결'(26%) 순으로 나타났고 일본은 '경제교류'(28.0%)와 '문화 스포츠 교류'(27.6%), '역사인식 문제 해소'(27.4%)가 상위권에 이름을 올렸다.

   한일 FTA 체결에 대해서는 한국국민 63.3%와 일본 국민 68.1%가 찬성 입장을 밝혔다.

   북한 문제 해결을 위한 우선 과제로는 한국 국민이 핵문제 해결(77.8%)과 이산가족 문제 해결(46.6%)을, 일본 국민은 일본인 납치문제 해결(79.3%)과 핵문제 해결(71.6%)을 각각 꼽았다.

   한국 국민에게 일본인은 '친절하다'(40.1%), '근면하다'(38.4%)는 이미지가 강했으며 일본 국민에게 한국인은 '기가 세다'(27.6%), '감정적이다'(27.1%)란 이미지가 우세한 것으로 나타났다.

   한국인은 일본인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인물로 조선 침략을 주도한 이토 히로부미를 꼽은 사람들이 20.8%로 가장 많았다. 이어 고이즈미 준이치로 전 총리가 9.7%, 피겨 선수 아사다 마오 8.4%, 야구선수 스즈키 이치로 6.4% 순이었다.

   일본 국민은 배용준을 뽑은 사람들이 20.8%로 가장 많았고 김대중 전 대통령 7.6%, 이명박 대통령 7.3%, 최지우 4.3%, 이병헌 3.9% 순이었다.

   이번 조사는 지난 6월 26일~7월 4일 만20세 이상 한국인 1천명과 일본인 1천473명을 상대로 대인면접 방식으로 이뤄졌다. 표본오차는 한국이 95% 신뢰수준에서 ±3.10% 일본은 95% 신뢰수준에서 ±2.55% 다.
   okko@yna.co.kr

 
KBSとNHKが韓日国民意識調査を実施
KBSがNHKと共同で韓日両国の国民意識を調査した結果、真っ先に思い浮かぶ相手国の人物として、韓国人は伊藤博文を、日本人はペ・ヨンジュンを1番に上げるなど、かなりの点で意識の隔たりがあることがわかりました。
この調査は韓日併合100年を迎え、KBS放送文化研究所とNHK放送文化研究所が共同で6月26日から7月4日にかけて行ったもので、20歳以上の韓国人1000人と日本人1473人から回答を得ました。
調査では真っ先に思い浮かぶ相手国の人物の名前を尋ねたところ、韓国人の20.8%が伊藤博文を、日本人の20.8%がペ・ヨンジュンを上げました。
また、両国関係の改善に向けた重要な課題を聞く質問では、韓国人は「独島(トクド)、日本でいう竹島をめぐる領有権の問題の解決」と答えた人が62.0%で最も多く、次いで「歴史認識の問題の解決」34.3%、「戦後補償にかかわる問題の解決」26.0%の順となっており、日本人は「政治的対話」が37.1%で最も多く、「経済交流」28.0%、「文化・スポーツ交流」27.6%の順でした。
さらに、現在の韓日関係については、韓国人は「よくない」と答えた人が59.9%で「よい」と答えた人の39.2%を上回っていました。
これに対し、日本は「よい」と答えた人が62.1%で「よくない」の29.3%より多くなっています。
そして、今回の調査のきっかけにもなった過去の日本の韓国に対する植民地支配については、韓国人の91.2%が「知っている」と答えたのに対し、日本人は68.0%に止まり、両国の間で歴史認識に差があることがわかりました。
また、韓日関係において過去の歴史の問題が持つ重要性を聞いたところ、韓国人の88.9%が、日本人の80.5%が重要だと考えていることがわかりました。
一方、今後の韓日関係については、今より強化されるべきだと考える韓国人は49.6%、日本人は52.6%で、韓日FTA=自由貿易協定の締結については韓国人の63.3%、日本人の68.1%が賛成していることがわかりました。
さらに、韓国人の48.4%が「日本に対して関心を持っている」と答え、日本人の59.2%が「韓国に対して関心を持っている」と答えました。
このほか、相手国の国民に対するイメージについて聞いた質問では、韓国人は「日本人は親切だ」と答えた人が40.1%で最も多く、「日本人は勤勉だ」という答えが38.4%とその後に続いており、日本人は「韓国人は気が強い」と答えた人が27.6%で最も多く、「韓国人は感情的だ」が27.1%で2番目に多くなっています。  
 
2010-08-05
 
 
 
 
 
구로다 “‘독도는 우리땅’ 가사 모순”
 
구로다 “‘독도는 우리땅’ 가사 모순”


 
일본의 극우 매체 산케이신문의 서울 지국장 구로다 가쓰히로가 2일 칼럼에서 '한일병합 100년 한일 지식인 공동성명'이 일본 정부에 사죄를 요구한 것과 한국가요 '독도는 우리 땅'의 가사에 모순이 있다는 식의 주장을 펼쳐 또 다시 논란이 예상된다.


구로다는 2일 산케이신문에 기고한 '독도는 우리 땅, 하와이는 누구의 것?'이란 제목의 칼럼에서 이 노래의 4절에 나오는 '하와이는 미국 땅, 대마도는 일본 땅, 독도는 우리 땅' 가사에서 '하와이는 미국 땅'이란 부분에 문제가 있다고 적었다.

한일 양국 지식인 1118명이 지난달 28일 발표한 '한일병합 100년 한일 지식인 공동성명'의 내용과 결부시키며 '독도는 우리 땅' 가사에 모순이 있다는 식의 주장을 펼친 것이다.

구로다는 이 성명 가운데 "미국 의회가 지난해 하와이 병합 100년을 맞아 하와이에 대한 사죄 결의를 채택한 것을 칭찬하는 내용이 나온다"며 "일본도 이것을 모방해 다시 한국에 사죄하라고 말한다"고 적었다.

이어 그는 "하지만 한일 병합은 65년 전에 종식됐는데 하와이는 아직도 미국령"이라면서 "한일 지식인들이 하와이를 논하려면 '독도는 우리 땅'의 가사부터 문제 삼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한국 노래가 하와이는 미국 땅이라고 인정하면서 일본을 향해 미국 정부가 하와이에 사죄한 것을 본받으라고 요구하는 것이 모순이라는 설명이다.

구로다는 이 칼럼에서 "한일 양국 간 독도 분쟁이 고조되는 가운데 한국에선 '독도는 우리 땅'이란 노래가 불리워진다"고 소개하며 '독도는 우리 땅'이 '전국노래자랑'에 자주 등장하고 학교에서도 가르치는 것으로 보인다고 적었다.

또 '독도 엘레지' 등 독도와 관련된 노래가 한국에 많다고 전하며 러시아와 북방 4개 섬을 둘러싸고 영토분쟁 중인 일본에는 한국처럼 강한 분위기의 노래 대신 애잔한 곡이 많은 점이 다르다고 덧붙였다. '독도는 우리 땅'의 5절 가사 '러일전쟁 직후에 임자 없는 땅이라고 억지로 우기면 정말 곤란해'란 부분에선 일본을 비난하는 내용도 있다고 적었다.

구로다는 지난달 24일에도 이 매체 칼럼에서 한국의 동해 표기를 문제 삼으며 '일본해가 싫으면 일본 뇌염이란 말도 쓰지 말라' '동해는 한국에서만 통하는 명칭' 등 막말을 늘어놓아 논란을 일으킨 바 있다.

그는 지난해에도 한국 전통음식 비빔밥을 겉과 속이 다른 '양두구육'(羊頭狗肉) 같은 음식이라 폄하하는 등 그 동안 여러 차례 망언으로 파문을 일으킨 장본인이다. 2005년에는 MBC '100분 토론'에 출연해 일제 강점기가 "한반도 근대화를 앞당겼다"며 일본 극우 세력이 주장하는 '식민지 근대화론'을 옹호해 거센 항의를 받기도 했다.

 

2010-08-03

 

 

 

 

 

일본에선 사료용 쌀이 한국에선 1등 고추장 원료?

 

[CBS산업부 윤지나 기자] 

가축사료로 처분이 검토되고 있는 묵은쌀이 고추장 시장에서는 1위 제품에 사용되고 있어 논란이다. 업체는 맛이나 영양 면에서 문제가 없다는 입장이지만 '우리 쌀'을 핵심키워드로 대대적인 제품광고를 접했던 소비자들은 불쾌하다는 반응이다. 

'우리 쌀'을 원료로 사용한다며 지난 해 출시돼 고추장 시장 업계 1위를 달성한 대상 청정원 '순창 우리쌀 고추장'.이 고추장이 일본에서는 가축 사료용으로 처분되는 묵은쌀로 만들어지는 것으로 확인됐다. 

농림수산식품부가 최근 쌀 수급안정 대책의 일환으로 수확한 지 3년이 넘은 묵은쌀을 가축 사료로 처분하는 방안을 내놓았는데, 이 제품에 들어가는 쌀은 무려 5년 전 생산된 것이다. 농협중앙회 관계자는 "대북 지원의 길이 막힌 데 반해 풍작이 이어지면서 3년 전 쌀은 물론, 2005년산 쌀까지 창고에 쌓여있다"고 말했다. 

한마디로 대상이 쓰는 쌀은 '존재하는 쌀 중 가장 오래된 쌀'인 셈이다. 이처럼 장기 보관된 쌀은 식용으로 쓰기 어렵기 때문에 일본의 경우 3년이 지난 쌀을 무조건 사료용으로 돌린다. 

대상은 지난 해 '순창 우리쌀 고추장'을 출시하면서 이효리를 광고 모델로 내세우는 등 대대적인 마케팅을 벌여왔다. 밀가루를 주원료로 하는 경쟁사와 차이점을 부각시키는 공격적인 마케팅 끝에 이 제품은 최근 몇 달 동안 경쟁사를 제치고 시장 점유율 1위를 차지하기도 했다. 제품 원료를 중시하는 웰빙 분위기와 쌀을 주원료로 한 제품 업그레이드 추세도 한 몫 했다. 

이같은 마케팅과는 대조적으로, 대상이 2005년산 쌀을 쓰는 이유는 가격 때문이다. 대상 관계자는 "원료가 비싸지면 그만큼 가격이 올라 소비자들이 외면할 수 있다"며 "품질이 비슷하다면 가격이 업체 입장에서 가격이 낮은 쌀을 쓰는 것은 당연하다"고 말했다. 2005년산 쌀 가격은 40kg 당 30,720원으로 2008년산 55,290원의 절반 수준이다. 

이처럼 가공을 해 제품품질에는 영향이 없다고 해도, 식용으로 쓰기 힘든 쌀이 주원료로 쓰인다는 것이 소비자들은 찜찜하다는 반응이다. 박수진(30,여)씨는 "우리 쌀이라고 해도 5년이 지난 쌀이라면 반갑지 않다"고 말했고 나수현(29,여)씨는 "원료를 그렇게 광고하더니 묵은쌀로 생색내기한 것 같다"고 불쾌해 했다. 김애경(45,여)씨는 "좋은 고추장 맛을 내기 위해 국내산 재료에 신선한 원료가 중요하다는 것은 식품회사가 더 잘 알았을 것"이라며 "가격이 비싸도 청정원 고추장을 샀는데 후회된다"고 말했다. 

한국쌀가공식품협회 관계자는 "쌀의 다양한 판로를 확보하면서 쌀가공품에 대한 소비자 신뢰도 얻어야 하는 상황"이라며 "최근 인기를 끌고 있는 쌀가공품이 과도기를 겪고 있다"고 말했다. 

 

2010년 07월 28일 (수) 06:03  노컷뉴스

 

 

 

 

 

 

 

 

 

 

[도쿄리포트]日 집안에 틀어박힌 은둔형외톨이 70만명 추정, 내각부 조사

 

도쿄=김범수특파원bskim@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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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안에 틀어 박힌 채 사회활동은 물론 타인과 접촉도 거의 하지 않는 은둔형외톨이(히키코모리)가 일본 전국에서 70만 명에 이르는 것으로 나타났다. 히키코모리는 이지메(집단 따돌림)처럼 일본 특유의 사회현상으로 처음 알려진 뒤 세계 각국에서 유사 사례가 확인되고 있다.

일본 내각부는 2월 실시한 ‘히키코모리 실태 조사’ 결과, 히키코모리가 일본 전국에서 약 70만 명, 향후 히키코모리가 될 가능성이 있는 친화군은 155만명으로 추정된다고 23일 밝혔다. 그 동안 시민단체나 언론의 조사는 있었지만 정부가 히키코모리 실태를 파악하기는 처음이다. 내각부는 히키모코리를 ‘정신ㆍ신체 질환이나 임신, 가사, 육아 등의 이유 이외에 6개월 이상 거의 집밖으로 나가지 않고 근처 편의점에 가거나 취미활동을 위해 외출할 뿐이라고 답한 사람’으로 정의해 15~39세 3,287명을 조사했다.

조사에서 히키코모리는 1.7%로 파악됐다. 이 수치를 일본 전체 인구로 환산할 경우 약 69만6,000명에 해당한다. 남성이 66.1%로 3분의 2를 차지했다. 연령별로는 35~39세(23.7%)가 가장 많았고 이어 30~34세(22%) 20~24세(20.3%)순이었다. 히키코모리에 대해선 흔히 등교 거부 청소년을 연상하지만 실제로는 사회생활 경험이 있는 성인이 다수다.

히키코모리가 된 이유는 ‘직장에 정을 붙일 수 없었다’ ‘몸이 아파서’가 각각 23.7%로 가장 많았다. 이어 ‘취업이 잘 되지 않았다’(20.3%) ‘등교 거부’(11.9%)순으로 직장내 불화나 취업난이 히키코모리 양산의 중요 요인으로 파악됐다.
 
히키코모리들은 초ㆍ중학 시절 ‘학교에서 참는 일이 많았다’(55.9%) ‘혼자서 노는 편이 재미있었다’(27.1%) ‘가족과 상담이 도움 되지 않았다’ ‘부모가 과보호였다’(각각 18.6%) 고 답했는데 이 수치는 일반인의 2배를 넘는 것이다. 청소년기 인간관계가 적잖은 영향을 끼친 것이다. 

조사의 기획분석을 맡은 다카쓰카 유스케(高塚雄介) 메이세이(明星)대학 교수는 “히키코모리 친화군에는 젊은이들이 많다”며 “이들이 사회에 나가면서 친구를 읽거나 새 환경에 적응하지 못하면 히키코모리는 점점 늘어날 것”이라고 말했다고 요미우리(讀賣)신문이 전했다.
 
2010-07-05
 
 
 
 
 
 
 

이완용, 한일병합 이후 400억 축재

 

병합 15년후 재산 3배로…대부분 친일 대가 

일제 초 여의도 2배 땅 소유…친일재산조사위 조사결과 

(서울=연합뉴스) 한상용 기자 = 대표적 친일파로 꼽히는 이완용이 한일강제병합 이후 15년동안 400억원 이상을 축재했다는 조사 결과가 나왔다. 

22일 친일반민족행위자재산조사위원회가 공개한 '백서'에 따르면 이완용은 1925년 당시 '경성 최대의 현금부호'라는 명칭에 걸맞게 최소 300만원(현시가 약 600억원) 이상을 소유한 것으로 파악됐다. 

한일병합 당시에는 일제와 황실로부터 받은 은사금(恩賜金)과 하사금, 뇌물, 횡령한 금액 등을 합해 이완용의 재산은 약 100만원(현시가 200억원)에 이를 것으로 백서는 추정했다. 

15년간 400억원을 축재, 재산이 재산이 3배로 늘어난 셈이다. 

이완용은 한일병합 전후로 방대한 토지를 취득하고 처분하는 과정에서 상당한 재산을 축적했으며, 이후에는 토지를 재매입하지 않고 대부분 현금과 예금을 보유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완용의 재산 축적 과정을 보면 일제에 적극적으로 협력함으로써 대가로 받은 재산과 토지 매각 대금이 대부분을 차지했다. 

이완용은 1907년 고종의 강제퇴위와 한일신협약(정미7조약)의 대가로 10만원(현시가 20억원)을 받았고 1910년 한일병합 조약 체결 대가로 은사금 15만원(현시가 30억원)을 챙겼다. 

또 국유 미간지나 국유임야를 무상으로 대부받고 이를 제3자에게 되팔아 차익을 남기는 방법을 통해 재산을 축적하기도 했다. 

이렇게 모은 재산은 주로 군산과 김제, 부안 일대의 비옥한 논을 집중적으로 매입하는 데 사용됐고 그 결과 일제 초기 이완용의 토지 보유 규모는 여의도 면적의 약 1.9배에 해당하는 1천573㎡ 상당에 달했다. 

그가 짧은 기간 이렇게 많은 토지를 소유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일제의 병합 공작과 관련한 수수, 일제ㆍ황실로부터 받은 은사금과 각종 하사금, 권력을 이용한 뇌물과 횡령, 미간지 혹은 임야 대부ㆍ양도 등을 통한 매각자금이 뒷받침됐다고 백서는 분석했다. 

이완용은 총리대신 재직시에도 뇌물과 횡령을 통해 적지 않은 재산을 축적한 것으로 밝혀졌다. 

그는 경인철도 부설권을 미국인에게 내주면서 1만5천달러를 받았고 한미 전기회사를 설립할 때도 옥새를 위조해 고종의 내탕금 40만원(현시가 80억원)을 횡령한 것으로 조사됐다. 

그러나 이완용은 일제로부터 받은 땅 중 98%를 1915∼1917년 일본인 대지주에게 처분해 현재 그의 재산으로 남아있는 토지는 거의 없다. 

일본인에게 처분한 토지는 해방 이후 모두 귀속농지로 몰수돼 신한공사가 관리하다가 미군정에 의해 1948년 한국인 소작농에 모두 분배됐다. 

해방 전에 처분되지 않고 남아있던 2%(31만4천㎡)의 토지는 해방 이후부터 1990년대 중반까지 꾸준히 제삼자에게 매각됐으며, 일부는 그의 후손들이 소송을 통해 되찾아가기도 했다. 

정숭교 친일재산조사위 조사총괄과장은 "이 자료는 친일재산에 관한 공식 조사를 역사적으로 정리한 것"이라며 "다만 공식 조사와 함께 주변의 역사적 조사를 포괄한 만큼 부분적인 내용은 더 확인해 볼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한편 이완용의 재산 중 국가귀속결정이 내려진 땅은 16필지(1만928㎡)이며 공시지가로 7천만원 상당이다. 

 

2010-07-22

 

 

 

 

 

 

 

징용 66년만에 외친 정신대 할머니의 '만세'

 


만세하는 근로정신대 할머니 (광주=연합뉴스) 장덕종 기자 = 근로정신대 출신 양금덕(82) 할머니가 15일 오전 미쓰비시자동차 광주전시장 앞에서 열린 기자회견에서 미쓰비시중공업의 협상 동의를 환영하고 있다. 미쓰비시 측은 "근로정신대 문제 해결을 위한 협상에 나서겠다"는 공문을 14일 전달했다. 2010.7.15 cbebop@yna.co.kr

'징용에서 협상 성사까지'..과정과 전망

(광주=연합뉴스) 손상원 기자 = "구호를 외칠까요? 만세를 부를까요? 만세로 합시다!"

근로정신대 할머니와 이들을 지원하는 시민 모임의 한 맺힌 절규가 끊이지 않았던 광주 미쓰비시자동차 전시장 앞에서 '만세 삼창'이 울려 퍼졌다.

'근로정신대 할머니와 함께 하는 시민모임'(시민모임)은 15일 오전 미쓰비시중공업의 협상 의지 표명을 환영하는 기자회견을 했다.

미쓰비시중공업의 태도 변화에 고무된 할머니 등은 "잠자는 양심을 깨워냈다. 승리를 자축하자"는 진행자의 외침에 만세로 화답하며 감격을 나눴다.

일본 강점기 근로정신대에 끌려간 지 66년 만, 해방 65년 만, 손해배상 소송 11년 만의 작은 환호였다.

◇미쓰비시중공업 "협의하자"

미쓰비시중공업은 지난 14일 '나고야 미쓰비시 조선여자 근로정신대 소송을 지원하는 모임'(나고야 소송지원회)에 '협의의 장' 마련에 동의한다는 뜻을 알리는 공문을 보냈다.

이 회사는 협의가 계속되는 동안 한·일 양국에서 정신대 문제와 관련해 미쓰비시 관련 회사를 대상으로 한 집회와 서명활동, 불매운동을 삼가해 달라고 요청했다.

이는 지난달 23일 일본을 방문한 시민모임과 이용섭 의원 등의 제안에 대한 회답이었다.

당시 시민모임은 삼보일배로 미쓰비시의 사죄와 일본 정부의 배상을 촉구했다.

이들은 13만4천여명의 서명을 미쓰비시중공업과 일본 정부에 전달하고 7월 15일까지 협상테이블 마련에 참여해 달라고 통보했다.

시민모임 측은 미쓰비시의 이번 입장 표명에 대해 "200일에 가까운 광주시민의 1인 시위, 일본 정부의 연금탈퇴수당 '99엔'에 반발해 서명한 국민의 분노 앞에 무릎을 꿇은 것"이라며 "국적을 뛰어넘어 인권과 정의를 회복하려는 한일 양국 시민의 연대투쟁과 범국민적 저항이 해방 이후 65년간 잠자던 전범기업의 양심을 깨웠다"고 평가했다.

미쓰비시의 이번 조치에는 일본 정부의 전후 처리에 대한 달라진 시각도 반영됐을 것이라는 분석이다.

일본 내각 2인자이자 공식 대변인인 센고쿠 요시토(仙谷由人) 관방장관은 최근 일제시대 강제징용자 등에 대한 일본 정부의 대응이 미흡했음을 솔직히 인정하면서 정부 차원의 보상에 의욕을 보인 바 있다. 

◇'만시지탄'..'정의회복을 위한 첫 걸음'

시민모임은 미쓰비시 중공업의 결단을 환영하면서도 '만시지탄(晩時之歎)'이라는 견해를 밝혔다.

징용 피해자들이 미쓰비시중공업 나고야 항공기 제작소로 끌려가 젊음을 바친 뒤 66년 만에야 협상의 첫걸음을 뗐기 때문이다. 

미쓰비시 중공업은 1944년 5월 전남 출신 150여명, 충남 출신 150여명 등 300여명의 소녀를 나고야 항공기 제작소로 징용했다.

이들은 같은해 12월 도난카이(東南海) 지진으로 목포, 나주, 광주출신 동료 6명이 숨지는 아픔을 겪은 뒤 해방을 맞아 1945년 10월 맨몸으로 귀국해야 했다.

수십 년이 지나서야 이들을 기억한 사람은 나고야의 일부 양심적인 시민들이었다.

1988년 12월 나고야의 일부 시민들은 미쓰비시 공장 안에 당시 조선인 희생자를 위한 추모비를 건립했다.

그 후로 10여년이 또 흐른 뒤 양금덕(82) 할머니 등 8명은 1999년 3월 일본 정부와 미쓰비시중공업을 상대로 손해배상 소송을 시작했지만 2005년 3월 나고야 지방재판소, 2007년 나고야 고등재판소, 2008년 11월 도쿄 최고재판소에서 모두 기각 판결을 받았다.

뜻있는 지역 인사들은 이에 반발해 지난해 3월 시민모임을 결성해 정신대 문제 해결을 촉구하는 2만8천여명의 서명을 미쓰비시중공업에 전달했다.

이들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같은해 9월 일본 후생노동성 사회보험청은 원고 8명에 대한 후생연금 가입사실을 확인하고 3개월 뒤 연금 탈퇴수당으로 라면 1개 값에 불과한 99엔을 지급하기로 해 파문이 일었다.

시민모임은 이후 미쓰비시자동차 광주전시장 개장에 반발해 1인 시위를 시작했고 '99엔 지급'과 관련 후생노동성을 방문하는 등 항의활동을 벌였다.

◇"아픔을 치유하는 것은 돈이 아니라 사죄"

피해 할머니와 유족 등의 첫째 요구는 일본 정부와 미쓰비시중공업 측의 사죄이다.

한 유족은 기자회견에서 "돈은 광주 시민모임과 나고야 시민모임에 기증할 의사도 있다"며 "보상금 얼마로 해결할 아픔이 아닌 만큼 반드시 사죄가 선행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시민모임은 이같은 피해자들의 의견을 수렴해 최우선 조건으로 사죄를 내세울 예정이다.

시민모임은 이달 중 방한 예정인 나고야 소송지원회와 피해 당사자, 유족 간 협의를 통해 구체적인 협상 방법, 요구안 등을 결정할 방침이다.

시민모임은 특히 80대에 접어든 할머니들을 위해 지체할 시간이 없다고 판단, 최대한 빨리 협상 테이블을 꾸려 광복절인 다음 달 15일 이전 진전된 협의안을 끌어낼 방침이다.

미쓰비시중공업의 요청에 따라 1인 시위 등 반(反) 미쓰비시 활동도 잠정 중단하기로 했다.

시민모임 대표 김희용 목사는 "미쓰비시 측의 결정이 잠시 상황을 모면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진심이 담겨 있는 것 같다"며 일단은 미쓰비시의 진정성을 믿고 협상에 임하겠다는 입장이다.

 

2014-07-15

 

 

 

 

전문대 해외인턴 '빛 좋은 개살구' (한국일보)

 

전문대 해외인턴 '빛 좋은 개살구'

"국제감각 배양" 불구 학생들 대부분 단순노무
전문대協은 대책없이 비용 늘려 혈세만 낭비

한국일보 박철현기자 karam@hk.co.kr
 
지난해 전문대 해외인턴십 대상자로 선발돼 일본에 다녀온 서울 A전문대 2년 이모씨는 "남은 것은 여행 뿐"이라고 했다. A씨는 "어학연수 후 한 기업체에서 정식 인턴을 하는 줄 알았지만 사무보조원 수준이어서 그만두고 여행을 다녔다"고 털어놓았다. 호주로 파견됐던 김모(경기 B전문대 유아교육과 2)씨도 비슷한 경우. 한달 간 어학연수 후 한 현지 차일드케어센터에서 전공 관련 생생체험을 기대했으나 빗나갔다. 단순한 보모 역할에 그치는 바람에 뛰쳐나와 현지 레스토랑에서 일했다.

인턴은커녕 여행과 식당 보조원으로 소일했으나, 이들은 해외인턴십 프로그램을 마친것으로 교육과학기술부와 해당 대학 측에 보고됐다. 학점을 인정받은 것은 물론이다. 허울뿐인 전문대 해외인턴사업의 실체다.

5년째를 맞는 교과부의 전문대 해외인턴십(글로벌 현장실습) 사업이 예산만 축내는 전형적인 비효율 정책으로 전락하고 있다는 목소리가 높다. 

이 사업은 전문대생에게 해외 현장실습 기회를 제공하고 국제감각과 실무능력을 키울 수 있도록 하기 위해 2005년 도입됐다. 올해에만 50억원의 예산을 정부가 지원한다. 해외인턴십에 선발되면 4개월동안 최고 1,000만원을 훌쩍 넘는 체재경비를 전액 지원받는다.
 
하지만 이런 막대한 예산 지원에 비해 인턴십 관리는 엉망인 현상이 전혀 개선되지 않고 있다. 각 대학 측에 현지 인턴십 프로그램을 알선하는 업체들이 해당 기업이 요구하는 인턴조건 및 역할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채 일단 받고보자식으로 학생들을 유치했기 때문이다. 이를 모르고 해외인턴에 도전했다가 실망한 학생들은 어학연수나 여행으로 소일하다 귀국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사업 부실 비판이 제기되자 급기야 2학기부터 한국전문대협의회가 직접 인턴십 프로그램 운용에 나섰지만 나아질 기미가 별로 없다는 지적이다.

전문대협 측은 지난해보다 오히려 1.5~2배 많은 1인당 지원금을 책정했다. 지난해엔 영어권 900만원, 일본어권 680만원, 중국어권 510만원 씩의 1인당 경비가 지원됐으나 2학기부턴 영어권 1,100만원, 일본어권 1,200만원, 중국어권 780만원 등으로 껑충 올렸다. 일본어권의 경우 도쿄(東京)전문학교협회에 1개월치 어학연수 비용으로 1인당 300여만원을 추가 지불하는 식이다. 

그러나 전문대협의 이런 조치에 대해 "숲은 보지 못하고 나무만 보는 격"이라는 비판이 쏟아지고 있다. 충남 C전문대 박모 교수는 "어학연수 기간만 늘린다고 인턴십 프로그램이 개선되는 것은 아니다"며 "인턴십 학생들을 관리하는 게 가장 중요한데도 대책은 없이 1인당 보조금만 올리는 것은 국고 낭비를 자초하는 행태"라고 꼬집었다. 교과부 관계자는 이에 대해 "자비가 안 들도록 예산을 넉넉하게 잡은 것"이라고 궁색하게 설명했다.

비자 발급 문제도 해결되지 않고 있다. 해당 국가에서 해외인턴십 사업을 무비자 프로그램으로 인식, 문화활동비자나 워킹홀리데이 비자, 유학생 비자 등의 발급을 꺼리고 있기 때문이다. 일본대사관 관계자는 "기업 단체 등에 파견돼 일하려면 반드시 문화활동비자를 받아야 하지만 호텔 병원 등에서의 무급 파견 실습에는 비자를 내줄 수 없다"고 말했다. 비자없이 일본에 체류중인 대다수 인턴십 학생들은 '인턴다운 인턴'은 꿈도 꾸지 못하고있는 실정이다.                    (한국일보, 2010-07-12)
 
 
"전문대 해외인턴 부실은 졸속협상 탓"
 

 
교육과학기술부와 한국전문대교육협의회가 부실 논란(본보 12일자 12면)을 빚고 있는 전문대 해외인턴 사업을 올해부터 직접 주관하고 있지만 일부 지역의 경우 협상 미숙 등으로 예산만 낭비했다는 비판이 나오고 있다.

지난해 영미권 900만원, 일본권 680만원으로 각각 책정됐던 학생 1인당 국고지원금은 2학기부터 각각 1,100만원과 1,200만원으로 늘었다. 영미권이 200만원 증액된 반면 일본 파견학생은 무려 520만원이 증가한 것이다.

이런 기형적인 지원금은 현지 사정에 어두운 전문대협의 졸속 준비가 원인이라는 지적이다.

전문대협의회 측은 당초 일본의 지자체협의회를 통해 관공서에 학생을 파견할 계획이었으나, 최종 협상에 실패하자 부랴부랴 도쿄지역 전문학교(기술학교)와 4개월치 강습료 300만원을 내는 바가지 협상을 해버린 것이다. '1개월 어학연수 후 3개월 실습'이라는 기존 패턴을 무시한 채 4개월분 강습료를 무작정 지불키로 한 것이다. 

한일 교류 민간단체 대표를 맡고 있는 A씨는 "교과부와 전문대협의회가 각종 비영리단체의 교류사업을 막고 직접 현지 준비에 나섰지만 오히려 졸속으로 진행돼 과거보다 문제가 더 심각해졌다"고 말했다. 전문대협의회 관계자는 이에 대해 "일본 지자체협의회에서 과다한 금액을 요구하는 바람에 계획을 변경할 수밖에 없었지만 현지 인턴사업 준비가 더 어려워진 것은 사실"이라고 말했다.      
 
(한국일보, 2010-07-12)
 
 
 
 
 

주한 일본대사 강연도중 피습

 

2010-07-07 21:57

 
시게이에 도시노리 주한 일본대사가 강연 도중 한국인으로부터 피습을 받았습니다.

시게이에 도시노리 대사는 오늘 오후 서울 프레스센터에서 '한일신시대, 공동번영을 지항하며'라는 주제로 특별강연을 하던 중 관객석에서 뛰어나온 한국인으로부터 습격을 받았지만 다치지는 않았습니다.

자신의 신분을 우리마당 독도지킴이 대장이라고 밝힌 김기종 씨는 시게이에 대사의 강연이 끝난 뒤 질의 응답 시간에, 남북이 분단된 원인은 일본의 강점이라고 주장하며 연단으로 뛰어나가 시게이에 대사를 향해 손바닥 반 크기의 시멘트 돌을 던졌습니다.

대사는 다행히 돌을 피해 부상은 입지 않았으나 대신 통역을 하던 주한일본대사관 소속 여성 마유미 호리에 씨가 손에 부상을 입었습니다.

김 씨는 자신이 세 차례나 대사에게 편지를 보냈지만 답장이 없었다며 편지를 직접 전달하겠다며 연단쪽으로 나간 뒤 갑자기 돌을 던졌습니다.

사건이 발생하자 강연회장은 아수라장이 됐으며 즉시 경찰이 현장에 출동해 김 씨를 연행했습니다.
 
2010-07-07
 
 
 
 
 

日 관방장관 "한국 관련 전후처리 불충분"

 

정치 판단으로 징용자 개인보상 필요성 시사 
(도쿄=연합뉴스) 이충원 특파원 = 일본 내각 2인자이자 공식 대변인인 관방장관이 일제시대 강제징용자 등에 대한 일본 정부 차원의 보상에 의욕을 보였다. 

이는 1965년 한일청구권협정으로 징용자 등의 개인청구권까지 소멸했다는 기존 입장과 차이가 있는 것으로 향후 보상 논의가 활발해질 것으로 예상된다. 

7일 교도통신과 지지통신에 따르면 센고쿠 요시토(仙谷由人) 관방장관은 이날 도쿄 일본외국특파원협회(FCCJ) 주최 기자회견에서 한국과의 전후(戰後) 처리 문제에 대한 질문을 받고 "하나씩, 또는 전체적으로도, 이 문제를 해결해 나간다고 할까, 일본의 입장을 분명히 밝힐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고 언급, 그간 일본 정부의 대응이 불충분했다는 인식을 보였다. 

특히 한일청구권협정으로 정부 청구권과 함께 소멸했는지 논란이 인 개인청구권에 대해 "(개인청구권도 함께 소멸했다는 해석이) 법률적으로 정당성이 있다고 해서 그것만으로 좋은가, 모두 해결된 건가라는 문제가 있다"고 말했다. 

센고쿠 관방장관은 개인청구권에 대해 "어느 정도 일한 기본조약으로 해결됐다"는 인식을 보이면서도 "'법적으로 끝났다'고 했다가 관계가 나빠진다면 정치적으로 개선 가능한 방침을 만들어 판단하지 않으면 안 되는 안건도 있다"고 덧붙였다. 

이는 정치적인 판단으로 개인 보상을 할 필요가 있다는 생각을 시사한 것으로 풀이된다. 
특히 한반도 출신 강제징용자의 유골 반환 문제와 한국에서 유출된 문화재의 반환 문제, 재한(在韓) 피폭자 문제 등을 언급하며 "하나씩 하나씩 역사적 사실을 직시하면서 해결할 수 있는 것을 해결하겠다. 그렇게 하는 것이 일본인이 국제 사회에서 존경받는 방법이다"라고 강조한 것으로 전해졌다. 

 

2010년 07월 08일 (목) 00:15  연합뉴스

 

 

 

 

 

‘겨울연가’ 배용준-최지우, 故 박용하 빈소 조문 ‘남다른 우정’

 

[뉴스엔 글 김지윤 기자/사진 배정한 기자] 
'겨울연가' 배용준과 최지우가 극중 함께 호흡을 맞췄던 故 박용하(33)의 빈소를 찾았다. 

6월 30일 오전 서울 서초구 반포동 서울 성모병원 영안실 5접객실에는 고(故) 박용하의 임시 빈소가 차려졌다. 생전 고인의 따뜻했던 성품을 증명하듯 이날 빈소에는 많은 동료 연예인들이 조문 행렬을 이었다. 

특히 이날 조문객 중 고인과 함께 지난 2002년 KBS 2TV 드라마 '겨울연가'에서 삼각관계를 이뤘던 배용준과 최지우의 조문에 취재진들의 관심이 주목됐다. 

오후 7시께 먼저 빈소를 찾은 최지우는 오열하며 조문행렬에 동참에 보는 이들을 안타깝게 했다. 이후 오후 11시 8분께 배용준이 다소 무거운 표정으로 병원문을 들어섰다. 그는 쏟아지는 플래시 세례를 묵묵히 받으며 별다른 말없이 빈소로 향했다. 

한편 박용하는 6월 30일 오전 5시 30분 서울 강남구 논현동 자택에서 사망한 채 발견됐다. 

일본언론 등이 병원에서 생방송으로 현장을 연결하는 등 박용하의 자살 소식을 대서특필한 가운데 상주인 매형 김재형씨는 오후 2시께 강남 성모병원 공식 브리핑을 통해 유서는 없었다고 말했다. 경찰 역시 유서를 발견하지 못했으며 휴대폰 통화목록은 모두 삭제돼 있었다. 

다만, 박용하는 앞서 자신의 트위터에 "사람들이 가끔씩 나도 잘 모르는 나에 대해 쉽게 이야기를 한다"는 메시지와 함께 "부모를 위해 천천히 가겠다"는 글을 남긴 바 있다. 

고(故) 박용하의 갑작스러운 자살 소식에 따라 연예계 스타들은 눈물을 흘리며 황급히 빈소를 찾아 애도하고 있다. 

송승헌과 소지섭, 김민정, 박희순, 유진, 김기수, 강타, 씨엔블루(정용화 이정신 이종현 강민혁), 유노윤호, 강원래-김송 부부, 김진표, 김민종, 이형철, SS501 김형준, 유키스 김기범, 정일우, 이태임, 김현주, 김원준, 박효신, 최지우, 이병헌, 장신영, 신승훈, 고주원, 서유정, 김하늘, 최은주, 이주현, 김범, 김규리, 린, 거미, 이연희 등이 발걸음을 했다. 특히 소지섭은 빈소에 들어서자마자 오열 통곡했다.

고인의 장례는 불교식 3일장으로 엄수된다. 1일 입관식과 빈소 이동을 한 뒤 2일 발인, 경기도 성남 영생원에서 화장장을 치른다. 장지는 미정. 

 

2010년 06월 30일 (수) 23:35  뉴스엔
 
 
 
 
 

막걸리 만들때마다 일본에 로열티 낸다니…

 

 

발효때 日특허 미생물 사용하는 탓 
 
◆ 발효산업에 미래 있다 ② ◆ 

 

 
 
   
 
막걸리 붐이 일게 된 배경에는 다름 아닌 우리 것이라는 자부심이 있었다. 하지만 막걸리를 만드는 원천기술이 일본에 있다면 어떨까. 실제로 상당수 막걸리 업체들은 일본에 로열티를 내면서 막걸리를 생산하고 있다. 많은 업체들이 막걸리 제조 과정에 아스페르질루스 오리재(Aspergillus oryzae)라는 미생물을 활용하고 있다. 메주에서 나오는 이 곰팡이는 쌀을 당화(糖化)하는 역할을 한다. 막걸리는 쌀을 당화한 뒤 이 당을 알코올로 전환해 만들어지는데 당화 과정은 막걸리 제조에 있어 가장 중요한 과정 가운데 하나다. 문제는 이 미생물에 대한 특허권이 일본에 있다는 사실이다. 

한금수 순창군장류연구사업소 소장은 "일본은 일찌감치 메주에 대한 연구를 해왔고 여기에서 나온 미생물인 아스페르질루스 오리재를 일찌감치 특허 등록했다"며 "우리나라 막걸리업체 중 절대 다수가 이 미생물을 쓴다고 보면 된다"고 설명했다. 

 


 

 
 
   
 
막걸리는 원래 누룩을 넣어 만든다. 하지만 누룩은 온도나 습도 등에 민감해 맛을 균질하게 내지 못한다. 이 과정에서 아스페르질루스 오리재라는 곰팡이를 일본에서 수입하게 되는 것이다. 

아스페르질루스 오리재 대신 리조푸스 오리재(Rhizopus oryzae)라는 곰팡이를 사용하는 업체도 있다. 전통 누룩에서 찾아낸 곰팡이다. 

하지만 이 곰팡이의 대표 균주 역시 미국과 캐나다 연구진이 이미 분석을 완료해 특허 등록을 마쳤다. 

김대혁 전북대 교수는 "이들 곰팡이는 우리나라에서 쓰는 것과 다소 차이가 있어 이를 대외적으로 증명하기만 하면 우리도 새로 특허를 낼 수 있다"며 "하지만 증명 과정이 만만치 않아 아직 연구를 시작하지 않은 상태로 자칫 잘못하면 우리의 자원을 해외에 빼앗길 여지가 있다"고 경고했다. 

우리나라가 울며 겨자 먹기로 로열티를 지불해야 하는 배경에는 유엔 생물종다양성협약이 있다. 

1992년 유엔환경개발회의에서 채택된 이후 고유한 생물종은 특허로 등록이 가능하며 다른 나라가 특허 등록을 선점한 생물에 대해서는 원산지 국가가 권리를 주장할 수 있다. 

모든 미생물 유전자 염기서열이 철저하게 등록돼 있어 만약 몰래 이 미생물을 사용하다가 적발되면 피할 길이 없다. 

뒤늦게 발등의 불이 떨어진 것은 국내에서 미생물에 대한 인식이 안일했기 때문이다. 

특히 막걸리의 핵심은 발효에 있는데 이 중에서도 핵심인 미생물에 대한 연구를 제대로 못했다는 것도 안타까운 일이다. 

뿐만 아니라 고추장 된장 간장 등 전통 장류 역시 일본에 특허권이 있는 미생물을 쓰는 비중이 높은 것도 심각한 문제다. 

한 소장은 "일본 등 미생물에 대해 눈을 뜬 다른 나라들이 미생물에 대한 특허 선점을 워낙 많이 해놨기 때문에 피해 갈 길이 많지 않다"며 "일본에선 된장이나 간장에 대한 표준화를 많이 진행해 왔고 이에 대한 자부심이 아주 강하다"고 설명했다. 

 


 

 
 
   
 
미생물에 대한 원천기술을 얻기 위해서는 생물자원 선점이 무엇보다 필수적이다. 하지만 미생물과 관련한 국제 특허건수는 최근 들어 급감하는 추세다. 일본이나 독일 등 주요 국가들이 일찌감치 미생물을 등록해 선점한 바람에 후발주자들은 새로운 미생물을 찾는 데 애를 먹고 있기 때문이라는 게 전문가들의 분석이다. 

이정숙 한국생명공학연구원 생물자원센터장은 "우리나라도 최근 들어 새로운 미생물을 발굴하는 데 발 벗고 나서고 있고 성장세도 뚜렷하다"며 "새로 발굴한 미생물 등록건수는 우리가 가장 많은 나라 중 하나"라고 말했다. 

■ < 용어설명 > 

효소(酵素ㆍen-zyme) : 생물체 몸속에서 생리 활성을 주관하고 촉진하는 촉매물질. 단백질로 구성된 효소는 우리 몸속 음식물을 소화시키고 신진대사와 면역력 증강 등에 작용한다. 

효모(酵母ㆍYeast) : 효소를 가지고 있는 세포로 빵이나 맥주, 포도주를 만드는 데 사용되는 곰팡이류 미생물. 효소의 어머니라는 뜻에서 '어미 모(母)'를 써서 효모(酵母)라고 부른다. 

미생물 : 0.1㎜ 이하 크기인 최소 생활단위 단일세포 생물. 박테리아, 곰팡이, 효모 등이 모두 미생물 일종이다. 미생물은 식품, 의약품 등 생물자원이나 수질 환경 또는 토양 지력 보존 등에 이용된다. 

균주 : 순수하게 분리하여 배양한 세균이나 균류. 

누룩 : 술을 만들 때 사용하는 발효제. 술을 만드는 효소를 가진 곰팡이를 곡류에 번식시켜 만든다. 누룩곰팡이는 빛깔에 따라 황국균(黃麴菌) 흑국균(黑麴菌) 홍국균(紅麴菌) 등이 있는데 막걸리나 약주에 쓰이는 것은 주로 황국균이다. 

당화 : 녹말 또는 다당류가 효소나 산 작용으로 가수분해돼 단당류나 이당류를 생성하는 것. 
 
2010-06-30
 

 

 

 

“정대세의 눈물 … 조선학교를 보라”

 

김명준 다큐 감독이 말하는 … 재일동포에게 눈물이란 

정대세가 울었다. 지난 16일 남아프리카공화국 월드컵 북한-브라질 경기 전 양국 국가(國歌)가 연주될 때다. 그 눈물은 어찌나 난해했던지 해석이 분분했다. 

차범근 SBS 해설위원은 "얼마나 월드컵 무대를 밟고 싶었으면"이라고 했고, 정대세 본인은 "큰 경기에 나선 게 기뻐서"라고 말했다. "재일동포의 고단한 삶이 묻어난 눈물"이라고 풀이한 이도 있다. 그의 눈물이 궁금했다. 

조선학교 

김명준(40·사진)씨를 만난 건 22일이었다. 그는 다큐멘터리 '우리학교'의 감독이다. 2003년 10월부터 2005년 4월까지 일본 홋카이도(北海道) 조선학교에서 아이들과 함께 숙식하며 촬영한 이 영화로 2006년 부산국제영화제 운파상(다큐멘터리 부문 최우수상)을 받았다. 재일동포가 아니면서 재일동포 영화를 가장 잘 만든 사람이다. 

-정대세는 왜 울었을까요? 

김 감독의 대답은 1시간30분 동안 이어졌다. 되풀어보면, 출발점은 조선학교다. 일본에는 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조총련) 자본으로 설립된 초·중·고교 통합 과정의 학교가 70여개, 대학교가 1개 있다. 이런 학교를 조선학교라 부른다. 

정대세는 초·중·고·대학교 모두 조선학교를 다녔다. 재일동포 중에도 드문 경우다. 형과 누나도 그랬으니 집안 전체가 조선학교 출신인 셈이다. 학비도 비싼 곳에 부모는 악착같이 삼남매를 보냈다. 

-정대세 부모님이 조총련계인 모양이네요. 그래서 북한 국가대표 축구팀 선수가 된 거겠죠? 

"글쎄요. 조선학교가 조총련계 지원을 많이 받았고, 북한 쪽에 가까운 교육을 하는 건 맞아요. 이 문제로 조선학교들도 요즘 고민이 많아요. 그러나 북한을 지지하는 동포만 조선학교에 다닌다는 건 100% 오해예요. 재일동포들에게 조선학교는 그냥 '우리 학교'예요. 우리말과 민족정신을 가르쳐주는 유일한 학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에요." 

정대세의 형 이세(28)씨는 이와 관련해 "아버지는 한국 국적이고 어머니는 조선적(朝鮮籍)이다. 아버지는 (남과 북 중에) 지지하는 쪽이 없고 어머니는 따지자면 조총련 쪽"이라고 말했다. 

-그래도 재일본대한민국민단(민단)에서 운영하는 학교도 있는데 굳이 조선학교에 보낸 건 부모의 정치적 성향이 반영된 것 아닐까요? 

"민단에서 운영하는 학교는 일본 전역에 4개뿐이에요. 보내고 싶어도 보낼 수가 없어요. 아까 말한 것처럼, 아이에게 한국말을 가르치고 싶다면 선택 가능한 학교는 조선학교뿐이에요." 

민단의 한국학교는 교포들 마음에서도 멀다고 했다. "도쿄 한국학교는 한국에서 온 주재원 자녀가 다니는 학교로 변했어요. 일본사회에서 한국인으로 살아가기 위한 교육은 제공하지 않고 한국대학 입시교육을 해요. 동포들이 아이 보내기 힘들죠." 

민단이 운영하는 오사카(大阪)의 백두학원이나 금강학원은 일본어 수업시간이 한국어 시간보다 많다. 일본 교과과정에 부합하는 교육을 해서 일본 정부로부터 아무런 제약을 받지 않는다. 

-그냥 가까워서 조선학교에 가는 거라면 정대세를 이해하느라 굳이 조선학교를 들여다볼 필요가 없을 텐데. 

"흠… 조선학교를 다니면 아이들이 달라져요. 조선학교의 역사를 이해할 필요가 있는데…." 

복잡한 설명이 이어졌지만 간단히 정리하자면 이렇다. 1945년 광복 직후 재일조선인연맹(조련)이 민족교육을 위한 학교를 세웠다. 탄압을 받았지만 학교 형태로 발전시켜나갔다. 이 학교를 지켜내기 위해 재일동포 1세대가 쏟아 부은 노력은 상상을 초월한다. 북한도 도움을 주긴 했지만 재일동포들이 스스로 돈을 모아 일군 학교였다. 그 전통을 이어받은 게 조선학교라는 것이다. 

"자연히 학생들이 사명감을 갖게 되죠. 일본 애들에게 꿀리지 말아야겠다는 그런 거. 주변 환경이 그럴 수밖에 없게 만들어요." 

그의 영화에서 일본 아이들과의 축구시합에서 지고 그토록 서럽게 우는 재일동포 아이들 심정이 조금은 이해가 됐다. 

"일본 학생들은 자기계발을 위해 축구를 하지만 조선학교 아이들은 단지 거기에만 머무를 수가 없어요. 일본 애들을 한번 이기면 동포 사회가 난리가 나요. '일본 학생들을 상대로 열악한 상황의 우리 아이들이 이렇게 잘하는구나' 하는 거죠. 그래서 마음가짐이 비장해요. 정말 꼭 이겨야겠다는 마음이 강하죠." 

정대세의 눈물, 조금은 이해할 것 같았다. 

"재일동포를 만나보면 일본학교 다닌 분, 한국학교 다닌 분, 조선학교 다닌 분이 정말 달라요. 사고방식 차이가 엄청나죠. 조선학교를 조금이라도 다닌 분들은 당당해요. '일본 사회 나가서 잘 행동해야 돼. 자긍심을 가져야 해.' 이런 의식이 강하죠. 헤쳐 나갈 수 있는 힘을 갖고 있죠. 딱 정대세예요." 

조선학교도 최근엔 많이 달라졌다. 80년대 이후 남한에서 이민 온 사람들도 아이를 맡기는 경우가 꽤 있다. 

"이민자들은 처음엔 조선학교라고 하니 무서워하죠. 하지만 동포 사회에서 살다보면 조선학교에 자주 가게 돼요. 학예회도 있고, 운동회도 있고 하니까. 가보면 아무것도 아니에요. 평범한 학교죠. '여기에 아이를 보내면 우리말도 배우고 일본말도 배우겠구나' 싶어서 보내는 거예요. 일본으로 귀화했는데도 조선학교에 아이를 보내는 집도 있고 한국 국적을 가진 아이들도 많아요." 

조선적 

그래도 질문이 남는다. 정대세는 한국 국적인데 북한의 축구 국가대표다. 이를 이해하기 위해선 재일동포들의 복잡한 국적 관계를 이해해야 한다. 

정대세는 재일동포 3세다. 일제시대 일본으로 건너온 할아버지 고향은 경북 의성이고, 아버지는 한국 국적, 어머니는 조선적이다. 정대세는 아버지를 따라 한국 국적을 취득했다. 

일제시대 조선인의 국적은 모두 일본이었다. 광복과 함께 모두 조선적이 부여됐다. 북한도 남한도 생기지 않았던 시기였고, '조선'이란 용어에는 '조선반도 출신자'라는 뜻밖에 없었다. 

48년 남북에 두 개의 나라가 생겼다. 65년 한일조약이 체결되면서 '한국'은 정식 국적으로 인정됐다. 일본은 지금까지도 북한을 국가로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일본에서 북한 국적은 존재하지 않는다. 재일동포 중 한국 국적을 택하지 않은 사람은 조선적으로 남게 됐다. 

현재 조선적은 여전히 조선반도 출신자란 의미밖에 가지지 않는다. '조선'은 국적이 아니라 기호에 불과하다. 조선적 재일동포는 법적으론 무국적자다. 

일본 정부가 한국 국적만 인정하기 때문에 재일동포가 조선에서 한국으로 국적을 변경하는 건 언제든지 가능하지만 한국에서 조선으로 변경하기란 불가능하다. 그래서 조선적은 줄어들기만 할 뿐 결코 늘어나지는 않는다. 북한 대표로 뛰고 싶었던 정대세가 국적을 바꿀 수 없었던 이유다. 

"북한 국적을 취득하는 방법이 있지만 그러면 일본에서 살 수가 없게 되죠. 한번 출국하면 재입국이 거부될 테니." 정대세는 2년 전 국내 일간지에 기고한 글에서 당시의 절망감을 털어놨다. 

"조선적으로 바꾸는 게 일본 법률상 불가능했다. 절망감에 밥도 목구멍으로 넘어가지 않았다. 아버지를 원망하기도 했고, 내 꿈을 자신의 꿈처럼 열망했던 어머니도 아버지와 말다툼을 했다. 내 꿈 때문에 가족까지 깨질 지경이었다." 

우여곡절 끝에 북한이 정대세에게 여권을 발급해줬고 국제축구연맹(FIFA)도 남북한 특수성을 고려해 정대세가 북한 대표로 뛰는 걸 인정했다. 

"일본에서 한국 국적은 플러스알파가 되는 측면이 있어요. 회사에서도 좋아해요. 하지만 조선적은 달라요. 눈에 보이지 않는 차별이 여전하죠." 

그런 시류를 거슬러 조선적 회복을 시도했던 정대세가 생각하는 조국은 어디일까. 김 감독은 이렇게 설명했다. 

"조선학교에 다니는 아이들에게 조국은 복합적이에요. 학교 교육이 북한을 지향하고 있다는 건 나이를 먹을수록 알게 돼요. 근데 집에 가면 엄마는 한류 드라마를 보고 열광해요. 자기도 한국음악을 즐겨 듣게 되죠. 문화적으론 한국과 가깝고 머리로는 북한이 조국 같은 그런 상황인거죠." 

 

2010년 06월 24일 (목) 17:46  국민일보

 

 

 

 

 

한반도 유사시 주일미군 출격에 대한 日 입장은

 

[동아일보] “美 요청땐 적절하고 신속하게 대응”

1960년엔 자동출격…1969년 “전향적 결정”

日 자율성 확보 내비쳐

오카다 가쓰야(岡田克也) 일본 외상은 한반도 유사시 주일미군의 출동과 관련한 미국의 사전협의 요청이 오면 ‘적절하고 신속하게 대응하겠다’는 방침을 미국 측에 전달했다고 일본 언론이 16일 보도했다. 오카다 외상은 15일 기자회견에서 미일 밀약에 관한 입장을 설명하면서 이같이 말했다.

미국과 일본은 1960년 외교밀약을 통해 한반도에 비상사태가 발생하면 주일미군의 출동을 사전협의 대상에서 제외하기로 했다. 미국이 일본의 동의 없이도 주일미군을 한반도로 출격시킬 수 있다는 뜻이다. 이는 한미안보조약에 따라 주일미군이 자동 출격한다는 의미였다.

밀약 체결 이후인 1969년 사토 에이사쿠(佐藤榮作) 당시 총리는 미국을 방문해 “사전협의를 요청해 오면 전향적이고 신속하게 일본 정부의 태도를 결정하겠다”고 밝혔다. 한반도 유사시 미국은 주일미군 출동에 앞서 일본 정부와 사전협의를 해야 하지만, 일본은 사실상 곧바로 동의해 주겠다는 의미다.

민주당 정권은 지난해 집권하자마자 미일 밀약에 대한 전면조사를 벌였고 올 3월 조사 결과 발표를 통해 밀약의 존재는 인정하면서도 효력은 인정하지 않았다. 그러자 미국에선 한반도 유사시 미군의 활동에 지장을 초래할 수 있다는 우려가 제기됐고, 일본은 미국을 안심시키기 위해 “사전협의에 적절하고 신속하게 대응하겠다”고 약속한 것이다. 다만 일본 정부는 ‘전향적’이란 말 대신 ‘적절’이라는 용어를 사용함으로써 자율성을 더 확보하겠다는 의지를 내비친 것으로 보인다.

일본에선 한반도 유사시 미군이 일본 내 기지에서 발진하면 일본의 의지와 관계없이 분쟁에 휘말린다는 우려가 있어 왔다. 그러나 밀약의 효력을 인정하지 않던 일본 정부가 미국에 이런 약속을 했다고 공개한 것은 천안함 사건 등 최근의 안보 정세와도 관련이 있어 보인다.
 
2010-06-17
 
 
 
 
 

정대세, ‘나는 왜 ‘조선 대표’를 택했나’

 

[한겨레] 아버지 '한국' 국적 이어 받아 북한 대표선수 

왜 시대 흐름을 거슬러 '조선' 선택한 것일까 

남아프리카공화국 월드컵에서 북한 축구대표팀의 스트라이커로 활약하는 정대세는 재일동포입니다. 아버지의 '한국' 국적을 이어받았지만 북한의 대표선수로 뛰고 있습니다. 그는 왜 '한국'이 아니라 '조선'을 선택한 것일까요? 그는 왜 많은 재일동포들이 '한국' 국적을 선택하고, 심지어는 '조선'에서 '한국'으로 국적을 바꾸기도 하는 시대의 흐름을 거스른 것일까요? 정대세가 2008년 7월 < 한겨레 > 매거진 'ESC' 에 보내온 글을 소개합니다. 당시 정대세는 5개월에 걸친 월드컵 3차 예선을 마치고 일본으로 돌아온 상태였습니다. 글은 6월22일 서울 상암 월드컵경기장에서 치른 한국과의 시합에서 득점 없이 비긴 소회로 시작합니다. 

아버지의 '한국'국적을 이어받은 나는 왜 조선 대표팀을 택했나 (2008/07/02) 

안녕하세요. 장마로 기분이 찌뿌드드한 정대세입니다. 오늘도 일본에선 일찍부터 비가 옵니다. 여러분, 어떻게 지내시는지요? 

저는 약 4주일간의 해외 원정에서 일본으로 돌아왔습니다. 오랜만에 안기니 내 침대가 쾌적하군요. 몸 컨디션을 회복한 뒤 6월24일부터 가와사키 프론탈레 팀에 합류해 다시 연습에 매진하게 됩니다. 

고3때 수학여행 간 평양에서 선언하다 

이제 5개월에 걸친 3차 예선이 마침내 끝났습니다. 6월22일 한국 상암 월드컵경기장에서 치른 한국과의 시합은 아쉽게도 득점 없이 비기고 말았습니다. 하지만 관중석에서 통일기를 휘날리며 응원해 주신 분들도 있어 정말 감동했습니다. 경기장에 나와 주신 분, 텔레비전으로 시합을 봐 주신 분들, 감사드립니다. 몹시 고대하던, 한국에서 한 시합이어서 반드시 골을 넣겠다는 각오로 임했습니다만 실망스런 시합을 보여드리게 돼 죄송합니다. 

지난달 14일의 대요르단전을 앞두고, 6월7일 요르단이 한국과 비겼다는 소식을 듣고는 요르단과 시합도 쉽지 않을 것으로 예상했으나 2 대 0으로 쌈빡하게 이겨(이날도 저는 골을 넣지 못했습니다만…) 최종예선에 진출하게 됐습니다. 

어쨌든 무사히 최종예선에 나갈 수 있게 돼 한시름 놨습니다. 그리고 한국과 함께 최종예선에 나가게 된 것도 정말 기쁜 일입니다. 수비에 치중한 팀 전술 때문에 생각처럼 공격을 할 순 없었지만 3차예선에서 유일하게 무실점을 기록하는 성과를 남길 수 있었습니다. 최종예선은 지금까지와는 다른 어려운 시합이 되리라는 건 누구나 예상합니다. 제 희망을 말한다면, 꼭 한국, 일본과 같은 그룹에서 싸우고 싶습니다(6월27일 열린 아시아 최종예선 조 추첨에서 남과 북은 같은 조인 B조에 배정되었다-편집자) 

서론이 좀 길어졌습니다만, 이번 테마는 '정대세가 조선대표를 택한 이유'입니다. 도대체 나는 언제부터 조선대표가 되겠다는 꿈을 꾸기 시작한 걸까. 초심으로 돌아가 기억을 더듬어가며 써 보겠습니다. 

언젠가 전화로 어머니와 얘기를 하는데 무심코 "서랍을 정리하다가 대세의 소학교(초등학교) 때 작문이 나왔어. '나는 장래 반드시 국가대표가 될테야!!'라고 돼 있었어"라고 했습니다. 일본에서도 J리그 다큐멘터리 등에서 곧잘 듣는, 흔해빠진 얘기일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아마도 소학생 때부터 그런 꿈을 간직해온 모양입니다. 

고교 3학년 때 여름, 수학여행으로 조국을 방문했을 때의 일입니다. 평양에서 보낸 마지막 날 밤 축구부 친구들과 뭔가 얘기를 하던 나는 그만 들뜬 기분에 "나는 꼭 조국대표가 돼서 여기(평양)로 돌아오겠습니다!!" 하고 힘차게 선언한 일을 지금도 선명하게 기억합니다. 이 세상에 태어나 아버지의 '한국' 국적을 그대로 이어받은 나는 멋도 모르고 모두들 앞에서 내 꿈을 선언한 것입니다.

조선대학에 진학한 나는 망설임 없이 축구부에 들어갔습니다. 2학년 때 2004년 아시안컵 예선 조선대표로 참가해보지 않겠느냐는 얘기가 날아들었습니다. 그런데 그 꿈을 막은 것은 저의 '국적'이었습니다. "나는 공부에선 다른 학생보다 뒤지지만 이제까지 총련계 민족교육을 받아서 애국심과 민족혼, 긍지는 누구에게도 지지 않습니다. 내 국적 표기가 '한국'이라는 데 모순을 느끼며 살아왔는데, '조선' 국적을 다시 취득해서 국가대표가 되고 싶습니다." 아무 거리낌 없이 당시 축구부 부장에게 말했습니다. 

'조선'에서 '한국'으로 바꾸는 시대를 거슬러… 

지금 재일조선인 사회에서는 국적을 '조선'에서 '한국'으로 바꾸는 사람이 많습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여행갈 때 비자 신청하기도 쉽고, 조선-일본 관계가 날로 악화되는 때에 일본에서 살아가기가 아무래도 용이합니다. 이런 시기에 국적을 '한국'에서 '조선'으로 바꾼다는 것은 황당한 얘기로 들렸을 겁니다. 쉽게 얘기하자면, 재난이 일어났을 때 모두가 피난 가는 방향과는 거꾸로 재난 발생지를 향해 스스로 나아가는 것과 같은 짓입니다. 하지만 저에게는 그런 건 문제가 되지 않고 오직 자신의 꿈을 향해 달려가는 저 자신을 오히려 자랑스럽게 생각했습니다. 

모든 수단을 동원해서 '조선'적을 취득하려 했으나 결과는 노(NO). 우리 가족은 어머니만이 '조선'적, 아버지와 누나와 형님은 '한국'적인데다, 일본과 국교가 있는 '한국'적에서 국교가 없어 일본이 '나라'(國)로 인정하지도 않는 '조선'적으로 바꾸는 것은 일본 법률상 불가능했던 것입니다. 

눈앞에 다가온 꿈이 한순간에 사라져버렸습니다. 절망감으로 밥도 목구멍으로 넘어가지 않고 눈물만 뺨을 타고 흘러내렸습니다. 아무 죄도 없는 아버지를 원망하기도 했고, 내 꿈을 자신의 꿈처럼 열망했던 어머니도 아버지와 말다툼을 해 내 꿈 때문에 가족까지 깨질 지경이었습니다. 그만큼 조선대표가 되고자 했던 내 꿈은 강렬했고 가족 또한 열렬히 응원해주고 있었기 때문이겠죠. 

2005년 2월9일 그런 나를 제쳐놓고 일본 사이타마 스타디움에서 독일 월드컵 최종예선 일본-조선전이 열렸습니다. 같은 재일동포로서 조선대표로 소집된 안영학, 이한재 선수가 일본 매스컴에서 앞다퉈 모셔 가는 귀한 몸이 된 걸 선망의 눈초리로 지켜보는 수밖에 없었습니다. 많은 재일동포들이 스타디움으로 달려갔습니다. 일본에서 태어나 자란 우리에겐 일본에서 국가대표로 뛰는 시합은 특별한 의미가 있습니다. 일본대표를 상대로 호각지세를 이루며 싸우는 조선대표 선수들 모습을 보면서 얼마나 감동했겠습니까. 그리고 '국적' 문제만 없었다면 나도 이 무대에 서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한편으론 정말 부럽기 짝이 없고 또한 어금니를 꽉 깨물게 하는 분기가 치받쳐 올라왔습니다. 저는 꿈을 포기했습니다. 

대학 졸업 뒤 프로로 J리그 가와사키 프론탈레에 입단했습니다. 꿈을 이룰 수 없었던 분기도 잊고 프로로 활동하는 데 몰두할 뿐 제대로 시합에도 나가지 않던 나에게 낭보가 전해졌습니다. 재일본조선인축구협회를 비롯한 주변의 여러분들이 힘을 써서, 일본에서의 '국적' 표기를 바꾸지 않고도, 내 꿈과 민족에 대한 생각을 평가해준 '우리나라'가 패스포트(여권)를 발행해주기로 했다는 겁니다. 바꿔 말하면, 진정한 '조선사람'으로 인정을 받을 수 있었던 겁니다. 그때 일시 포기했던 꿈이 현실이 된 것입니다. 정직하게 말하면 기쁨보다 놀라움이 먼저였습니다. 그리고 내가 살아온 23년간의 인생이 주마등처럼 떠올랐습니다. 

일제 식민지시대 때 일본에 건너온 할아버지가 생활 기반을 잡고 일본 정부의 부당한 차별 속에서 조선사람으로 살았고, 그 2세인 아버지 어머니가 그 뜻을 이어받아 우리를 '우리 학교'에 보내주었습니다. 소학교에서 대학까지의 16년간에 걸친 민족교육은 내게 조선사람 마음을 길러 주었습니다. 수업 커리큘럼이나 귀한 친구들을 사귀는 일은 일본 학교에 다녔더라도 마찬가지였겠지만, 우리 학교는 일본 학교에서 배울 수 없는 우리나라 말, 역사를 가르쳐 주었습니다.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 민족의 혼과 긍지, 내가 일본에 있더라도 조선사람으로 살아갈 신념을 심어 주었습니다. 

"7년만에 또 하나의 꿈이 이뤄졌어!" 

이런 나의 성장과 그 속에서 배양된 애국심, 민족심이 흔들리지 않았기에 조선대표로 인정받을 수 있었습니다. 누가 이끌어 준 것도 아니고, 바로 이것이 '정대세가 조선대표를 택한 이유'일지 모르겠습니다. 아버지 어머니가 우리 학교를 선택해 준 것에 감사합니다. 저를 조선인으로 키워 준 우리 학교에 감사합니다. 

대표가 되고 나서 첫 시합은 지난해 7월 마카오에서 열린 동아시아선수권. 일본에서 익힌 나의 우리말 실력이 대표선수들에게 통할까, 문제없이 적응할 수 있을까 하는 불안과 반드시 좋은 결과를 내 보이겠다는 기대를 안고 꿈의 무대로 가는 첫발을 대디뎠습니다. 그러나 상상도 하지 못한 환경의 차이, 서포트 부족 등으로 당황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지만 한마디의 불평불만도 없이 항상 전력을 기울여 플레이하는 대표선수들과 함께 지내다 보면 잊어버렸던 혼이 다시 되살아난 느낌이 듭니다. 그것은 내가 그냥 간단히 제이(J) 리그에 들어가고, 간단히 국가대표가 된 게 아니라는 겁니다. 일본 학교의 절반 크기에도 못 미치는 우리 학교 운동장에서 축구를 시작해 주변의 서포트에 진심으로 감사하면서 한눈팔지 않고 계속 달려온 잡초혼 덩어리가 정대세다, 하고 초심으로 돌아갈 수 있었습니다. 그러고 나서 2008년 2월 충칭의 동아시아선수권, 월드컵 아시아예선을 조선대표와 함께 싸워왔습니다. 지금은 국가대표라는 자각도 다지면서 2010년의 남아프리카 대회를 향한 일념뿐입니다. 이 많은 생각으로 가득 채워진 플레이에 대해 일본에서는 '인간 불도저'라는 별명을 붙여 주었습니다. 

고교 3학년 여름, 친구들에게 선언했던 꿈이 이루어졌습니다. 다시 한번 외치고 싶습니다. "바로 지금! 7년이나 걸렸지만 또 하나의 꿈이 이뤄졌어!!" 

정대세 조선 축구대표팀 선수 · J리그 가와사키 프론탈레 소속 

 

2010년 06월 16일 (수) 14:30  한겨레

 

 

 

 

 

"日, 아시아 돌풍 이어 달라' ...국내 팬들 '대승적 성원'

 

[OSEN=이명주 기자] '영원한 라이벌' 일본을 바라보는 한국의 눈빛이 달라졌다? 카메룬과 첫 경기를 앞두고 있는 일본에 한국 축구 팬들이 응원의 메시지를 보내고 있어 화제다. 
14일 오전 한 포털사이트에는 '일본 대 카메룬, 어떻게 생각하나'라는 제목의 게시글이 등장했다. 이날 밤 11시 블롬폰테인의 프리스테이트 스타디움에서 열리는 2010 남아공 월드컵 일본-카메룬전 결과를 예측해 보자는 게 해당 글의 논지였다. 

이제까지 월드컵에서 일본 대표팀은 한국의 미움을 사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역사 교과서 왜곡, 독도 발언 등 스포츠 외적인 부분에서 대립각을 세우다 보니 응원은 고사하고 비난만 가득했다. 

그러나 이번 남아공 월드컵은 조금 다른 모습이다. '먼 이웃나라'였던 일본을 '아시아 대표'로 보기 시작하면서 일본 팀에 힘을 보태주는 양상이다. 일본과 카메룬의 경기에서 일본을 응원하겠다는 한 네티즌은 "같은 아시아인으로서 일본이 잘해줬으면 좋겠다"고 지지했고, 또 다른 네티즌은 "일본 대표팀의 실력이 너무 떨어진 것 같아 안타깝다. 힘내길 바란다"고 전했다. 

한국과 일본 언론 역시 서로를 향해 호의적인 시선을 보내는 중이다. 아사히, 요미우리 신문 등 일본 언론에서는 지난 12일 있었던 한국과 그리스 경기 결과를 대서특필하며 ;사상 최강의 2010년판 코리아' 라고 환호했다. 

한국 언론 또한 일본 대표팀의 일거수일투족을 보도하면서 일본과 카메룬 경기에 대한 관심을 높이고 있다. 

일본이 바라는 대로 '아시아의 돌풍'을 이어갈 수 있을까. 일본과 한국 축구팬의 관심이 14일 밤 11시에 쏠려 있는 이유다.

 

2010년 06월 14일 (월) 16:39  OSEN

 

 

 

 

 

日, 10년만에 非세습 총리 등장

 

'주식회사 일본'을 이끌 제94대 일본 총리대신의 강력한 후보인 간 나오토 부총리 겸 재무상(63)은 자수성가형 정치인이다. 

세습 의원 출신으로 '유약하다'는 평가가 많은 하토야마 유키오 총리와 달리 전형적인 야당 투사 출신으로 정치적 소신이 뚜렷하고 시장 개입이나 경기 부양 등 경제정책을 강력하게 밀어붙일 것이라는 전망도 나온다. 

1946년 야마구치현에서 태어나 71년 도쿄공업대학 응용물리학과를 졸업했고, 일본의 거물급 정치인(중의원 10선) 가운데 특이하게 시민운동 경력을 바탕으로 정계에 진출했다. 사회시민연합, 신당 사키가케, 옛 민주당 등을 주도하며 '타도 자민당'의 선봉장 역할을 해왔고, 96년 초 호소카와 연립내각에 참여해 후생상을 지낸 경력을 제외하면 정치 경력의 대부분을 야당에서 보냈다. 

자신의 정치후원단체를 '초지회(草志會)'라고 이름 붙인 것도 "기득권층이 아니라 시민이 중심이 되는 정치를 구현하겠다"는 뜻이라고 밝혔다. 

96년 자민당 이탈 세력과 공조해 민주당을 창당한 이래 초대 대표와 3대 대표를 역임하는 등 '민주당의 적통'으로 평가받는다. 

주일 한국대사관 측은 " '한일의원연맹'의 일본 측 고문을 맡을 정도로 한국에 대한 이해도와 관심이 높다"고 말했다. 

76년 중의원 총선(무소속), 77년 참의원 총선(사회시민연합), 79년 중의원 총선(사회민주연합) 등 3번의 선거에서 낙선의 고배를 마신 뒤 80년 제36회 중의원 총선에서 첫 당선됐다. 

아사히신문은 "세습 출신들이 손쉽게 당선되는 일본의 정치 풍토에서 잡초와 같은 인생 역정을 걸어왔다"고 평가했다. 

간 부총리 자신도 "총리의 아들이나 손자가 아니면 총리가 될 수 없는 게 일본 정치의 문제"라고 강조해 왔다. 

차기 총리로 선출되면 세습정치를 차단하기 위해 어떤 제도적 장치를 만들지도 주목된다. 2000년 4월 총리에 오른 모리 요시로 총리 이래 꼭 10년, 6대(총리 선출 기준) 만에 비(非)세습 출신의 총리대신이 탄생하게 된다. 

하토야마 내각에서 부총리 겸 재무상으로 근무할 당시 엔화 약세를 용인하거나 경기부양책을 주도하는 등 소신이 뚜렷한 정책 성향을 보였다. 

 

2010년 06월 03일 (목) 17:19  매일경제

 

 

 

 

 

황제의 서명까지 위조했다

 


 
일본 황태자 마중 나가는 순종 황제 마차. ⓒ연합뉴스 

올해는 한·일 병합 100주년이 되는 해이다. 

지난 1910년 대한제국은 일제에 의해 강제로 병합된 이후 36년간 치욕스러운 식민 통치를 받아야 했다. 1945년 광복이 되었지만 식민 지배가 남긴 상처는 여전히 한·일 양국에 깊은 앙금으로 남아 있다. 지난 5월11일 백낙청 서울대 명예교수와 와다 하루키 도쿄 대학 명예교수 등 한·일 양국의 지식인 2백14명은 '한·일 병합 조약은 무효이다'라는 내용의 공동 선언문을 발표했다. 그러나 정작 우리들 가운데도 '왜 조약이 무효인가'에 대해 분명하게 알지 못하는 이들이 많다. < 시사저널 > 은 지난호에 이어 이태진 서울대 명예교수의 기고를 통해 일제의 한국 강제 병합 조약이 왜 무효인지를 알아본다. 

 



 
'제2차 일한협약'(보호조약)의 한·일 양국어본 비교(왼쪽). 한국어본의 끈이 일본어본과 같은 청색이다. 일본어본은 '의정서'처럼 '재한국일본공사관' 용지를 사용했지만, 한국어본은 '한국 외부' 표시가 없는 적색 괘지이다. ⓒ서울대 규장각 한국학연구원소장 

① 보호조약 강제의 현장, 일본이 남긴 강제 증거 

'제2차 일한협약'(을사륵약)은 가장 중요한 주권인 외교권을 빼앗는 것이었기 때문에 한국측의 저항은 어느 때보다 컸고, 일본측의 강압도 가장 난폭했다. 일본은 총리대신을 네 번 지낸 추밀원 의장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특파대사로 보내 현장을 지휘하게 했다. 

2005년 11월15일 이토가 고종 황제를 알현하고, 이 자리에서 세 시간이 넘도록 쟁론이 벌어졌다. 일본의 요청을 들은 고종 황제는, 그렇다면 한국은 아프리카의 토인국이나 오스트리아에 병합된 헝가리 신세가 되지 않느냐고 반문하면서 절대로 이에 응할 수 없다고 단호하게 말했다. 이토는 외부대신에게 협상에 임하라고 지시해주기를 협박조로 거듭 말했지만, 황제는 이런 중대사는 정부에서도 절차가 있고 중추원과 일반 신민의 의견까지 들어야 하는 일이라고 말하면서 거부했다. 이토는 전제국가에서 황제의 뜻 외에 다른 무슨 절차가 필요하냐고 폭언하면서 협상 지시를 거듭 촉구하고 물러났다. 

대한제국의 '의정부회의 규정'(최종 규정, 1904년 3월4일자)에 따르면, 조약은 외부대신이 상대국의 제안을 접수해 의정부 회의에 회부해 의정(또는 참정)이 토론을 주재해 다수 의견으로 회의록을 작성해 황제에게 재가를 구하는 한편, 중추원에도 동의를 구하도록 되어 있었다. 11월16일 주한 일본공사 하야시 겐죠(林權助)는 외부대신 박제순에게 협상안을 제출했다. 고종 황제와 대신들은 곧 회동해 이 안건은 회의에 아예 회부하지 않기로 결의했다. 11월17일 아침부터 일본 공사는 한국 대신들을 일본공사관으로 초치해 제안을 수락할 것을 회유·압박했다. 대신들이 응하지 않자 하야시 공사는 황제와 직접 의논할 것을 제안하면서 황제의 거처인 중명전(重明殿)으로 이동했다. 황제와 대신들은 간담회 형식으로 다시 만나 계속 거부할 것을 다짐했다. 오후 6시께 하야시 공사는 이토 특사가 있는 곳에 사람을 보내 대사가 직접 나설 것을 요청했다. 이토는 종일 한국주차군 사령부(현 웨스틴조선호텔 건너편에 있던 대한제국의 영빈관 대관정을 무단 점거해 사용)에서 사령관 하세가와 요시미쯔(長谷川好道)와 함께 기다리고 있었다. 이토는 이 전갈을 받고 하세가와와 함께 헌병들을 거느리고 중명전으로 갔다. 좁은 입구와 마당은 일본군 헌병들로 가득 차다시피 했다. 

 



 
'한국 병합 조약'의 한국측 전권위임장. 국새가 날인되어 있고 그 위에 순종 황제의 이름자 서명이 보인다. ⓒ서울대 규장각 한국학연구원소장 

이토는 황제에게 알현을 요청했지만, 황제는 대사와는 더 할 얘기가 없다고 거절했다. 이토는 퇴궐하려는 한국 대신들을 불러 세워놓고 한 사람씩 심문조로 찬반 의견을 물었다. 이토는 반대 의견에 대해서도 엉뚱한 토를 달아 찬성으로 간주해 찬성자를 다수로 만들었다. 이완용이 조약의 시한을 '한국이 부강해질 때까지'라고 명시하고, '한국 황실의 안녕을 보장한다'라는 구절을 넣자고 제안했다. 이것은 전날 이토와 짠 각본이었다. 이토는 반대자는 참정(한규설)과 탁지대신(민영기) 두 사람뿐이라고 선언하면서 이완용의 제안을 반영해 조약문을 새로 쓰게 했다. 이즈음 통역관 마에마 교오사쿠로 해금 헌병들을 데리고 한국 외부에 가서 외부대신의 직인을 가져오게 했다. 새로 쓴 조약에 날인을 마쳤을 때는 11월18일 새벽 1시 30분께였다. 외교권 이양이라면 '조일 수호 조규'처럼 한국 황제의 비준서가 반드시 첨부되어야 하는데도 이 조약에는 외부대신 직인만 찍혀 있을 뿐이다. 

일본측은 억지를 부리던 중에 결정적인 강제의 물증을 스스로 남기고 있는 것을 몰랐다. 한국측의 손으로 작성되고 철해져야 할 한국어본의 조약문이 일본공사관측에 의해 처리된 증거가 남겨졌다. 1년여 전의 '의정서'만 해도 조약문은 각기 외교 업무를 주관하는 양측의 기관이 주관해 처리되었다. 즉, 한국은 '韓國外部', 일본은 '在韓國日本公使館'이라는 글자가 인쇄된 용지를 사용하고, 각기 서로 다른 끈으로 그 문건들을 철해 교환했다. < 사진 1 > 한국측은 황색, 일본측은 청색의 끈을 사용했다. 

그런데 이때는 일본어본은 '의정서' 때와 같은 용지와 끈을 사용했지만, 한국어본은 기관명이 인쇄되지 않은 적색 괘지에 일본측이 사용한 청색 끈으로 철해져 있다. < 사진 2 > 이것은 일본공사관측이 한국어본까지 직접 챙겼다는 명백한 증거이다. 

이토 히로부미는 귀국 후 천황에게 올리는 보고서의 내용까지 조작했다. 추밀원 비서실장(都築馨六)이 작성한 보고서의 초고(일본 국회 헌정 자료실 소장)에는 이토 특사가 한국 황제를 알현했을 때의 분위기를 '한국 황제는 이번 조약에 찬성하지 않아'라고 적었다. 그런데 '찬성하지 않아'의 구절 위에 흑색 선을 긋고 '찬성하지 않을 수 없어'라고 고치고 한국 황제가 처음부터 협조적으로 임한 것으로 내용을 바꾸었다. 이런 조작 후에 '황제 협상 지시'를 정론처럼 삼아 한국 정부의 < 官報 > 에 이 조약을 '한일 협상 조약'으로 게재하게 하는 한편, 한·일 양측의 공식 기록들을 모두 이 각도에서 작성하도록 했다. 

 



 
(왼쪽) 이탈리아의 사진 잡지(1907년 8월4일자)의 표지 사진. '신황제' 대역의 젊은 환관이 '구황제' 대역 환관으로부터 양위를 받고 막 용상에 올라앉아 있다. 앞쪽에 일본 장교 복장의 인물이 보인다. (오른쪽) 순종 황제 이름자 서명 위조 상태. 하나여야 할 필체가 여섯 가지 정도 된다. 통감부 직원들이 각기 소관별로 위조 처리한 것으로 입증되었다. ⓒ서울대 규장각 한국학연구원소장 

② 고종 황제 퇴위 강제, 뒤이은 순종 황제 친필 서명 위조 

고종 황제는 '제2차 일한협약'이 강제되자 곧바로 독일, 러시아, 미국, 프랑스 등 수교국의 국가 원수들을 상대로 조약 무효화 운동을 벌였다. 그러나 일본에서는 1906년 1월 말에 외교권 실행 기구로 통감부를 서울에 설치하고 이토가 초대 통감으로 부임했다. 이토는 고종 황제가 1907년 6월에 비밀리에 제2차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 특사 3인을 파견하자, 이를 구실로 퇴위를 강제했다. 황제는 이를 거부했지만, 일본 정부는 7월20일에 환관 두 명을 신·구 황제의 대역으로 동원해 양위식을 거행했다. < 사진 3 > 

이토는 7월24일에 총리대신 이완용을 불러 '한일협약'을 체결했다. 통감이 대한제국의 내정까지 직접 관여하는 체제를 만들기 위한 조약이었다. 이 조약은 퇴위 강제와 함께 추진된 것이었기 때문에 정상적인 절차를 밟는 것이 될 수 없었다. 한국 황제가 퇴위를 거부하고 황태자가 움직이지 않은 상태에서 전권 위임과 같은 절차가 이루어질 수가 없었다. 이 조약은 말미에 두 사람이 '각기 본국 정부에서 상당한 위임을 받아 본 협약에 기명 조인한다'라고 밝히고 있지만, 신·구 황제 어느 쪽도 위임을 허락해준 적이 없었다. 한마디로 이 조약은 통감이 나서 대한제국의 통치 체제를 통감부의 것으로 바꾸는 것에 대한 요식 행위에 불과했다. 

 



 
'한국 병합 조약' 전권위원들의 기명 날인 상태. ⓒ서울대 규장각 한국학연구원소장 

황제와 황태자는 이토의 강압에 오래 맞섰다. 8월2일에 통감부가 융희(隆熙)라는 새 연호를 공표했지만, 황태자는 나서지 않았다. 일본은 황태자의 이복동생인 10세의 영친왕을 왕세자로 책봉하고 그를 인질로 삼는 계략으로 황제를 압박했다. 일본의 황태자가 먼저 서울을 방문하는 것으로 계략이 가시화되자 고종 황제는 더 이상 버티지 못했다. 황제는 11월15일 종묘를 방문한 다음 경운궁으로 돌아오는 길에 황태자(순종)가 있는 창덕궁을 들렸다. 3일 뒤 황태자가 종묘를 찾고 선대왕들의 신위 앞에서 황제의 위에 오르겠다는 서고(誓告)를 올렸다. 

이때 통감부는 다시 기묘한 계략을 부렸다. 황제의 서고문에 이름자를 친필로 기입하는 난을 만들었다. 새 황제가 '李拓'이라는 자신의 이름을 여기에 써넣도록 유도했다. 그리고 이날부터 황제의 결재 방식을 황제가 이름자를 직접 쓰는 친서(親署) 제도로 바꾸었다. 이 방식은 일본에서 명치유신 이래 해 오던 것이었다. 서고가 끝나자마자 통감부의 직원들은 서고문을 넘겨받아 이날부터 1910년 1월18일까지 2개월간 61건의 문서에 황제의 이름자 서명을 흉내 내어 안건들을 처리했다. < 사진 4 > 

이 문건들은 대한제국의 정부 조직과 재판소, 감옥 제도 등을 통감부 감독 체제로 바꾸는 것들이었다. 공문서 위조 행위가 내정권 탈취에서도 대규모로 행해졌다. 

 



 
'한국 병합 조약'의 한국 황제 '칙유'(조선총독부 홍보용). 국새가 아닌 것이 찍히고 황제의 이름자 서명이 없다. 

③ 병합 조약에 순종 황제는 서명하지 않았다 

고종 황제가 강제 퇴위당한 후 무력 투쟁을 벌이는 의병들의 기세는 국내외에서 날로 높아갔다. 1909년 6월에 이토는 이에 대한 책임을 지고 통감 자리에서 물러났다. 같은 해 10월에 일본의 만주 진출에 한몫하고자 하얼빈으로 갔다가 거기서 블라디보스토크에 본거를 둔 대한의군의 참모중장 안중근이 이끄는 특파대에 의해 처단되었다. 일본 군부는 이토가 통감에서 물러나기 직전에 한국 병합에 대해 이토도 찬성한다는 것을 확인했다. 일본 군부는 하얼빈 사건 후 배후 조직에 대한 철저한 탐문 조사를 마치고 1910년 3월에 안중근을 극형에 처한 뒤, 6월에 '한국병합준비윈회'를 발족시켰다. 병합에 필요한 모든 절차를 검토하고 문건들을 준비하기 위해서였다. 안중근 사건에 대한 조사를 주관한 육군대신 데라우찌 마사다케(寺內正毅)가 7월 하순 통감으로 부임해 병합 집행에 나섰다. 

일본은 병합 조약만은 정식 조약의 요건을 다 갖추려고 했다. 준비위윈회는 한국측의 이름으로 낼 문건들도 모두 준비했다. 데라우찌는 총리대신 이완용에게 사전에 협조를 당부한 뒤, 8월22일에 위임장부터 내놓고 이것을 순종 황제에게 가져가서 서명과 날인을 받아오라고 했다. 황제는 이완용 외에 친일 분자 윤덕영, 민병석 등이 지켜보는 가운데 두 시간 이상 버텼다. 그것은 침묵 시위였다. 창덕궁 낙선재에 갇힌 몸이 된 그에게는 이미 저항할 아무런 수단이 없었다. '大韓國璽'라고 새겨진 국새를 찍고 그 위에 자신의 이름자를 직접 썼다. < 사진 5 > 이완용은 이를 받아들고 남산 아래 통감 관저로 달려갔다. 데라우찌가 내놓은 조약 본문에 기명 날인했다. < 사진 6 > 그런데 데라우찌는 다시 각서 하나를 내놓았다. 병합의 사실을 알리는 양국 황제의 조칙을 언제든지 발표할 수 있도록 준비한다는 내용이었다. 이 조약은 체결과 동시에 한 나라가 없어지는 것이라 비준 절차를 밟을 시간이 없으므로 병합을 알리는 조칙의 공포로 대신하기 위한 것이었다. 

 



 
샌프란시스코에서 발행된 신한민보(新韓民報) 1926년 7월18일자에 실린 순종 황제의 유조. '병합 인준은 일본이 제멋대로 한 것이요 내가 한 바가 아니다'라고 밝히고 "여러분들이여 노력해 광복하라, 짐의 혼백이 명명한 가운데 여러분을 도우리라"라고 끝맺었다. 

양국 황제들의 조칙은 8월29일에 반포되었다. 그런데 한국 황제의 조칙은 '칙유'로 이름이 바뀌고, 위임장과는 달리 국새가 아니라 '勅命之寶'라고 새겨진 어새가 찍혔다. 그 위에는 반드시 있어야 하는 황제의 이름자 서명도 없다. < 사진 7 > 이 어새는 황제의 행정 결재용으로서 통감부가 고종 황제를 강제 퇴위시킬 때 빼앗아간 것이었다. 따라서 이 날인은 순종 황제의 의사와는 무관한 것이었다. 순종 황제는 1926년 4월26일에 운명하기 직전에 곁을 지키고 있던 조정구(趙鼎九)에게 유언을 구술로 남겼다. 자신은 나라를 내주는 조약의 조칙에 서명을 하지 않았다는 내용이었다. 이 구술 유언 조칙은 멀리 샌프란시스코 교민들이 발행하던 신한민보에 실렸다. < 사진 8 > 이 진술은 '칙유'의 상태와 일치하는 것이었다. '한국 병합 조약'만은 정식 조약의 구비 조건을 다 갖추려 했던 일본측의 계획과는 달리 비준서를 대신할 한국 황제의 조칙은 발부되지 않은 것이 되었다. 

 



 
'한국 병합 조약'의 한·일 양국어본 재질 비교. 앞표지, 첫 페이지 그리고 뒤표지(왼쪽부터). ⓒ서울대 규장각 한국학연구원소장 

일본측은 병합 조약에서도 결정적인 강제의 흔적을 남겼다. < 사진 9 > 에서 보듯이 이 조약은 한·일 양국어본이 똑같은 용지에 똑같은 필체로 작성되고 똑같은 끈으로 묶여져 있다. 조약이 한쪽 의사로 강제되었다는 명백한 증거이다. 세계 조약사상 이런 예는 찾아 볼 수 없는 것이다. 

 

 
2010년 06월 03일 (목) 17:26  시사저널
 
 
 
 
 

日, 멀어진 경제 회복·물건너간 정치 개혁

 

하토아먀 총리 퇴진 
후텐마 기지이전 문제·정치자금 스캔들로 8개월만에 퇴임 
민주, 내달 참의원 선거서 안정의석 확보 못하면 불안 지속 

반세기 만의 정권 교체를 이뤄냈던 하토야마 유키오 일본 총리가 2일 사퇴 의사를 표명함에 따라 일본 정국이 소용돌이에 휘말리고 있다. 

하토야마 총리는 '관료중심의 정치 타파'와 '경제 부흥'을 공약으로 내걸었지만, '단명 총리'로 끝나고 말았다. 

외신들은 "하토야마 정권에 대한 지지율은 출범 당시만 해도 70%를 웃돌았으나불과 8개월 여 만에 20% 밑으로 떨어졌다"며 "일본의 정치 개혁과 경제 회복이 더욱 요원해졌다"고 평가했다. 월스트리트저널(WSJ)은 "그의 퇴임은 자민당의 반세기 아성을 무너뜨린 민주당 역시 활력을 잃은 일본의 정치와 정책입안 과정을 변화시키지 못했다"고 말했다. 

하토야마의 퇴진을 가져온 직접적인 원인은 오키나와 현에 자리잡은 후텐마 미군 기지의 이전 문제였다. 총리는 이 기지를 오키나와 현 밖으로 이전하겠다는 공약을 내걸고, 처리 시한까지 못박았으나 기지는 이전하지도 못한 채 미ㆍ일 동맹만 약화시키는 악수를 뒀다. 이에 따라 정권 지지율은 추락했고, 내달 참의원(상원) 선거 때 지지할 정당을 묻는 조사에서도 처음으로 자민당에게 1위 자리를 내주고 말았다. 국민들이'아마추어 정권'에 염증을 표시하며 "국가적 위기 국면에서는 경험이 많은 자민당이 낫다"고 여기기 시작했다. 

정권의 개혁 의지가 자금 스캔들 등으로 빛을 잃은 것도 지지율을 떨어뜨린 또 다른 배경이다. 총리는 이날 정치자금 스캔들에 대한 책임을 물어 오자와 이치로 간사장에게 동반 퇴임할 것을 요구했고, 오자와 간사장은 이를 수용했다. 당내에서 가장 많은 지분을 가진 오자와 간사장은 공천 및 정부 운영을 좌지우지하며 당의 이미지를 얼룩지게 만들었다. 뉴욕타임스(NYT)는 "개혁 의지가 부족한 오자와 간사장과 쌍두마차를 형성한 총리의 우유부단이 미국과의 갈등으로 더욱 부각됐다"고 평가했다. 

경제 회복이 더딘 것도 국민들의 실망감을 키웠다. WSJ는 "일본 국민들은 20년간의 저성장의 책임을 물어 정권을 교체했지만 이번에도 일년을 넘지 못했다"며 "정치 개혁도 경제 살리기도 난맥을 보이고 있다는 것만 드러낸 셈"이라고 평했다. 

물론 민주당이 총리를 선출하는 중의원(하원)에서 다수를 확보하고 있기 때문에 총리가 사임해도 정권은 바뀌지 않는다. 하지만 후임으로 거론되는 인물중에서 현실 정치 역량과 개혁 실천 능력을 겸비한 리더를 찾기 어렵다는 게 고민이다. 니혼게이자이신문도 "총리 퇴임의 목적은 오자와 간사장을 새 체제의 중심에 두지 않겠다는 것"이라며 "그러나 새 대표가 그의 영향력을 제거할 수 있을지는 불확실하다"고 말했다. 

총리의 퇴임으로 일단 민주당 지지율은 회복세로 돌아설 발판을 마련했다는 게 지배적인 평가다. 하지만 내달로 예정된 참의원(상원) 선거에서 민주당이 안정 의석을 확보하지 못한다면 정국 혼란은 더욱 심화될 것으로 전망된다. 

 

2010년 06월 02일 (수) 17:47  서울경제

 

 

 

 

 

독도 공시지가 6.28%↑..10억원 넘었다

 

국토부 "관광객 늘고 경제적 가치 높아져" 

㎡당 최고 15만5천-최저 440원..350배 差 

(서울=연합뉴스) 강의영 기자 = 독도의 공시지가 총액이 10억원을 넘어섰다. 

30일 국토해양부가 발표한 전국의 개별 공시지가 자료에 따르면 경북 울릉군 울릉읍 독도리 1~96번지인 독도의 전체 공시지가는 올해 1월1일을 기준으로 10억898만원으로, 지난해(9억4천542만원)보다 6.28%(6천356만원)나 올랐다. 

전국 평균 공시지가 상승률(3.03%)과 비교하면 배 이상 뛴 것이다. 

국토부는 "일본의 도발로 사회적 관심이 높아졌고, 영유권 확보를 위해 정책적으로 입도 제한을 완화하면서 관광객이 증가했으며 독도 근해에서 메탄 하이드레이트가 발견돼 경제적 가치가 올라간 데 따른 것"이라고 설명했다. 

차세대 대체연료로 주목받는 메탄 하이드레이트는 메탄과 물이 해저나 빙하 아래에서 높은 압력에 의해 형성된 얼음 형태의 고체로, 한반도 해역에도 울릉도·독도 주변 등을 포함해 천연가스의 최소 20배 이상, 최대 수백배에 달하는 엄청난 양이 매장된 것으로 알려졌다. 

독도는 국유지로 매각·점용이 사실상 불가능하지만 `우리 땅'이라는 점을 강조하기 위해 상징적으로 2000년부터 개별지가를 조사해 공시해왔다. 

필지수는 2005년까지 독도리 1~37번지로 37필지였으나 물 위로 드러난 면적 1㎡ 이상의 돌섬까지 개별 지번을 부여해 2006년부터 지가 산정 대상이 1~96번지(101필지)로 확대됐고 면적도 18만7천554㎡로 이전보다 7천600여㎡나 늘었다. 

독도는 동도, 서도 등 91개의 섬으로 이뤄져 있으며 동도가 7만3천297㎡, 서도가 8만8천740㎡이고 부속 섬이 2만5천517㎡다. 

이에 따라 지가 총액도 2002년 2억6천292만원에서 2005년 2억7천296만원으로 늘어나는 데 그쳤던 것이 2006년 7억3천780만원으로 껑충 치솟았고 2008년 8억원, 지난해 9억원을 차례로 넘어선 데 이어 올해 10억원을 돌파했다. 

개별 공시지가가 가장 높은 곳은 접안시설과 경비대, 헬기장 등이 있는 독도리 27번지(1천945㎡) 등 9필지로 각각 ㎡당 15만5천원이며 가장 낮은 곳은 독도리 30번지의 임야(6만8천28㎡) 1필지로 ㎡당 440원이다. 같은 독도 내에서도 350배 이상의 가격 차이가 나는 셈이다. 

 

2010년 05월 30일 (일) 11:02  연합뉴스

 

 

 

 

 

하토야마 총리 "日, 진심으로 한국 지지할 것"

 

【제주=뉴시스】박정규 기자 = 하토야마 유키오(鳩山 由紀夫) 일본 총리는 29일 천안함 사태와 관련해 "일본은 진심으로 한국을 지지하겠다"고 말했다. 

하토야마 총리는 이날 제주 롯데호텔에서 제3차 한·일·중 정상회의에 앞서 이명박 대통령과 가진 한·일 단독 및 확대 정상회담에서 이 대통령에게 "한국의 천안함 사태에 대해 냉정하고도 훌륭한 지도력을 발휘하고 있는 데 대해서 경의를 표한다"며 이같이 밝혔다. 

하토야마 총리는 또 단독회담에 이어 열린 확대회담에서는 이날 오전 대전 현충원을 방문한 점을 언급하면서 "다시 한 번 46명의 희생자에 대해 애도의 뜻을 표하면서 일본 정부를 대표해서 애도의 말씀을 드린다"고 전했다. 

이와 함께 "아시아에서 일본과 한국 양국이 다양한 신뢰관계를 강화하는 것이 세계 평화와 공영에 이바지할 것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이에 이 대통령은 "하토야마 총리께서 우리 한국이 어려운 일을 당한 데 대해 아주 확고한 지지를 보내주시고, 오늘 아침 바쁜 가운데 그 곳(현충원)을 직접 찾아주셔서 고맙게 생각한다"고 감사의 뜻을 표했다. 

또 단독회담에 이은 확대회담에서 "하토야마 총리께서는 국내·외 매우 바쁜 가운데 한·일·중 회의에 참석차 제주를 찾아주셔서 매우 환영한다"며 "일본은 우리 한국이 이번 천안함 사태가 발생했을 때 세계 어느 나라보다 먼저 우리 한국 정부를 강력히 지지해주면서 대한민국 국민을 진정한 이웃으로서, 가까운 나라로 대해주셨다"고 말했다. 

이어 "앞으로 양국은 이러한 국내외 어려운 문제를 풀어나가는 가장 가까운 나라로서, 이후 강력한 경제를 위시한 여러 분야에서 협력을 강화하는 계기가 됐으면 좋겠다"고 밝혔다. 

이날 비공개로 진행된 단독·확대회담에서도 하토야마 총리는 다시 한 번 천안함 사태에 대한 협력의사를 표했다. 하토야마 총리는 최근 조총련계 재일동포 대북송금 제한조치 및 선박검색법 통과 등 일본의 독자적인 대북 제재조치에 대해 설명하면서 "일본은 국제공조에 있어 선도적 역할을 할 것이며, 유앤 안보리에서 한국의 입장에 적극 지지하겠다"고 말했다고 이동관 청와대 홍보수석은 전했다. 

이와 함께 양 정상은 한·일 자유무역협정(FTA) 협상에 대해서도 의견을 나눴다. 특히 이 대통령은 "한·일 FTA가 중장기적으로는 한·일 양국의 발전에 기여한다고 생각한다"며 한·일 FTA 협상을 가속화하는 것에 대해 긍정적인 의사를 밝혔다. 

이 수석은 "(이 대통령이) 한·일 FTA 협상 재개를 위한 실무협의의 격을 한 단계 높여 협상을 좀 더 가속화, 본격화하는 것이 좋겠다는 취지에 긍정적인 의사를 밝혔다"고 전했다. 

이와 함께 이 대통령은 한·일 FTA의 필요성에 대해 적극적으로 공감의 뜻을 나타내면서도, 삼성전자·LG전자·현대자동차 등이 일본의 비관세장벽과 관련해 최근 잇따라 일본에서 철수한 점을 지적하면서 "하토야마 총리 정부가 적극적으로 노력해달라"고 당부했다. 

이에 대해 하토야마 총리는 "앞으로 100년의 한·일 관계를 공고히 하기 위해서도 FTA 협정 체결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또 "새 정부에서 이같은 비관세장벽 해소를 위해 적극 노력하겠다"며 "이른바 일본의 배타적, 폐쇄적 유통구조 관행이 있다면 이것은 없어지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아울러 이날 양국 정상은 부품·소재분야 협력 확대 및 한·일 원자력협력 협정, 종합인증 우수업체 상호인정협정 조기체결을 위해 협력하자는 데 합의한 것으로 전해졌다. 또 한·일 부품·소재 조달공급 전시회 및 한·일 중소기업 CEO 포럼 등의 성공적 개최를 위한 협력에도 의견을 모았다. 

이와 함께 하토야마 총리는 이날 과거사와 관련해서도 "지난 100년의 과거사를 확실히 청산하기 위해 반성할 일은 반성하겠다"고 말한 것으로 전해졌다. 

이 수석은 "올해가 한·일 강제병합 100년이라는 점과 관련해 하토야마 총리가 이같이 발언했다"면서 "양 정상이 다같이 지난 100년의 역사를 청산하고 앞으로의 100년의 미래를 염두에 둔 미래지향적인 결실을 만들어내기 위해 노력하자는 데 의견을 모았다"고 밝혔다. 

한편, 이 대통령은 전날 청와대에서 가진 원자바오(溫家寶) 중국 총리와의 단독회담에서 당초 예정됐던 30분보다 1시간 이상 길어진 100분 가량 회담을 진행한 데 이어, 이날 하토야마 총리와도 단독회담이 당초 예정된 20분보다 30분 가량 길어지면서 총 95분 동안 단독 및 확대회담을 진행했다. 

이처럼 단독회담이 길어진 이유에 대해 이 수석은 "어제 원자바오 총리와의 양자회담 결과에 대해 상세히 설명했고, 그에 앞서 드미트리 메드베데프 러시아 대통령과의 통화내용에 대해서도 설명하다보니 시간이 많이 걸렸다"고 전했다. 

 

 
2010년 05월 29일 (토) 17:20  뉴시스
 
 
 
 
 

日 외상, 부산 의인 故 이수현씨 묘 참배

 

(부산=연합뉴스) 조정호 기자 = 오카다 가쓰야(岡田 克也) 일본 외무대신이 15일 오후 2시10분 부산시립공원묘지(영락공원)에 있는 고(故) 이수현씨 묘를 찾아 헌화하며 고인의 넋을 위로했다. 

이날 방한한 오카다 외무대신은 1박2일 일정으로 경북 경주에서 열리는 제4차 한.중.일 외교장관 회의에 참석하는 길에 의인 이수현씨 묘를 참배했다. 

영락공원에서 미리 기다리고 있던 이씨의 부모는 "아들이 세상을 떠난 지 10년이 됐는데 잊지 않고 찾아줘 감사하다."라고 말하자 오카다 외무대신은 "일본국민은 이수현씨를 영원히 잊지 않을 것"이라고 위로의 말을 전했다. 

이씨는 지난 2001년 일본 유학중 도쿄의 한 지하철 선로에 떨어진 취객을 구하고 숨졌다. 

오카다 외무대신은 이어 영락공원에 있는 태평양전쟁희생자 위령비를 찾아 헌화하고 경주로 향했다. 

 

2010년 05월 15일 (토) 14:51  연합뉴스

 

 

 

 

 

일본 ‘아이리스’ 인기추락 충격, 왜?

 

마이데일리 = 배국남 대중문화전문기자] *골든타임에 방송되는 '아이리스' 일본 시청률은 7%대, 실망스러운 시청률! 

많은 사람들의 기대를 모으며 엄청난 마케팅과 파격적인 골든타임 편성으로 방송 전부터 눈길을 끌었던 '아이리스'의 일본 TBS 방송에 대한 시청률이 7%대에 머무르는 등 기대 이하의 성적을 올려 큰 충격을 주고 있다. 

이병헌 김태희 정준호 김승우 김소연 탑 등 톱스타 그것도 일본에서 인기가 높은 이병헌이 주연을 맡은데다 200억원이라는 막대한 제작비, 일본 등에서의 촬영 등으로 '아이리스'는 일본에서 제작단계부터 많은 관심을 촉발시켰다. 그리고 방송전 이병헌 등 출연 스타들이 일본을 방문해 '아이리스'에 대한 드라마 홍보행사를 대대적으로 벌였다. 

무엇보다 '아이리스'는 외국 드라마로는 파격적이며 이례적으로 지상파 TV의 골든타임에 편성돼 시청자의 눈길을 끄는데 매우 유리한 분위기를 조성했다. 한류가 한창 상승했을 때에도 한국 드라마가 오후 9시대 지상파 TV 골든타임에 편성되는 것은 매우 힘들었는데 이런 상황에서 '아이리스'가 골든타임에 편성된만으로 큰 화제가 됐다. 

'아이리스'에 출연한 일본 연기자 유민은 "한국 드라마가 일본 주요 TV방송사의 골든타임에 편성된 것 자체가 신선한 충격일 정도로 '아이리스'에 대한 방송사의 관심은 지대했다"고 말했다. 

이런 우호적 분위기와 시청하기 좋은 방송시간대 편성으로 높은 시청률을 기록할 것으로 기대했던 '아이리스'는 그렇지 못했다. 1,2회가 연속으로 방송된 4월21일 방송 시청률은 10.1%로 두자리수를 기록했다. 하지만 4월 28일 방송분에선 8.8%로 한자리수 시청률로 떨어지더니 5월 5일 방송분에선 7.5%, 5월12일 방송분에선 7.9%를 기록했다. 방송전 기대했던 것에 비하면 초라한 시청률 성적이다. 

최근 한류를 취재하기위해 한국을 찾은 일본 아사히 신문 출판부 'AERA'키요히토 코키타 기자는 "일본에서 높은 인기를 얻고 있는 한류스타 이병헌 등이 출연하고 주요장면을 일본에서 촬영하고 골든타임에 편성된 점을 고려하면 한자리수 시청률은 기대이하의 낮은 반응이다"고 설명했다. 

왜 이처럼 '아이리스'가 일본에서 기대이하의 성적에 그치고 있는 것일까. 일본 J캐스트의 지난 6일자 보도 '이병헌으로도 시청률 실패'라는 기사에 따르면 "(아이리스)시청률 하락은 불순한 동기였기에 당연한 결과다"며 일본 TBS가 단순히 돈으로 드라마를 사 시청률을 올리고자 했던 동기 자체가 불순하다고 본 것이다. 

국내에서도 방송될때 '아이리스'는 볼거리에 치중해 이야기 구조나 완성도가 엉성하기 그지 없었고 현실성이나 개연성이 없는 드라마라고 비판을 받은 바 있다. 또한 이야기가 허술해 드라마의 전체적인 완성도도 떨어졌다.J캐스트가 "'아이리스'의 스토리에 대해서 이병헌과 정준호, 김태희의 3각 관계가 북한, 일본이 관련된 테러와 스파이 활동에 녹아 들지 않았다"고 비판한 맥락도 바로 '아이리스'의 네러티브의 문제점중 하나를 꼽은 것이다. 

볼거리가 화려한 드라마가 많은 일본에선 '아이리스'의 볼거리만으로 일본 시청자의 눈길을 끌수 없다는 점을 지적하는 전문가들이 많다. 독창적이고 완성도 높은 스토리를 바탕으로 탄탄하게 영상화 작업을 해야만 눈길을 끈다는 것이다. 또한 단순히 한류스타를 주연으로 내세웠다는 이유로 일본 시청자의 관심을 끈다는 것도 힘든 상황이 됐다. 

'아이리스'의 일본에서의 기대이하의 성적은 앞으로 우리 드라마가 해외에서 인기를 얻으려면 어떻게 해야하는지를 역설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2010년 05월 13일 (목) 10:28  마이데일리
 
 
 
 

법률용어로 `홈리스' 사용…결국 없던 일로

 

보건복지부 `부랑인ㆍ노숙인'을 대체어로 개정안 마련

(서울=연합뉴스) 김승욱 기자 = 사회복지사업법을 개정하면서 `홈리스'를 법률용어로 도입하려던 보건복지부가 한글단체 등의 반대로 결국 홈리스를 포기했다.

보건복지부는 홈리스 대신 부랑인과 노숙인을 하나로 묶은 `부랑인ㆍ노숙인'을 대체어로 채택한 사회복지사업법 개정안을 법제처에 제출해 심사를 통과했다고 5일 밝혔다.

복지부는 지난해 8월 `부랑인과 노숙인 이미지에 대한 부정적 인식을 없애고 이들을 상대로 한 서비스 제공을 전문화하려는 목적'이라며 사회복지사업법의 부랑인 또는 노숙인이라는 단어를 홈리스로 통합해 대체하는 개정안을 입법예고했다.

그러자 한글단체 등이 강력하게 반대하고 나섰다. 

부랑인과 노숙인이라는 단어의 부정적인 어감은 사회적 상황 때문에 생긴 것으로 호칭을 영어로 바꾼다고 이런 인식이 사라질 리 없다는 것이다. 

집을 뜻하는 명사 `홈(home)'과 없음을 의미하는 접미사 `리스(less)'가 결합한 홈리스를 생소하게 여기는 사람이 적지 않을 뿐 아니라, 형용사인 홈리스로 명사인 부랑인이나 노숙인을 대체하는 것이 문법에 어긋난다는 주장도 나왔다.

또 개정안이 통과되면 홈리스가 법률용어의 지위를 차지해 공식문서와 교과서 등에서 우리말을 대체하게 된다는 점도 심각하게 지적했다.

법제처도 외국어를 법률용어로 하는 것이 이 부처가 추진하는 `알기 쉬운 법령 만들기 사업'의 취지에 맞지 않고 다른 법률에 인용돼 널리 사용될 수 있어 신중하게 접근해야 한다는 견해를 밝혔다. 

여기에 누리꾼 사이에서 `영어 우월주의'를 꼬집는 목소리가 커지자 복지부는 법제처, 한글단체 등과 수차례 공청회를 연 끝에 결국 홈리스를 포기하기로 했다. 

복지부 관계자는 "반감이 너무 심해 `홈리스'는 사용할 수 없었고 한글단체가 추천한 `한둔인' 등 우리말도 생소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차선책으로 두 단어를 묶어 한 단어처럼 사용하기로 했다"고 밝혔다.

이 관계자는 "두 단어를 묶어 쓰다 보면 불편한 점이 많을 것"이라며 "더 시간을 두고 적합한 단어를 찾아 `부랑인ㆍ노숙인'을 대체할 필요가 있다"고 덧붙였다.

한글문화연대 정인환 사무국장은 "무엇보다 생소한 외국어에 법률용어의 지위를 내주지 않아 다행"이라며 "한글단체의 뜻을 받아들인 복지부에 감사한다"고 말했다.

`홈리스'를 `부랑인ㆍ노숙인'으로 바꾼 사회복지사업법 개정안은 13일 차관회의에 상정될 예정이다.
 
2010-05-05
 
 
 
 
 

“외계인 존재 가능성 높지만 그들과 접촉하려 하지 마라”

 

천체물리학자 스티븐 호킹 박사 위험성 경고 

"우리는 외계인과 얘기하려고 시도하지 않는 게 좋습니다. 그들은 너무나 위험합니다." 
세계적인 천체물리학자인 스티븐 호킹 박사(사진)가 외계인(생명체)이 존재할 가능성은 거의 확실하지만 그들과 접촉하려고 하지 않는 게 좋다고 경고했다. 

25일 영국 선데이타임스에 따르면 호킹 박사는 최근 제작 중인 한 다큐멘터리 프로그램을 통해 이같이 주장했다. 그는 "우주 곳곳에 생명체가 존재할 가능성이 매우 높다"며 "지구와 같은 행성에 존재하거나 별의 내부에 거주할 수 있고 우주 공간을 떠돌아다닐 가능성도 있다"고 주장했다. 

호킹 박사가 외계인의 존재를 믿는 이론적 근거는 간단하다. 우주에는 1000억개의 은하가 있으며 각각의 은하에는 또 수억개의 항성이 존재한다. 이런 우주 환경에서 오직 지구만이 유일하게 생명체가 존재하는 별일 가능성은 높지 않다는 것이다. 

호킹 박사는 "수많은 학자가 산술적으로 볼 때 외계인의 존재가 거의 확실한 것으로 보고 있다"면서 "우리의 진정한 과제는 외계인들이 어떤 형태로 존재하는가를 알아내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그러면서 외계인이 단세포 동물이나 미생물 형태로 존재할 수도 있음을 시사했다. 

외계 생명체 가운데는 지적인 존재가 상당수 있을 수 있으며 그들과 접촉하는 것은 지구를 끔찍한 위험에 빠뜨릴 수 있다고 호킹 박사는 경고했다. 그는 "외계인은 자신들의 별(거주지)에 있는 자원을 모두 소모한 뒤 지구의 자원을 약탈하기 위해 우리를 공격할 수 있다"면서 "그들은 정복할 별을 찾기 위해 우주를 떠돌고 있을지 모른다"고 주장했다. 그는 이 때문에 "우리가 외계인과 접촉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은 너무 위험한 일"이라고 덧붙였다. 

호킹 박사는 외계인과 지구인의 조우를 이탈리아의 탐험가 크리스토퍼 콜럼버스의 아메리카 대륙 발견에 비유하며 위험성을 경고했다. 그는 "외계인이 지구를 방문하는 것은 콜럼버스가 아메리카에 첫발을 내디딘 것과 비슷할 것"이라며 "결국 원주민(지구인)들에겐 이로울 게 없다"고 강조했다. 

 

2010년 04월 25일 (일) 19:11  세계일보

 

 

 

 

“일본군, 성 착취 뒤 위안부 결국 죽였을 것”

 

“일본군, 성 착취 뒤 위안부 결국 죽였을 것”
일제말 트럭군도 근무자 “위안부, 하루 10시간 15명 상대” 

“일본군 외출 때 콘돔 주며 출입 부추겨…90%가 한국처녀”
 
 
하니Only  
 
 
 
» 마쓰바라 씨가 직접 사용했던 위안소 출입증 사본. 오른쪽이 앞면, 왼쪽이 뒷면이다. 원본은 이쪽 링크(http://jpnews.kr/sub_read.html?uid=4576)에서 확인할 수 있다. ⓒJPNews/박철현
 
 
 
<한겨레>가 일본 뉴스 전문 포털사이트 <제이피뉴스>(JPnews.kr)와 제휴해 일본 소식을 전달합니다. 전여옥 의원과 ‘일본은 없다’ 재판을 벌여 지난 1월13일 2심에서 승소한 재일 언론인 유재순씨가 <제이피뉴스> 대표를 맡고 있습니다. <제이피뉴스>는 전 일본인 군속 마쓰바라 마사루(85)로부터 일제시기 종군위안부와 관련한 생생한 증언을 얻었습니다. 원문을 보시고자 하시는 분은 아래에 있는 바로가기를 누르시면 <제이피뉴스>의 해당 기사로 이동하실 수 있습니다.

▶ <제이피뉴스> 바로가기

 

 
 
» 마쓰바라 마시루 ⓒJPNews/야마모토히로키
 
 
 

 

 

일제 때 종군위안소가 일본군에 의해 직접 운영됐다는 증언이 일본인 군속에게서 나왔다. <제이피뉴스>는 23일 일제시대 때 트럭제도에서 근무했던 군속 마쓰바라 마사루(85)와의 인터뷰를 통해 당시 군 위안소 두곳을 두 군수부대에서 직접 관할했다고 보도했다. 지바현 아비코 시의 시민단체 ‘아비코 평화네트’ 회원인 그는 65년전인 1943년 11월부터 제국해군 제4함대 시설대대 군속(군무원)으로 대평양전쟁에 참전했었다.

 

마쓰바라는 그 증거로 당시 부대에서 발급한 출입증을 제시했다. “군 위안소 출입증”은 가로 5.8cm 세로 10.8cm 증명서로 ‘남국료출입증(南國寮出入証)’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는 것이다. 그는 당시 이 ‘남국료위안소’는 해군용이었으며, 이외에 육군이 이용하던 ‘남성료(南星寮)위안소’도 있었다고 증언했다.

 


마쓰바라는 특히 모든 위안부는 거짓광고에 속아서 왔다고 증언했다. 모집공고에 위안부 모집이라는 것은 없고 장교 메이드 구함 등의 거짓내용만 있었다는 것이다. 일본이 군 위안부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거나, 존재했더라도 민간이 운영한 공창제도라고 주장하는 상황에서, 이 증언은 종군위안부 문제에 대한 사과와 배상을 촉구하는 한일 평화단체들에 활동에 큰 보탬이 될 것으로 기대된다.

 

마쓰바라는 당시 트럭군도에는 평균 3만-4만명 가량의 육군과 해군이 주둔하고 있었으며, 육군과 해군이 각각 운용하던 두 군데의 위안소가 있었다고 증언했다. 위안부 규모는 한 군데에 50-60명씩 120명이었으나, 전쟁 말기로 가면서 각각 70명 수준으로 늘어났다고 한다.

 

그는 당시 위안부들이는 집단적으로 막사에서 생활하며 낮 12시부터 저녁 10시까지 근무했으며, 하루 12-15명의 군인들을 상대했다고 증언했다. 이들은 한달에 딱 한번 성병 검사를 할 때만 막사를 나올 수 있었다고 증언했다.

 

또 마쓰바라는 일본 군대가 모집한 위안부들을 돌려보낼 의도는 없었다고 증언했다. 위안소를 작전지역에 설치한 뒤 작전이 끝나 다른 지역으로 이동할 때, 부대만 옮기고 위안부들은 내팽개친 채 가버리기 때문이다. 트럭 군대에서도 말기에는 위안부들이 식량을 자급자족해야 하는 등 어려운 상황을 겪게 됐다고 고백한다.

 

마쓰바라는 평화운동을 해오면서 위안소 문제를 고백해야 한다고 판단하고 있었다고 고백한다. 하지만, 직접적 계기가 된 것은 지난 3월 아비코 시의회에서 “교과서에 종군위안부의 존재를 기재할 것을 요구한다”라는 내용이 담긴 의견서가 일본 지자체 가운데 처음으로 채택 된 것이었다고 한다. 그는 <제이피뉴스>와의 인터뷰에서 “지금 생각해보면 그녀들이 얼마나 두려웠을지…”라며 당시 종군위안부들에게 미안함 마음을 나타냈다.

 

 
 
» 마쓰바라 씨가 직접 그린 당시 트럭제도 일대. 그의 증언에 따르면 지도 오른편에 보이는 나쓰시마(夏島)라는 곳에 두 곳의 위안소가 있었다고 한다. ⓒJPNews
 
 
 

 

아래는 마쓰바라의 증언을 토대로 트럭 군도 종군위안소인 남국료위안소의 24시를 재구성한 것이다.

 

 

 

■ 위치

 

남태평양 트럭제도는 총 11개의 큰섬과 100여개의 무인도로 구성돼 있었다.

 

특히 제도의 오른쪽에 위치한 하루시마(春島), 나쓰시마(夏島), 아키시마(秋島), 후유시마(冬島)에는 군 부대와 그 부대를 위한 후방보급기지들이 들어서 있었는데, 두 개의 위안소는 후방보급기지들이 모여 있던 나쓰시마에 위치하고 있었다. 나쓰시마는 위안소 이외에도 유곽, 술집, 식당, 옷가게 등이 줄지어 늘어서 있었다.

 

 

 

■ 관할

 

이 두 위안소는 모두 군대가 관할했다. 이 가운데 남국료위안소는 내가 배속된 제4함대 시설부대인 하기와라 간이치 부대가 관할했다. 시설부대인 탓에 막사나 도로, 항만, 비행장 같은, 그러니까 토목건축들도 진행했지만, 위안소 관리업무도 진행했다.

 

 

 

 
 
» 마쓰바라 씨가 발급되었던 위안소 출입증. 1943년 11월에 발급되었다고 한다. ⓒJPNews/야마모토히로키
 
 
 

 

■ 위안소 건물과 위안부의 방

 

남국료, 남성료는 둘 다 길다란 단층짜리 막사 대여섯동이 죽 나열된 형태다. 1개 막사에는 보통 10개에서 12개 정도 방이 있는데, 위안소 주위에는 철책 같은 게 쳐져 있다. 정문에 가서 출입증을 보여주면 들어갈 수 있다. 외부에는 철책이 처져 있고, 경비원이 철책 주변을 계속 돌았다.

 

막사 1개 동 내부구조를 보면, 길다란 복도가 하나 있고, 그 복도를 따라 조그만 방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다. 각 방마다 몇호인지 적혀 있다. 복도 끝은 세면장과 화장실이 위치한다. 방 크기는 하나당 약 2평 정도이고, 왼쪽 구석에 매트리스 침대가 하나 있고 조그만 탁자가 하나 있다.

 

방문을 열고 들어가면 왼쪽 구석에 얇은 판이 놓여져 있고, 그 위에 매트리스가 깔려져 있다. 오른쪽 구석에는 위안부들이 자기 물건을 놔둘 수 있는 조그만 탁자가 있었고, 문 바로 옆에 경대가 있다.

 

 

 

■ 위안부

 

주로 18~25살 정도의 젊은 여성들로 위안부의 90%는 조선인, 10% 정도는 일본인이었다.

 

1943년 당시에는 두 위안소에 각 50~60명 정도씩 배채됐다. 하지만, 44년부터는 각각 70명 정도씩으로 늘어났다.

 

이들은 대부분 고급장교의 메이드(하녀)를 모집한다든가, 병원에서 사무볼 사람을 찾는다는 내용의 모집공고에 속아서 찾아온 이들이다. 게다가 월급이 당시로서는 아주 좋은 30엔, 숙박료도 식대도 필요없다고 하니까 다들 응모했다. 숙박료, 식대 다 무료니까 아, 이돈 모아서 고향에 부쳐주면 되겠다는 그런 마음을 가지고 응모하는 것이다.

 

 

 

■ 성적 착취

 

위안부들의 영업시간은 기본적으로 낮 12시부터 22시까지다. 22시에 일단 영업은 끝나는데, 일반 사병들은 18시까지만 이용할 수 있었다. 배를 타고 귀대해서 이것저것 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사관이나 장교, 군무원들은 22시까지 이용할 수 있었고, 또 자고가는 것도 허용이 됐다.

 

공휴일도 없었고, 한달에 한번씩 성병 검진이 있었다. 위안부 여성들은 이때만 영외로 나갈 수 있었다. 해군병원에서 검사를 받아야 했기 때문이다. 해군병원은 위안소에서 한 2km 정도 떨어져 있었는데, 트럭으로 가면 금방 가지만, 걸어서 갔다. 어차피 도망가지 못하니까, 천천히 걸어가면서 시원한 공기도 좀 쐬라는 것이었다. 위안부 여성들도 그 때 만큼은 파라솔도 펴고 오랜만에 바깥구경한다고 즐거워했다.

 

훈련이 없을 땐 군인 수가 늘어나고, 바다에 나가면 줄어들었지만, 평균적으로 한명의 위안부가 하루 14-15명 정도의 군인을 상대했다.

 

 

 

■ 군인 외출 때 의무적으로 콘돔 지급

 

위안소 앞은 언제나 길게 줄이 늘어서 있다. 남성료는 육군이 이용하고, 남국료는 해군이 이용했는데, 언제 출격할지 모르니까 그 전까지는 마음껏 즐겨라 그런 분위기가 있었다.

 

군인들은 주로 하루시마, 아키시마, 후유시마 등에 주둔했는데, 조그만 배를 이용해 자주 나쓰시마를 방문했다. 꼭 위안소가 아니더라도 여러 가지 시설이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군대에서는 군인들이 외출할 때 꼭 콘돔을 2개씩 의무적으로 지급했다. 마치 위안소에 가라고 장려하는 듯했다.

 

 

 

 
 
» 마쓰바라 씨가 직접 그린 위안소 평면도. 왼쪽에 요금이라고 적혀진 곳이 요금접수대이다. 군인, 군속들은 요금소 앞에서 길게 줄 섰다. 요금을 내면 방 번호표를 받고 오른쪽 복도를 지나 지정된 방으로 들어간다. 방은 다다미 4장 정도의 크기로 가재도구는 거의 없었다고 한다. 복도 끝에는 화장실이 있었다. ⓒJPNews/야마모토히로키
 
 
 

 

■ 군인들의 위안소 이용

 

군인들은 정문에 가서 출입증을 보여주고 들어간다. 입구에서 1엔의 이용요금을 내고 가장 먼저 방 번호표를 받는다. 그 번호표를 주는 곳이 요금소라는 곳이다. 그 번호표를 들고 해당 번호가 적힌 위안부의 방을 찾아간다.

 

 

 

■ 위안부의 운명

 

일본 군부는 위안부를 돌려보낼 생각이 없었다. 돌아가면 거짓말이 탄로나기 때문이다. 고향에 가면 모집공고가 거짓말인 것이 탄로난다.

 

육군의 경우를 보면 작전지역에 위안소를 만든다. 작전기간 중에 짬을 내서 위안소를 이용한요. 그런데 작전이 끝나 후퇴를 해야 할 때 데려가지 않는다. 위안소도 위안부도 버리고 간다. 군대만 다른 지역으로 간다. 위안부들은 아무것도 없는 폐허가 된 땅에서 비참하게 죽어가게 된다.

 

2010-04-24

 

 

 

 

LA 독도 광고, 부메랑이 되는가

 

로스앤젤레스 동부에서 대형 찜질방을 운영하는 한인 알렉스 조씨는 캘리포니아 60번 고속도로 변에 지난 1월15일부터 독도 사진과 함께 '독도는 한국 땅(Dokdo Island Belongs to KOREA)'이라는 대형 옥외 광고판을 제작해서 부착했다. 이에 대해서 로스앤젤레스 주재 일본 총영사관 측은 4월5일 광고주인 알렉스 씨에게 편지를 보내 일본 외무성의 견해라면서 '다케시마는 역사적 사실의 관점에서 국제법상 분명히 일본의 영토'라고 주장하면서 독도 광고를 떼라고 요구했다. 

이와 같은 사실이 알려지자, 한인 동포사회가 즉각 나섰다. '일본의 생떼 주장에 단호하게 대처한다'면서 일본 영사관 앞에서 규탄대회를 열기로 했다. 한국 정부도 나섰다. 로스앤젤레스 주재 한국 총영사관은 "독도 영유권을 훼손하려는 어떠한 도발에 대해서도 우리 정부는 강력하고 단호하게 대응해 나갈 것이다"라고 밝히면서 한인단체들과 협의해서 공동 대응하겠다고 했다. 

미국 정부, '한국의 독도 지배' 인정

   
ⓒ연합뉴스 재미동포가 캘리포니아에 세운 '독도는 한국 땅' 광고판. 

'독도'와 관련해 올 것이 왔다. 제3국에서 분쟁이 노골화되었고 일본과의 구체적인 전선이 생겼다. 독도가 우리 영토라는 것에 확신이 없어서 이를 두려워하는 것이 아니다. 미국에서 독도 관련 준비가 덜 된 상황인데 공개적인 분쟁을 벌이는 것은 결코 우리에게 득이 없기 때문이다. 그냥 가만히 있는 지금의 상황은 100% 우리의 것이다. 언급 자체가 우리에게는 결코 유리하지 않기 때문이다. 국제사회에서 미국 정부는 독도를 한국의 지배 아래 있는 섬으로 인정한다. 왜냐하면 현재 실질적으로 한국이 지배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미국에서 우리(한인들)가 해야 할 핵심 역할은 미국이 독도를 한국의 영토로 인정하도록 하는 것이다. 

2008년 7월 어느 날, 갑자기 워싱턴 의회도서관에서 독도를 분쟁지역으로 규정해 명칭을 바꾸겠다는 공고가 났다. 정부 관리가 독도 광고를 보고 그렇게 한 것이다. 문제는 쉽게 터졌는데 수습은 정말로 힘들었다. 눈을 씻고 찾아도 부근에 일본은 없었다. 당시 로스앤젤레스와 뉴욕에서는 연일 일본을 규탄하는 동포들의 목소리가 하늘을 찔렀고 일본 영사관 앞의 시위로 이어졌다. 한국에서는 독도수비대가 생겨났고 국회에서는 독도특별위원회가 조직됐다. 워싱턴 주재 일본 특파원들은 오히려 무슨 일이 왜 생겼는지 문의해 왔다. 정말로 어처구니없었다. 

미국에서 독도는 시민의 이슈가 아니고 외교 문제다. 광고로 미국 전역을 뒤덮어도 독도가 국내 시민 이슈로 변할 가능성은 전혀 없다. 한인동포는 한국인임이 분명하지만 동시에 미국 시민이다. 미국 정부가 시민의 요구를 무시하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독도를 시민의 사활적인(외교정책에 영향을 줄 정도의) 이슈로 볼 가능성은 전혀 없다. 2008년 독도 명칭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독도 이슈를 시민의 논리로 바꾼 것은 억지였다. "독도 문제가 터지니까 한인들이 일본의 침략주의 공포증 때문에 일을 못한다. 이렇기 때문에 지금 이 문제가 미국의 국익에 도움이 안 된다"라는 논리였다. 미국에서 분쟁에 이기려면 준비가 필요하다. 미국 정부가 한국의 지배로 인정하는 동안 오히려 우리가 조용히 준비를 철저히 해야 할 일이다. 광고가 무익한 것은 아니다. 다만, 목표를 이루기 위한 전략(순서)의 문제라는 것이다. 

로스앤젤레스 총영사관은 동포들과 협의해서 공동 대응하겠다고 했다. 민감한 문제다. 총영사관은 한국 정부기관이고 한인동포(단체)는 미국 시민이다. 다른 나라 정부가 미국 시민과 협력해서 미국의 외교정책과 관련한 의견을 낸다는 것은 진정 민감한 일이다. 무슨 일이든 행동을 취한다면 한인동포(한국계 미국 시민)들 스스로 판단하고 실행할 일이다. 냉정하게 대처해야 할 일이다. 이전과 다르게 이번에는 일본이 있다. 

 

2010년 04월 23일 (금) 10:33  시사IN

 

 

 

 

 

이보다 더 나쁠수 없는 美·日

 

[서울신문] │도쿄 이종락특파원│일본의 하토야마 유키오 총리 취임 이후 껄끄럽게 이어져온 미·일관계가 최악의 상황으로 빠져들었다.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이 13일 워싱턴에서 열린 핵안보 정상회의에서 하토야마 총리에게 후텐마 미군기지 이전과 관련해 "제대로 끝까지 실현될 수 있나."라고 힐난했다고 요미우리신문이 18일 보도했다. 

오바마 대통령은 이날 만찬장에서 가진 10여분간의 비공식 면담에서 하토야마 총리가 "후텐마 문제를 5월 말까지 결론 내리도록 노력하겠다."고 말하자 "당신은 (지난해 11월 미·일 정상회담에서) '나를 믿어달라.'라고 했다. 그러나 아무 것도 진행되지 않고 있다. 제대로 끝까지 실현될 수 있나."라며 극도의 불신감을 드러냈다는 것이다. 

오바마 대통령의 발언은 하토야마 총리가 지난해 11월 정상회담에서 후텐마 기지 문제에 대해 조기 해결을 약속해 놓고 하루 만에 일본 기자들에게 "백지상태에서 재검토"라고 말을 바꾼 것에 대한 불신감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미 행정부는 이때 이후 하토야마 총리를 "신뢰할 수 없는 사람"이라며 성토의 목소리를 높였다. 결국 오바마 대통령의 발언은 양 정상 간 신뢰관계가 전혀 없음을 나타낸 것으로, 향후 미국 정부가 하토야마 정권에 더욱 거리를 둘 것으로 예상된다. 

미·일 양국은 90년대 무역마찰을 겪으며 미 대통령이 일본 정부의 대응을 비판하며 양국 간 주장이 부딪친 적이 있다. 하지만 이번의 경우처럼 미 대통령이 일본 총리 개인에게 불신감을 직접 언급한 것은 지극히 이례적인 일이다. 외교가에서는 2001년 조지 W 부시 대통령이 소원한 관계였던 김대중 전 대통령과의 공식 기자회견장에서 "This man(이 사람)"이라고 칭한 것과 같은 외교적 참사에 해당한다고 보고 있다. 

미국은 이달 안에 예정돼 있던 커트 캠벨 차관보의 일본 방문도 보류한다고 일본정부에 17일 통보한 것으로 알려져 양국 간의 관계가 더욱 멀어질 전망이다. 

이에 따라 내각 지지율이 정권의 위험 수위인 20%대까지 추락한 하토야마 정권은 더욱 위기에 몰리게 됐다. 그동안 하토야마 총리의 거취 문제에 대해 비교적 담담했던 일본 언론들도 드러내놓고 '총리 교체론'까지 거론하며 유력한 후임자들을 언급하고 있는 형국이다. 

 

2010년 04월 19일 (월) 03:28  서울신문

 

 

 

 

 

日, 독도 주변 지질조사 중단 요구

 

(도쿄=연합뉴스) 이충원 특파원 = 후쿠야마 데쓰로(福山哲郞) 일본 외무성 부대신(차관격)은 16일 한국이 독도(일본명 다케시마) 주변 해역에서 지질조사를 시작한 것과 관련, 권철현 주일 한국대사에게 전화를 걸어 항의하고 즉시 중단하라고 요구했다. 

앞서 한국해양연구원 동해연구소는 내달 10일까지 독도 주변 해역의 지질구조와 암석의 특성에 관한 연구활동을 한다고 밝혔다. 

해양연구원은 이번 연구가 그동안 독도 육상부에 대해서는 지반안정성 조사와 분석이 이뤄졌지만 주변 해역과 관련해서는 연구 및 학술 자료가 거의 없는 데 따른 것이라고 설명했다. 

 

 
2010년 04월 16일 (금) 11:44  연합뉴스
 
 
 
 

日, LA서 "`독도는 한국땅' 광고 떼라" 생떼

 

(로스앤젤레스=연합뉴스) 최재석 특파원 = 미국 로스앤젤레스(LA) 일본총영사관 측이 LA 근처 고속도로변에 독도 홍보 대형광고를 게재한 재미 동포에게 최근 "다케시마(독도)는 일본의 영토"라는 내용의 항의편지를 보낸 것으로 확인됐다. 

일본총영사관은 이달 5일 자로 작성한 편지에서 일본 외무성의 견해라면서 "다케시마는 역사적 사실의 관점에서 국제법상 분명히 일본의 영토"라고 주장하면서 독도광고를 뗄 것을 요구했다. 

일본총영사관 측이 문제삼은 광고는 LA 동부에서 대형찜질방 '다이아몬드 스파'를 운영하는 알렉스 조(50) 대표가 60번 고속도로변에 지난 1월15일부터 3개월째 게재 중인 대형 옥외광고다. 

이 광고판에는 독도 사진과 함께 `독도는 한국 땅(Dokdo Island Belongs to KOREA)'이라는 문구가 크게 적혀 있다. 

후루사와 히로시 부총영사대리 명의로 된 이 편지는 "한국의 다케시마 점거는 국제법상 어떤 근거도 없는 불법점거며 이런 불법점거에 근거해 한국이 행하는 어떠한 조치도 법적인 정당성이 없다"고 주장했다. 

이어 "이 광고는 역사적, 법적인 관점에서 정확하지 않은 것"이라며 "이 광고를 뗄 것을 요구하며 만약 지금 그것이 어렵다면 앞으로라도 유사한 광고를 게재할 때 주의해줄 것을 강력히 촉구한다"고 적었다. 

조 씨는 11일 전화통화에서 "지난주 이 편지를 받고 너무 불쾌하고 당황스러웠으며 두렵기도 했다"면서 "일본의 주장을 반박하는 편지를 써놨는데 이를 보낼지 고민하고 있다."고 말했다. 

조 씨는 이어 "한 개인이 일본 정부를 상대로 싸우는 꼴이 돼 사실 두려운 마음도 있다"면서 "하지만 이달 중순 끝나는 독도광고를 5월 말까지 연장할 생각"이라고 밝혔다. 

일본총영사관 측은 이번 편지와 함께 '다케시마에 대한 10가지 현안'이라는 외무성 책자까지 동봉했다고 조 씨는 전했다. 

 

 
2010년 04월 12일 (월) 01:38  연합뉴스
 
 
 
 

日 '그많던 한국산 짝퉁 다 어디갔지?'

 

[머니투데이 전혜영기자][일본내 한국산 '짝퉁' 비중 5년만에 44.95%- > 6.8%로 급감] 

일본에서 소위 '짝퉁'이라 불리는 한국산 위조상품의 비중이 크게 줄어든 것으로 나타났다. 
불과 5년전만 해도 일본내 짝퉁은 두개 중 한개 꼴로 '메이드 인 코리아' 제품이었지만 지난해에는 열개 중 하나에도 못 미치는 수준으로 줄어들었다. 

관세청은 11일 지난해 일본 세관의 지적재산권 침해물품 적발실적을 분석한 결과, 한국에서 수출된 물품의 비중이 6.8%로 전년(12.4%)에 비해 절반 수준으로 감소했다고 밝혔다. 

이로써 한국은 비중 1위인 중국(86%)과 큰 격차를 보이며 2위를 기록했다. 홍콩(2%)과 필리핀(2%)이 한국의 뒤를 이었다. 

한국은 지난 2005년 이전까지 일본에서 지재권 침해물품 수출국 1위를 기록한 바 있다. 그러나 이후 관세청의 지속적인 위조상품 수출단속 노력으로 해마다 수치가 큰 폭으로 감소하고 있다. 

2005년(44.9%)과 2006년(44.5%)만 해도 일본 짝퉁 시장의 절반 가량을 차지해왔으나 2007년 20%대로 비중이 뚝 떨어진 후 2008년에는 10%대까지 내려왔고, 지난해 드디어 10% 미만으로 떨어졌다. 


 

관세청은 관계자는 "지재권 보호를 위해 2006년부터 주기적으로 전청 차원의 위조상품 특별단속을 실시하고 있다"며 "또 2008년 1월부터 한·중·일 세관간 실시하고 있는 '위조상품 적발정보 교환 프로젝트'(Fake Zero Project)에 따라 일본세관에서 적발된 정보를 입수, 수출단속에 활용하고 있다"고 말했다. 

관세청은 일본세관 적발건의 96.7%가 국제우편을 통해 반입된다는 점을 감안, 지난해 8월부터 국제우편물을 통해 반출되는 지재권 위반물품에 대해 민·관 합동 상시단속체제를 구축해 위조상품 선별검사를 강화해왔다. 

관세청 관계자는 "적발건수가 대폭 줄었지만 앞으로도 지속적으로 위조상품 단속을 강화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2010년 04월 11일 (일) 12:01  머니투데이

 

 

 

 

"한국기업은 연아型, 日기업은 마오型" - 매일경제신문

 

"한국기업은 연아型, 日기업은 마오型"  - 매일경제신문


후카가와 와세다대 교수 `세계화 파고속의 한ㆍ일경제` 강연 
 

 



 

 
 
   
 
'한국 기업은 글로벌시장 중시의 김연아형, 일본 기업은 고난도 기술에 도전하는 아사다 마오형.' 

후카가와 유키코 일본 와세다대 교수는 7일 서울 프라자호텔에서 '세계화 파고 속의 한국과 일본 경제'를 주제로 한 강연에서 한ㆍ일본 기업 간 차이를 양국 대표 선수들의 피겨스케이팅 스타일에 비유했다. 

그는 세계경제연구원 주최로 열린 이날 강연에서 "한국 기업은 김연아처럼 글로벌 모델을 잘 확립했지만 '기술 국가'라는 환상에 사로잡힌 일본은 아사다 마오처럼 지나치게 어려운 기술을 연마하는 데 너무 많은 시간과 비용을 쏟아부었다"고 지적했다. 

한국 기업은 기초연구에는 크게 투자하지 않고 이 부분에서는 일본의 도움을 받는다고 했다. 그후 해당 분야 글로벌 시장이 커지면 여기에 집중 투자하고 마케팅 활동을 강화해 매출과 수익을 단기간에 끌어올리고 있다는 것이다. 이에 비해 엔지니어 출신 사장이 많은 일본 기업은 기초연구에 집중 투자하고 어렵고 리스크가 큰 기술에 집착한다고 분석했다. 

오너 중심의 한국 기업과 전문경영인 중심의 일본 기업 간 차이도 설명했다. 

후카가와 교수는 "한국 기업은 오너의 강력한 리더십을 바탕으로 의사결정 속도가 일본 기업보다 훨씬 빨랐다"며 "외환위기 이후 재벌에 대한 비난 여론에 시달리면서 변화해 온 반면, 일본 대기업에는 관료주의가 뿌리내리면서 의사결정 속도가 느려지고 책임지는 사람이 거의 없다"고 꼬집었다. 오너의 책임경영과 스피드경영의 대표적 사례로 삼성전자의 반도체, LCD패널 투자를 들었다. 

일본 경제는 '넘버2 증후군'에 빠졌다는 의견도 내놓았다. 일본 기업들이 자국 내수시장이 충분히 크다고 생각하고 안주하는 바람에 국제 경쟁에서 실패하거나 뒤처진 반면, 내수시장이 좁은 한국은 외환위기를 겪으면서 해외시장 개척에 눈을 돌렸으며 이것이 오히려 한국에는 도움이 됐다고 설명했다. 일본의 정체가 장기간 지속되면서 일본은 더 이상 슈퍼파워가 아니라는 점도 분명히 했다. 

후쿠가와 교수는 중국이나 인도, 브라질 등 신흥국 시장의 구조 변화에 대해서도 설명했다. 신흥시장 소비자들은 소득 수준 증대로 고가 제품 구매를 늘리고 있으며 제품뿐 아니라 다양한 서비스에 대한 소비도 늘리고 있다고 소개했다. 

정보통신 발달로 산업화 모델도 바뀌고 있다는 견해도 피력했다. 과거에는 타사에 비해 상대적인 경쟁력을 갖추는 것이 중요했지만 이제는 네트워크나 서비스 융합ㆍ복합을 활용한 새로운 비즈니스 모델이 속속 등장하고 있다고 밝혔다. 시간이 갈수록 국가 단위에서 지역(도시) 단위 경제가 중요해진 점도 적시했다. 

후카가와 교수는 '도요타 리콜 사태'에 대한 견해를 묻자 "미ㆍ일관계 악화에 따른 희생양이 된 측면이 있다"며 "일본의 하토야마 정권 출범 이후 미군기지 문제 등과 맞물려 미국의 안보 로비스트들이 활동에 나섰고, 정치인들이 적극적으로 도요타의 실책을 확대 과장하고 있다"고 말했다. 
 
2010-04-08
 
 
 
 

국회, `日교과서 검정승인 취소 촉구결의안' 의결

 

(서울=연합뉴스) 김범현 기자 = 국회는 2일 본회의를 열어 일본의 초등교과서 독도 영유권 명기와 관련, `일본의 사회교과서 독도 영토표기 검정승인 취소 촉구 결의안'을 의결했다. 

국회는 결의안을 통해 "독도는 역사적, 지리적, 국제법적으로 명백하게 대한민국 고유 영토"라며 "일본 정부가 독도 영유권이 일본에 있음을 사회교과서에 기술 또는 표기한 행위는 영토주권을 침해하는 명백한 도발행위로, 엄중히 규탄하며 검정승인을 즉각 취소하라"고 촉구했다. 

국회는 "일본 정부의 검정승인은 국제법 질서에 위반되고 한.일 양국의 신뢰관계를 훼손할 뿐 아니라 동북아 및 국제사회의 근본질서마저 무너뜨리는 행위"라며 "일체의 역사왜곡 시도를 중단하라"고 강조했다. 

국회는 또한 "동아시아 평화와 공동번영에 대한 기대를 무너뜨릴 뿐 아니라 역사의 수레바퀴를 거꾸로 돌리려는 퇴행적 발상으로, 국제사회에서의 고립을 자초하는 행위"라고 비판하면서 일본 정부의 검정승인 취소를 위한 아시아 각국 및 유엔 등 국제사회의 동참을 호소했다. 

 

2010년 04월 02일 (금) 14:35  연합뉴스

 

 

 

 

한 "교과서에 대마도문제.日역사왜곡 기술"(종합)

 

당 "조용한외교 안돼, 주일대사 소환"..정부 "단호.차분한 대응"

(서울=연합뉴스) 정윤섭 기자 = 한나라당은 1일 일본 초등학교 교과서의 독도영유권 명기사태와 관련, 맞대응 차원에서 대마도 영유권 문제, 일본의 역사왜곡, 과거 왜구의 침탈 등을 우리 역사교과서에 기술하는 방안을 추진하기로 했다.

한나라당은 이날 국회에서 김성조 정책위의장, 유명환 외교통상부 장관 등이 참석한 가운데 열린 당정회의에서 이러한 내용을 외교통상부에 요구했다고 황진하 제2정조위원장이 전했다.

황 위원장은 국회 브리핑을 통해 "일본이 교과서에 왜곡된 역사를 기술하고 있는 만큼 이에 상응해 우리도 일본의 역사왜곡과 거짓 주장을 교과서에 기재해야 한다"며 "교육과학기술부와 협조해 구체적인 내용을 정리하기로 했다"고 밝혔다.

한나라당은 이날 회의에서 ▲일본이 왜곡된 역사를 가르치고 있다는 점 ▲과거 왜구의 한반도 침탈 ▲대마도 영유권 문제 ▲독도가 우리땅임을 입증하는 증거사료 등을 교과서에 반영해야 한다고 요구한 것으로 알려졌다.

또 독도의 실효적 지배를 강화하기 위해 ▲주거도서화 및 박물관 설치 ▲헬기장 확충 및 경비행장 착륙시설 설치 등 독도관광 활성화 ▲독도관련단체 지원확대 ▲독도의 모(母)섬이 울릉도라는 점에 대한 입증자료 강화 등을 요구했다.

한나라당은 또 일본의 하토야마 민주당 정부가 `아시아 중시, 과거사 반성'이라는 기존정책에서 역행하고 있다는 점을 지적해나가기로 했다. 

조해진 대변인도 국회 브리핑을 통해 "외교부의 대응은 일본의 독도 분쟁지역화 기도를 막는데 별 효과가 없었고 문제만 더 악화됐다는게 대다수 국민 생각"이라며 "적극적, 공세적 대응과 행동이 필요하다는게 당의 입장"이라고 밝혔다. 

조 대변인은 또 "일본이 도발할 때마다 군(軍) 독도주둔 등 다양한 조치를 실행에 옮기고, 독도.대마도문제, 일제침략을 교과서에 기술해 집중교육하는 방안을 검토해야 한다"며 "역사상 우리의 영유권적 지배가 거론된 대마도에 대해선 실증자료를 근거로 사실을 규명하고 이슈화하는 작업을 본격 전개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외교부는 관계부처와 협조해 반영할 내용은 최대한 반영하겠다면서도 `단호하고 차분하게 대처한다'는 기존 입장을 유지, 당과 온도차를 보였다.

유명환 장관은 "과거를 직시하면서 미래지향적 관계를 유지한다는 큰 틀을 유지하면서 독도영유권 침해 시도에 대해선 단호하고 차분하게 대처하겠다"고 말했다.

이에 앞서 당지도부는 최고위원회의와 당정회의에서 한일관계에 대한 정부의 `조용한 외교' 기조를 질타하면서 더이상 조용한 외교는 통용될 수 없는 만큼 독도문제에 대한 정부의 강력한 대응을 촉구했다.

정몽준 대표는 "외교부가 독도 실효적지배 조치를 강화하고 장기적으로 대응하겠다고 하지만 결과적으로 20여년간 아무것도 한 게 없다"며 "이제야말로 실효적 조치를 확대하는 구체적인 방안을 검토해야 한다"고 밝혔다.

김성조 정책위의장은 "외교부는 조용한 외교를 지향하고 있지만 이는 국민에게 설득력도 없어졌고, 조용한 외교는 더이상 통용될 수 없다"며 "필요하다면 권철현 주일대사를 소환하고, 한국에 있는 일본대사도 귀국시켜야 한다"고 말했다.

한편, 국회 교육과학기술위원회는 2일 전체회의를 열어 일본 정부의 초등교과서 독도영유권 명기를 철회하고 공식사과를 요구하는 내용의 결의안을 채택할 예정이다.
 
2010-04-01
 
 
 
 

日각료, 초등교과서 독도 검정 "문제없다"

 

(도쿄=연합뉴스) 이충원 특파원 = 일본 정부 주요 각료가 일본의 모든 초등학교 교과서에 '독도(일본명 다케시마)는 일본땅'이라고 기술토록 한 검정 결과에 대해 "아무런 문제도 없다"는 인식을 밝혔다고 마이니치신문이 31일 보도했다. 

이 신문에 따르면 히라노 히로후미(平野博文) 관방장관은 기자회견에서 30일 발표된 초등학교 교과서 검정결과에 대해 "일본의 생각의 근원에 있는 것을 정확히 기술한 것이기 때문에, 아무런 문제도 없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시게이에 도시노리(重家俊範) 주한 일본대사를 제외하고 일본 정부 인사가 이번 교과서 검정 결과와 관련해 견해를 밝힌 것은 히라노 관방장관이 처음이다. 

앞서 시게이에 대사는 30일 외교통상부에 초치됐을 때 "일본 정부로서는 독도 문제가 양국관계 전반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지 않도록 노력할 필요가 있다"며 "2010년이라는 의미 있는 해를 상호 협력해서 원만히 극복할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고 말했다. 

이 말은 한국 강제병합 100년을 맞아 독도 문제가 양국관계에 부정적인 영향을 주지 않도록 노력하겠다는 의미로 받아들여졌지만 일본 정부 대변인인 관방장관은 비슷한 시각에 자국 기자들 앞에서 '무슨 문제냐'고 맞받아친 셈이다. 

이에 대해 마이니치신문은 "후텐마 이전 문제 등 현안이 산적한 가운데 여당 안에도 찬반양론이 있는 교과서 문제를 깊이 살펴보지 않고, 자민당 정권의 방침을 담담하게 이어받은 인상"이라고 평했다. 

이 신문은 또 민주당이 2007년 '오키나와 집단자결' 문제와 관련해 일본군이 자결을 강요했다는 기술을 교과서에 다시 포함하라고 요구하는 등 교과서 우경화 경향에 대해 반대한 적이 있고, 연립여당 중 사민당도 이번 검정결과에 대해 반발하고 있는 만큼, 한국의 대응에 따라서는 검정의 방향성이 바뀔 가능성도 있다고 전했다. 

 

2010년 04월 01일 (목) 00:15  연합뉴스

 

 

 

 

안중근 의사 딸 수기 발굴, “고국에 돌아와도 의지하고 찾아갈 곳이 없었다”

 

 

독립운동가 가족의 삶은 고단했다. 안 의사의 딸 현생씨도 고단한 삶을 살았다. 의거 후 가족은 흩어져 중국과 러시아 일대를 떠돌아야 했다. 광복 후 고국에 돌아와서도 사정은 달라지지 않았다. 정부와 기관의 도움은 없었다. 뜻있는 사람들이 온정의 손을 내밀었지만 세상 눈이 어두워 사기를 당하곤 했다. 주변에는 안 의사를 이용하려는 자들이 끊이지 않았다. 

< 시사IN > 은 안중근 의사의 딸 현생씨의 수기를 공개한다. 수기는 안중근의사기념사업회(이사장 함세웅)에서 발굴했고, 국내 언론에 공개되기는 처음이다(수기 원문은 1956년 월간지 < 실화 > 4월호에 실렸고, < 시사IN > 은 가급적 당시 표기법을 살려 옮겨 실었다. < 실화 > 는 1953년 신태양사에서 창간한 문화·교양 등을 다룬 월간지다). 

안중근의사기념사업회 윤원일 사무총장은 "자신의 친일에 대한 참회는 빠졌지만 현생씨가 가족들의 삶을 직접 정리했다는 의미가 크다"라고 말했다. 안중근 연구가 신운용 박사는 "이 수기는 안중근 의사 가족이 안 의사 의거와 가족들을 이야기한 최초이자 유일한 자료다"라고 말했다. 

다음은 수기 전문 

혁명가 안중근 의사에 대해서는 지금까지 기사로 혹은 전기, 연극 등으로 적지 않게 소개되었으며 이와 같은 기사나 전기, 연극은 사실과 다소 어긋나는 점도 없지 않았다. 

그러나 지금까지 소개된 바와는 달리 안중근 의사의 딸인 안현생(安賢生) 여사의 이번 이 회고담은 새로운 사실을 허다히 밝힘으로써 독자 여러분에게 새로운 관심을 주리라고 믿는다. 원래 안중근 의사는 2남1녀를 두었다. 그러나 불행히도 안현생 여사의 맏동생은 어릴 때 세상을 떠났고, 그 다음에 태어난 장남 안준생(安俊生)씨는 피란 간 부산에서 온갖 고생 끝에 신병으로 타계했다. 그리하여 안중근 의사의 직계로는 안 여사 한 분만이 남고 그 밖에 안 의사의 질녀 안미생(安美生)·안련생(安蓮生)씨가 있다. (실화 편집부) 
 



 
ⓒ안중근의사 기념사업회 안중근 의사의 큰 딸 안현생씨. 

거사 후에 우리 가족이 더듬어온 길 

세상 떠나신 선친에 대해서 여러분이 쓰신 글들을 많이 보았습니다만 저 자신이 붓을 들기는 이것이 처음입니다. 이렇게 청을 받고 붓을 드니 하고 싶은 말도 많고 머리 위에 떠오르는 지난 일도 많습니다만 무엇으로부터 말을 시작해야 좋을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생각나는 대로 대충 적어보기로 하겠습니다. 선친이 돌아가신 것은 지금으로부터 46년 전 3월26일이었습니다. 

그때 제 나이 여덟 살이고 보니 큰 기억이라고는 있을 수 없었습니다만 자라면서 조모님을 비롯하여 여러 선생님으로부터 말씀을 들었습니다. 원래 저의 집 고향은 황해도였습니다만 조부모님 때부터 진남포(鎭南浦)에서 살았습니다. 선친께서는 일찍이 집을 떠나 망명길에 나섰고 숙부 한 분은 서울법정학교에 다녔고 한 분은 진남포에서 일찍이 선친이 창설한 학교 교원으로 있었습니다. 

이리하여 어머님과 어린 동생은 조모님과 함께 살고 있었습니다만 선친께서는 의거하신 해에 노령(露領·러시아 영토) '버그라니스'에 살림을 장만했으니 온 집안 식구더러 오시라고 편지를 보내왔습니다. 그러나 살림살이로 보든지 식구로 보든지 솔가할 수는 없었지요. 그래서 조모님 말씀이 비록 망명길을 떠나기는 했으나 가족이 그리울 것이며 그날그날이 적적할 테니 저의 어머님과 어린애들만이라도 보내는 것이 좋겠다고 하셨습니다. 그러시면서 장녀로 태어나 조모님의 지극한 귀여움을 받아오던 저까지 보내면 쓸쓸하셔서 견딜 수 없다고 저만은 조모님께 남게 되었습니다. 

 



 
1956년 월간 < 실화 > 4월호 표지 

이와 같은 조모님의 말씀대로 어머니는 어린 동생을 데리고 길을 떠났습니다. 딱딱한 사회적 환경과 딱딱한 집안 분위기에서 자란 어머니는 이때 처음으로 기차를 타시게 되었고 처음으로 얼굴을 가리고 다니던 장옷을 벗고 구두를 신었습니다. 이와 같이 여장(旅裝)을 꾸미시고 집을 떠나 기차가 장춘(長春·당시 新京)에 이르렀을 때 정거장에는 총을 메고 칼을 찬 헌병이나 경찰을 비롯하여 유달리 일반 사람이 흥성대고 있었답니다. 

그래서 처음 길 떠난 어머니도 의아스럽게 생각하였지만 주위 사람들도 저마다 의아스럽게 보고 있었는데 나중에 알고보니 이등박문(伊謄搏文)의 시체를 실은 기차가 마주 서 있었습니다. 

그러나 어머니는 이와 같은 중대한 사건이 일어난 줄도 모르고 하얼빈에 도착하여 선친이 연락하신 대로 그곳 김성백(金聖佰)씨 집을 찾아갔습니다. 한데 김성백씨를 비롯하여 집안사람들이 조금도 반가워하는 기색이 없을뿐더러 거의 무표정하게 아무런 말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아는 이라고는 한 분도 없는 하얼빈이라 어머니는 그래도 그 집에 들어갔습니다. 

그때 어머니는 그곳에 선친하고 함께 계시던 모씨가 들어오더니 선친께서 이등박문을 죽였다는 소식을 전함으로서 비로소 알게 되었습니다. 더구나 그분 말씀이 곧 일본 경찰이 잡으러 올 텐데 절대로 안중근의 아내라고 말해서는 안 된다고 주의를 주셨습니다. 그분 말대로 얼마 후 말소리 요란스럽게 일본 경찰이 와서는 어머니와 어린것을 잡아갔습니다. 

어머니로서는 객지에 나선 것도 이것이 처음이요 경찰서에 가보기도 처음이었습니다. 일본 경찰은 선친과 ×××씨의 사진을 내보이면서 잘 알지 않느냐 하고 묻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러나 순간 어머니는 선친의 사진을 '모르는 사람'이라고 하면서 한쪽에 밀어내고 모씨는 오빠 되는 분이라고 말하였습니다. 어머니가 이처럼 고집해도 이미 알아낸 일본 경찰은 "안중근의 아내인 줄 알고 있는데 왜 거짓말을 하는 거야" 하면서 욕설을 퍼부었습니다. 그러나 어머니가 끝내 부인하자 그들은 어머니와 어린 것을 유치장에 가두었습니다. 

평소 어떻게 생겼는지 생각조차 해본 일이 없는 어두컴컴한 유치장에서 어머니는 어린 동생보고 울라고 시켰습니다. 아마 그렇게 하면 시끄러워서라도 곧 내보내리라 믿었는지 모르지요. 그것은 어쨌든 어린 동생이 자꾸 울기만 하자 일본 경찰은 나오라고 하면서 다시 조사를 계속하는데 그때 어머니는 어린 동생보고 이젠 울지 말라고 하니 "엄마, 아까는 울라고 하더니 왜 이젠 울지 말라고 해요" 이렇게 말하였고 이것을 들은 일본 경찰은 또다시 욕설을 퍼부었답니다. 결국 어머니는 3일 동안 유치장 생활을 하시다가 나왔습니다. 어머니의 외로웠을 심정은 누구든 이해할 수 있는 일이지요. 그 후 선친이 의거하신 소식이 널리 알려지자 이곳저곳에 흩어졌던 여러분들이 하얼빈에 모이기 시작했고 그분들의 주선으로 선친이 마련하신 버그라니스에서 고독한 살림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李王의 밀사라고 모계(謀計)하는 일본 경찰 

한편 일본 경찰은 진남포 저희 집을 수색하고 서울에서 공부하시는 숙부도 조사하고 야단이었지요. 일이 이렇게 되니 저의 집안사람들이 국내에서 마음 편히 살수는 없는지라 조모님, 숙부님 모두 조국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낮에는 여관에 묵고 밤이면 걸어서 함경도-만주로 해서 노령인 버그라니스에 이르렀고 그곳에서 다시 동청철도(東淸鐵道) 연변에 있는 목릉에 집을 옮겼습니다. 그 후 한 사람 두 사람 숙부님의 가족도 한곳에 모이게 되었고 그리하여 그곳에서 우리 집안사람들이 살게 되었는데 그곳을 지나오고 지나가는 혁명가 분들은 꼭 들러서 위로해주곤 했습니다. 

한편 선친의 의거에 대해서 말하면 일찍이 의용군(義勇軍)을 조직하고 두만강에서 일본 사람과 접전(接戰)하시던 선친은 다시 해삼위(海蔘威·블라디보스토크)에서 동지들과 함께 의거할 계획을 세우고 있었습니다. 그리하여 이등박문이 온다는 소식을 듣자 구체적으로 준비하기 시작하였습니다. 동지의 한 분인 우덕순(禹德順)씨는 본래 은방을 한 경험이 있는지라 총알도 몸에 박히면 한층 괴로움을 당하도록 모가 나게 만들었다고 합니다. 그리하여 하얼빈까지의 지리를 따져 우덕순씨, 유동하(柳東夏)씨 그리고 선친 세 분이 세 곳에 대기하고 있었지요. 그러나 우덕순씨도 그와 같은 의거의 기회를 만나지 못했고 유동하씨도 그러했습니다. 그리하여 마지막 기회인 하얼빈에서 선친이 이등을 죽였지요. 

 



 
 

선친은 이등이 온다는 소식을 듣고 그와 같이 동지들과 계획을 세운 다음 소련에서 자라 소련말 중국말에 능통한 유동하씨와 함께 하얼빈에 도착해서는 위에서 말한 바 있는 김성백씨 집에 투숙하였습니다. 그리하여 20일 가까이 대기하고 계시다가 마침 10월26일! 그날이 왔습니다. 이등을 맞이하기 위해서 소련의 고관들도 많이 나왔고 경비도 준엄했습니다만 선친께서는 용의주도하게 이등 가까이까지 뚫고 들어가셨습니다. 그리하여 총을 뽑기 시작했는데 이에 앞서 해삼위에서 동지들과 약속하기를 이등에게는 총 세 발을 발사할 것, 그렇게 함으로서 절명(絶命)을 보장할 수 있으며 나머지 총탄도 주의해서 발사하되 소련 사람이 맞을 경우 국제적인 문제도 있으니 주위에 있는 일본 고관에게 발사하기로 했답니다. 

그래서 선친께서 이등을 향해 일 발을 발사했으나 워낙 군악(軍樂)소리가 요란스러웠기 때문에 주위 사람들은 총소리를 듣지 못했고 이 발을 발사하자 그때 비로소 주위 사람들이 총소리를 알아듣기는 했으나 순간 당황해서 어쩔 줄을 몰랐답니다. 삼 발을 발사하자 이등은 땅에 쓰러지고 선친은 계속해서 주위에 있는 일본 고관들에게 난사(亂射)하여 팔에 맞은 놈, 머리가 깨지는 놈이 속출했답니다. 이제 뜻했던 바 일에 성공하신 선친은 권총을 내던지고는 바로 그 장소에서 "대한민국 만세"를 힘 있게 외쳤지요. 이리하여 일본 경찰은 대한민국 만세를 외치는 선친을 마차에 실어 여순구(旅順口)에 이송하였습니다. 

취조가 시작되었으나 선친께서 자기의 일거일동을 명백히 하는지라 고문할 필요도 없었고 길게 조사할 것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의 모계(謀計)를 꾸미기 시작했습니다. 그것은 선친더러 목숨을 살려줄 테니 공판정에서 이왕(李王)의 명을 받고 이등을 죽였다고 진술할 것을 강요한 것입니다. 이때 선친께서는 "목숨을 아낄 내가 아니요, 그렇게 목숨을 아끼는 나라면 이런 중대한 일을 하지도 못했을 것이다" 이렇게 말씀하시면서 천부당만부당한 말을 그만두고 빨리 사형해 달라고 했습니다. 선친의 태도가 그와 같이 확고하니 일본 경찰도 그와 같은 그들의 계획을 단념하지 않을 수 없었지요. 

"나라를 찾거든 고국에 묻어달라!"고 유언 

그리고 일본 경찰도 선친께 대해서는 극진한 대우로서 음식은 요구하는 대로 제공했답니다. 의거하신 10월26일에서 사형당하시던 다음 해 3월26일까지의 만 5개월 동안 추운 형무소 생활을 계속하신 선친의 고생이야 이루 말할 수 없었겠지요. 

선친께서 사형언도를 받자 그때 서울에 와 있던 프랑스인 홍(洪) 신부님은 선친의 마지막 길에 '연미사'를 올리고 유언을 듣기 위해서 여순구로 왔습니다. 그러나 정식으로 주교(主敎)의 승낙을 얻을 수 없는 일이어서 홍 신부님은 주교에게 비밀에 부치고 개인적으로 그것을 행했기 때문에 나중에 신부 자격을 잃게 되었지요. 즉 홍 신부님은 선친을 위해서 희생된 것인데 그 후 홍 신부님은 비록 신부의 자격은 잃었어도 고국에 가서 그대로 신부의 복장을 하시고 아침저녁으로 기도를 계속했답니다. 

사형을 집행하기 전에 홍 신부님이 연미사를 올리고 마지막 유언을 들을 때에는 저의 숙부 두 분도 참석하였습니다. 선친의 유언은 간단했지요. "나라를 찾거든 나의 시체를 고국에 묻어달라"라는 한마디였습니다. 그들은 3월26일 오전 10시 정각에 정기장치로 사형을 집행했고 그때 숙부님 두 분이 일본 경찰에게 시체를 내달라고 요청하였습니다만 일본 경찰은 이를 거절하면서 숙부님을 밖으로 떠밀어냈습니다. 

 



 
 

숙부님 두 분은 워낙 어리신 때라 눈물이 앞을 가로막아 그대로 여관에 돌아가 밤새 붙잡고 울기만 했답니다. 아침에 배달되는 신문을 보고 선친을 ××에 매장한 것을 알게 되었지요. 한편 선친의 의거가 있기 전에 제정 러시아에서는 교포 7만명을 노령으로부터 퇴거(退去)하도록 명령을 내린 바 있었습니다. 그러나 선친의 의거가 있자 한국에 이와 같이 훌륭한 분도 있느냐고 하면서 퇴거명령을 철회했을 뿐만 아니라 좋은 땅을 제공하기까지 했답니다. 또한 저희들을 감격하게 한 것은 해마다 선친이 돌아가신 3월27일이면 중국 사람을 비롯한 외국 사람들까지도 그 묘지를 찾아주었다는 사실입니다. 일본 사람들도 그날이면 분향을 했습니다. 얼마 전 향항(香港.홍콩)을 거쳐 중국에서 돌아 온 사람이 전하는바 지금도 그 묘지를 찾아주는 사람이 많다고 합니다. 

8·15 해방이 되면서 선친의 유언대로 고국에 모시려고 했습니다만 국제정세가 미료했던 관계로 뜻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셋째 숙부님은 일찍이 중국에서 세상을 떠나시고 둘째 숙부님은 "형님이 그렇게 유언하셨는데 어찌 나만이 고국으로 돌아갈 수 있느냐"라고 하시면서 고국에 돌아올 것을 거부하고 국제정세가 좋아지면 선친의 유언대로 선친을 모시고 고국에 돌아가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후 공산당이 정권을 잡게 되었고 숙부님은 상해와 대만을 오고가고 하시다가 중국에서 세상을 떠났습니다. 

한편 제가 고국으로 돌아온 것은 해방된 다음해 11월11일이었습니다. 이렇게 늦게 돌아오게 된 것은 물론 선친을 모셔야 한다는 데도 이유가 있었지만 다른 돌발사건이 하나 있었습니다. 그것은 해방 당시 중국 상해에 우리 교포 몇 천명이 살고 있었는데 주인(남편)이 한교민단(韓僑民團) 단장으로서 일을 보아오다가 그해 12월4일 나쁜 사람들로부터 저격을 당해 세상을 떠나게 된 불행한 사실이었습니다. 그리하여 저는 주인의 유골을 모시고 돌아와야 하였기 때문에 그처럼 늦게 돌아오게 되었지요. 

 



 
 

두 딸과 함께 고국에 돌아온 저는 당장 의지하고 찾아갈 곳이 없었습니다. 오직 있다면 제가 어릴 때 약 4년간 불란서 '까이리' 수녀님과 지낸 일이 있어 그 계통을 찾는 일이었습니다. 그리하여 명동 성모병원으로 갔더니 마침 정(鄭)의례시나 수녀님이 저를 알아보고 고맙게 대해주셨습니다. 수녀님은 추운 날씨라 제 손을 잡고 자기 입김을 불어주시면서 방으로 안내하였습니다. 그곳에 우선 짐을 맡겨두었지요. 상해에 있을 때 듣기에 입을 옷이며 가구가 귀하다고 하기에 중요한 것만 꾸려 가족 가방 다섯 개와 보통 짐 다섯 개로 만들어 수녀님 댁에 보관시킨 거지요. 

조국을 찾은 첫날에 당한 지능적 사기! 

한데 고국에 돌아오자 또다시 예기치 않았던 불행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제가 상해를 떠날 때 저와 딸 둘로 여자들만이라 이웃사람의 소개로 어떤 청년과 같이 오게 되었습니다. 그 청년은 짐을 꾸릴 때에도 거들어준다고 하면서 어느 속에 무엇이 들고 어느 속에는 어떠한 것이 들어 있다는 것을 저만큼 알고 있었지요. 그리하여 함께 돌아와 성모병원까지도 같이 왔었고 저는 짐을 그곳에 맡겨두고는 아는 사람들을 찾기 위해서 밖으로 나왔지요. 

다음 날 옷을 갈아입기 위해서 수녀님을 찾고 그 뜻을 말했더니 짐을 둔 방문을 열어주셨습니다. 한데 가방 다섯 개가 눈에 띄지 않기에 제 생각으로는 수녀님께서도 가방 다섯 개만은 중요한 것이 들었으리라 믿고 자기 방에다 따로 보관했으리라 믿었지요. 그래서 "수녀님, 가방은 방에다 보관하셨군요"라고 한마디 하자 순간 수녀님은 매우 당황한 표정이 되어 잠시 말이 없었습니다. 다음 순간 말씀하기를 전날 저와 그 청년이 나간 지 한 시간 후 청년은 다시 돌아와서 지금 호텔 방을 하나 얻고 당분간 그곳에 투숙하기로 되었기 때문에 제가 시켜서 왔다고 하면서 가방 다섯 개를 갖고 갔다는 것입니다. 

 



 
 

실로 어쩔 줄을 몰랐습니다. 수중에 돈은 없고 이제 입을 옷까지 잃었으니 앞으로 어떻게 하나 생각해봐야 도리가 없었습니다. 그 청년은 처음부터 계획적으로 한 일이라 다시 찾을 수도 없으리라 단념하고 우리 세 모녀는 막연한 생각에 사로잡혀 있었지요. 한데 고마웠던 것은 이(李) 신부님이 신학교 기숙사 방 하나를 빌려주셨습니다. 비록 다다미방이기는 했으나 의지할 곳 없는 우리 모녀에는 사랑스러운 보금자리였지요. 

이제 방은 얻었으나 먹을 것이 문제였습니다. 그래서 하루는 정의례시나 수녀님의 소개로 금강전구주식회사 사장인 박정근(朴定根)씨를 방문하고 그곳에서 생산되는 전구로 장사를 하기로 했습니다. 이와 같이 장사하기로 이야기는 됐습니다만 우선 전구를 100개 받아오려면 낡은 전구 100개를 가지고 가야 하는데 제 주위에서는 그것을 구할 도리가 없었지요. 

이것 역시 교회 안에서 모아가지고 전구를 받아서 팔기 시작했습니다. 이집 저집, 이 가게 저 가게 찾아다녔지만 그리 잘 팔리는 장사도 못될뿐더러 아는 사람을 만날까봐 퍽 어색했습니다. 그러나 하루 이틀이 지나면서 다소 익숙해지기도 했고 밥 세끼를 먹을 만한 최소 한도의 수입은 있었습니다. 전구 하나를 팔면 20전이 이익으로 남았고 그리하여 하루 이삼백원 수입으로 세 식구는 그날그날을 보냈지요. 그러나 전구가 제대로 생산되면 100개건 200개건 받을 수 있었으나 생산이 제대로 되지 못할 때에는 최소한의 수입마저 끊어지는 날도 있었습니다. 더구나 전구를 잘못 받아 오면 몇 개씩 손해를 보게 되는지라 공장에서 하나하나 시험을 해가면서 100개 200개를 받는 수고는 그때가 추운 겨울이라 이루 말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최소한의 생활도 다시 풍파를 만나게 되었으니, 그것은 학교에서 기숙사를 수리하여 학교에서 써야 하는지라 저와 같이 방을 얻어 쓰고 있던 몇 사람은 부득이 방을 비워야 했습니다. 이와 같이 방은 꼭 비워드려야 했으나 우리 세 모녀는 당장에 갈 곳이 없었지요. 그래서 저는 며칠을 두고 생각했답니다. 누구를 찾아가면 꼭 도움을 받을 수 있을까? 하고 이 사람 저 사람을 머리 위에 그려보면서 하나하나 판단을 내렸지요. 

그러던 끝에 선친을 잘 아시고 저와도 중국에서 학교 시절 가까이 지냈던 주모씨를 방문하고 사정 이야기를 했더니 그분이 그때 돈으로 적지 않게 주셨습니다. 그래서 우선 안국동에 방 하나를 얻고 나머지 돈을 밑천으로 해서 우리 모녀의 살림을 확립하기로 했습니다. 그리하여 김모씨의 말이 된장, 간장을 받아서 군부에 납품하면 생활은 유지할 수 있다기에 그 사람 말대로 안국동에 '안생공사(安生公司)'라는 간판을 걸고 그 사람과 함께 장사를 시작했습니다. 

 



 
ⓒ안중근 의사 기념사업회 의거 직후 중국 뤼순 감옥의 안중근 의사(맨 왼쪽). 의거 다음날 1909년 10월27일 블라디보스토크 총영사관에서 찍은 안 의사 부인 김아려 여사와 아들 분도, 준생(오른쪽 위). 안 의사의 둘째 아들 준생, 동생 정근, 정근의 아들 원생, 안의사의 딸 현생, 동생 공근의 아들 우생. 

또다시 사기당하는 온정의 거금 

그것이 1947년 7월이었습니다. 한데 그 김모씨는 장사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고국 사정에 어두운 저를 속이고 장사밑천으로 고스란히 사복을 채웠지요. 속았다는 괘씸한 생각은 물론이거니와 주씨로부터 얻은 그 적지 않은 돈을 이렇게 헛되게 없애버린 미안스러운 생각이 앞서 몹시 괴로웠습니다. 이제 또다시 생활이 곤란한 데다가 방세도 다시 내야 할 텐데 제 힘으로는 도저히 감당할 수가 없었습니다. 

또다시 어는 누구를 찾아 동정을 바랄 생각은 없었습니다. 그래서 우울히 지내는 어느 날 저의 사정을 잘 아는 신모씨가 퍽 동정하시면서 8군단에서 지은 후생주택 하나를 주선하여 주셨습니다. 그것이 지금 살고 있는 집이지요. 서울시에 가서 집 열쇠를 받아들고 우리 세 모녀는 너무도 기뻐서 손을 마주잡고 눈물을 흘렸습니다. 이제 좋든 나쁘든 집은 장만이 되고 남은 것은 먹고살아 나갈 생활방도였습니다. 

그 당시 저는 인사를 드리기 위해서 민정장관(民政長官) 안재홍씨도 방문하고 경무부장 조병옥씨도 방문하였던바 조병옥씨 말씀이 모자 무두 경무부에 나와서 일을 하면 어떠냐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주위 사람들의 만류도 있고 해서 양자로 있는 사람을 경위(警衛)로 취직시켰습니다. 다만 이러니 저러니 해서 두 달인가 석 달 후에야 비로소 발령을 받았지요. 

근무는 인천이라 추운 겨울날 북아현동 산 밑에서 새벽 일찍이 출근하여 밤늦게야 돌아오고 그렇게 지내다가 마침내는 폐가 나빠서 신음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래도 그 수입으로 근근이 살아오기는 했으나 여순반란사건 때 전투대에 참가하여 부상을 입고는 병상에 눕게 되었지요. 이래서 생활은 이루 말할 수 없을 만큼 참혹했습니다. 장(張) 여사가 때때로 쌀을 갖다 주셨고 찬값도 이삼천원씩 주셨습니다. 

그러다가 그때 신한공사(新韓公司) 총재로 계시던 C씨가 영등포에 있는 땅 천평을 주셨습니다. 그래서 그곳에서 돼지를 치고 집에서는 닭을 쳤습니다. 이것이 6.25 직전까지 돼지 서른다섯 마리, 닭 백 마리가량으로 늘었습니다. 6·25동란을 맞이하여 양자 되는 사람이 경찰이라 해서 영등포에 있는 돼지는 그들이 죄다 가져갔습니다. 

집에 있던 닭은 파편을 맞아 죽기도하고 나머지는 생활이 궁할 때라 잡아먹기도 하고 이러하여 모두 없어졌지요. 6·25 때 공산당 사람들이 여러 차례 찾아오기는 했으나 양자는 병으로 누워 있고 집안 살림도 말씀이 아닌지라 별반 해롭게 굴지는 않았습니다. 더구나 9.28수복 때 제가 살고 있는 북아현동이 최전선이 되어 이웃집들은 적지 않게 피해를 입었습니다만 저희 집 장독대와 우물에는 파편 하나 떨어지지 않았습니다. 

1·4후퇴 때 양자는 끝내 세상을 떠나고 저와 딸 둘은 대구에 내려가 저는 천주교에서 세운 효성여자대학에서 불문학을 가르쳤습니다. 대구시장께서 쌀 배급을 주셔서 그럭저럭 생활은 유지되었고 큰딸은 육군중령으로 있는 지금의 사위와 결혼을 하였지요. 제가 효성대학에 나가다가 하루는 얼음판에서 넘어져 절골을 당하고 그때 혈압이 230으로 고혈압에 몹시 신음한 바 있었는데 지금도 그 병세 때문에 적지 않은 괴로움에 잠겨 있습니다. 

이렇게 모진 고생을 하면서도 저는 늘 선친의 교훈을 잊지 않습니다. 고생하고는 모진 고생이기도 하지만 선친에 비한다면 이것이 무슨 고생이 될까 자탄하면서 지내왔습니다. 서울로 돌아올 때에는 그곳 학생들이 모아둔 고마운 전별금도 있었고 그리하여 다시 옛집으로 들어왔습니다. 

안중근 의사를 역이용하는 사람들? 

생활은 사위 몫으로 배급 나오는 쌀로 그럭저럭 유지해왔고 해가고 있습니다. 둘째딸은 리더스다이제스트 사에 근무하여 집안 살림도 조금씩 도우면서 저금을 계속해오다가 이제 시집갈 나이가 되었으나 좀 더 공부를 해야 한다고 지난 1월20일 로스앤젤레스로 떠났습니다. 

서울에 돌아왔어도 생활 때문에 네다섯 명의 개인교수도 했으나 혈압이 자꾸 높아가고 그래서 그것도 그만두었지요. 다만 집주위에 꽃을 재배하는 것을 일삼고 그날그날을 보내왔습니다. 앞으로 저의 오직 하나 큰 희망은 선친의 유언대로 선친을 고국으로 모셔오는 일입니다. 그러나 지금의 이와 같은 국제정세에서는 당분간 어려우리라 생각되어 퍽 마음이 괴롭습니다. 

또한 제가 불쾌하게 생각하는 것은 선친의 이름을 이용하는 사람들입니다. "나는 안중근 의사의 어떻게 되는 사람이요" 하면서 이곳저곳을 찾아다니며 불미한 일을 하고 있다는 풍문을 허다히 듣고 있습니다. 풍문만이 아리나 실제 만나본 일도 있습니다. 

지난번에 '안희자'라는 여성이 저를 찾아와서는 언니라고 하면서 자기도 선친의 따님이라고 해요. 그래 세상에 이런 일이 어디 있습니까! 저는 하도 어처구니가 없어서 딸은 저 혼자뿐이라고 간단히 대답해 주었지요. 그랬더니 그 사람 말이 자기는 어릴 때부터 홀로 객지에 나왔기 때문에 기억이 확실치는 않으나 그렇다면 질녀가 되는지도 모른다고 엉뚱한 말을 하지 않아요. 그래 질녀가 있기는 해도 이미 세상 사람들이 아시는 바와 같이 안미생, 안련생 두 사람밖에 없어요. 

또 자기가 일본에서 자랐다고 하기에 그럼 일본 어디서 자랐느냐고 물었더니 기억할 수 없다고 대답해요. 우리 집안사람은 일본에 갈 리도 없고 갈 수도 없다는 것은 누구든 이해할 수 있는 일이에요. 저는 길게 말할 흥미조차 없어 저를 찾아온 목적이 뭐냐고 했더니 태연스럽게도 다음과 같이 말하는 거예요. 지금 땅도 얻게 되고 그리하여 학교를 짓고 저를 교장으로 모시겠는데 다만 필요한 것은 자기가 선친의 따님 혹은 질녀가 된다는 것을 증명해달라고 하지 않아요. 세상이 혼란하기로서니 이런 일이야 어찌 꾸며질 수 있겠습니까. 저는 다시는 찾아오지도 말라고 하면서 돌려보냈지요. 

평소 하고 싶은 말도 많았고 느낀 바도 않았던지라 두서없는 말 길게 늘어놓은 것 같습니다. 저는 하루바삐 선친을 고국에 모실 수 있는 그날이 돌아오기를 빌면서 끝을 맺습니다. 

 

 
2010년 03월 26일 (금) 10:32  시사IN
 
 
 
 

 

[한국, 일본 전철 밟나](3)불안이 불안을 낳는 사회

 

"취직이 이렇게 힘든 줄 몰랐어요." 
일본 명문사립 와세다대 4학년생인 가네야마(22·가명)는 지난해 대형 상사와 금융기관 등 20여곳에 지원서를 냈지만 모두 낙방했다. 일부 회사에서는 "신규채용 계획이 연기됐다"며 면접 일정을 취소한다는 연락이 왔다. 중소기업의 문도 두드려봤지만 '불황'이어서 뽑지 않는다는 소식만 들렸다. 당분간은 아르바이트를 하며 일자리를 다시 찾아볼 생각이지만 답답함은 감출 수 없다. 

불안한 개인과 꿈을 잃은 젊은이는 2010년 일본을 상징하는 풍경이다. 앞은 막막하고 미래도 보이지 않는다. 전체 실업률의 두 배에 이르는 청년 실업과 갈수록 확대되는 격차, 성장이 멈춰버린 현실 앞에서 갈 곳을 잃고 있다. 경기침체가 지속되는 가운데 하루 벌이로 먹고사는 '프리터', 직장 잡기를 포기한 '니트족'의 증가는 잠재적 사회 불안요소로 떠오르고 있다. 경제성장기 일본을 이끌었던 자부심은 온데간데 없고, 벌써부터 저출산·고령화에 따른 장래의 부담을 걱정해야 하는 처지로 전락했다. 

자산운용회사인 피델리티투신이 지난 1월 대학생 2200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65%는 '장래에 꿈이나 희망을 가질 수 없다고 느낀다'고 밝혔다. 고용 불안이 지속되고 소득이 늘지 않아 윤택한 삶을 기대하기 힘들기 때문이라는 이유다. 

꽁꽁 얼어붙은 고용시장의 상황은 젊은이들에게 좌절을 안겨주고 있다. 거품 붕괴의 악몽에서 벗어나 경제가 회복세를 보였던 3~4년 전만 해도 졸업 전 기업들이 인재를 입도선매하는 '나이테이(內定)'가 1990년대 이후 다시 등장하면서 편안히 직장을 잡는 대학생들이 상당수였지만 곧 옛얘기가 돼버렸다. 

지난해 말 가와바타 다쓰오 문부과학상은 게이단렌(한국의 전경련에 해당) 간부들에게 "1990년대 취업 빙하기보다 더 힘든 상황"이라며 채용을 늘려달라고 호소했다. 하지만 기업체들은 불황으로 30~50%가량 채용을 줄일 판이다. 내년에도 사정은 비슷하다. 지난 22일 교도통신에 따르면 내년에도 주요 대기업 109곳 중 61%가 "신규 채용을 줄이거나 동결하겠다"는 방침인 것으로 조사됐다. 도쿄 마치다에 있는 오비린대의 취업담당 직원은 "기업의 채용이 줄어드는 상황에서 학교도 도리가 없다"며 고충을 토로했다.

후생노동성에 따르면 올 봄 대졸예정자의 취업내정률은 80%. 2008년 90% 수준에 비해 10%포인트나 떨어졌다. 후생성 통계에 따르면 지난 2월1일 현재 대졸예정자 40만5000여명 중 직장을 구한 사람은 32만5000여명에 그쳤다. 

일본에서 15~24세 청년의 실업률은 전체 실업률의 2배에 달한다. 1990년 4.3%에서 2004년에는 10.1%로 갑절 이상 뛰었다. 1993년 101만명이던 '프리터'도 2003년 208만명을 기록한 이후 떨어질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다. 

저출산·고령화 현상도 개인의 불안을 증폭시키는 요인이다. 사회비용 증가와 가계수지 악화, 성장률 저하 등 구조적 문제는 불안 탈출의 실마리조차 찾지 못하게 만들고 있다. "단순한 사회문제를 넘어 근본 해결책을 가로막는 위험요인"(내각부 관계자)이란 진단이 나오는 배경이다. 

후생성 추산에 따르면 출생률이 2008년 수준(1.37)보다 다소 높아지더라도(1.55) 생산활동인구(15~64세)는 2005년 8552만명에서 2030년 6740만명으로 크게 떨어진다. 반면 65세 이상 고령자는 2576만명에서 3667만명으로 증가한다. 민주당 정권은 저출산 대책으로 월 2만6000엔의 아동수당을 지급하기로 했지만 효과를 거둘지는 의문이다. 경제적 이유에 따른 만혼(晩婚), 비혼(非婚) 추세가 갈수록 진전되고 있어 적절한 치유책이 되기 어렵다는 목소리가 높다. 

문제 해결을 위한 정책의 효율성이나 일관성도 떨어진다. 정부는 일부 시민단체가 실시하는 저소득층 지원사업에 대해 예산을 삭감하거나 폐지했다. '니트족' 지원을 위한 '자립학원'의 경우, "취업률이 낮다"는 이유로 정부가 지원 예산을 없애기로 했다. 지바현지원단체 '뉴스타트'에 입소한 스에마사(21)는 "조금씩 사회인으로서 공헌하고 싶다. 직업훈련이 끝나는 대로 취직하라면 (훈련을) 계속할 수 없다"며 정부의 결정에 불만을 나타냈다. 

 

2010-03-22

 

 

 

 

 

한일 노인장기요양보험 법과 제도, 무엇이 다른가

 

【서울=뉴시스】강경지 기자 = '한일 노인장기요양보험 법·제도 비교 토론회'가 16일 국회 헌정기념관 대강당에서 열린다. 

(사)보건복지자원연구원(이사장 백도명)이 프리드리히에버트재단 한국사무소와 한나라당 신상진, 민주당 최영희, 민주노동당 곽정숙, 진보신당 조승수 의원의 지원을 받아 연구한 결과를 발표하는 자리다. 

발제자로 나선 임정기 교수(용인대 노인복지학)는 "한일 양국이 노인요양 복지서비스가 시장화된 것은 틀림없지만 일본에서는 일정한 사회적 규제를 통해 서비스기관의 난립과 서비스 질 저하 같은 시장화의 폐해를 막고 있다. 또 정부의 직접 개입을 통해 요양보호사의 노동조건 개선을 꾀하고 있다는 점에서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밝혔다. 

최경숙 보건복지자원연구원 상임이사는 발제문에서 "한국 노인요양보험 제도의 핵심문제는 교육기관 및 서비스기관의 설립을 규제없이 시장에 전적으로 맡기는 바람에 과잉공급 현상이 발생했다. 그 결과 불법편법이 횡행하면서 서비스의 질저하는 물론 요양보호사의 근로조건이 악화되고 있다"고 지적했다. 

최 이사는 "사회적 규제, 수가 인센티브제 부여, 근로조건 개선 등 요양정책이 하나의 패키지로 작동해야만 실타래 같이 얽힌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밝혔다. 

최 이사는 이러한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해 ▲요양교육기관 및 서비스기관의 설립요건 강화 ▲병원의 간호관리료처럼 인력의 양과 질에 따른 차등수가제 도입 ▲ 파견금지 및 인력배치 기준강화 등 요양보호사의 근로조건 개선을 제시했다. 

이날 토론회에는 일본의 아키바 다케시(리츠메이칸 대학)교수와 아키노 준이치 (일본지방자치단체노동조합 사회복지평의회)사무국장 참석해 일본의 현황과 사례를 바탕으로 바람직한 노인요양제도에 관한 의견을 제시했다. 

이 밖에 지정토론자로 김영선 보건복지가족부 요양보험제도 과장, 김지영 한국재가노인복지협회 회장, 김병한 서울노인복지시설협회장, 현정희 전국공공서비스노동조합 수석부위원장, 김인숙 한국여성민우회 대표, 정금자 전국요양보호사협회 회장 등이 참석한다. 

 

2010년 03월 16일 (화) 07:01  뉴시스

 

 

 

 

日외무성 문서 "한일협정과 개인청구권 무관"

 

1965년 한일회담 당시 문서..2008년 공개분 중 일부 
징용 피해자측 "日 문서 전면 공개해야" 
(도쿄=연합뉴스) 이충원 특파원 = 일본이 1965년 한일청구권협정(이하 한일협정) 체결 당시부터 '협정 체결 후에도 개인 청구권은 유효하다'는 판단을 하고 있었다는 사실이 일본 외무성의 내부 문서에서 확인됐다. 


이는 "1965년 한일협정으로 개인의 청구권도 포기됐다"는 주장과 달리 일본측이 협정 체결 당시부터 위안부나 징용 피해자의 배상 청구 권리를 인정하고 있었던 것으로 해석될 수 있어 향후 강제징용 피해자 소송에 영향을 줄 것으로 예상된다. 

이 같은 사실은 연합뉴스가 14일 입수한 일본 외무성의 1965년 내부 문서에서 밝혀졌다. 

이 문서는 작성 직후 대외비로 분류됐다가 일본 내 정보공개 소송에 따라 2008년 일부 공개된 한일회담 관련 일본측 문서 중 일부로, 한일 시민단체.법조계의 분석작업을 거쳐 최근 일본내 강제징용 피해자 소송에 증거로 제출됐다. 

일본 외무성은 '평화조약에서 국민의 재산 및 청구권 포기의 법률적 의미'(1965년 4월6일자)와 '일한 청구권조약과 재한(在韓) 사유재산 등에 관한 국내 보상 문제'(19965년 9월1일자) 등 내부문서 3건에서 "한일청구권협정 2조의 의미는 국제법상 국가에 인정된 고유한 권리인 외교보호권을 행사하지 않는다고 약속한 것이고, 국민의 재산(개인청구권)으로 국가의 채무를 충당한 것은 아니다"라며 "개인이 상대국 국내법상의 청구권을 갖는지, 아닌지에 대한 것이 아니다"라고 밝혔다. 

일본 정부가 당시 한일협정에도 불구하고 징용피해자 등의 개인적인 청구권은 유효하다라고 결론을 내린 것으로 해석될 수 있는 내용이다. 

이에 대해 한국 외교부 관계자는 "일본 정부가 공개한 한일회담 관련 일본측 문서의 내용을 분석중"이라며 "이중 한일협정과 개인청구권간의 관계에 대한 문서가 어떤 의미가 있는지도 면밀히 검토할 것"이라고 말했다. 

한국 징용피해자 소송을 맡고 있는 최봉태 변호사는 "이 문서는 한일협정 당시 일본 정부의 생각을 드러내 주는 것"이라며 "이를 계기로 일본도 한국처럼 한일회담 문서를 전면 공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일본 정부는 1990년대까지는 "한일협정에도 불구하고 (징용피해자 등의) 개인청구권은 유효하다"고 했다가 이후 말을 바꾸기도 하는 등 혼란스러운 입장을 보여왔다. 

한일협정은 일본측이 `무상 3억달러, 유상 2억달러, 민간차관 3억달러'를 우리 측에 제공하기로 하면서 '(협정) 체약국 및 국민의 청구권에 관하여는 어떤 주장도 할 수 없는 것으로 한다. 양국 및 그 국민간의 청구권에 관한 문제가 완전히, 그리고 최종적으로 해결된 것을 확인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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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03월 14일 (일) 10:32  연합뉴스

'한일협정 관련 일본측 문서' 요지

(도쿄=연합뉴스) 이충원 특파원 = 연합뉴스가 입수한 일본 외무성 문서는 모두 3건(11쪽)이다. 

첫번째는 1965년 4월6일에 작성된 '평화조약에서 국민의 재산 및 청구권 포기의 법률적 의미'(이하 '법률적 의미')이고, 두번째는 같은해 5월28일자 '일한 청구권 협정 제2조와 나포어선 문제'('나포어선 문제')다. 

두 문서 모두 같은해 6월 한일청구권협정(이하 '한일협정')이 체결되기 직전에 작성됐다. 첫번째 '법률적 의미' 문서에는 '대외비'라는 의미의 '秘'(비)자와 함께 나중에 비밀 지정이 해제됐다는 표시가 돼 있다. 

세번째 문서는 1965년 9월1일자 '일한 청구권조약과 재한(在韓) 사유재산 등에 관한 국내 보상 문제'('보상문제')다. 

▲'법률적 의미' 문서 = 국가는 자국민에 대한 타국의 권리 침해에 대해 국제법상 청구를 할 수 있는 권리가 있다. 이때 국가의 청구권은 국민 개인에게 가해진 침해로부터 생긴 것이지만 법률적으로는 이와는 독립된 국제법적 권리다. (따라서 개인이 상대국의 국내법상의 청구권을 갖는지, 아닌지라는 것이 아니다). 국가는 재량에 따라 청구권을 제기할지를 결정할 수 있다. 어선 나포에 관한 보상청구권을 포기하는 경우, 이 청구권은 위와 같은 국가의 청구권인 것으로 생각된다. 

▲'보상문제' 문서 = 한일협정 2조의 의미는 국제법상 국가에 인정된 고유한 권리인 외교보호권을 행사하지 않는다고 약속한 것이다. 이는 고도의 정치적 판단에 따라 행사 여부를 결정하는 것인 만큼 그 판단에 대해 자국민에게 보상의 의무를 진다고 할 수 없다. 한일협정의 의미는 국민의 재산권을 서로 없애서 청구권을 해결하자는 것은 아니다. 국민의 재산으로 국가의 채무를 충당한 것은 아니다. 나포어선 선주 등이 한국에 대해 청구를 제기했을 때 외교보호권을 행사하지 않는다고 약속한 셈이다. 손해를 받은 국민에 대해 어떤 구제 조처를 할지는 정책상의 배려에 따라 신중하게 검토할 문제이다. 

▲'나포 어선' 문서 = 한일협정 2조에 따라 일본국은 나포어선과 관련된 국제법상 배상청구권을 포기하는 것이 된다. 나포 어선 선주의 반환 청구권과 손해배상청구권이 인정될지는 한국측 법률에 따르게 된다. 한국 정부가 선주의 청구를 거부해도 일본국은 항의할 수 없다. 한일협정은 양국간의 권리.의무관계를 정하는 것이다. 
 
 
2010년 03월 14일 (일) 10:31  연합뉴스
 
 
 
 
 

日韓関係の未来を開く会 20103月定例会ご案内

 

姜尚中教授が語る東アジアと日本の姿~これからの日本と東アジア各国との関係は?

 

ゲストスピーカー:東京大学 姜尚中教授

日時:2010324日(水)19時~21時

場所:国際交流基金 2F セミナー室「けやき」

東京都新宿区四谷4-4-1

(東京メトロ丸の内線 四谷三丁目駅 1番出口 から徒歩3分)

http://www.jpf.go.jp/j/about/outline/contact/map.html

  19時以降は入館ができなくなりますので、参加される方は、なるべく19時前に入館するようお願いします。遅れてこられた方は運営委の横井さんの携帯(090-4429-1338)まで連絡くだされば、入口を開けに行きます。

 

主催:日韓関係の未来を開く会

共催:慶應義塾大学 東アジア研究所 現代韓国研究センター

協力:日本サムスン、国際交流基金

 

急速な経済発展を遂げる中国、韓国などアジア各国の狭間で、日本は政治、経済的にも、また精神的にも彷徨っているように思えます。日本の“影“が薄くなりつつある今、日本はアジア各国とナショナリズムを超えて協力体制を築くことができるのか。グローバル時代の国家として、今、国民レベルでアジアの地域連携を考える必要があるのではないでしょうか。

今回は鋭い批評でメディアでもおなじみの姜尚中教授に今の日本社会の問題点とアジアとの“つき合い方“についてお話を伺います。

 

「日韓関係の未来を開く会」は、東京で活動している日韓両国のジャーナリスト、研究者、政府関係者などが、日韓の政治・外交・文化等、様々な分野での意見交換を通じて相互理解を深めるための勉強会です。

 

この会合は基本的にオフ・ザ・レコード(オフレコ)ですが、スピーカー、参加者の発言を引用される場合は直接ご本人の承諾をとるようお願いします。

 

参加者は20名程度を予想しています。

 

協力企業である日本サムスンからはゲスト謝金等について、協力団体である国際交流基金からは運営、会場について、共催団体の慶應義塾大学東アジア研究所 現代韓国研究センターからは運営のご協力、ご支援をいただいています。

 

参加を希望される方は下記までメールでご連絡お願い致します。

 

2010-03-11

 

 

 

 

‘요미우리 해명’ 보도 일파만파…누리꾼 댓글 폭주

 

MB 독도발언 파장에도 청와대는 '침묵'
국민일보 ‘요미우리 해명’ 보도 일파만파…누리꾼 댓글 폭주
 
2010년 03월 10일 (수) 14:42:44 류정민 기자
 
이명박 대통령이 일본의 후쿠다 전 총리와 정상회담 과정에서 독도의 일본 교과서 ‘다케시마(독도의 일본명)’ 표기를 기다려달라고 요청했다는 ‘독도 발언’ 논란 기사와 관련해 첫 보도를 한 국민일보 기사에는 누리꾼들의 댓글이 1만개가 넘어서는 등 관심이 증폭되고 있다. 
국민일보는 지난 9일 <요미우리 “MB 독도 발언 허위보도 아니다”>라는 제목의 인터넷 기사를 올려 관심을 집중시켰고, 10일자 2면에도 해당 기사를 게재했다. 국민일보 기사의 핵심은 이명박 대통령의 ‘독도 발언’ 진위 논란과 관련해 청와대는 당시 ‘사실무근’이라고 주장했지만 요미우리신문은 ‘보도는 사실’이라고 재차 주장했다는 점이다. 
이명박 대통령의 ‘독도 발언’ 논란은 요미우리 신문이 지난 2008년 7월15일 당시 일본 후쿠다 총리와의 정상회담 과정을 보도하면서 후쿠다 수상이 “(독도의 일본명인) 다케시마를 (교과서 해설서에) 쓰지 않을 수 없다”고 통보하자 이 대통령은 “지금은 곤란하다. 기다려 달라고 요구했다”고 말했다는 의혹이다. 
   
  ▲ 이명박 대통령과 후쿠다 야스오 일본 총리의 공동기자회견. ⓒ연합뉴스  
 
요미우리신문은 오는 17일 서울중앙지법 변론기일을 앞두고 서면 답변을 제출했고, 이 내용을 국민일보가 단독 보도하면서 쟁점으로 떠올랐다. 요미우리 신문은 준비서면에서 “당시 아사히 신문도 표현은 조금 다르나 요미우리와 같은 취지로 보도했다”면서 “서로 다른 신문사가 동일한 취지의 내용을 기사화한 것은 보도 내용이 취재 활동에 기초한 객관적 사실의 전달이라는 점을 방증한다”고 전했다.
이 소송은 지난해 8월 시민소송단 1886명이 “요미우리의 근거 없는 보도로 한국인의 자존의식에 상처를 입었다”며 손해배상을 청구한 것이다. 국민일보와 일부 언론의 관련 보도로 MB 독도발언 논란이 알려지자 누리꾼들의 반응은 말 그대로 폭발적이었다. 
미디어다음에 실린 국민일보 기사에는 10일 오후 2시35분 현재 1만개가 넘는 누리꾼 댓글이 달렸다. 요미우리신문 보도가 사실인지 오보인지에 따라 정치적 파장은 달라질 것으로 보인다. 
   
  ▲ 국민일보 3월10일자 2면.  
 

한편, 청와대는 국민일보 보도가 나온 사실을 확인했지만 별다른 견해 표명을 하지는 않고 있다. 청와대 대변인실 관계자는 “요미우리 보도가 처음 나왔을 때 청와대 차원에서 해명을 한 바 있다. 이번 국민일보 보도와 관련해 입장을 밝힐 것인지 여부는 확정되지 않았다”고 설명했다. 
이재명 민주당 부대변인은 "당시 청와대는 사실무근이라고 주장만 할 뿐 정정보도나 손해배상을 요청하지 않아 의구심을 자아냈다. 인터넷판 기사는 내려졌지만 신문 1면에 보도된 기사는 정정되지 않았고, 정정보도를 요구하는 국민소송에서 지금도 요미우리 신문은 사실보도라고 주장하고 있다. 청와대는 지금이라도 진상을 밝혀야 한다"고 주장했다.  

 

2010-03-11

 

 

 

 

靑 “요미우리 독도 관련 보도 재론 가치 없어”

 

청와대는 8일 일본 요미우리신문의 지난 2008년 독도 관련 보도에 대해 "이미 오보임이 확인된 사안으로 재론할 가치가 없다"고 밝혔다. 

청와대는 더불어 요미우리신문이 독도 관련 기사를 보도한 직후인 2008년 7월 15일 일본 외무성 보도관의 기자회견 발언을 소개했다. 

일본 외무성 보도관은 당시 일본 언론을 대상으로 한 브리핑에서 "오늘 국내언론 일부 보도 가운데, 이명박 대통령이 '지금은 곤란하다. 기다려달라'고 언급했다는 보도가 있었다"며 "환담시 구체적인 내용을 밝히는 것은 삼가고 싶으나, 보도된 것과 같은 대화가 이루어진 사실은 없다는 것을 이 자리에서 확실히 언급하고자 한다"고 밝혔다. 

보도관은 이어 "정상회담일인 7월 9일 시점에서는 해설서의 기술에 관한 방침이 아직 결정되지 않았기 때문에, 환담시 이 대통령이 동건에 관한 한국 측의 입장을 설명했고, 이에 대해 후쿠다 총리가 당시의 국내상황(일본)에 대해 설명했다고 알고 있다"고 말한 것으로 돼 있다. 

김은혜 청와대 대변인은 "이미 사실무근으로 밝혀진 사안이며, 요미우리신문이 서울중앙지법에 제출한 준비서면은 자신들의 보도를 합리화하기 위한 일종의 변명에 불과하다"고 밝혔다. 

 

2010년 03월 10일 (수) 18:27  국민일보

 

 

 

 

 

MB의 '독도 발언' 기사, 사실이다

 

<요미우리> "MB의 '독도 발언' 기사, 사실이다"
 

MB의 "독도 표기, 지금은 곤란. 기다려달라" 기사 재논란


2008년 이명박 대통령의 독도 발언 기사로 논란을 불러일으켰던 일본의 <요미우리> 신문이 “이 대통령이 후쿠다 야스오 당시 일본 총리에게 ‘기다려 달라’고 했다는 보도는 허위사실이 아니다”는 취지의 준비서면을 최근 법원에 제출한 사실이 드러나, 파문이 재연되고 있다. 

2008년 <요미우리>의 MB 발언 보도 파동

<요미우리>는 지난 2008년 7월15일자 기사를 통해 이 대통령과 후쿠다 당시 일본총리의 4월 정상회담을 보도하며 “관계자에 따르면 후쿠다 수상이 ‘다케시마(독도의 일본명)를 (교과서 해설서에) 쓰지 않을 수 없다’고 통보하자 이 대통령이 ‘지금은 곤란하다. 기다려 달라’고 요구했다”고 보도해 큰 파문을 일으켰다. 

이에 대해 이동관 당시 청와대 대변인은 "사실무근이고 터무니없는 말"이라며 "뭘 기다려 달라는 말인가. 한국 내부를 분열시키고 독도의 본질을 왜곡하려는 일본측의 언론 플레이의 결과라면 결코 용납할 수 없는 일"이라고 <요미우리>를 맹비난하며 보도 내용을 강력부인했다.

청와대가 강력 반발하자 <요미우리>는 이틀 뒤인 17일 문제 기사를 자사 인터넷판에서 삭제했다. <요미우리>는 그러나 해명 또는 정정기사를 싣지 않았고 국내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자사 보도가 허위가 아님을 주장했음에도 불구하고, 청와대는 더이상 이를 문제 삼지 않았다.

그러나 '안티MB' 카페의 백모씨 등 시민소송단 1천886명은 <요미우리>를 상대로 명예훼손에 따른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제기했고, 현재 서울중앙지법 민사합의14부(부장판사 김인겸)가 맡아 재판이 진행중이다.

요미우리 "우리 보도, 허위 아니다"

재판은 진행중이나 세간의 관심은 없었다. 그러던 것이 경찰이 안티MB 카페의 총무 집을 전격 압수수색하면서 아이러니하게도 세간의 관심 밖에 있던 이 문제가 다시 수면 위로 급부상하게 됐다. <요미우리>가 재판에서 자사 보도가 허위가 아니라고 주장하고 있음이 알려지게 된 것.

안티MB 카페 운영자인 강전호씨는 9일 평화방송 '열린세상 오늘 이석우입니다'와의 인터뷰에서 경찰의 압수수색을 질타하는 과정에 "현재 청와대와 일본정부는 <요미우리> 보도는 사실이 아니라고 주장하고 있고, 이에 반해 <요미우리>는 이명박 대통령 발언 보도는 사실이라고 계속 주장하고 있다"고 재판 진행 상황을 전했다. 

그는 이어 "법원에서 이명박 대통령의 증언 대신에 청와대에 사실확인서를 요청했고 청와대에서 <요미우리> 보도는 사실이 아니라고 사실확인서를 보냈다"며 "문제는 <요미우리>측이 청와대에서 보낸 사실확인서조차 인정할 수 없다는 입장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문제가 국제적으로 복잡해져 가는 모습"이라고 전했다. 

그는 "한달에 한번꼴로 재판이 열리고 있다. 다음 재판은 3월 17일 3차 본심이 열릴 예정"이라며 "<요미우리>가 워낙 자신들 보도가 맞다고 주장하고 있기 때문에 공방이 오래 지연될 것 같다 .앞으로도 서너 차례 재판이 더 진행되지 않을까 예상한다"고 덧붙였다. 

그의 주장은 확인 결과, 사실로 밝혀졌다.

10일 <국민일보>에 따르면, <요미우리>는 오는 17일 변론기일을 앞두고 민사합의 14부에 제출한 준비서면에서 "이 대통령이 후쿠다 야스오 당시 일본 총리에게 '기다려 달라'고 했다는 보도는 허위사실이 아니다"라며 "당시 <아사히> 신문도 표현은 조금 다르나 <요미우리>와 같은 취지로 보도했다"고 주장했다. 

<요미우리> 신문은 이어 "서로 다른 신문사가 동일한 취지의 내용을 기사화한 것은 보도내용이 취재활동에 기초한 객관적 사실의 전달이라는 점을 방증한다"며 "신빙성 있는 사실정보에 근거하지 않은 채 보도하는 것은 상식적으로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강조했다.

 

2010-03-10

 

 

 

 

 

日법원, "1965년 한일협정으로 개인 청구권 말소"

 

日법원, '근로정신대' 항소심도 기각(종합)

"1965년 한일협정으로 개인 청구권 말소"

(도쿄=연합뉴스) 이충원 특파원 = 제2차 세계대전 중 근로정신대로 일본으로 강제연행돼 군수공장에서 강제노동한 한국인 근로자와 유족들이 일본 정부와 후지코시(不二越)사를 상대로 낸 소송이 다시 기각됐다.

   일본 나고야(名古屋) 고등재판소(고등법원) 가나자와(金澤) 지부는 8일 유찬이(柳贊伊.84)씨 등 한국인 근로자와 유족 23명이 제기한 관련 소송 항소심 판결문에서 "1965년 한.일 청구권협정으로 한국 국민 개인의 청구권은 포기됐다"는 1심 논리를 반복했다.

   다만 와타나베 노부아키(渡邊修明) 재판장은 당시 일본인 교사가 유씨 등에게 "(일본에 가면) 공부를 할 수 있다"고 속인 데 대해 "면학 가능성이 거의 없었는데도 속여서 일본에 가게 했다"며 강제연행이나 강제노동 등 사실은 인정했다.

   교도통신에 따르면 한국인 전 근로자와 일본인 소송 지원단은 이날 패소 판결이 나오자 강력히 항의했고 일부 고령인 원고들은 허탈한 듯 법정에 주저앉기도 했다.

   유씨 등은 1944~1945년 일본인 교사 등으로부터 "돈벌이가 된다"거나 "학교에 다닐 수 있다"는 말을 듣고 일본으로 건너와 도야마(富山)의 후지코시 군수공장에서 식사도 충분히 하지 못한 채 비행기 부품을 만드는 중노동에 시달렸다.

   여자 근로정신대원으로 강제연행된 일부 한국인들은 1992년 후지코시사를 상대로 소송을 낸 끝에 회사측으로부터 '해결금'을 받아냈고 2000년 최고재판소(대법원)에서 화해가 성립됐다.

   이때 소송을 내지 못한 전 근로자나 유족은 2003년 일본 정부와 후지코시사를 상대로 사죄와 미지급 임금 등 1억엔을 지불하라고 요구하며 2차 소송을 냈지만 2007년 9월 1심에서는 청구권이 인정되지 않았다. 유씨 등은 전원 상고할 방침이다.

 

2010-03-08

 

 

 

위안부라 오해받아 평생 골목길로만

 

日 상대 ‘강제노역 임금지급 소송’ 김정주 할머니 “위안부라 오해… 평생 골목길로만 다녀”

중학생 손자가 물었다. "할머니, 위안부가 뭐예요. 할머니, 위안부 갔다 왔어요?" 할머니가 대답했다. "할머니 위안부 아니야. 할머니는 저 맨(먼) 후지코시 공장에 가서 일했어. 누가 할머니 보고 위안부라고 하디." 호기심으로 가득 찬 손자의 눈동자 앞에서 할머니는 눈물을 흘렸다. 

위안부라는 오인(誤認)은 김정주(79·서울 문정동) 할머니를 평생 괴롭혔다. 할머니는 수십년 동안 일부러 골목길로 다녔다. 사람들이 수군댈까봐 무서웠다. 아들에게도 조선여자근로정신대로 일본을 다녀왔다는 얘기를 못했다. 일본 법원에 제기할 손해배상 청구 소송을 준비하던 2002년이 돼서야 털어놨다. 

근로정신대는 일제가 전쟁 막바지인 1940년대에 노동력이 부족해지자 결성한 조직으로 주로 10대 여성이 모집 대상이었다. 성적 착취가 이뤄진 종군위안부와는 다르다. 그럼에도 정신대 출신에 대한 주변의 편견으로 말 못할 고초를 겪었다. 

김 할머니는 전남 순천남국민학교 6학년 때인 1945년 2월 일본 도야마현으로 가는 배를 탔다. 일본인 여성 담임교사는 일본에 가면 언니를 만날 수 있다고 거짓말했다. 언니 김성주(81) 할머니는 1944년 5월 나고야로 갔다. 언니도 '일본 가면 공부할 수 있다'는 말에 속았다. 자매는 똑같이 임금도 못 받고 미쓰비시중공업과 후지코시 군수공장에서 각각 강제노동에 시달렸다. 

김 할머니는 정신대 전력이 부끄럽다고 했다. 그리곤 계속 흐느꼈다. "군인으로 갔다가 돈 못 받아서 우리랑 같이 데모하는 빼빼 마른 할아버지도 아직까지 우리를 위안부라고 해요. 그러니 넘(남)들은 (위안부로) 인식 안 하겠어요?" 

할머니는 35세 때 이혼했다. 전 남편은 '일본 가서 뭐 했느냐. 몇 사람을 상대했느냐'며 할머니를 학대했다. 참다못한 할머니는 아들을 데리고 집을 나왔다. 떡을 이고 다니며 팔아 자식을 키웠다. 재혼 생각은 안 해봤느냐고 물었다. "누가 이북 사람을 중신해준다고 했는데 싫다고 했어요. 아이코, 나 또 버림 받으라고." 

김 할머니는 손자를 자신의 손으로 키웠다. 아들은 결혼생활에 실패했고, 지병으로 돈도 벌지 못하고 있다. 김 할머니와 아들, 손자 이렇게 세 식구는 매달 60여만원의 정부 지원금으로 반지하방에서 어렵게 산다. 

할머니는 7일 다른 피해 할머니 5명과 함께 비행기를 타고 일본 도야마현에 도착했다. 8일은 할머니들이 일본 기업 후지코시를 상대로 낸 소송의 2심 선고가 있는 날이다. 김 할머니를 비롯한 후지코시 근로정신대 출신 23명은 2003년 미불임금 등을 돌려달라는 소송을 냈다. 1심인 도야마지방재판소는 소송을 기각했다. 1965년 한일협정에 따라 개인 청구권은 사라졌다는 게 이유였다. 

김 할머니는 이번에도 승소가 쉽지 않을 것으로 보고 있다. 그래서 2심 선고 후 기자회견, 집회 등을 통해 일본 정부와 법원의 각성을 재차 촉구하는 '행동'에 나설 생각이다. "우리는 늙어서 시간이 없응께. 후지코시 사장이 도쿄로 이사갔는데 그 집 앞에 가서 기어이 답변을 받아올랍니다." 
 
2010년 03월 07일 (일) 18:20  국민일보
 

 

 

 

"초중고생 40% 3.1절 의미 잘 모른다"

 
독립기념관 태극기 물결
(천안=연합뉴스) 양영석 기자 = 제 91주년 3.1절을 엿새 앞둔 23일 천안 독립기념관 태극기광장에 설치된 태극기 815개가 바람에 펄럭이고 있다.2010.2.23
youngs@yna.co.kr
 

한국교총, 전국 초중고생 3919명 조사 결과  42.9%는 "과거사 때문에 일본에 부정적" 

(서울=연합뉴스) 이준삼 기자 = 전국 초ㆍ중ㆍ고교생 10명 중 4명은 일제강점기 독립선언과 독립운동을 기념하고자 제정된 3.1절 의미를 제대로 알지 못하는 것으로 조사됐다.

   연합뉴스가 제91주년 3.1절을 맞아 한국교원단체총연합회에 의뢰해 전국 초중고생 3천919명을 상대로 `3.1절 관련 학생인식에 관한 조사'를 한 결과 이같이 나타났다.

   28일 조사 결과에 따르면, `3.1절이 무엇을 기념하기 위한 날인지 아는가'라는 질문에 `잘 알고 있다'(43.7%)와 `조금 알고 있다'(39.6%)는 응답률이 83.3%로 파악됐다.

   `잘 모른다'와 `전혀 모른다'는 응답률은 각각 13.7%, 3.1%로 조사됐다.

   `3.1절을 어떤 날로 알고 있는가'라는 물음에는 `독립운동을 기념하기 위한 날'이라는 정확한 설명을 고른 학생은 59.1%에 불과했다.

   나머지 40.9%는 `식민지배에서 벗어난 날을 기념하는 날', `애국선열을 추모하는 날', `헌법 제정ㆍ공포 기념일' 등의 부정확한 답변과 `모르겠다'(5.1%)는 응답이었다.

   학생 대부분이 3.1절을 어느 정도 안다고 하지만, 정확한 의미를 아는 학생은 10명 중 6명 수준인 셈이다.

   태극기와 애국가 인지도는 대체로 높았다.

   태극기 문양이 4괘와 태극으로 이뤄진 것을 안다는 학생이 76.7%, 태극기를 정확히 또는 비슷하게 그릴 수 있다고 답한 학생은 95.3%였고, 애국가를 4절까지 모두 부를 수 있다는 학생도 55.7%로 집계됐다.

   `3.1절 등 국가기념일에 집에서 태극기를 게양하느냐'는 질문에 "그렇다"고 대답한 학생 비율은 71% 수준이었다.

   학생들은 `3.1절과 관련해 가장 먼저 연상되는 것'으로는 `유관순 열사'(59.3%)를 가장 많이 꼽았고, 다음이 `태극기'(18.8%), `공휴일'(7.5%), `기미독립선언문'(6.8%) 순이었다.

   일본을 어떻게 인식하느냐는 질문에 43.8%가 `과거사를 잊고 이웃나라로 함께 발전해야 한다'고 했지만, `과거사 때문에 부정적으로 본다'는 학생도 42.9%에 달해 식민지 역사가 여전히 학생들의 일본관에 상당한 영향을 미치고 있음을 보여줬다.

   교총은 "태극기, 애국가, 유관순 열사 등은 잘 알면서도 왜 3.1절을 공휴일로 지정해 기념하는가를 잘 모르는 학생이 많다. 학교교육 과정에서 국가기념일의 의미를 좀 더 제대로 가르칠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2010-02-28
 
 
 
 

민단ㆍ조총련 손잡고 조선인 유골 봉환

 

강제동원 추정 시즈오카 무연고 유골 94위

3월 10일 천안 `국립 망향의 동산'에 안장

(서울=연합뉴스) 김연정 기자 = 한ㆍ일 정부의 무관심 속에서도 일본 내 조선인 무연고 유골을 돌보며 유족 찾기에 힘써온 재일교포 단체들의 노력이 50여 년 만에 결실을 보게 됐다.

일본 시즈오카(靜岡)시 시미즈(淸水)구의 재일본대한민국민단(민단) 지부와 재일조선인총연합회(조총련) 분회로 구성된 `조선인 무연고 유골 봉환추진위원회'는 이 지역 조선인 유골 안치당에 있는 무연고 유골 94위를 3월10일 봉환한다고 28일 밝혔다.

위원회에 따르면 이번 한국으로 봉환하는 유골은 일제 강점기에 강제 동원됐거나 일자리를 찾아 일본에 건너갔다가 사망한 민간인들의 것이다.

시미즈 근방으로 끌려가 토목 공사와 선내 하역 등에 동원된 조선인 노무자는 1930년대 400∼600명이었으나 태평양 전쟁이 한창일 때는 2천∼3천명에 달했던 것으로 파악된다.

봉환을 앞둔 유골 94위는 합장된 무명 유골 76위와 이름은 있지만 연고가 없는 납골 유골 18위로, 이 중 2위는 어렵사리 신원과 한국 본적지를 밝혀냈으나 친ㆍ인척을 찾지 못했다고 위원회는 전했다.

이들 유골의 존재는 시미즈 키타야베(北矢部)에 있던 사찰 도까이지의 주지가 1950년부터 인근 사찰 34곳에서 무연고 조선인 유골을 발굴, 보관해오던 사실이 알려지면서 드러났다.

이 절이 1956년 문을 닫자 조총련 분회가 당국에 진정해 납골당을 만들어 유골을 옮겼고, 이후 민단 지부와 조총련 분회는 이 지역 행정기관과 시민 유지의 도움을 받아 납골당을 관리하면서 매년 합동위령제를 지내왔다는 것이다.

이들은 유족 등 유골의 연고를 찾으려 힘썼으나 신원 정보가 거의 남아있지 않아 '망향의 동산'에 안장하는 것이 타당하다는 결론을 내리고 2008년부터 위원회를 구성해 봉환을 추진해왔다. 

위원회는 이번 봉환으로 `이역만리 남의 땅 남의 나라에서 억울하게 희생돼 무주 고혼이 된 당신들이여. 당신들의 백골도 영혼도 주인이 있고 조국이 있다. 멀지 않은 장래에 당신들을 데리러 올 그날까지 편안하게 고이 잠드시지요'라고 현지 납골당에 새겨진 비문의 내용이 현실화됐다고 설명했다. 

정인모 위원장은 "아직 일본에는 조국에 돌아가지 못한 수천의 영혼이 안식을 찾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리고 싶었다"고 말했다. 

위원회는 다음달 10일 천안 `국립 망향의 동산'에서 봉환식을 연다. 
 
2010-02-28
 
 
 
 

도요타 청문회, 美.日 문화충돌 축소판

 

(서울=연합뉴스) 박용주 기자 = 24일(현지시간)에 미국 워싱턴에서 진행된 도요타 청문회장에선 세계화된 21세기 일본과 미국의 문화가 맞닥뜨렸다. 

외견상 미국 하원의원들이 도요타의 리콜 사태를 질타하고 도요타 아키오 사장이 사과하는 모양새였지만 서로 다른 두 나라 미국과 일본의 문화 대치였다는 평가가 많았다. 

일본의 기업 경영자는 통상 부하 직원의 의견을 두루 포용하고 가급적 대결 국면을 회피하는 부드러운 치어리더 성격이 강하다. 

미국의 의원들은 스포트라이트를 받기 위해선 고성과 삿대질은 기본인 사람들이다. 특히나 선거가 있는 해에는 더 그렇다. 

미 하원에서 진행된 도요타 청문회는 이 같은 차이가 극명하게 드러났다. 
태평양을 건너온 도요타 아키오 사장은 연방 고개를 숙이며 겸손한 자세를 취하려 애썼고 미 하원의원들은 성난 도부수(刀斧手)처럼 아키오 사장에 목소리를 높였다. 

AP통신은 도요타 청문회장이 세계화로 국가 간 통합의 정도는 더욱 정밀해졌지만 여전히 상당한 거리가 있다는 점을 확인할 수 있었다고 평가했다. 

특히 도요타 청문회장은 기업과 정치 문화의 엇박자와 21세기 세계화의 다층적인 모습을 축약해 보여주는 장이었다고 진단했다. 

미국의 솔직함과 일본의 미묘함은 청문회 내내 대조를 이뤘다. 
아키오 사장은 도요타 자동차 이름이 곧 자신의 이름임을 상기시켰다. 그는 "도요타가 손상을 입는 것은 내가 손상을 입는 것과 같다"고 말했다. 

자기 자신을 홍보하기에 바쁜 미국의 최고경영자(CEO)들이 자신을 파손된 상품으로 비유하는 예는 매우 드물다. 

자신의 능력보다 팀플레이를 강조하고 안정과 조화에 무게 중심을 두는 문화도 미국의 기업이나 의회와는 거리가 멀다. 

미 의원들은 아키오 사장에게 "끔찍하다"거나 "당신 때문에 당혹스럽다"는 등 직설적인 화법을 구사했다. 

미국의 CNN방송도 이날 청문회가 단순히 도요타 자동차의 대량 리콜사태에 대한 진상 규명 차원을 넘어 미국과 일본 사이에 벌어진 `문화의 충돌'이라고 비유했다. 

일본은 전통적으로 어려운 문제에 봉착할 경우, 합일점을 찾는 더딘 의사결정 구조를 갖고 있는 반면, 미국은 브레이크 결함 문제 등에 대한 신속한 답변을 원했기 때문에 이번 리콜사태가 본질보다 더욱 부풀려지게 됐다고 분석했다. 

미국과 일본의 언론 문화 차이도 있었다. 일본의 언론이 상대적으로 기업친화적이어서 도요타가 적대적인 미국 언론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아키오 사장이 청문회에서 눈을 잘 마주치지 않은 것에 대한 해석도 달랐다. 일본에선 사과할 때 종종 시선을 피하는 반면 미국 사람들은 이 같은 행동을 약점을 보이거나 무엇인가 숨기는 행동으로 해석했다. 

한편 케니치 오메 경영 컨설턴트는 인터내셔널헤럴드트리뷴(IHT) 기고문에서 도요타의 리콜 대란이 컴퓨터와 인간적인 요인에서 비롯됐다고 분석했다. 

그는 부품이 전자화되면서 점차 복잡해져 일괄적인 통제가 어렵게 됐고 이들 기술을 총괄할 수 있는 책임자가 존재하기 어렵다는 점을 문제로 지적했다. 

 

 
2010년 02월 25일 (목) 10:56  연합뉴스
 
 
 
 

한국어, 일본인 학습 희망 외국어 3위

 

"한국어, 일본인 학습 희망 외국어 3위"
 

(도쿄=연합뉴스) 한국어가 영어와 중국어에 이어 일본인들이 배우고 싶어하는 외국어 3위에 올랐다는 조사 결과가 나왔다. 

15일 아사히(朝日)신문이 최근 자사 인터넷 회원 4천여 명을 상대로 조사한 자료에 따르면 가장 배우고 싶은 외국어 1위에는 역시 영어(71.6%)가 올랐다. 조사는 복수 응답이 가능한 방식으로 실시됐다. 

특히 한국어는 22.8%로 중국어(42.7%)에 이어 3위를 기록했다. 프랑스어와 스페인어, 독일어, 이탈리아어, 러시아어 등이 뒤를 이었다. 

한국어를 배우고 싶은 이유로는 "한국 드라마가 좋다"는 등의 답변이 많아서 일본 내 한류 확산이 한국어 학습 동기로 이어지고 있음을 보여줬다. 

 

2010-02-16   연합뉴스

 

 

 

 

 

물 건너가는 日王 방한

 

[서울신문]한·일 강제병합 100년을 맞는 올해 일왕의 한국 방문이 사실상 무산되는 분위기다. 

외교통상부 고위 관계자는 12일 "건강문제와 한국 내 반대여론으로 일왕 방한은 불가능하다."고 단언했다. 올해 77세인 아키히토일왕은 전립선암 수술을 받은 바 있다. 지난 9일 권철현 주일대사도 "(일왕 방한은) 현재로선 낙관할 수 없는 상황"이라고 했다. 오카다 가쓰야 일본 외상도 11일 한·일 외교장관 공동 기자회견에서 이 문제와 관련, "여러 사정을 감안해 신중하게 검토해 나가고자 한다."고 원론적 입장을 견지했다. 

일왕 방한은 노태우 정부 이후 이명박 대통령에 이르기까지 우리 정부가 일본 측에 꾸준히 초청해 놓고 있는 사안이다. 공이 일본에 넘어가 있는 셈이다. 아키히토 일왕은 개인적으로는 한국에 오고 싶어하는 것으로 알려진다. 그는 간무(桓武·재위 781~806년) 일왕의 어머니가 백제 무령왕의 후손이라는 말을 권 대사에게 했다고 한다. 하지만 일왕의 해외 방문은 '국사(國事) 행위'로 정부가 최종 결정하는 사안이다. 때문에 일왕은 우리 정부 관계자를 만날 때 "해외 방문은 일본 정부가 결정하는 문제"라며 즉답을 피한다고 한다. 

패전(敗戰) 전까지만 해도 일본 국민들에 의해 신처럼 받들어졌던 일왕의 해외 방문은 극히 민감한 문제라 일본 정부는 매우 조심스러워한다. 만에 하나 불상사가 일어난다면 그 부담은 정부가 고스란히 져야 하기 때문이다. 

일본 정부는 일왕이 한국 땅을 밟았을 때 시위대와 맞닥뜨리는 상황을 가장 우려한다. 한국에 주재하는 한 일본 언론인은 "(일왕에게) 계란 한 개만 날아들어도 엄청난 사태라는 정서가 일본인들 사이에 있다."고 했다. 아키히토 일왕은 지난 1992년 중국 난징(南京)을 방문했다. 난징은 일제가 중국인 30만명(중국 측 추산)을 학살한 곳으로 반일감정이 우리 못지않은 곳이다. 그런 험지(?)에 일왕이 발을 디딜 수 있었던 것은 공산주의 국가인 중국이 시민들을 완벽하게 통제했기 때문이다. 반면 민주주의 국가인 한국에서는 시위를 100% 막기가 불가능하다는 인식을 일본 정부가 갖고 있다고 한다. 

실제 지난 7일 한국 내 시민단체들은 안중근 의사 유해 반환과 역사교과서 왜곡 시정, 독도 망언 근절 등의 문제가 선결될 때까지 일왕 방한에 반대한다는 입장을 밝혔다. 권 대사는 "일왕이 방한하려면 결정적인 문제를 해결하는 뭔가가 있지 않고서는 힘들 것"이라고 했다. 

 

2010년 02월 13일 (토) 01:16  서울신문

 

 

 

 

 

日 외상 "한일 강제병합 한국민 자긍심 깊이 상처"

 

오카다 가쓰야(岡田克也) 일본 외상은 11일 올해 100년을 맞는 한일 강제병합에 대해 "한국인들이 나라를 빼앗기고 민족 자긍심에 크게 상처받은 일이었다고 생각한다"고 밝혔다. 

지난해 9월 취임 후 처음 방한한 오카다 외상은 이날 서울 외교부청사에서 한일 외교장관 회담을 가진 뒤 공동 기자회견을 통해 이같이 말했다. 

오카다 외상은 "합병당한 측의 아픔을 기억하고 피해자의 기분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며 "그 위에서 지금부터의 백년을 내다보고 진실로 미래지향의 우호관계를 강화해 나가고자 한다"고 말했다. 

그는 또 "하토야마 내각은 무라야마 담화를 계승하고 있다"며 "과거 역사를 외면하지 말고 앞으로를 내다보고 진정으로 미래지향적인 한일 관계를 발전시켜 나갈 것"이라고 밝혔다. 

무라야마 담화는 1995년 8월 15일 열린 전후 50주년 종전기념일에서 당시 무라야마 도미이치(村山富市) 총리가 태평양 전쟁과 전쟁 이전에 행한 침략 및 식민지 지배에 대해 공식적인 사죄의 뜻을 표명한 담화이다. 

오카다 외상의 발언은 올해 강제병합 100년을 맞아 일본 민주당 정부가 과거사 문제에 대해 처음으로 공식적인 입장을 표명했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아울러 과거사에 대한 반성과 함께 미래 한일 관계를 발전시켜가야 한다는 뜻도 담겨 있다. 

다만, 과거 일본 정부 입장과 크게 다르지 않은 점을 고려해 볼 때 보다 진정성이 담긴 입장표명과 실천이 뒤따라야 한다는 게 외교가의 평가다. 

오카다 외상은 일왕 방한과 관련 "제반 사정을 감안해 신중하게 검토해 나가고자 한다"고 밝히고 "오늘 양국이 설치하기로 합의한 한일 문화교류회의를 통해 양국 국민간 교류를 활성화하고 싶다"고 말했다. 그는 재일한국인 지방참정권 문제와 관련 "현재 검토중"이라고 밝혔다. 

유명환 외교통상부 장관과 오카다 외상은 이날 회담에서 북한이 6자회담 복귀의 전제조건으로 평화협정 회담과 대북제재 해제를 요구하는 데 대해 "북한이 6자회담에 복귀하고 비핵화가 실질적으로 진전된 이후에 (논의가) 가능하다"는 입장을 확인했다. 

오카다 외상은 이날 이명박 대통령, 정운찬 국무총리, 현인택 통일부 장관을 잇따라 예방ㆍ면담한 뒤 연세대 어학당을 시찰하고 일본으로 돌아갔다. 

 

2010-02-11

 

 

 

 

"'섹시한' 소녀시대 좋아하는 게 죄인가요?"

이제 고등학교에 입학하는 조카가 있다. 조카는 '소녀시대'의 팬이다. 당연히 이번 달 단독 콘서트 예매도 이미 끝냈다. 조카는 특히 서현을 좋아한다. 한정판 소녀시대 카드 중에서 다른 멤버들 것은 줘도 서현의 것은 끝내 안 준다. 소신이 뚜렷한 녀석이다. 크게 될 놈이다.

내가 글쟁이인 것을 아는 조카는 며칠 전 이번 새 앨범 음악이 어떠냐고 물어왔다. 해줄 말 중에는 좋은 것도, 나쁜 것도 있었다. 어차피 나쁜 말하면 귀담아 듣지 않을 테니 대충 좋은 말만 하고 넘어갔다. 실은 내가 오히려 묻고 싶은 게 하나 있었다. 하지만 묻지 않았다. 이것이었다.

"네가 진짜로 소녀시대를 좋아하는 이유가 뭐야?"

이걸 묻고 싶었던 이유는 간단하다. 나 자신에게 물어봤는데, 나에게서 나온 대답이 정답인 것 같아서 다른 남자(!)에게도 확인해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나는 소녀시대가 '섹시'해서 좋다. 물론 기본적으로 귀여운 매력이 크긴 한데 섹시한 매력도 나에게는 그 정도 크기는 된다.

이게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냐고? 노파심에 말하자면 나는 변태도 아니고 과대망상증 환자도 아니다. 그리고 이제는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소녀시대는 분명히 섹시하다. 정확히 말하자면, '섹시하지 않은 척 하면서 섹시'하다.

내가 소녀시대에게서 섹시함을 느낀 건 'Gee' 이후였던 것 같다. 그전까지 소녀시대는 나에게 그저 귀여운 여동생에 불과했다. 그러나 소녀시대가 Gee로 컴백해 딱 달라붙는 배꼽티와 스키니진을 입고나오자 '소녀'는 '그녀'가 되었다. '소원을 말해봐'는 'Gee'의 심화판이었다. 핫팬츠와 하이힐, 제복을 입고 그녀들이 내게 '소원을 말해보라고' 외쳤다. 신곡 'Oh!'는 한술 더 떠 치어리더 콘셉트다. 더 무슨 말이 필요하나.

▲ 최근 '소녀시대'는 신곡 'Oh!'를 발표했다. 소녀시대 멤버들은 치러디어 콘셉트로 퍼포먼스를 하면서 이 곡을 부른다. ⓒSM엔터테인먼트


여기서 중요한 건 섹시 그 자체가 아니다. 소녀시대보다 섹시한 가수들은 얼마든지 있다. 포인트는 소녀들이 '더없이 순수한 눈망울'을 하고선 남성의 성적 판타지를 자극하려는 의도가 분명한 옷과 액세서리, 그리고 노랫말과 춤동작을 선보인다는 점이다. 나는 고민에 빠진다. 그 순수한 눈망울들이 나를 죄책감의 구렁텅이로 몰아넣는다. 내가 저 천사 같은 아이들을 두고 대체 무슨 상상을 한 걸까. 나는 변태인가. 난 누군가 또 여긴 어딘가.

분명히 맞는 것 같은데 증명할 방법이 없다. 섹시함을 주 무기로 삼으면서 겉으로는 그렇지 않은 척한다. 그런데 더 가관(?)인 건 그렇지 않은 척하니까 대놓고 그러는 것보다 더 섹시하다는 거다. 낮에는 현모양처, 밤에는 요부를 바라는 어쩔 수 없는 남성의 본능이다. 가히 최악의 상황이다.

이런 상황에서 '기획사 너희들! 일단 남성의 성적 판타지를 정확히 자극한 것에는 10점 만점에 10점을 주겠어. 대단히 유효한 전략이었지. 하지만 어린 여자애들 데리고 더 이상 교묘하게 섹스를 팔지 마! 이제 더 이상 당하지 않아!', 이렇게 외친다면 (비록 속은 다를지라도) '아니, 어떻게 이렇게 귀여운 여동생을 보고 그런 천박한 생각을…', 하며 경멸어린 시선으로 변태 취급당할 가능성이 다분하다.

과연 나만 이런 생각을 하는 걸까? 나만 섹시함을 섹시함이라 말하지 못하는 '소길동'의 덫에 걸린 걸까? 아니라고 본다. 모르긴 몰라도 적지 않은 대한민국 성인 남성이 나와 비슷한 고민을 하지 않으려나?

여기서 두 가지 고민이 발생한다. 그리고 그 전에 하나 전제되어야할 것이 있다. 바로 '소녀시대의 기획사는 어린 소녀들을 통해 남성의 성적 판타지를 자극해 교묘히 섹스를 판매한다'는 합의다. 물론 이 같은 판단에 소녀시대의 팬이나 어린 학생들, 그리고 여성들은 동의하지 않을 수도 있다.

이유는 여러 가지다. 우선 소녀시대의 팬들에게 이 같은 지적은 소녀들에 대한 모욕일 수 있고, 어린 학생들이나 여성들의 경우에는 진심으로 이러한 부분을 체감하지 못했을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엄연히 현존하는 사실이다. 양해를 구한다. 그렇게 사실로 인정하고 넘어가도록 하자.

첫 번째 고민은, '욕망하는 것은 과연 나쁜가'이다. 더 정확히 말하면 '의도된 자극에 예상된 욕망으로 반응하는 것은 나쁜가'가 되겠다. 말이야 바른 말이지 은근슬쩍 성적 판타지를 자극해 오는데 모른 척하며 억지로 속으로 눌러야 하나? 오히려 그게 솔직하지 못하고 자신을 속이는 것 아닌가?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솔직함은 미덕이라고 배우지 않았나. 굳이 말을 하자면 자극받는 쪽보다 자극하는 쪽이 나쁘지 않느냐는 말이다. 하아, 나는 왜 불필요한 죄책감에 사로잡혀 있었을까. 문제는 개인이 아니라 구조이고 시스템인 것을.

두 번째 고민은, '어린 소녀들을 통해 섹스를 파는 행위는 과연 나쁜가'이다('미성년자'라는 법적 개념으로도 판단할 수 있겠지만 여기서 논하려는 건 그러한 차원은 아니다). 어떻게 보면 누이 좋고 매부 좋은 거래가 아닌가. 기획사는 돈을 벌고, 소녀들은 스타가 되고, 대중은 욕망을 충족한다. 소녀들이 특별히 공공질서를 저해하는 음란 행위를 하는 것도 아니고, 대중이 소녀들에게 위해를 가하거나 범죄를 저지르는 것도 아니다. 상부상조하는 좋은 거래다.

그러나 이렇게 간단하게 정리하고 넘어갈 문제가 아니라는 게 바로 문제다. 기본적으로 나는 욕망하는 주체다. 그리고 욕망하는 나 자체는 건강하다. 그러나 내 욕망을 충족시켜주는 것들이 모두 옳은 건 아니다. 다시 말해 나는 내 욕망의 정곡을 찔러주는 소녀시대의 무대를 보면서 기획사의 의도대로 욕망을 느낀다.

하지만 그 반대편엔 욕망의 크기만큼이나 커다란 이성 역시 자리 잡고 있다. 나는 소녀시대가 내 성적 판타지를 충족시켜준다는 점을 인정하면서도 동시에 그들 기획사의 전략이 야기할 부정적인 단면들을 고민한다. 즉 나는 끊임없이 욕망하면서 동시에 그 욕망을 충족시켜주는 것의 올바름에 대해 끊임없이 의심한다.

그렇게 의심해본 결과, '섹시하지 않은 척 하면서 섹시한' 소녀시대는 몇 가지 문제점을 내포하고 있다. 먼저, 이것은 기획사의 입장에서는 분명 대단히 효과적인 돈벌이 전략이지만 사회적으로는 성의 이중성을 더욱 공고히 할 뿐이다. 성적 판타지를 자극하도록 설계된 소녀들에게서 당연하게(?) 예정된 욕망을 느끼더라도 남성들은 그것을 제대로 표출할 수 없다. 욕망 표출의 해방감 대신 그들에게 부여되는 것은 일종의 죄책감이다. 욕망은 점점 안으로 파고 들어가고 겉과 속은 달라진다. 그렇게 섹시한 것을 섹시하다고 말하지 못하는 소길동이 되어간다.

또 하나. 다름 아닌 소녀들 걱정이다. 윤아 걱정, 유리 걱정, 무엇보다 우리 조카를 위해 서현 걱정이다. 어쩌면 이게 제일 중요한 문제일지도 모른다. 나는 소녀시대의 무대를 볼 때마다 매번 이런 생각이 든다. 쟤네들은 자기가 어떻게 소비되는지 과연 알고 있을까? 남성들의 시선과 속마음에 대해서는 얼마나 알까? 만약 알고 있다면 그게 쟤네들이 원하는 걸까? 혹시 기획사의 의도와 속내가 충돌해 괴롭지는 않을까?

이게 무슨 오지랖이냐고 웃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소녀들도 이제 엄연한 법적 성인이니까 자기 일은 자기가 알아서 하겠지'라고 안일하게 생각하기에는 아직도 소녀들은 많이 어릴뿐더러 소녀들 개개인의 힘에 비해 시스템의 권력이 너무 크고 거대하다. 또한 '자본주의 사회에서 소녀시대 역시 하나의 상품이며 상품이 된 것 역시 소녀들의 선택'이라고 치부하기에는 머릿속에서 '인간의 존엄성'이라는 단어가 자꾸만 아른거린다.

서현. 가장 순수할 것 같고 실제로도 가장 어린 서현. 지금, 상처받지 않고 있을까? 그리고 앞으로도 상처받지 않을 수 있을까?

글을 마무리하면서 문득 지금의 내 메신저 대화명을 떠올렸다. '소시 앨범 득템! 화보 쩐다.' 화보가 쩌는 건 사실이지만 아무래도 당장 다른 대화명으로 바꾸어야겠다. 갑자기 이 저열한 욕망의 바다에 물 한 방울 보태기도 싫어졌으니까.

 

기사입력 2010-02-04 오전 8:38:30

 

 

 

 

 

전주대사습놀이 일본서 첫 해외 대회 연다

 

<전주대사습놀이 일본서 첫 해외 대회 연다>
전주대사습놀이 2월 일본서 첫 해외 대회

(전주=연합뉴스) 홍인철 기자 = 국악 명인ㆍ명창의 등용문인 36년 전통의 전주대사습놀이가 2월 20일 일본에서 첫 해외대회를 연다. 사진은 지난 대회 풍물 공연 모습. <<지방부 기사 참고>> <<전주대사습놀이 보존회 제공>> 2010.1.20
ichong@yna.co.kr
 



(전주=연합뉴스) 홍인철 기자 = 국악 명인ㆍ명창의 등용문인 36년 전통의 전주대사습놀이가 일본에서 첫 해외대회를 연다.

   20일 전주대사습놀이보존회(이사장 김정호)에 따르면 우리의 국악을 일본에 알리고 국악을 배우는 재일교포와 일본인의 기량을 향상시키기 위해 2월 일본 도쿄에서 '제1회 전주대사습 일본 대회'를 개최한다.

   재일교포와 일본인이 모두 참가하는 이 대회는 2월20일 주일한국대사관 한국문화원과 도쿄 한국학교체육관에서 판소리와 기악, 무용, 민요, 풍물 등 5개 부문으로 나뉘어 펼쳐진다.

   이미 작년 12월부터 예선이 진행 중이다.

   본선 대회(2월20일)에는 전주대사습놀이 전국대회 각 부문의 역대 수상자들이 심사위원으로 참여해 기량을 평가한다.

   이 대회 성적 우수자는 올해 6월 열리는 전주대사습놀이 전국대회에서 특별공연한다.

   전주대사습놀이 보존회가 첫 해외 대회를 일본에서 열기로 한 것은 재일교포 사회에서 풍물. 판소리에 대한 관심과 명인에 대한 경외감 등이 다른 나라 유달리 높기 때문이다.

   특히 재일 전북도민회 등이 중심이 된 교포들이 1억 원가량의 성금을 모아 선뜻 대회 경비로 내놓으면서 일본 대회가 급물살을 탔다.

   대회 개최가 확정되자 주일한국대사관 한국문화원과 전주시, 재일본대한민국민단 중앙본부, 우석대, 전주문화재단 등도 이 대회를 후원하고 나섰다.

   전주대사습놀이는 조선시대 판소리, 백일장, 무예 대회 등을 포함한 종합 대사습으로 출발했으나 임진왜란 등으로 중단됐다가 1975년 전주에서 판소리와 농악, 무용, 시조, 궁도 등 5개 부문으로 첫 대회가 부활한 뒤 매년 단옷날을 전후해 열리고 있다.

   제1회 오정숙 명창을 비롯해 조상현, 이일주, 조통달, 은희진, 전인삼, 윤진철, 왕기석, 허은선씨 등 내로라하는 명창이 이 대회를 통해 배출됐다.

   전주대사습놀이 보존회 전영술 사무국장은 "동포 사회의 국악 대중화를 위해 일본 대회를 매년 지속적으로 열 계획"이라며 "교포 사회에서 국악이 대중화해 생활 속의 일부분이 되기를 기대한다"고 말했다.

 

2010-02-02

 

 

 

 

日 '잃어버린 10년' 다시 오나

 


[일본경제 어디로] <1> 쓰러지는 경제대국

간판기업들 휘청… 내수 시장마저 침체

새해 벽두부터'경제 대국'일본이 쓰러지는 파열음이 곳곳에서 터져 나오고 있다. 수년전 서브프라임 위기로 시작된'월가발 금융위기'를 잘 버텨내는 듯 했던 일본이 해가 바뀌자 마자 좌초 위기를 맞고 있다.

지난 90년대 중반 부동산 버블 붕괴와 더불어'잃어버린 10년'이라는 긴 침체의 늪을 지나야 했던 일본에게는 새로운 시련이다. 경제 전반에는 디플레이션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져 있고 도요타, 혼다, 세이부 백화점, 일본항공(JAL) 등 일본의 아이콘이라 할 간판기업 들이 줄줄이 좌초했다. 

일본의 대표 기업들이 맥없이 무너지는 모습에 충격을 받은 일본인들은 이제'일본의 2등국 추락이 현실화되는 것 아니냐'는 우려의 시선을 감추지 못하고 있다.

◇마지막 버팀목 내수의 붕괴 = 일본의 위기는 사실 어제 오늘의 일은 아니다. 지난 90년대 이미 10년여년의 기나긴 침체기를 거쳤고'저성장, 저물가, 고실업'이 일본 경제의 대명사가 된지 오래다. 특히 금융위기의 와중에서 일본 경제는 2008년에 이어 2009년 역시 2년 연속 마이너스(-) 성장을 한 것이 확실시된다.

그나마 일본 경제가 버틸 수 있었던 것은 국민총생산(GDP)의 55%를 차지하는 탄탄한 내수 덕분이었다.'규모의 경제(Economy of Scale)'를 누릴 수 있는 적정 수준이라 하는 1억3,000만의 인구가 받쳐 주는 견실한 소비 시장은 해외 수출이 감소하는 와중에서도 제 역할을 톡톡히 해 냈다.

최근 터진 세이부 백화점의 몰락은 일본의 내수 시장이 송두리째 흔들리고 있음을 여실히 보여준다. 이 백화점뿐만 아니라 일본 각지의 백화점들은 이미 리먼브러더스 쇼크가 발생한 2008년 가을 이후 매출이 매달 전년 같은 기간에 비해 5~10%씩 줄어 들었다. 

일본 백화점협회의 자료를 보면 2008년 전국 백화점 매출은 전년 대비 10.1% 감소한 6조5,842억엔으로 24년만에 7조엔 이하로 떨어졌다. 사실 일본 백화점들의 매출감소는 13년째 진행중이고 현재 90% 정도가 적자여서 올해 수십개의 백화점들이 더 문을 닫을 것이란 전망이 나오고 있다.

◇중국에 쫓기는 세계 2위 경제대국 = 일본 내수시장의 몰락은 소비 부진을 의미하는 디플레이션의 장기화로 나타나고 있다. 지난 12월 일본의 근원소비자물가지수(식료품, 에너지 제외)는 99.8로 전년동월대비 1.3% 하락하며 10개월째 하락세를 이어간 것으로 조사됐다. 연간 기준으로도 지난해 일본의 근원소비자물가지수는 100.3으로 전년도에 비해 1.3% 하락했다.

이웃나라인 중국이 급속한 경제성장을 기반으로 미국과 함께 주요 2개국(G2)으로 국제적 위상을 높이고 있는 것과는 달리 일본은 정치, 경제적으로 축소지향의 길로 내쫓기고 있다. 미국(14조달러)에 이어 세계 GDP 순위 1, 2위를 다투는 중국과 일본은 최근 4조달러를 전후로 순위가 역전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중국의 일간 차이나 데일리는 최근 보도에서 2009년도에 중국은 이미 일본을 따라 잡아 GDP순위 2위로 뛰어 놀랐다고 선언하기에 이르렀다. 지난해 일본 내각부가 발표한 2007년 기준 일본의 국부(國富·토지와 금융자산 등의 합계) 역시 2,794조엔으로 정점이던 1990년(3,534조엔)에 비해 20%이상 줄어 들었다.

◇'잃어버린 20년'으로 가나= 일본 열도는 지금 90년대식의 또 다른'잃어버린 10년'이 오는 것 아니냐는 불안감이 팽배하다. 정보기술(IT) 열풍으로 잠깐 회복세를 보였던 2000년대 중반의 호시절을 제외하면 무려 20년에 이르는 기나긴 침체의 터널이 펼쳐지고 있다는 것이다. 

지난 보름새 터진 도요타 사태와 세이부 백화점의 폐점, 일본항공(JAL)의 파산 등은 이런 우려를 현실로 바꾸는 징후들로 받아들여 진다. 최근 국제신용평가사 S&P가 일본의 장기채권 AA 에 대한 신용등급 전망을'네가티브(NEGATIVE)'로 하향한 것도 일본의 미래를 더욱 어둡게 만들고 있다.

지난해 9월 오랜 정권 교체의 꿈을 이룬 하토야마 유키오(鳩山由紀夫) 일본 총리는 금융위기이후 선진국들의 경기 침체를 의식, 그간의 무리한 수출 의존에서 벗어나 내수(內需) 중심의 성장 전략으로 전환하고 소득분배 구조를 재구축하겠다고 선언했다. 

그러나 디플레이션 압력이 심화되는 현실 속에서 하토야마식 성장 전략이 일본을 저성장의 그늘에서 탈출시킬 것으로 믿는 전문가는 많지 않다. 더욱이 그의 의욕적인 개혁정책은 자민당의 반대와 민주당내 부정부패로 인해 정치적ㆍ도적적인 타격을 입으면서 차츰 추진 동력을 잃고 있다는 지적이다. 

니혼게이자이(日本經濟)신문은 지난해 연말"잃어버린 20년에 종지부를 찍을까"라는 제목의 사설에서 "신흥국을 포함한 글로벌 대(大)경쟁의 시대에 일본은 승자가 못 되고 경제 정체에 시달려 왔다"면서 "앞으로도 성장의 맹아(萌芽)를 찾지 못하면'잃어버린 20년'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을 ?이라고 경고했다. 

 

서울경제 기사입력 2010-02-01 17:48

 

 

 

 

 

 

도요타, 일본식 경영 내세우다 국제화 전략 실패

 

◆일본病…그것이 주는 교훈 ②◆ 

도요타 위기가 미국에 이어 중국 시장으로 확대되면서 전 세계적으로 이른바 '일본병'에 대한 논란이 일고 있다. 

일본 국내적으로는 이번 도요타 위기(Toyota Crisis)를 일회성 사건으로 여기며 무마하는 분위기지만 미국과 유럽 등 외신은 그동안 국제적 흐름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한 일본이 국가적 취약점을 드러낸 대표적 예라고 지적하고 나섰다. 

도요타는 일본 제조업을 대표할 뿐 아니라 1980년대 이후 일본의 세계시장 진출을 상징하는 기업이기 때문이다. 일본적인 강점을 내세우며 세계 무대에서 경쟁하려던 일본으로서는 이번 사건이 어떻게 진행되느냐에 따라 국가 브랜드에 치명적인 타격을 입을 가능성도 작지 않다. 

무엇보다 도요타 위기는 전략 실패에서 비롯됐다고 전문가들은 분석한다. 자동차 시장이 가장 넓은 미국과 유럽에서 대형 차량이나 고가 하이브리드차량을 중심으로 사업구조를 짰던 것부터 어긋나기 시작했다. 금융위기를 예상하지 못한 도요타는 생산시설을 1000만대까지 확대했다. 운도 없었지만 신흥시장 성장에 대한 대비가 부족했다. 

더 큰 문제는 금융위기 이후였다. 주된 시장에서 수요가 감소하고 소비 패턴이 변하고 있는데 부품을 현지에서 조달ㆍ생산하는 원가 절감 전략만으로는 근본 해결책이 되긴 힘들었다. 

그러나 신임 도요타 아키오 회장은 새로운 비전을 제시하기보다 간부들 좌석을 강등시키는 등 기존 비용절감책을 강화했고, 이것이 오늘날 대량 리콜 사태를 초래한 직접적 원인 중 하나가 됐다. 일본 내에서는 제대로 작동해 온 것으로 보였던 품질관리(QC)도 외국에서는 허점을 드러냈다. 

섬 국가라는 폐쇄적 한계성을 가리키는 '갈라파고스 신드롬'이 도요타 위기를 부른 근본적인 원인이라는 분석도 있다. 일본인 사이에 팽배하고 있는 무기력증이 세계 1등 기업 도요타 내에 암세포처럼 자리 잡고 있었던 셈이다. 

이번 도요타 리콜 사태는 미국과 유럽뿐만 아니라 중국 등 전 세계로 확산되는 형국이다. 특히 캠리, 코롤라, 아발론, 하이랜더, 툰드라 등 8개 주력 차종에 문제가 동시에 발생했다는 것은 예사 문제가 아니다. 도요타는 북미에서만 800만대 리콜을 결정한 데 이어 28일에는 중국에서도 7만5000대를 리콜했다. 전 세계적으로는 1000만대가 넘는 리콜이 예상된다. 2월 1일부터 일주일 동안 북미 5개 공장은 생산도 중단된다. 

도요타는 자동차 판매가 급성장하는 중국과 브라질에서도 현지화에 성공하지 못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도요타 하이브리드 차종은 자사 다른 고급차 시장을 갉아먹는 카니발현상(cannibalization)까지 빚어냈다. 

국제 컨설팅전문 '인터브랜드' 최고경영자인 제즈 프램턴은 "현대차의 제1 경쟁자로 꼽히고 있는 도요타가 만만치 않은 문제로 전열이 흐트러지는 형세"라며 "현대차에 기회가 될 수 있다"고 전망했다. 

최근 글로벌 애널리스트들은 도요타 실적 전망을 상향 조정했다. 그러나 이번 리콜 사태는 이 같은 낙관론에 찬물을 끼얹는 격이 됐다. 국제신용평가회사인 피치는 현재 'A+'인 도요타 장기 신용등급 전망을 현재 '안정적'에서 '부정적'으로 하향 조정하는 방안을 검토 중이라고 현지 언론들이 29일 보도했다. 

■ "미국의 도요타 때리기" 日 언론 다른 분석 

일본 현지에서도 도요타가 대규모 리콜 조치로 인해 1937년 창업 이래 구축해 왔던 제품 신뢰도에 치명상을 입을 수 있다는 염려섞인 전망이 나오고 있다. '경영 전략 부재'라는 냉혹한 평가도 잇따르고 있다. 

그러나 미국의 '도요타 때리기'가 이번 사태 배경이라는 분석도 일부에서 나오고 있다. 

제품 결함이나 리콜 조치는 자동차 메이커에 드물지 않은 일이지만 매년 GM 등 미국차 '빅3'가 몰락한 이후 미국 현지 언론들이 도요타 제품 결함을 유독 확대 해석해서 보도하고 있다는 이유에서다. 

일본 경제주간지인 도요게이자이는 최신호(1월 30일자)에서 미국 자동차업계 관계자를 인용해 "올해 가을 중간선거를 앞두고 있는 미국 행정부가 자국 내 메이커를 보호하려는 움직임이 가시화하고 있다"며 "도요타가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면 북미시장에서 더욱 고전할 수 있다"고 보도했다. 

실제로 북미시장에서 실시된 8개 차종 생산 중단과 230만대 리콜 조치는 미국 운수부 측이 먼저 요청해 도요타 현지법인이 이를 받아들인 것으로 알려졌다. 

 

 

 

 
2010년 01월 30일 (토) 04:03  매일경제
 
 
 
 
 

"독도 가치 연 11조5천842억5천만원"

 

(아산=연합뉴스) 이우명 기자 = 독도의 해양생물과 광물자원 등을 포함한 연간 가치가 11조원을 넘는다는 분석이 나왔다.

25일 호서대 해외개발학과 유승훈 교수가 독도연구저널 8호에 발표한 '독도의 경제적 가치 평가'에 따르면 독도와 그 일대의 시장적가치는 해양생물자원 9천492만원, 해저광물자원 10조3천208억1천만원, 관광 514억1천만원 등 연간 10조3천723억1천만원이며 역사적.상징적가치, 군사안보적 가치 등 비시장적 가치 1조2천119억4천만원까지 합치면 11조5천842억5천만원에 이를 것으로 나타났다. 

더욱이 독도의 비 시장적가치(1조2조119억4천만원)는 한려해상국립공원(915억4천만원), 가로림만(106억7억7천만원) 등 국내 7개 주요 자연자산보다 월등히 높았다. 

시장가치 가운데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해저광물자원에는 차세대 연료로 주목받는 메탄 하이드레이트(매장량 6억t)와 인산염 등이 다량 매장돼 있는 것으로 분석됐다.

유 교수는 "이번에 평가된 독도의 경제적 가치가 향후 독도와 관련된 정책수립 및 의사결정 과정에 참고가 될 것"이라며 "이 자료에서 미진한 부분은 추가 가치평가 작업을 통해 보완되길 기대한다"고 밝혔다.
 
2010-01-25
 
 
 
 
 

김장훈 "비빔밥 세계화..비빔밥집 연다"

 

(서울=연합뉴스) 이은정 기자 = "한국을 대표하는 음식인 비빔밥의 세계화를 위해 올해 봄 비빔밥집을 열 겁니다." 

가수 김장훈이 비빔밥을 '양두구육(羊頭狗肉. 선전은 버젓하지만 내실이 따르지 못함)' 음식이라고 비판한 산케이 신문 구로다 가쓰히로 서울지국장의 칼럼을 읽고 발상을 전환, 비빔밥의 세계화에 앞장설 생각이다. 

이달 초 미니홈피를 통해 구로다의 글을 반박하기도 했던 김장훈은 최근 연합뉴스와의 전화 통화에서 "이번 기회에 비빔밥에 대해 공부하며 위대한 음식이라는 걸 깨달았다"고 말했다. 

그는 "비빔밥은 서민적인 음식 같지만, 각종 채소와 나물이 어우러져 맛을 내는 영양 만점의 웰빙 음식"이라며 "내 어머니는 밖에서 먹을거리가 애매하면 비빔밥을 사먹으라고 하신다. 이렇게 좋은 음식을 세계화할 수 있도록 재미있는 아이디어를 내 비빔밥집을 열어보려고 한다"고 설명했다. 

이어 "요식업 관련 종사자인 지인과 논의 중인데, 15평대 작은 규모더라도 세련되고 깔끔한 인테리어로 된 공간에서 예쁜 그릇에 담은 비빔밥을 즐기도록 할 것"이라며 "또 비빔밥에 들어가는 재료도 손님의 취향에 따라 고르도록 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더불어 해외 프랜차이즈 계획도 전했다. 
김장훈은 "해외에 문을 연 일식집은 모두 고급스러운데 한식집은 그에 반해 무척 소박하다"며 "국내를 넘어 미국과 유럽 등지의 주요 도시에 아이디어가 번득이는 비빔밥집을 프랜차이즈로 열겠다는 큰 꿈도 갖게 됐다"고 말했다. 

그러나 평소 가수로서 연예인의 부업 활동을 이상적이지 않다고 생각해온 그는 "나는 아이디어를 내고 투자만 하지 경영, 서빙 등에는 참여하지 않을 것이므로 가수로서의 본분은 결코 잊지 않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한국 홍보전문가 서경덕 씨와 손잡고 월스트리트저널 등 미국 유력 매체에 일본해가 아닌 동해 표기가 옳다는 전면 광고를 내는 활동도 계속하고 있다. 

지난해 11월에는 사이버외교사절단 반크의 해외홍보비, 한국 홍보전문가인 서경덕 씨가 진행하는 뉴욕 타임스퀘어 전광판 독도홍보 광고비, 독도 전문가로 유명한 귀화 일본인인 호사카 유지 세종대 교수의 일반인 대상 독도 교육비에 1억원씩 총 3억원을 기부했다. 

 

2010년 01월 18일 (월) 07:32  연합뉴스

 

 

 

 

 

취업의 수단으로 전락한 어학연수

 

이력서에 쓸 '어학연수' 자신에게 유익한 '어학연수'로 바뀌어야...

[상식이 무너진 사회 교육을 다시 세우자] 11회

[아시아경제 문소정 기자]현재 졸업 한 학기를 남겨놓은 한국어문학과 유모(29)씨는 어학연수를 위해 휴학을 해야 할 지 학교를 다니면서 토익점수를 올려야 할 지 고민이다. 취업하기에 적은 나이는 아니지만, 이력서에 어학연수라는 한 줄이 취업의 필요(必要)조건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21세 글로벌 시대를 맞이해 많은 사람들. 특히 대학생들이 어학연수에 관심을 갖고 있다. 원래 어학연수의 목적은 외국에 나가 현지인들과 직접 부딪치면서 그들의 언어와 문화를 배우는 것이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어학연수를 다녀오지 않으면 많은 학생들이 선호하는 대기업이나 외국인기업 등에 취업하기가 하늘의 별따기이다. 실제로 채용을 담당하는 기업체 인사 담당자들 대부분은 "어학연수의 경험은 취업에 장점이 된다"라고 말했다. 

어학연수를 다녀오지 않으면 서류전형에서조차 합격하기 어려운 현실은 어학연수가 다른 나라의 언어와 문화를 배우는 것과는 전혀 다른 취업하기 위한 수단으로 변질됐다는 것을 보여준다. 

교육과학기술부가 2009년 12월 발표한 대학생 유학 현황자료에 따르면 지난해 4월1일 기준으로 어학연수 중인 대학 또는 대학원생은 총 9만8644명이다. 이는 대학ㆍ대학원 과정의 전체 유학생 24만3224명의 40.6%를 차지하고 있다.



교과부가 유학생 현황을 공식 집계하기 시작한 2001년과 비교하면 어학연수생 수는 4만782명(전체 유학생 대비 27.2%)에서 올해 배 이상 증가한 것이다. 

또한 유학지역도 북미, 유럽 등 한정적인 곳에서 아시아와 중동 등으로 다양하게 확대된 것으로 나타났다.



2010년 2월 졸업예정자인 서모(26)씨는 요즘 이력서 쓰기에 한창이다. 토익점수 820점, 학점 3.89. 1년 전 미국으로 어학연수를 다녀온 그녀는 토익점수가 생각만큼 나오지 않아서 골머리를 앓고 있다.

2008년 취업에 필요한 경쟁력을 얻기 위해서 어학연수를 결심한 서씨는 캐나다의 한국인이 없는 지역을 찾으려고 했지만 그런 곳은 찾기 어렵다는 유학원의 설명을 듣고 한국인들과 어울려 다니지 않고 공부만 열심히 하겠다는 굳은 다짐을 하고 어학연수를 갔다.

처음에는 열정적인 마음으로 유학원에서 소개시켜준 어학원을 다니면서 한국인들과 눈도 마주치지 않고 오직 영어만 쓰면서 열심히 공부했다.

하지만 빨리 늘지 않는 영어 때문에 절망감과 외로움이 커갔고 3개월이 지난 후 그도 주말이면 몰려다니는 한국인들 중 한명이 됐다. 어떤 친구들은 어학원 수업은 듣지 않고 내내 한국인들과 어울려 다니면서 그들과 토익스터디를 하고 따로 외국인에게 회화과외를 했다. 

그는 "나는 한국인들과 몰려다니면서 영어 실력 뿐 아니라 토익점수조차 오르지 않았다. 외국에 나가서까지 한국인들과 토익스터디를 하면서 외국인 과외를 받는 아이들이 많은데 그게 한국에서 학원 다니면서 토익과 회화 공부 하는 거랑 뭐가 다른 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또한 "철저하게 준비하고 가는 어학연수가 아니면, 어학연수 가는 의미가 없다. 한국에서 공부하는 게 더 많은 도움이 될 수 있다"며 "내가 어학연수 갈 동안 학교를 다니면서 꾸준히 학원에서 수업을 들으며 영어공부를 했던 친구가 나보다 영어 스펙이 월등하게 높다"고 한숨지었다.

종로의 한 유학원 관계자는 "어학연수를 갔던 대학생들 중 절반이 생각보다 늘지 않은 영어 실력으로 인해 힘들어 한다"며 "어학연수를 그저 취업의 수단으로만 생각하지 않고 자신에게 유익하고 즐거운 어학연수가 되려면 미리부터 영어와의 친밀도를 쌓아 마음과 머리의 준비를 충분히 해야 한다"고 설명했다.

그는 "이력서에 한 줄 추가하기 위한 어학연수, 취업에서의 경쟁력을 키우기 위한 어학연수는 취업에 있어서도 그들 자신에 있어서도 어떤 도움이 되지 않는다"며 "메이크업용 어학연수보다 자신을 당당하게 드러낼 수 있는 알찬 어학연수를 계획 해 가야 한다"고 충고했다.

 

2010-01-17

 

 

 

 

"일본의 바람처럼 쉽게 죽을 순 없지!"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 끈질긴 '삶의 의지' 

(광주=연합뉴스) 김인유 기자 = 일본군의 위안부 강제동원 문제 해결을 촉구하려고 1992년 1월 8일 서울 종로구 주한일본대사관 앞에서 시작된 '수요집회'가 900회를 맞은 지난 13일 정오. 

경기도 광주 '나눔의집'에 사는 위안부 피해자 이용녀(84) 할머니는 자신의 방에서 조용히 나와 마당 한쪽에 있는 '추모공원'을 찾았다. 

자신처럼 위안부로 끌려가 모진 고초를 겪은 아픔을 간직한 채 나눔의집에서 희로애락을 함께 나누다 세상을 떠난 위안부 피해 할머니 7위의 유해를 모신 곳이다. 

"일본 사람은 우리가 죽을 때까지 기다리고 있어. 한명 두명 죽어 없어지면 그만인 거여. 그래서 일본이 사죄를 안 하고 버티면서 시간을 끌고 있는 거여." 

이용녀 할머니는 한때는 언니이자 동생이었던 고인들과 대화를 나누듯 혼잣말을 하면서 '900회' 수요집회에 참석하지 못한 아쉬움을 달랬다. 

같은 시각, 또 다른 위안부 피해자인 김군자(84) 할머니도 자신의 방 침대에 걸터앉아 수요집회에 참석하지 못한 미안함을 속으로 삭이고 있었다. 

2년 전 골반을 크게 다쳐 보행보조기구가 아니면 혼자 움직이지 못하는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며 "수요집회도 못 가고 이렇게 앉아 있는 나 자신이 한심해요. (집회 참가 할머니들에게) 미안해요"라고 말했다. 

1998년 3월 12일 나눔의집에 들어오고서 거의 한 번도 빠지지 않고 참가했던 수요집회였건만, 이제는 몸이 아파서 화장실 들락날락하는 것조차 버거운 일이 됐다. 

2007년 2월 15일 미국 하원 '위안부 청문회'에 참석, 일제가 저지른 만행을 낱낱이 증언할 정도로 심지가 강한 김군자 할머니는 4년이 지나도록 아무런 사죄를 하지 않는 일본 정부에 쓴소리를 토해냈다. 

"일본 정부는 우리한테 저지른 만행을 사과하고 배상해야 해요. 그렇지 않으면 (내) 청춘을 돌려주던지. 그런데 청춘은 돌려줄 수 없잖아요. 사과는 할 수 있어도.." 

그러면서 그는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이 많이 죽고 이제는 얼마 남지도 않았어요. 일본은 할머니들이 다 죽기를 바랄 거에요. 언제 사과를 받을 수 있을지 모르겠어요"라며 눈시울을 붉혔다. 

김군자 할머니의 걱정처럼 태평양전쟁 당시 일본군 종군위안부로 강제로 끌려갔던 할머니들이 점점 사라져 가고 있고, 남아 있는 할머니들도 건강이 심각하게 우려된다. 

나눔의집의 하루 일과는 이곳에 기거하는 위안부 피해 할머니 9명의 건강검사로 시작된다. 매일 오전 9시 아침식사가 끝나면 간호사가 각 방을 돌며 할머니들의 혈압과 당뇨 수치를 검사한다. 

할머니들은 매주 월요일과 목요일은 인근 퇴촌중앙병원에서 무료로 건강검진과 심리치료를 받고 한 달에 한 번 서울아산병원에서 무료 진료를 받는다. 

나눔의집이 이렇게 할머니들의 건강을 챙기는 것은 9명 모두 건강에 이상이 있기 때문이다. 
막내 강일출(82) 할머니는 당뇨, 박옥선(86) 할머니는 심리불안증세, 김군자 할머니는 갑상선 질환을 앓고 있고 2년 전 치매가 온 박옥년(92) 할머니는 요양보호사인 친딸의 24시간 집중 보호를 받고 있다. 

모두 힘들게 하루하루를 살아가면서도 할머니들은 삶에 대한 강한 의지로 버텨내고 있다. 
기약은 없지만 일본 정부로부터 사죄와 배상을 받으려면 이를 악물고 건강하게 살아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나눔의집 안신권 소장은 "할머니들이 언제 어떻게 건강이 악화될지 몰라 항상 '5분 대기'를 하고 있다"면서 "그러나 당신들 세대에 반드시 일본과의 위안부 피해 문제를 해결하려는 의지를 볼 때마다 그것이 바로 할머니들의 삶을 지탱하는 원동력이라는 생각이 든다"고 말했다. 

안 소장은 "할머니들은 일본의 사죄를 이끌어 내려고 끊임없이 외치고 있는데 과연 우리 정부는 이 문제를 해결하려고 얼마나 노력하고 있는지 묻고 싶다"며 아쉬움을 나타냈다. 
 
2010년 01월 17일 (일) 07:32  연합뉴스
 
 
 
 
 

구로다 "한국은 오징어"<조선일보>

 

곽수근이 만난 구로다 "한식 세계화의 대표는 '한정식'"
"선택 즐거움과 아름다움 있어… 음식 관점에서 접근해야 성공"

구로다 가쓰히로(黑田勝弘·69) 일본 산케이(産經)신문 서울지국장의 비빔밥 칼럼은 지난달 26일 보도됐다. 그는 MBC '무한도전'팀이 한식을 세계화하겠다며 미국 뉴욕타임스에 게재한 비빔밥 광고를 보고 이 글을 썼다고 한다.

구로다는 칼럼에 "뉴욕타임스 광고사진을 보고 비빔밥을 먹으러 나온 미국인이 이 '양두구육(羊頭狗肉)'에 놀라지 않으면 좋으련만…"이라고 썼다.

글이 문제가 되자 그는 9일 같은 신문에 '양두구육이 일본에선 한국처럼 쓰이지 않는다'고 해명성 글을 썼다. 12일 그를 만났다.

―양두구육의 한·일 간 뉘앙스가 진짜 다른가요.

"일본에선 장난스럽게 쓰는 말입니다. 음식 견본과 실제가 다를 때 웃으며 '양두구육이네'라고 말하지요. 맞선 때 실물이 사진만 못해도 '양두구육'이라 합니다. 사기(詐欺)를 뜻하는 한국에서의 뜻과는 상당한 차이가 있어요."

―독도, 일본군 위안부에 이어 비빔밥 문제까지 꺼낸 건 관심을 끌어보려는 건가요.

"20년 넘도록 쓴 한국 관련 기사가 셀 수 없을 정돕니다. 대부분은 한국에 대한 애정을 표현한 겁니다. 그런데 늘 부정적인 글만 부각되더군요."

―비빔밥 파동이 억울합니까.

"일본에선 20여년 전에 최초의 한류 붐이 일었습니다. 그때 저도 한몫했다고 자부합니다. 1986년 NHK에서 한국어 방송도 했고 한국의 음식·여행·말에 관한 책을 내고 강연도 했습니다. 그렇게 한국을 알린 저를 이토록 몰아붙이니 억울하지 않겠어요?."

―한·일문제에 관한 민감한 발언들은 소신 아닌가요?

"기자로서의 의견을 말한 것뿐입니다."

―비빔밥은?

"독도처럼 한·일외교에 관한 발언을 할 땐 대충 반응을 예측할 수 있습니다. 비빔밥에 대한 반응은 뜻밖이었어요. 비빔밥이 한국인들에게 이렇게 큰 의미가 있었나요?"

―비빔밥을 싫어합니까?

"칼럼 첫 부분도 '비빔밥은 일본인에게도 인기 있다'로 시작합니다. 오늘 낮에도 '간장두부 비빔밥'을 먹었어요. 비빔밥을 논한 것은 한식 세계화의 대표선수로 적당한 것이냐는 문제를 제기한 것이지 폄하는 아니었어요.(그가 작년에 한글로 쓴 책 '보글보글 한일음식 이야기'에는 '그동안 내가 미워했던 비빔밥의 재발견이었다'라는 부분이 있다. 비빔밤에 대해 평소 감정을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지금도 한식 세계화에 비빔밥이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합니까.

"전 90% 이상 밥을 사먹습니다. 한정식이 한식 세계화의 대표가 돼야 한다고 봐요. 삼계탕이나 쌈이 비빔밥보다는 낫지요."

―한정식의 어떤 점이?

"우선 가짓수가 많잖아요. 외국에선 볼 수 없는 음식문화입니다. 보기도 좋고 선택의 즐거움도 있지요. 시각적인 면으로도 아름다워 외국인들이 놀랍니다."

▲ 지난달 26일 산케이신문에 구로다 가쓰히로씨가 비빔밥에 대해 쓴 칼럼. / 채승우 기자
―평소 자주 먹는 음식은?

"한겨울엔 굴전·생굴·굴밥 등 굴 음식을 즐깁니다. 일본에선 볼 수 없는 굴전의 맛은 최고지요. 점심식사로 5000원짜리 한식 도시락을 애용합니다. 요일마다 자반고등어· 제육·닭볶음 등이 나오거든요."

―그렇게 한국이 싫으면 일본으로 돌아가라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가족을 일본에 두고 혼자 한국에서 30년 이상 산 이유가 오로지 한국 때문이었습니다. 한국을 알기 위해 가족을 포기했어요. 하루 24시간 중에 1시간만 일본을 위해 살고 23시간은 한국을 위해 살아왔어요. 그런데 떠나라니…."

―그렇다면 한국을 위해 일해볼 생각은 없나요?

"한국인을 제대로 알기 위해선 한국인과 결혼했어야 했습니다. 그래야 인맥을 알고 그 네트워크에 속할 수 있거든요. 이참 한국관광공사 사장이나 방송인 로버트 할리처럼."

―비빔밥 논란을 어떻게 해석하나요.

"일본인들이 한국을 비판하는 건 무조건 듣기 싫어하는 것 같습니다. 좌파에 가까운 이들이 주로 그러는 것 같아요. 방송국의 일부 편향된 인사나 친노(親盧) 사람들…."

―앞으로도 한국에 계속 살 건가요.

"계속 한국 음식을 먹기 위해서라도 떠나지 않을 겁니다. 비빔밥처럼 한국인들이 한식에 대한 긍지와 자부심이 있다면 한식 발전의 동인(動因)이 될 겁니다. 비빔밥 외에도 다른 한식에 대해서도 꾸준한 관심을 가져주면 좋겠어요."

―한식 세계화에 대해선?

"이외수 작가가 야만적인 날고기라 평한 회와 스시도 서양에선 처음에 비호감이었습니다. 먹어본 사람들이 늘면서 맛을 알게 됐고 세계화됐지요. 한식도 그 안에 담긴 혼이나 정신을 앞세우기보다는 음식의 관점에서 접근해야 합니다. 얼마나 보기 좋고 맛있느냐로. 몸에 좋은 웰빙음식이라든지 다이어트에 도움이 된다 등으로 자연스럽게 알리는 것도 좋을 것 같습니다."

―김치와 기무치에 대해선 어떻게 생각합니까.

"음식의 기원에 대해 너무 민감하지 않는 게 좋겠습니다. 일본의 3대 요리인 초밥·뎀뿌라(튀김)·스키야키(일본 전골) 중 뎀뿌라와 스키야키는 뒤늦게 외국에서 들여온 것을 일본식으로 변용한 겁니다. 중국의 소면을 라멘으로 개발한 것도 그렇고요. 기무치가 대세가 되면 결과적으로 김치도 고마워해야 할 일 아닌가요."

―기무치야말로 양두구육이잖아요.

"음식의 뿌리가 어디인가는 중요하지 않다니까요."

비빔밥 논쟁이 가열된 탓인지 그를 만나는 데는 '약속 확인'이 필요했다. 그렇게 해서 들어가본 구로다의 서가(書架)에는 그가 쓴 책들이 꽂혀 있었다. 언뜻 세어봐도 30권은 돼 보였다.

1983년에 낸 '한국인 당신은 누구인가'를 비롯한 구로다의 책들은 대부분 베스트셀러가 됐다. 교도(共同)통신 기자였던 그에게 산케이신문이 "한국에서 평생 근무하게 해주겠다"며 스카우트 제의를 한 데는 이런 배경이 있었다.

1964년 기자생활을 시작한 구로다가 한국에 처음 온 것은 1971년이다. 1978~79년 연세대에서 한국어 연수를 받은 그는 1980년부터 서울 특파원으로 일하고 있다. 1989년에 산케이신문으로 옮긴 것도 서울에 계속 있고 싶어서였다.

1968년에 결혼한 아내와 작은딸(34)은 도쿄에 산다. 큰딸(41)은 대만인과 결혼해 남미에 있다. 그는 한국을 이렇게 표현했다. "기삿거리도 많고 재미있는 지역입니다. '오징어' 같다는 느낌입니다. 씹으면 씹을수록 맛이 나는 상대라고 할까요."
 
2010-01-16
 
 
 
 

일 “민간기업 강제징용 조선인 20만명 공개”

 

일 “민간기업 강제징용 조선인 20만명 공개”
명단·미지급임금 등 3월 한국에 첫 제공
 
 
한겨레  길윤형 기자 김도형 기자
 
일본 정부가 태평양전쟁 당시 일본 기업에 강제동원된 조선인 노무자들의 명단과 미지급 임금 기록 등을 오는 3월 한국 정부에 제공하기로 했다.

‘일제강점하 강제동원 진상규명위원회’(위원장 김용봉·이하 위원회)는 일제강점기에 일본 본토로 강제동원된 조선인 노무자들의 이름(창씨명)과 주소, 미불임금·후생연금 등 공탁금의 액수가 담긴 ‘공탁금 자료’ 일체를 일본 정부한테서 제공받기로 합의했다고 7일 밝혔다.

공탁금이란 1945년 8월 해방 이후 조선인 노무자들이 대거 귀국함에 따라 일본 기업들이 미처 지급하지 못했던 임금·수당·후생연금 등을 연합국총사령부(SCAP) 지침에 근거해 일본 정부(법원)에 맡겨둔(공탁) 돈을 말한다.

공탁 인원과 금액은 자료에 따라 조금씩 다르지만 대체로 20만여명, 2억엔 정도로 추정된다. 그러나 한국 정부는 1965년 한-일협정을 체결하며 국민들의 개인 청구권을 포기해, 일본 정부를 상대로 이 돈의 지급을 요청할 수는 없다. 대신 한국 정부는 2007년 제정된 ‘태평양전쟁 전후 국외강제동원 희생자 등 지원에 관한 법률’에 따라 공탁금 1엔을 2000원으로 환산해 지원금을 지급하고 있다.

정혜경 위원회 조사2과장은 “이번 자료 제공으로 그동안 자료가 없어 피해자 인정과 지원금을 받지 못했던 사람들에게 지원의 길이 열리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지난해 12월 현재, 군인·군속의 경우 6만4858건의 신고가 접수돼 5만6354건(87.1%)이 피해자 인정을 받았다. 그러나 피해자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민간 노무자의 경우 15만9060건이 신고됐지만, 자료 부족 등으로 지금까지 5만7151건(35.9%)밖에 처리되지 못했다. 그나마 공탁금에 대한 지원금을 손에 쥔 사람은 5403건(208억9700만원)에 불과하다.

위원회는 이번에 제공되는 자료를 분석하면 조선인 강제동원 실태를 좀더 명확하게 파악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이번 자료에는 미쓰비시·미쓰이 등 기업별 강제동원 노무자의 이름(창씨명), 주소, 공탁금 등 상세 정보가 포함돼 있어, 기업별로 동원된 노무자·부상자·사망자의 정확한 규모를 산정할 수 있다.

일본 정부의 결정에 대해, 이희자 태평양전쟁 피해자보상 추진협의회 대표와 후쿠도메 노리아키 ‘강제동원 진상규명네트워크’ 사무국장은 “하토야마 정부 집권 이후 과거사 문제에 대한 전향적인 입장을 보여준다”고 환영했다.

<아사히신문>은 “일본 정부는 군인·군속 등 약 11만건의 미불임금 관련 명단을 2007년 한국에 제공했으나, 민간 기업 징용자 기록을 제공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라고 전했다.


한편 김용봉 위원장은 “이번 자료는 분류에만 6개월이 넘는 시간이 걸리는데, 위원회 종료 시점은 오는 3월로 다가왔다”며 “2월 임시국회 때 위원회 활동기한 연장 등을 위한 법 개정이 이뤄져야 한다”고 말했다.

 

2010-01-08

 

 

 

 

 

`아이리스`에 빠진 日, 닌텐도에 홀린 韓…문화는 통한다

 

◆ 한·일 新100년을 열자 / ④ 문화는 이미 하나가 됐다 ◆ 

#장면 1일본프로축구(J리그)의 막바지 순위 경쟁이 한창이던 2009년 12월 초 도쿄 아지노모토 스타디움.원정팀 주빌로 이와타 소속 이근호 선수가 동점골을 터뜨리자 주빌로 응원단에서 수백 개의 태극기가 등장해 5분 이상 휘날렸다.암울한 일제 식민통치 시대를 경험했던 우리 선조들은 일본 한복판에서 일본인 손에 의해 태극기가 휘날리는 날이 올 것을 과연 상상이나 했을까. 

#장면 2동장군이 기승을 부리던 작년 말 서울 홍대입구에 위치한 일본식 라면집 하카다분코. 







점심시간이 한참 지났는데도 입장을 기다리며 긴 행렬이 늘어서 있다. 줄 서 있는 대학생들의 대화가 재미있다."넌 얼큰한 삿포로 라면이 좋니? 난 구수한 규슈 라면이 더 좋은데." 이들 한국 신세대의 대화 속에서 한ㆍ일 양국의 과거 역사로 인한 문화적 거리감은 거의 찾아볼 수 없다. 

저녁 회식 때 막걸리로 건배를 한 뒤 다음날 북엇국으로 속을 푼다. 전철에서는 동방신기의 노래를 듣고, 집에 가서는 드라마 '선덕여왕'을 시청한다. 

요즘 일본에서 쉽게 접할 수 있는 젊은 직장인들의 하루 일과다. 한국이 일본에 강제 합방된 지 꼭 100년이 됐지만 이제는 한국 문화가 일본의 안방과 거리를 점령하고 있는 셈이다. 

1998년 일본 대중문화 개방과 2002년 공동 월드컵 개최, 2003년 이후 지속 중인 한류 붐 등 한ㆍ일 양국의 문화적 교류 확대는 막대한 경제적 부가가치를 창출하며 양국 국민들의 정서적 거리감을 좁히는 데 '전령사' 역할을 하고 있다. 

한국에서도 일본 애니메이션에 열광하고 이자카야에서 니혼슈(일본술)를 즐기며 나가노나 니가타로 스키여행 계획을 세우는 젊은이들을 쉽게 접할 수 있다. 드라마 '아이리스'의 배경이 됐던 아키타현 다자와 호수 일대는 오는 2월 말까지 관광 예약이 끝났을 정도로 폭발적인 인기를 누리고 있다. 

2009년 말 성탄절 특집으로 방영된 일본 TBS 가요 프로그램 '카운트다운 TV'는 한 해 동안 가장 두각을 나타낸 가수 10명을 선정했다. 

여기서 1위를 차지한 가수는 한국의 인기 그룹 '동방신기'였다. 가미지 유스케와 니시노 가나 같은 내로라하는 일본 인기 가수들도 동방신기의 인기에는 미치지 못했다. 

한국 문화가 일본에서 '헐값'으로 대우받던 시기는 이제 까마득한 옛이야기가 돼버렸다. 최근 방영된 인기 드라마 '아이리스'는 50억원을 받고 일본에 방영권을 수출했다. 현대자동차 '쏘나타'(대당 2500만원 기준) 200대를 수출한 것과 맞먹는 규모다. 

작년 12월 17일 도쿄돔에서 열린 한류스타 사천왕(이병헌ㆍ장동건ㆍ송승헌ㆍ원빈) 팬미팅 때는 5만명의 관람객이 몰려 스이도바시 일대 교통이 마비됐을 정도였다. 당시 2시간 공연을 보기 위해 일본인들이 지불한 평균 입장료는 1만5000엔(약 20만원)이었다. 

'안녕하세요'나 '감사합니다'라는 한국식 인사말도 일본 TV의 토크쇼에서 수시로 튀어 나온다. 토크쇼 진행자들은 아예 "~했어요"나 "~하세요" 등 한국어 접미사까지 흉내 내면서 흥을 돋우기도 한다. 도쿄 시내에서 한국어 전문 어학원은 100개를 넘어섰고 공영방송 NHK의 한국어 강좌 교재도 매월 5만~10만부가량 팔리며 꾸준한 인기를 과시하고 있다. 




강기홍 주일대사관 문화원장은 "드라마에서 출발한 한류 붐은 한국말 배우기에 이어 최근에는 한국 음식, 한국 여행으로 빠르게 확산되고 있다"고 말했다. 

한국 서점가에서 일본 소설은 변두리 상품이 아닌 주류 중 주류로 대접받고 있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작품은 필독 독서로 간주되고무라카미 류요시모토 바나나에쿠니 가오리, 오쿠다 히데요, 쓰지 히토나리 등은 웬만한 국내 작가의 인기를 뛰어넘은 지 오래다.

닌텐도의 DS게임기나 도요타의 렉서스, 시세이도 화장품에 이르기까지 일본의 대중 소비제품들이 국내 시장에서 아무런 저항감 없이 판매되고 있는 것도 눈에 띄는 변화다. 10년 전 '렉서스'를 앞세워 한국 시장에 처음 진출한 도요타는 지난해 하반기 '캠리'와 '프리우스' 등 대표 모델을 한국 시장에 집중적으로 투입하고 나섰다. 

일본 드라마에 빠져서 일본어 공부를 시작했고 일본으로 유학까지 오게 됐다는 릿쿄대 2학년생 황은혜 씨(23)는 "일본 드라마라서 즐겨 본 게 아니라 그냥 재미 있고 취향에 맞기 때문에 좋아했을 뿐"이라고 말했다. 

이들 세대에도 한ㆍ일 간의 역사의식은 존재하고 있지만 적어도 과거사 문제가 일본 문화에 대한 호불호를 나누는 기준은 되고 있지 않은 것이다. 

※매일경제신문ㆍ세종연구소 일본연구센터 공동기획 

 

2010년 01월 06일 (수) 17:27  매일경제

 

 

 

 

 

한식(韓食)에 반한 일본, 일(日) 방송형식 수입 한국… '문화'로 밀착

 

조선일보 도쿄=신정록 특파원 jrshin@chosun.com  입력 : 2010.01.02 03:31

드라마에서 음식으로 韓流 확대
日 스타들 "한국음식 최고" 붐 단계 지나 이미 정착단계
도쿄에만 한국어 학원 107개 NHK 강좌교재 20만부 팔려

2007년 가을 일본 영화계를 휩쓴 기무라 다쿠야 주연의 '히어로'에는 한국음식 '청국장'이 '음식 코드'로 등장한다. 기무라가 부산의 서민식당에서 "청국장 주세요"라고 한국말로 말하는 장면, 도쿄의 일본식당에서 일본말로 "청국장 있어요?"라고 묻자, 주인이 "있다"고 대답하는 장면이 나온다. 극 전체의 양념에 해당하지만, 일본 내에 한국 음식 붐이 없었다면 나오지 않았을 장면이다. 

일본 내 한국 음식 붐은 한국에서 생각하는 이상이다. 산케이신문 구로다 가쓰히로 지국장이 비빔밥을 '양두구육(羊頭狗肉)' 음식에 비유해 논란이 되기도 했지만, 그런 혐오를 보이는 사람은 소수다. 도쿄 아카사카의 한국 식당 거리, 신오쿠보의 한인타운, 오사카 스루바시 한인타운에 갇혀 있던 한국 음식이 긴자·롯폰기 등 상업의 중심지로 활개치고 나가기 시작한 지 오래됐다. 메뉴도 야키니쿠(양념 쇠고기구이의 일본식 이름)·김치·파전에서 시작해서 지금은 순두부찌개나 감자탕·부대찌개·순대를 좋아한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키친' '데이지의 인생'으로 한국에도 잘 알려진 소설가 요시모토 바나나는 일주일에 한번 이상 한국식당을 찾는 한국 음식 마니아라고 스스로 말한다. 간장게장과 삼계탕을 특히 좋아한다.

일본의 대표적 전자부품 메이커 가와무라 마코토 교세라그룹 회장도 "집에서 아내가 끓여주는 김치찌개가 최고"라고 말한다. 외국 대사관이 많은 아자부주반의 한국식당 '신풍'에는 자민당 정권에서 소비자담당상을 지낸 노다 세이코 중의원 의원, 사사에 겐이치로 외무성 외무심의관 등이 가족동반 단골이다. 김월림 사장에 따르면, 중·참의원들의 소규모 모임도 한 달에 서너 번씩 있다고 한다. 하토야마 총리 부부도 취임 이후 세 번이나 각각 다른 한식당을 찾았다.

지난해 10월 28~29일 도쿄 간다 거리에서 열린 고서적 축제 현장에서도 음식코너 가운데 파전 코너에 가장 긴 줄이 늘어섰다. 피자 한 쪽 크기의 파전 한쪽에 300엔(약 4000원)을 주고 사먹던 한 남성은 "말로만 듣던 '지치미(지지미의 일본식 이름)'를 처음 먹는데 향이 독특하고 아주 맛있다"고 했다.

마이니치신문 사와다 가쓰미 기자는 "한국음식은 붐의 단계를 지나 정착의 단계"라면서 "대중성으로 보자면중국식당과 비슷한 수준이 된 것 같다"고 말했다. 그는 "'오늘은 한국식당 갈까'라고 말하는 친구들이 점점 많아지고 있고 바쁠 때 한식 도시락을 시켜먹는 일도 자주 있다"고 했다.

한국어 학습 열기도 정착 단계로 들어서고 있다. 일본 내 한국어 학습의 원조는 나카소네 야스히로(中曾根康弘) 전 총리다. 그는 일본 총리로서는 전후 처음으로 1983년 한국을 방문했을 때 청와대 만찬 자리에서 인사말을 한국말로 했다. 그는 1980년부터 3년 동안 "학생 때처럼 열심히 한국말 공부를 했다"고 최근 술회한 일이 있다.

현재 국회에도 한국계인 하쿠신쿤(참의원·민주당) 의원은 한국인 수준의 인사말을 구사하고, 고바야시 지요미(중의원·민주당) 의원도 기본 의사소통이 가능하다. 간단한 인사말을 할 수 있는 사람은 많다. 비서진 중 한국말 구사자도 1990년대까지만 해도 거의 없었으나 지금은 10명 이상이라고 한다. 2003년 '겨울연가' 방영 이후 시작된 한국어 학습붐은 지금도 통계로 확인되고 있다. 지난해 11월 치러진 한국어 검정시험 응시자는 1만900여명이었다. 2004년 4000명대, 2006년 8000명대에서 꾸준히 늘고 있다. 1993년 이 시험이 시작된 이래 1~5급까지 18만7899명이 응시, 10만8857명이 합격했다.

일본 문부과학성이 추산하고 있는 일본 전국의 한국어 학습자는 200만명가량. 50명 중 1명꼴로 한국어 공부를 하고 있는 셈이다. 1990년대까지 한 달에 수천부밖에 팔리지 않던 NHK 한국어 강좌 교재가 지금은 20만부 안팎 나가고 있고, 사설학원도 도쿄 시내에만 107개가 있다.

문부성에 따르면 한국어를 제2외국어로 선택하고 있는 고교가 1999년 131개교였으나 2008년에는 426개교로 급증했다. 지난 4월에는 일본 내 한국어 강사들의 네트워크인 '한강넷'이라는 단체가 결성됐고, 일본 전통 만담인 '라쿠고(落語)'를 한국어로 공연하는 한인 3세도 나타났다. 각 직장과 학교 단위에서 한국어를 공부하는 풀뿌리 모임은 셀 수 없을 정도로 많다.

한류붐의 폭발성은 주춤하고 있지만 그래도 저변은 꾸준한 편이다. 지금도 공중파 방송에는 '선덕여왕' '대장금' '꽃보다 남자' '주몽' '이산' 등 10편이 넘는 한국 드라마가 밤 7~10시대 황금시간대에 전파를 타고 있다. 한류붐의 원조 배용준의 지난해 10월 도쿄돔 팬미팅과 지난달 17일 이병헌·장동건·원빈·송승헌의 도쿄돔 행사 때도 각 5만여명이 1만~2만엔의 입장료를 내고 꽉 들어찼다.

2007년부터 한국기업 주재원 부인을 일주일에 한 번씩 만나 일본어와 한국어를 서로 배우고 가르치고 있는 하시모토 류코(여·43)씨는 "한국과 중국에 가본 적이 있는 일본인들은 대부분 한국을 훨씬 편하게 생각한다"면서 "한류붐이 주춤한 것은 사실이지만 친밀감은 점점 높아지지 않을까 생각한다"고 말했다.
 
2010-01-02